키워드 : 결혼


꿈속의 카사마츠 유키오가 카사마츠 유키나였던 건, 잘생긴 키세의 옆자리는 왠지 아리따운 여자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카사마츠의 무의식 발현. 키세를 좋아하고 키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자각은 확실하게 하고 있지만, 저런 무의식 때문에 여자의 모습으로 키세와 결혼하는 꿈을 꾸었던 거라는 설정.

절대로 여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님.

결혼에 대한 약간의 환상 -> 상대는 당연히 키세 -> 키세에게 어울릴 법한 이상형 -> 아리따운 여자(무의식) -> ‘유키나’로 키세와 결혼하는 꿈 꿈. 정도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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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고] AU 에필로그 연성 2015. 6. 10. 00:10

보름에 가까워질 즈음에는 늘 꿈을 꾸었다.

그 꿈은 과거와 현재가 뒤죽박죽 섞여있는 것으로, 꿈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어느 것이 과거이고 어느 것이 현재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자신이 과거의 ‘자신’인지, 현재의 ‘자신’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말 그대로 장자의 꿈.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나비가 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비가 ‘나’인 것인지, 아니면 ‘내’가 나비인 것인지. 자아를 지탱하고 있는 기본적인 인식마저도 뒤틀어버릴 정도로, 영혼에 각인되어 있는 무수히 많은 기억들이 혼재된 상태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아주 작은 소리가 귓가를 스치듯이 들리곤 했다. 모래성이 파도에 쓸려 무너지는 것처럼 덧없고도 부드러운 소리가. 그리고 자연스럽게 깨닫곤 했다.

‘아, 벽이 허물어지고 있구나.’ 하고.

***

“…쨩.”
“…신쨩?”
“이보세요, 미도리마 신타로 군?”
“…인마, 미도리마!”

거칠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뿔이 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인간이 눈에 들어왔다. 부름에 대답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매우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니, 낯익다기보다는 잊을 수 없는 얼굴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몰랐다.

타카오.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잊을 수 없었던 이름과 함께.

“이보세요, 미도리마 씨. 정신 차리지 그래?”
“… 제 정신이라는 것이다.”

그가 다시 한 번 자신을 불렀다. 놀리는 것인지 빈정거리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어조에, 자신도 모르게 살짝 불쾌감을 드러내며 대답을 했다. 그리고 스스로가 놀라버렸다. 자신답지 않게 그에게 예민하게 대꾸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소중히 대해도 모자랄 이에게 이런 태도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겉으로 드러날 것 같은 당혹감을 애써 추스르면서, 그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리더니, 그러시겠지요, 하고 덧붙이면서 입술을 가볍게 삐죽일 뿐이었다.

“화내지 않는 것이냐…?”

입 안에 맴돌고 있는 의문을, 무심코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실수했다 싶으면서도 내심, 그가 지금이라도 화를 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안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말은 단순한 것을 넘어서 단정적이었다.

“화를 왜 내? 신쨩 예민한 거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
“그런 거에 일일이 화내고 있으면 내가 이 자리에 이렇게 있을 수나 있겠어? 사소한 거에 트집 잡고 화내고 그랬으면 신쨩이 먼저 날 멀리 했겠지?”

대수롭지 않게 덧붙여진 그의 말에, 오히려 놀란 것은 자신이었다. 익숙할 대로 익숙해졌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어조. 그리고 자신의 행동 같은 건 일찍이 다 파악했다는 요지의 말. 그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다시금 혼선이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것은 꿈인 것일까, 현실인 것일까. 자신은 지금 꿈속의 자신인가, 아니면 현실의 자신인가.

다시 한 번 무언가가 허물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봐, 미도리마. 괜찮아?”
“…괜찮냐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니, 평소보다 영 상태가 안 좋은 것 같단 말이지.”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아니, 이상해. 하고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어느새 장난기가 가신 진지한 얼굴로, 그가 자신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에 약간 불편하기도 하고 미묘한 기분이 되어서, 슬쩍 시선을 피하자 그가 집요하리만치 따라붙으면서 시선을 맞췄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냐, 장담컨대 지금의 신쨩은 이상해.”

게다가 뭔가 허전하단 말이지,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자신에게로 바싹 가까이했던 얼굴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허전함의 원인에 대해서 잠시 동안 고찰을 하더니, 이내 떠올랐다는 듯이 본인의 손바닥 위에 주먹을 툭하고 내리쳤다.

“알아냈다!”
“…무엇을?”
“신쨩, 오늘 럭키 아이템 안 들고 왔지?”

뭔가 이상하다 싶었더니 럭키 아이템을 안 들고 왔다며, 그것 때문에 혼이 쏙 빠진 것이었다는 둥 그는 내키는 대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그의 말을 모조리 받아들일 수가 없어 도리어 혼란이 가중될 즈음, 그가 자신을 직시하면서 물었다.

“오늘은 왜 안 들고 왔어? 평소라면 신쨩, 무슨 짓을 해서라도 챙겨들고 오잖아.”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의 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으면서, 무심코 거짓으로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 슬쩍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뭐가? 럭키 아이템 리스트가? 그럴 리가 없는데?”
“….”

그가 다시 한 번 의심이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하자 이번엔 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문득, 한 단어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비.”
“나비? 이 계절에 무슨 나비…아!”
“…이 계절이기 때문에 구할 수 없었단 것이다.”

커져만 가는 거짓말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싶으면서도,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가슴이 술렁거리는 것 같아서 입이 멈추질 않았다.

“확실히 구하기 힘들겠네, 그건.”
“….”
“표본 같은 거라면 모를까, 살아있는 나비는 확실히 힘들지. 그래서 맨손으로 온 거구만, 미도리마 군?”
“…그렇다고 해두지.”
“거 참, 남 말 하듯 이야기하는 건 여전하시네요?”

존대지만 결코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 아닌 어조로 대답한 그는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리다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근데 꼭 살아있는 나비여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의미를 모르겠단 것이다.”
“왜, 예전에도 그랬잖아. 어느 정도 부합하는 거면 충분히 커버가 되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말이야, 라고 덧붙인 그는 책상 위에 있는 필기구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중 한 가지를 골라 뚜껑을 열더니 자신의 손등 위에 가져다 댔다. 촉이 굵은 낯선 필기구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가 일필휘지로 손등 위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부드러운 곡선이 손등 위에 남았다. 그리고 그가 필기구를 거두어들였을 때에는, 곡선으로 이루어진 나비문양이 손등에 새겨져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말이야.”
“…나비군.”
“나비지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른 애들한테 나비 모양 물건 있냐고 물어는 볼 테니까, 라고 그가 이야기를 하면서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 개구진 미소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고맙다, 타카오.”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두 눈을 크게 뜨면서 놀란 기색을 감출 생각조차 못하는 그의 태도에, 왠지 모르게 머쓱한 기분이 되어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그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친근감 있게 자신의 어깨를 툭툭 내리쳤다. 힘이 실려 있었기에 아프지 않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 이면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충분히 살가워서 아무런 불만도 표시하지 않고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또 무언가가 생각난 것인지, 아, 하고 짧은 소리를 내더니 다시금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나비 하니까 생각난 건데 언제였더라… 어떤 사람이 나한테 나비 어쩌구 했던 기억이 있는데.”
“타카오, 네게?”
“응. 뭐라더라, 나비는 영혼과 순환을 뜻한다고 했던가? 그러면서 당신의 곁으로 돌아올 거라는 둥, 덧없지만 아름다운 만남이라는 둥 그랬던 것 같은데.”
“…그렇군.”
“거기다 신에게 사랑받고 있는 아이구나, 라고 했었지 아마?”

솔직히 대충 맞장구치면서 흘려 넘겨서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말이야. 그가 어깨를 으쓱이면서 덧붙였다. 그리고 도를 믿으라고 권하는 종교관계자일지도 모른다고 첨언했다. 그러나 자신은 그 말을 가볍게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예언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암시. 우연과도 같은 필연을 넌지시 알려주는 말.

‘미도리마’는 눈을 감았다.

그 때의 대화가, 그 시절의 만남이, 마치 영상처럼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

[그런 식으로, 네가 윤회의 길에 오르기 위해 버려 버린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세계는 '조정'에 들어가겠지. 수지타산에 맞게. 어느 것은 빼앗아가고, 어느 것은 보충하기도 하면서.]
[….]
[그래도 넌 그 길을 택할 셈인가?]
[…나는….]

아카시와의 대화를 마친 미도리마는 자신의 토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당 옆 바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명히 이 자리를 떴을 때에는 크고, 눈이 시릴 정도로 빛나는 보름달이 떠 있었는데, 어느새 달은 하늘 저편으로 져버리고 새로운 해가 동쪽에서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을 붉게 물들여가면서 떠오르는 태양은, 이전에 보았던 것보다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 강렬한 빛에 자신의 존재가 스러져버릴 것만 같을 정도로. 그렇게 한참동안을, 미도리마는 하늘을,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

[재고할 생각은 없는 건가, 미도리마.]

미도리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결정한 일이라는 것이다. 전에 네게 답했듯이.]

아카시는 미도리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도리마가 대답을 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수지가 맞지 않아 어그러질 수도 있는데도 윤회를, 인간으로서의 환생을 선택하겠냐는 아카시의 물음에 미도리마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나는 그래도 인간이 되겠다.' '떠나보내고 나서 기나긴 시간을 홀로 슬퍼하는 것보다, 같이, 짧은 순간을 공유하며 그와 살아가고 싶다.' 라고.

[이후의 일은 제 아무리 나라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그래도 선택하는 건가.]
[그래.]
[어그러진 후의 저 인간의 운명과 네 운명이 교차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래도 그 쪽으로 가겠다는 건가.]
[물론.]

***

“타카오.”

미도리마의 부름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를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미도리마는 옅은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마 그 사람이 한 말은 틀린 게 없을 거다.”
“나, 신쨩이 했던 말 되돌려줘도 돼?”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단 것이다.”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주는 그를, 미도리마는 잠깐 응시하고 있다가 슬쩍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표정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를 마주하지 않고 바로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굳이 이해할 필요까지는 없어.”

장자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나비가 꾸고 있는 꿈인지, 장자가 꾸고 있는 꿈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나비가 자신인지, 자신이 나비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경계가 무너져 내렸다.
과거와 현재를 단절하고 있던 벽이 허물어져버렸다.
자신은 장자였고, 또한 나비였다.
자신은 과거의 미도리마이자, 또한 현재의 미도리마 신타로였다.
나비는 미도리마이고, 미도리마는 나비였다.

나비는 무수히 많은 삶을 거쳐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순환.
윤회라는 순환의 고리를 거쳐 만난 인연은 덧없으면서도 아름다운 것.
이것은 나비가 바라던 소원.
미도리마라는 신이 선택한, 한 인간을 사랑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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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퀘 : 마유즈미에게 집착하는 아카시


오늘로써 이게 몇 번째 밤이던가.


마유즈미 치히로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더할 나위 없이 고급스러운 느낌에, 깃털 위에 누워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푹신한 침대 위였음에도 불구하고, 허리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둔통은 가실 줄을 몰랐다.


입술 밖으로 새어나올 것 같은 신음을 간신히 속으로 삼켰다. 그렇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천천히 숨을 고르면서 통증을 잊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저릿저릿하게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통증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 아무리 표정 변화가 적은 마유즈미라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찾아드는 아픔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아프다.


한쪽 손으로 묵직한 통증이 느껴지는 허리를 가만히 문질렀다. 그렇게 하고 있다 보니, 가만히 통증을 참고 있었을 때보다는 상태가 조금 나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손으로 허리를 문지르고 조심스럽게 주무르는 것을 반복했다. 평상시처럼 움직이는 것은 무리일지 몰라도 거동하는 것 자체는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야 비로소 주변 풍경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유즈미 자신의 옆자리에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는 이의 얼굴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도 피부색이 밝은 편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온 달빛이 어슴푸레 비추어진 그의 피부는 유독 하얗게 보였다. 아니, 창백하고 파리하다는 것에 가까운 느낌일지도 몰랐다. 마치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처럼. 만져보면 얼음장처럼 차가울 것 같았고, 생명체의 보드라운 느낌보다는 이질적이고 무기질적인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무심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가만히 쓸어내려보았다. 하지만 보고 있었을 때와는 달리, 미미하지만 따스한 체온도 전해지고 사람 피부 특유의 결 좋은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마유즈미는 일순,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사람은, 가끔씩 인간 같지 않은 느낌을 주곤 했으니까. 지금 이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인간이 아니었던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계 같았으며 또한 광기에 미친 짐승 같기도 했다. 그리고 닫혀버린 천국의 문 앞에서 절망하는 천사 같기도 했다.


더 이상 천국에 오를 수 없는 천사는 지상으로 떨어져 악마가 되었다고 했던가.


그래, 그런 논리라면 이해가 갈지도.


마유즈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절망으로 타락해버린 천사일지도 몰랐다. 빛을 잃고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갈구하는 악마가 되어버린 천사일지도 모른다고, 마유즈미는 생각했다.


***


이렇게 강압적으로 섹스를 하게 된 건 아무래도 그 무렵인 것 같았다. 깨끗하기 짝이 없던 그의 몸 위에 누군가의 이름이 떠오르기 시작했던 그 때부터.


물론 그 전부터 자신과 그는 교제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밝힐 수 없는 비밀스러운 교제였지만, 그래도 애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제일 먼저 상대의 얼굴을 떠올리곤 했으니까.


그러나 애인 사이치고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서로를 향한 애정 어린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으며, 애인 사이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았을 사소한 스킨십조차 없었다. 그저 빛 가는 곳에 그림자가 따라가듯, 조용히, 당연한 것처럼 같이 있을 뿐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자신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느 순간 그의 몸 위에 누군가의 이름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그는 답지 않게 가끔씩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 초조함은 불안감으로 바뀔 때도 있었고, 이따금 무언의 어리광으로 바뀌기도 했다. 통상적인 의미의 불안감과 어리광과는 조금 다른 형태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이름을 붙이자면 그런 쪽에 가까웠다.


흐릿한 흔적에 가깝던 이름이 점점 짙어질수록, 그의 감정도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폭력성으로 나타났다. 다른 이에게는 화살을 돌리지 않는, 오로지 마유즈미 치히로, 자신에게만 드러내 보이는 폭력성으로.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의 상대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운 거였을까. 아니면 그 자신이 누군가에게 감정적으로 예속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의 높디높은 프라이드를 부숴버렸던 걸까. 물론 직접 물어본 적은 없으니 그것에 대한 답은 얻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때 그가 느꼈을 비참함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단지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것은, 그 이래로 그가 자신을 안기 시작했다는 점뿐이었다.


***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자신을 찾아왔었다. 평소와는 달리 약간 들뜬 것 같기도 했고, 얼굴도 약간 상기되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달리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이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이름이 선명해졌습니다.]


그 때 자신은 이렇게 대답을 했던 것 같다.


[그래? 내 몸엔 아무 이름도 없는데. 네 짝이 생겼으면 이제 헤어져야 하나?]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다. 현재는 서로를 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들, 머나 먼 그의 미래까지 책임일 운명의 상대가 자신일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에게 그 어떤 이득도 도움도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저 같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애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너무나도 쉽게 헤어짐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그 뒤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끔찍할 정도로 신체의 한 부분이 아팠던 것과,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는 점과,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곤 짐승 같은 신음소리뿐이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의 체액 교환에는 사랑 따윈 없었다. 그 이전의 관계들은 비록 다소 강압적일지언정 배려는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달랐다. 행위에는 사랑도, 배려도 없었다. 남는 것은 몸과 마음의 상처였고, 느껴지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절박함과 절망감이었다.


[... 미안해요. 미안해요, 치히로.]


신체적 폭력에 지쳐 정신을 놓아가는 와중에, 그가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에 미안한 걸까. 싫다고 했는데도 억지로 침대 위에 눕힌 게 미안했던 걸까. 그렇게 눕히고도 자신이 반항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자 억지로 삽입부터 한 것이 미안했던 걸까. 아니면 더 이상 눈물도, 신음도 나오지 못할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인 게 미안했던 걸까.


그가 한 말의 저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렇게 자신은 까무룩 잠들었다.


***


“하지만 지금은 알 것도 같아.”


마유즈미는 속삭이듯이 이야기를 하면서, 잠든 그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어느 날, 정사라고도 할 수 없는 행위를 끝낸 이후에 우연히 그의 쇄골 밑에 작게 새겨진 세 글자를 보게 되었다. 문자치고는 작아서 약간 큰 점이 연이어 세 개 붙어 있는 건가 싶었는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자체로 쓰인 한문 이름이었다.


“내 이름이었으니까, 그거.”


그의 몸에 새겨진 이름은 마유즈미 치히로의 이름 석 자였다. 그의 운명의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마유즈미 본인이었다. 하지만 마유즈미에게 있어서 아카시는 그런 상대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마유즈미의 몸에는 어느 누구의 이름도 새겨져 있지 않았기에.


운명의 상대라는 게 차라리 이 세상에 없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면 몸에 새겨진 이름 석 자에 일비일희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가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을 놓지 못하는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아니면, 자신의 몸에도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일방통행인 운명은 한 사람에게는 절망에 가까웠으며,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상처밖에 되지 않았다.


“미안해.”


그 이후로 잠든 이에게 사과를 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마유즈미 본인이 되었다. 그도 그럴게, 마유즈미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기에.


운명의 상대가 혹시나 자신을 떠나갈까 초조해 하면서 아카시는 마유즈미를 속박했다. 그리고 마유즈미의 몸에 혹시라도 아카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이 떠오르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마유즈미의 온 몸을 구석구석 살피고 탐했다. 그런 뒤 아무 이름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지어보이곤 했다.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마유즈미를 내려다보면서.


온연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마유즈미를 내려다보다가, 아카시는 이따금 마유즈미보다 먼저 잠들곤 했다. 마치 오늘 밤처럼.


마유즈미는 잠든 그를 내려다보면서, 그에게는 닿지 않을 희미한 목소리로 연신 사과의 말을 되풀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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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단지 알 수 있었던 것은,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카가미 자신이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진정시키고 있던 그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었다.


어디로 간 거지.


혹시 자신의 힘으로도 감정 제어가 안 된 탓에 그가 폭주해버린 것은 아닐까. 아니면 힘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본능적으로 이곳을 빠져나가다가 다른 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현듯 부정적인 상상이 카가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막아야 해.


자신의 불찰이었다.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을 숙지하고 있으면서도 마음을 놓아버렸다. 적어도 자신이 이곳에 온 이후로 발작적으로 일어나는 폭주는 없었다고 전해 들었으니까. 그리고 자신 또한 그의 폭주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으니 안심하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더욱 신경을 썼었어야 했는데. 그의 감정을 끌어안았어야 했는데. 달래주었어야 했는데. ‘내가.’


후회와도 같은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카가미는 무의식중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더 늦기 전에 그를 붙잡아야만 했다. 그의 손을 잡아주어야만 했다. 그 생각이 온 머릿속을 잠식해가자,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워 침대 아래로 두 발을 내딛었다.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툭, 하고 묵직한 소리를 내면서 발치에 떨어졌다. 그러나 카가미는 주변을 돌아볼 새도 없이, 나가는 문만을 응시하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채지 않았더라면 곧장 밖으로 나갔을 터였다.


“갑자기 일어나는 것 같더니,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려는 거야? 화장실?”

“...?”


퉁명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비꼬는 어조가 섞인 낮은 목소리가 카가미의 귓가에 닿았다. 누군가에게 붙잡힌 손목을 한 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나른하면서도 염세적인 분위기가 도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얼굴의 주인은, 다소 황당하다는 듯한 눈으로 카가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장 자체는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심코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해버렸다.


“아...오미네...?”

“그래.”

“진짜...?”

“진짜가 아님 뭔데? 나 같은 놈이 나 말고 또 있을 리가 없잖아.”


나 참, 잠에서 깨보니 덩치 산만한 놈이 곁에서 내 손을 잡고 있질 않나, 심지어 내 얼굴 가까이에 고개를 묻고 잠들어 있질 않나. 그는 어이없다는 어조로 불평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덩치 산만하고 심지어 잠들어 있었다는 말 외에도 여러 가지 불평을 쏟아내었지만, 그 불평은 카가미에게는 닿지 않았다. 아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는 것이 맞을지도 몰랐다.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아직 이곳에 있다는 점이었으니까. 어디론가 떠난 것도 아니고, 어디론가 끌려가버린 것도 아니었다. 그것만이 중요했다.


“다행이다, 다이키...”


카가미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과 함께 짤막한 말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그의 얼굴 표정이 서서히,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가지 표정을 지으며 물끄러미 응시하는 것 같더니, 이내 핫, 하고 숨도 웃음도 아닌 묘한 것을 한 번 뱉어내고는 입을 열었다.


“뭐야. 그 새끼들이 너한텐 내 이름도 알려주든? 다른 가이드 놈들에게는 보안이다 극비사항이다 뭐다 하면서 코드네임만 알려주더니.”

“코드네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그것도 모르냐고 되묻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코드네임 ‘아오미네.’ 뭐, 내 경우는 코드네임이자 성이지만. 풀 네임은 아오미네 다이키.”

“...”

“그래서, 그 새끼들이 내 이름까지 알려줄 정도로 유능하신 가이드님의 이름은 뭐지?”


내 이름을 알려줄 정도로 그 새끼들에게 신뢰받고 있으면 통성명쯤은 해야 되지 않겠어? 라고 그가 덧붙이며, 한쪽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얼굴을 잠시 동안 응시하고 있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 말을 꺼낸 순간, 그에게서 불쾌감이라는 감정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맞닿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감정이 더욱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뭐야, 그쪽은 내 이름까지 알아놓고 이쪽에겐 알려주기 싫으시다?”


이제 빈정거리는 어조를 숨길 생각도 없는 그의 목소리에, 카가미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게 아냐.”

“그럼 뭔데?”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잠시 주저했다. 그는 자신의 정보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올 때 자신의 발언을 통제하려는 생각은 없어 보이기도 했다. 이 점이 카가미를 갈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곧, 선을 넘지 않을 정도의 신상 정보를 제공하는 건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심을 굳혔다. 결심을 굳혔을 때 바로 입을 열었다.


“난 내가 ‘카가미’이고 가이드라는 것 정도밖엔 몰라.”

“뭐?”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의 반응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하긴 카가미 자신이 그의 입장이었더라도, 지금 꺼내는 말은 단번에 이해하기 힘들 터였다.


“흔히 말하는 기억상실이다. 그들에게 거두어지기 전의 기억은 없어. 전무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고 탓인지 뭔지 우연히 가이드로서의 능력을 자각했고, 그래서 그들 눈에 띈 이래로 줄곧 그들은 나를 카가미라고 불렀다. 솔직히 난 내 본명조차 기억나질 않으니까, 카가미라는 건이 그들이 붙여준 이름이겠거니 했는데... 네 말을 들어보면 단순한 코드네임이었을지도 모르겠네.”


스스로도 기억 못하는 본명이라니, 이보다 보안이 철저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인걸. 왠지 웃음이 나는 것 같아서, 피식 웃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아직 웃음기가 덜 가신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바라보게 된 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잘못 봤겠거니 하고 생각을 하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미안하다. 본명을 이야기 해줄 수가 없어서.”

“....진짜냐?”

“기댈 하늘은 없지만, 관용구를 빌리자면 ‘하늘에 맹세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하자, 그가 자신을 응시하다가 이내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모르긴 몰라도 어느 정도 자신의 이야기를 믿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재미없게 됐네. 결국 너도 도구라는 거 아냐.”


부려 먹히는 신세라니 너나 나나 딱하구만, 하고 그가 공허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 말에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저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슬그머니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 손으로 본인의 뒷머리를 문지르듯이 긁적이다가, 한 발 앞서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방문 앞에 서서 문손잡이를 잡고 돌리던 그는 마지막으로 슬쩍 자신에게로 시선을 한 번 던졌다. 그리고 툭 한 마디를 내뱉었다.


“... 타이가.”


그가 잠결에 내뱉었던 이름이었다. 다시 한 번 심장이 크게 뛰었다.


“내... 가 알던 녀석 이름이야. 너, 그 녀석이랑 뭔가 비슷하니까. 내가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을 정도로. 그러니까 내키면 그 이름 쓰던지.”


그런 다음 그가 방문을 열고 나가고, 문이 닫히기 전 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한 말이 어렴풋이 들렸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였지만, 내용만큼은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침 잘 먹었다는 말이었다. 퉁명스럽게 흘러나온 그 말에 조금 기분이 좋아져서, 카가미는 낮게 목을 울리면서 웃었다. 그렇게 한동안 웃고 있다가, 문득 잊고 있었던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내가 아오미네에 대한 정보를 받은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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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먹] 리퀘 연성 2015. 5. 6. 20:21

아침운동 나가는 아카시와 아침 식사 차려주는 마유즈미


자신의 기상시간이 이른 편이라는 것은 아카시 세이쥬로,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상 시간은 전 날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쪽에 가까웠다. 전 날에 아무리 늦게 잠들었어도, 전 날에 아무리 고단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일어나는 시간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 맞이하게 된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카시는 자신의 옆자리에 누워 있는 사람을 응시했다. 어슴푸레한 아침 햇살이 드리우고 있는 그의 실루엣은 여느 때보다 존재감이 흐릿한 것 같았다. 마치 창문 틈새로 흘러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녹아버릴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점점 강해질 태양빛에, 이슬과 마찬가지로 눈 깜빡할 새에 증발하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물론 사람이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카시는 입술 사이로 피식,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웃음을 짧게 흘렸다. 아직 해가 미처 다 떠오르지 못한, 새벽에 가까운 아침에는 유독 감성적인 기분이 되곤 했다. 그와 몸을 섞은 다음 날에는 특히 더 그랬다. 그가 가지고 있는, 건조한 것 같으면서도 풍부한 감수성이, 몸을 섞을 때 자신에게 흘러들어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아카시는 다시 한 번 작게 목을 울리며 웃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럴 리가 없었다. 그건 과학적인 근거를 댈 수 없는 망상에 가까운 생각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자신은 그에게 빠져있었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 마유즈미 치히로라는 존재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그 탓에 매번 무리하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이야기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두 눈을 꼭 감고 잠들어 있는 그의 뺨 위에 아주 살짝, 닿을 듯 말듯하게 손을 얹었다. 손바닥에서부터 희미한 온기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접하는 체온보다는 약간 높은 듯 했다. 아마 밤늦게까지, 아니 새벽까지 자신이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은 탓일지도 몰랐다. 그는 무리를 하면 몸 어딘가에 변화가 생기곤 했으니까.


그의 뺨에 얹었던 손을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물끄러미 그의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한 번 눈을 뜬 이상 밤이 되기 전까진 잠이 오질 않으니 억지로 더 잘 수도 없었다. 몸에 익어버린 생활패턴은 이제 바꾸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러니 그가 잠에서 깨어나는 걸 기다릴 겸 가벼운 시간 때우기로 아침 운동을 하고 와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생각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행여나 자신 때문에 그가 잠에서 깨지는 않을까, 아카시는 조심스럽게 움직여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욕실로 향해 가볍게 세안을 한 뒤, 장롱에서 트레이닝복을 꺼내어 갈아입었다. 나갈 준비를 마친 뒤 바로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잠시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다시 침실 쪽으로 들어가, 곤히 잠들어 있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마유즈미 상.”


그를 불렀으나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치히로.”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으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미동조차 없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작게 웃으면서, 허리를 숙여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운동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맞춘 뒤 자세를 바로 했다. 미련 없이 발걸음을 현관 쪽으로 돌리곤 아침 운동을 위해 밖으로 나섰다.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얼굴에 와 닿는 공기는 약간 서늘하다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정도가 운동을 하기엔 최적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손목과 발목을 가볍게 풀며 달릴 준비를 했다. 잠을 자면서 굳은 근육과 관절이 어느 정도 풀리자, 보폭을 크게 하며 걷다가 서서히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페이스 조절을 하면서 인근 거리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평소 하던 게 있었기 때문에 숨이 차오른다던가, 심장이 급격하게 뛴다던가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달리면서 체온이 조금 오른 것인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결이 뜨거웠다. 그리고 서늘하다고 느꼈던 공기 또한 더 이상 서늘한 걸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이 정도면 되었을까.


페이스를 늦추며 천천히 보폭을 줄여나갔다. 그리고 정리 운동을 하는 것처럼, 천천히 걸어 집 앞으로 되돌아왔다. 현관문을 열면서 문득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하는데,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이마며 몸에 살짝 땀에 배어나와 있는 걸 깨닫게 되었다.


샤워부터 해야겠는걸.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가볍게 훔쳐내면서 생각했다. 그리고 운동화를 벗은 뒤 현관에 올라섰다. 발걸음을 집 안에 내딛자마자 바로 욕실로 향하려는데, 뭔가 고소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


향기의 근원지는 부엌이었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욕실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돌려 부엌으로 걸어갔다. 부엌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갓 구운 것으로 보이는 토스트 두어 장과 우유 한 컵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아무 말 없이 테이블 위에 차려진 것을 응시하고 있다가 싱크대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왠지 모르게 어수선한 모양새였다. 어제 말끔하게 치웠음에도 불구하고.


“하하.”


테이블 위의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아카시는 바로 침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침실 문을 열어젖히니, 아직 침대 위에 누워서 곤히 자고 있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 자고 있는 척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까지 자고 있는 척 할 거예요?”


자신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말이 안 통하면 행동하는 수밖엔 없겠군요.”


아카시는 그렇게 이야기를 한 뒤 곧장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그에게로 다가가, 허리를 숙여 입을 맞췄다. 시작은 가벼운 버드키스였지만, 그가 눈을 뜰 것 같지 않자 집요하게 혀로 그의 입술을 핥아 올리고 치아로 가볍게 입술을 자극했다. 자극에 반응해 반사적으로 입술이 벌어지자 그 틈을 파고들어갔다. 숨이 모자랄 정도로 진득하게 입을 맞추고 있자, 그가 눈을 뜨더니 그만하라는 듯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어깨를 밀어댔다.


“지독한 놈 같으니.”

“그러니까 자는 척 그만하랄 때 그만하는 게 좋았잖아요.”

“타이밍을 놓친 걸 어떡하라고. 게다가 이런 식으로 강제로 일어나게 만들 줄 내가 알았겠냐?”


불퉁거리는 어조로 이야기를 하는 그를 바라보면서, 아카시는 도리어 그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왜 모릅니까?”

“뭐?”

“잠자는 공주님을 깨울 수 있는 건 왕자의 키스뿐이잖아요.”

“...”

“그러니까 키스로 깨우는 게 당연하죠.”


공주님 치곤 꽤 큰 키의 소유자지만 말이에요, 하고 덧붙이면서 아카시는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자신을 이상한 놈을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응시하는 그에게 살며시 손을 뻗었다. 다시금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어 말했다.


“아침식사 준비해줘서 고마워요.”

“...흥.”

“땀 냄새 날지도 모르니까 샤워하고 나와서 먹을게요.”

“그러던지.”

“더 잘 생각 아니면 같이 샤워 할래요?”

“거절한다.”


같이 들어가면 어제의 연장전이 될 것 같으니까, 하고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게 어렴풋이 귓가에 닿았다. 그 이야기에 작게 웃으면서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곤, 먼저 씻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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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이렇게 어그러지게 된 원인은 단순하다면 단순했다. 그의 귀에 흘러들어간 한 마디의 말 때문이었다.


[마유즈미 공이 아카시 님을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여인이 자신의 정인을 보는 시선 같군요.]


자신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만지며 그 말을 꺼냈던 여관은, 별 생각 없이 이야기를 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 뒤, 손을 거두어들이고 쥘부채를 꺼내들어 본인의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으니까. 그리고 본인의 입이 주책이었다며,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자신 혼자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후궁에 인접한 곳이었기 때문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고는 하나, 이곳 또한 아카시 가문과 연관되어 있는 이들이 오고가는 장소였다. 황제의 뒤에서 천하를 호령하는 아카시 가문이니, 황궁 깊은 곳까지 아카시 가문의 눈과 귀가 심어져 있는 것은 당연했다. 여관으로서는 자신과 그녀, 단 둘이 주고받은 농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 말은 가문의 눈과 귀를 통해 전달되어 최종적으론 아카시에게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실은 자신도 아카시가 직접 자신을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리 심각하게 여기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농은 농일 뿐. 그리고 여관이 한 말은 아카시를 모욕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여인에 빗댄 것뿐이니 그의 심기에 거슬릴 것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멋대로, 자신의 잣대로 그의 생각을 추측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추측이 빗나갔다는 것은, 그가 살벌한 기운을 내뿜으며 자신의 방문을 열어 젖혔을 때 깨달았다. 옅은 미소를 짓고 있던 평소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차가운 얼음 같은 표정만이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예상과는 다른 그의 반응에, 최대한 그를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하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자신에게 맡기고 간 서안을 대강 훑어보고 있던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찾아온 그를 맞이하기 위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카ㅅ....읏...!]


자신이 그의 이름을 입에 담기도 전에, 그가 자신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얼마나 힘을 주어 잡았는지, 잡힌 머리채가 당겨질 때마다 두피에서 투둑 투둑 하며 머리카락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따끔한 통증도 찾아왔다. 통증 때문에 반사적으로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만 두라고,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고개를 더욱 숙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꿇어.”

[읏...]

“꿇으라고 했어.”


그 말은 명령이었다. 그의 명령에 자신의 몸은 자연스럽게 복종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자세를 숙여 그의 발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행여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의 심기를 더욱 거슬리게 할까봐, 머리채를 잡힌 그대로 눈을 아래로 내리 뜨고 있었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다행이었을 것을. 아카시는 자신의 이런 순종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잡은 머리채를 끌어 올려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올려다보는 자신의 시선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의 붉은 홍채에서는 분노가 감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다른 한 쪽, 보다 색소가 옅은 눈에는 살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단지 농담 한 마디였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분노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것도 놀림의 대상이 된 것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었는데.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머리채를 쥔 손에 다시금 힘이 들어가자 생각이고 나발이고, 낮은 신음을 토해내게 되었다.


[읏...]

“재미있는 소리가 들리더군. 그것에 대해 변명할 생각은 없는 건가, 치히로?”

[변명이고 뭐고 그건 단지...]


농담이었을 뿐이었지 않냐고 그에게 되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머리채를 잡고 위로 끌어올리자 미처 말을 마무리 할 수가 없었다. 어찌나 세게 끌어당기고 있던지, 무릎을 꿇고 있던 자신의 몸이 살짝 일으켜 세워질 정도였다.


[아...팟.....]

“아프다고? 당연하지. 이것은 벌이니까.”


그의 목소리에 조소기가 묻어났다. 그리고 머리채를 잡고 있는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이내 방바닥에 내던지듯이 손을 놓아주었다. 그 바람에 쓰러지듯이 풀썩 그 자리에 엎어졌다.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평소엔 온후하다가도 이따금 사람 같지 않을 정도로 냉정한 모습을 보이는 그였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상황을 직시한 적절한 사리판단 내에서 움직였다. 그 방법이 잔혹할지언정.


그러나 이번에는 그 경우에 해당하는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그의 변화에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이유를 묻는 자신의 목소리에, 방 한 쪽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던 그가 자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찾은 물건을 손에 쥔 채, 이쪽으로 걸어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싸늘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주제를 모르고 경거망동하는 식신에게, 스스로의 위치를 깨달으라고 내리는 벌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주제넘게 행동했던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것은 옳지 못한 것이라고 그에게 항변하려고 했다. 그가 다시금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들어 올리지만 않았더라면 그 말은 똑똑히 입 밖으로 흘러나갔을 터였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다른 한 쪽 손에 들고 있는 것을 휘둘렀다. 방 안에 켜놓은 촛불에 번뜩이는 것을 보아하니 날붙이인 듯 했다. 그리고 쥐고 있는 모양새를 언뜻 확인하니, 그가 쥐고 있는 것이 단도가 아니라 가위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은 순간 머리 쪽이 허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가 손을 놓아준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주변에 한 올 한 올 떨어지기 시작하는 은빛 실과도 같은 것에, 천천히 어떻게 된 상황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은사가 아니었다. 지금 제 주변에 흐트러지고 있는 것은, 거의 발치까지 길게 기르고 있던 자신의 머리카락이었다. 그가 손을 놓아주었기 때문에 머리가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라, 그가 가위로 머리채를 잘라내었기 때문에 자유로워진 것이었다.


어째서, 라고 묻는 것 같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손에 쥐고 있던 머리카락 뭉치와 가위를 방구석으로 내던졌다.


“이걸로 처벌이 끝난 줄 알았다면 오산이야.”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밀어 젖혀 바닥에 눕히고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고정시키며 서서히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는 언제나 위압감이 넘쳤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위압감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느끼고 있었다. 말로는 잘 표현할 수 없었지만, 굳이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하면 ‘위기감’에 가까웠다.


그가 자신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말을 이해할 겨를이 없었다. 겹겹이 입고 있는 옷 사이로 그의 손이 밀고 들어오더니, 자신의 맨 살갗을 훑어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눈 깜빡할 새에 그 옷가지를 모조리 벗겨내고는 그 또한 한 겹 한 겹 본인의 옷을 벗어 내렸다.


값 비싼 비단 옷들이 한데 뒤엉켜 나뒹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그 옷이 구겨지든 더러워지든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자신만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손을 움직였다. 그 손길에서,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나려고 바르작거렸지만 이미 제 몸의 통제권은 그에게로 넘어가 있는 상태였다. 자신은 그에게 속박되어 있었다.


간간히 그에게서 감탄 어린 말이 흘러나왔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경황이 없어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어느 샌가 자신의 입술 새에서 뜨거운 숨과 함께, 앓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남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은밀한 부위에, 그가 무언가를 밀어 넣기 시작할 땐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릿한 통증이, 느껴져서는 안 되는 부위에서부터 느껴지고 있었다.


이걸로 끝이겠거니. 조만간 그가 떨어지겠거니, 하고 통증을 견뎌냈다. 그리고 그가 삽입했던 무언가를 빼내었을 땐 약간이나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허나 그런 자신을 내려다보며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세를 조금 바꾸더니 이내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아까의 통증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격한 고통이 온몸으로 퍼져갔다.


그 뒤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뒤섞여가는 거친 숨소리와, 어디서 나는 건지 모르는 질척거리는 소리뿐이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전해지던 격통과 함께 아릿한 통증도 몸에 새겨졌다. 그 통증이 새겨진 몸에는 붉은 꽃잎 같은 자국들이 남았다. 격통이 느껴지던 곳에는 액체로 질펀하게 젖어 들어간 것 같은 기분 나쁜 감각이 남아 있었다.


[...]


누워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둔부에서부터 척추를 내달리듯 올라가는 고통에, 절로 이를 악물게 되었다. 간신히 그 통증에 익숙해졌을 즈음에야, 이 방 안에 자신을 제외한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일어났나보군.”

[...]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했다.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눈동자를 보게 되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어제 그의 눈동자가 분노와 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면, 오늘은 또 달랐다. 마치 길거리의 돌멩이를 보는 것처럼, 무가치한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아무런 감정도 묻어나지 않는 눈이었다. 불안감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효용가치가 사라진 말은 버린다는 것이 내 원칙이지.”

[...아카시...]

“넌 더 이상 필요 없다.”

[...]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 그림자여.”


불안감은 적중했다. 그리고 ‘그림자’는 주인이었던 자에 의해 부여받았던 이름을 빼앗겼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닌 그림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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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심상이 연결되었을 때, 미도리마는 타카오의 꿈을 엿볼 수 있었음. 꿈은 온연히 타카오의 것으로, 미도리마는 그것에 관여할 수 없었음. 단지 지켜볼 뿐이었음. 타카오가 꾸고 있는 꿈이 파노라마처럼 천천히 흘러지나가기 시작했음. 타카오를 상냥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중년 남녀. 그리고 타카오에게 친근하게 매달리는 어린 여자아이. 또래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밝게 웃고 있는 타카오. 한 손으로 다루기에는 유독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공을 가지고도 신나게 뛰노는 타카오. 그것은 타카오의 일상이자, 타카오의 행복이었음. 그에게 붙여두었던 바람을 통해서 읽어낸 적이 있는 풍경들임에도 불구하고, 타카오의 꿈을 통해서 보게 된 것은 미도리마에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음. 타카오의 꿈에 미도리마 자신이 관여할 수 없는 것처럼, 타카오의 일상과 행복에 미도리마가 억지로 개입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자신이 그를 원하고 있다고 해도, 그를 강제적으로 제 곁에 묶어둘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음.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할 자유의지가 있었음. 그가 원하지 않는 한, 자신의 욕망을 그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음.


타카오는, 타카오 스스로의 생각과 의지로 본인의 삶을 살아가야만 했음. 자신이 그것에 개입해서는 안 됐음. 미도리마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음. 타카오의 일상 풍경이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갔음. 그리고 낯익은 풍경이 주변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음. 그것은 자신의 사당이었음. 그리고 그곳에서 타카오는 사당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열심히 떠들기 시작했음.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타카오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너의 모든 것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너의 일부로서는 남아 있는 거로구나.] 자신과의 만남이, 그에게 있어서 일상의 일부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음. 조금이나마 그가 가지고 있는 행복의 편린으로나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었음. 그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미도리마의 선택뿐이었음. 사당 앞에서 재잘재잘 떠들고 있는 타카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가, 미도리마는 살짝 눈을 내리 감았음. 그리고 타카오의 꿈속에서 천천히 떨어져나오기 시작했음.


그 날의 일은 마치 없었던 일처럼, 미도리마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행동했음. 자신의 힘이 닿는 토지를 천천히 거닐며 확인하고, 이따금 사당으로 찾아오는 타카오를 맞이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음. 그리고 다시 그날 밤처럼 둥근 보름달이 뜬 날이 돌아왔을 때, 미도리마는 사당 옆에 있는 바위 위에 걸터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음. 유독 달빛이 시렸음.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달만 응시하고 있다가, 미도리마는 자리에서 일어났음. 그리고 늘 거닐던 방향과는 달리,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음. 걷고 걷고 또 걷다보니 어느새 미도리마 본인의 토지에서 벗어나 있었음. 그것을 깨달은 것은, 낯선 존재의 접근에 불안한 듯 흔들리는 초목때문이었음. 그러나 미도리마는 그에 개의치 않고 낯선 토지에 발을 디디며 점점 더 그 토지의 중심부로 향하기 시작했음. 토지의 중심부엔, 붉은 토리이가 번듯하게 세워진 신사가 자리하고 있었음. 미도리마는 신사로 올라가는 계단에 첫 발을 내딛었음. 신인 미도리마의 몸에도 신사의 결계가 발동하는지, 미약하게나마 짓누르는 것 같은 힘이 느껴졌음. 하지만 살짝 신경에 거슬리는 정도일 뿐이었기에, 자신의 방문을 거부하는 결계를 헤집으며 계단을 올라 신사 안으로 들어갔음. 

[여전하군, 아카시.]

미도리마는, 신도 위에 서 있는 한 존재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음. 그리고 그 존재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미도리마에게로 다가왔음.

[낯선 이의 방문을 주시하는 것은 주인의 의무이자 역할. 게다가 방문한 이가 다른 땅의 주인이라면 더더욱.]
[어차피 너라면 내가 이곳에 발을 딛은 순간 나인 걸 알고 있었을텐데.]
[그렇기에 더욱 주시했다. 내가 알고 있는 너라면 사전 연락을 취하지 않은 채 이곳에 올 리가 없으니까.]

미도리마, 하고 그의 입술이 그의 이름을 언급한 후 부드럽게 다물렸음. 미도리마는 아카시를 바라보다가, 그 말에 수긍하는 것처럼 가볍게 숨을 내쉬곤 눈을 내리 감았음.

[그래서 미도리마, 너답지 않게 감정적으로 움직일 만큼 긴급한 용무라도 있는 건가?] 


아카시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가려는 태도를 취하자, 미도리마의 어깨가 살짝 움찔거렸음. 그것을 본 아카시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미간을 살짝 좁혔지만, 일단 미도리마가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겠다는 듯이 입을 다물고 있었음. 일말의 침묵이 두 존재 위에 내려앉았음. 미도리마는 다시금 숨을 짧게 내쉬고는, 눈을 떠 아카시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음.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이 되는 법을 알고 있나?]
[물론.]
[그럼 신이, 신에 가까운 존재가 인간이 되는 법도 알고 있나?]
[그래.]

아카시의 대답에, 미도리마는 어딘가 기대감에 찬 것 같은 눈으로 아카시를 바라보았음. 아카시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음.

[방법은 제법 간단하지. 현재의 삶에서 쌓아올린 것을 자연에, 세상에 돌려주고 윤회의 길에 오르면 돼.]
[...윤회.]
[신에 가까운 존재라면 본인이 가지고 있는 힘을 자연에 환원한 뒤 윤회를 선택하면 된다.]
[그렇군.]

그렇군, 하고 대답한 미도리마의 목소리에 결의가 묻어나는 것 같았음. 하지만 아카시가 이어 내뱉은 말은 냉정하기 짝이 없었음.

[하지만 포기해, 미도리마.]
[?]
[넌 안 돼.]


넌 안 된다며 딱 잘라 이야기를 하는 아카시의 목소리에 미도리마는 눈을 크게 뜨고 아카시를 응시했음. 그러나 아카시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음. 자신이 그렇게 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고 변명을 할 수도, 자신이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도 물을 수가 없었음. 그저 흔들리는 눈으로 아카시를 바라보면서, 아카시가 이어 말하기를 기다릴 수밖엔 없었음. 아카시는 미도리마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나지막이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음.

[수지가 맞지 않아.]
[...]
[인간을 비롯해 다른 영혼이 신격을 얻는다는 매우 힘든 일이지. 하지만 그것을 버리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워. 왜인지 알아?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쌓아온 것이 미미한 것이기 때문이야.]
[...]
[그러나 우리는, 다른 존재들에게 '신'이라 불리는 우리는 달라. 이 땅에 존재했을 때부터 그 격을 타고났지.]
[...]
[이제 이해했을까. '우리'는 그들과 격이 달라.]
[하지만...]

미도리마는 그래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지 않냐고 이야기를 하려고 했음. 하지만 그 말이 미처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아카시가 손을 들어 그 말을 끊었음. 그리고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것 같으면서도, 상대를 질책하기도 하는 것 같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음.

[물론 신이라 불리는 존재에게도 가능한 일이긴 해.]

신에게도 급이라는 것이 존재하니까, 하고 아카시의 입술 사이에서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단호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음.

[하지만 미도리마, 너는 네가 존재하기 시작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하고 싶은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음. 미도리마는 질끈 눈을 감았음.


[기억할 리가 없겠지.]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다 안다는 듯이 자문자답을 했음. 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미도리마를 향해, 다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음. 

[우리는 갓 태어난 신들과는 달라. 스스로의 기억이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오랜 세월을, 이 토지와 함께 살아왔지. 애초부터 다른 것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다. 그런데 그 존재가 헤아릴 수도 없는 시간을 보내왔다면?]
[...]
[우리 자체가 자연의 섭리라는 천칭을 유지하는 것들 중 일부가 되어버린 거야. 극단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가 그 균형을 맞추고 있다고 해도 좋겠지. ]
[...]
[우리가 사라져 버리면, 윤회의 길에 올라버리면, 모든 것이 어그러져 버릴지도 몰라. 예를 들면, 너와 관련된 인간의 운명이 뒤틀려버린다거나.]

그 말에 미도리마는 몸을 흠칫, 한 번 떨었음. 아카시는 다시금 낮은 한숨을 내쉬었음.

[그런 식으로, 네가 윤회의 길에 오르기 위해 버려 버린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세계는 '조정'에 들어가겠지. 수지타산에 맞게. 어느 것은 빼앗아가고, 어느 것은 보충하기도 하면서.]
[...]
[그래도 넌 그 길을 택할 셈인가?]
[....나는....]


아카시와의 대화를 마친 미도리마는 자신의 토지로 돌아왔음. 그리고 사당 옆 바위에 걸터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음. 분명히 이 자리를 떠났을 때에는 크고, 눈이 시릴 정도로 빛나는 보름달이 떠 있었는데, 어느새 달은 하늘 저편으로 져버리고 새로운 해가 동쪽에서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음. 하늘을 붉게 물들여가면서 떠오르는 태양은, 이전에 보았던 것보다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음. 마치 그 강렬한 빛에 자신의 존재가 스러져버릴 것만 같을 정도로. 그렇게 한참동안을, 미도리마는 하늘을,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음.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러갔음. 미도리마는 바위에 앉은 자세 그대로, 타카오가 자신을 찾아오기만을 기다렸음. 오늘 당장 찾아오지 않아도 좋았음. 언제라도 좋으니 단 한 번, 자신을 만나러 찾아오기만 하면 되었음.

[그거면 돼.]

미도리마는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하듯 중얼거렸음. 그리고 그가 몇 번이고 거닐었던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음. 그렇게 기다림이 계속되고, 밤에 가까운 시간이 되었을 때, 그 길 위에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음. 그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사당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음. 


"오늘은 늦어버렸네... 설마 없는 건 아니겠지..."

타카오는 걱정이 어린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음. 하지만 이내 미도리마가 이 곳에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인지 환하게 미소를 지었음. 그리고 밝은 목소리로 미도리마에게 인사를 건넨 뒤, 다시금 조잘조잘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음. 그러나 그를 만나게 된 미도리마는, 그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었음. 아니,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그 이야기를 들어서는 안 되었음. 미도리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타카오에게로 다가갔음. 그리고 타카오를 자신의 품 안에 가두듯이 꼭 끌어안았음. 

"어라...? 향기가..." 여느 때보다 가까이서 느껴지네, 하고 타카오가 멍하니 중얼거렸음. 타카오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 닿았지만, 미도리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 그저 그를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음.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테지만, 한동안을 계속 그렇게 하고 있었음. 멍해져 있던 타카오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것 같자, 미도리마도 그의 몸 위로 둘렀던 팔을 조심스럽게 떼어내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음. 타카오의 얼굴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했음. 미도리마는 그 얼굴을 시야에 담고 있다가, 천천히 그를 향해 손을 뻗었음. 그리고 손바닥으로 그의 두 눈을 가렸음.

[미안하다, 타카오.]

미도리마의 입술에서 사과의 말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타카오의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더니 스르륵 그 자리에 주저앉기 시작했음. 자세가 완전히 무너져버리기 전에, 미도리마는 쓰러지는 그의 몸을 받치고는 조심스럽게 땅 위에 눕혀주었음.


바닥에 눕혀진 타카오는 고른 숨을 내쉬면서 잠들어 있었음. 미도리마가 힘을 사용한 탓이었음. 잠든 타카오 곁에 앉아서, 애틋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미도리마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서 타카오의 뺨을 살며시 쓸어내렸음.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나마 그를 만지는 시늉을 하는 것 자체로도 미도리마는 행복하다고 생각했음. 무심코 손을 움직여 타카오의 입술을 손끝으로 건드리다가, 이내 손을 거두어 들였음.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음.

[온 거냐, 아카시.]

미도리마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슬쩍 고개를 돌려 어느 한 장소를 응시했음. 분명 아무 것도 없었던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샌가 아카시가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음.

[재고할 생각은 없는 건가, 미도리마.]

미도리마는 고개를 내저었음.

[이미 결정한 일이라는 것이다. 전에 네게 답했듯이.]

아카시는 미도리마를 가만히 바라보았음. 그리고 미도리마가 대답을 했던 순간을 떠올렸음. 수지가 맞지 않아 어그러질 수도 있는데도 윤회를, 인간으로서의 환생을 선택하겠냐는 아카시의 물음에 미도리마는 이렇게 대답했음. '나는 그래도 인간이 되겠다.' '떠나보내고 나서 기나긴 시간을 홀로 슬퍼하는 것보다, 같이, 짧은 순간을 공유하며 그와 살아가고 싶다.' 라고. 

[이후의 일은 제 아무리 나라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그래도 선택하는 건가.]
[그래.]
[어그러진 후의 저 인간의 운명과 네 운명이 교차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래도 그 쪽으로 가겠다는 건가.]
[물론.]

미도리마의 대답에는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음. 그걸 아카시도 잘 알고 있었음. 아카시는 살짝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음.

['저 아이'의 기억을 지운 것에서 네 각오를 읽어낼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남겨놓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너를 위해서나, 저 아이를 위해서나.]
[아이가 아니라 타카오다.]

아카시의 말을 일부 정정해준 미도리마는, 잠들어 있는 타카오 쪽으로 고개를 돌렸음. 그리고 여느 때보다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음.

[내가 사라진 이후의 일은 나도, 그리고 심지어 너도 모르지. 그래서 지운 것이다. 나와 관련된 기억이 타카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니까. 내 존재가 사라진 걸 알고 슬퍼해주면 분명 그것만으로도 나는 기쁘겠지. 하지만 그건 내 이기심일뿐이다. 그에게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슬픔이라는 감정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 그러니 이게 타당한 것이다.]
[그렇군.]

아카시가 짤막하게 대답했음. 미도리마는 타카오를 좀 더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아카시 쪽을 돌아보았음.

[뒤를 부탁한다, 아카시.]
[별로 들어주고 싶은 부탁은 아니군.]
[훗.]

미도리마는 아카시에게로 손을 뻗었음. 아카시도 미도리마에게 손을 뻗었음. 두 손이 닿지는 않았지만, 미도리마의 손끝에서부터 은은한 빛이 나는가 싶더니 형태가 무너져가기 시작했음. 손끝에서부터 사라져가는 와중에도, 미도리마는 타카오 쪽을 응시했음. 그의 눈에 타카오를 담을 수 있는 한계의 한계까지. 더 이상 타카오를 볼 수 없게 될 즈음, 미도리마의 의지가 아카시에게 속삭였음.

/고맙다, 아카시./
[잘 가게, 친우여.]

한 마디의 인사말을 교환한 뒤, 미도리마는 한 줌의 빛이 되어 사라져버렸음. 그리고 그 빛마저 사라져버렸을 때,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음. 아카시는 잠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타카오에게로 다가갔음. 그리고 타카오의 머리 위에 살짝 손을 얹은 뒤 언령 비슷한 것을 중얼거렸음. 그런 다음 손을 거두어들이고, 타카오를 내려다보면서 말을 걸었음. 

[이제 깨어날 시간이다, 미도리마의 정인이여.]
[현재의 기억도 잃고, 과거의 추억마저 비틀려 버리겠지만 그것 또한 타카오라는 인간을 사랑한 신의 선택이니.]
[바라건대, '두 사람'의 연이 다시 닿을 수 있길.]

그 말을 남기고 아카시는 홀연히 사라져버렸음. 그리고 미도리마가 사라진 뒤 아카시의 힘으로 잠시나마 유지되고 있던 미도리마의 사당이 마치 지우개로 지운 것마냥 세상에서 지워졌음. 남은 것은 바닥에 누워있는 타카오 뿐이었음. 

얼마 지나지 않아 타카오는 눈을 떴고, 낯선 곳에서 잠들어 있던 자기 자신에게 잠시 놀란 뒤 발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돌아갔음.


*


과거가 바뀌고, 현재가 바뀌었음. 
그러나 그들은 다시 만났음. 
토지신과 인간 아이로서의 만남이 아니라. 
비상한 재능을 지녔지만 그래도 평범한 아이와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의 재능을 가진 평범한 아이로서.
그렇게 그들은 다시 만났음.
유한한 삶 속에서, 서로만을 바라보고 서로에게만 온전한 애정을 바치는 그런 관계로.
그리고 그들이 맞이하게 될 결말은 신이 바랐던 것처럼 행복이 가득한 것일터.
~원작의 녹고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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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Like a Butterfly 연성 2015. 4. 25. 17:23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중간부터 꼬여버렸던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애초에 첫 단추를 잘못 끼워 넣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이 관계의 결말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


시야 한 가득 펼쳐진 하늘은 여느 때보다도 유독 푸르렀다. 그 푸른 빛깔에 눈이 시리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심코 하늘을 향해 한쪽 손을 뻗어보았다.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았지만, 손끝에 걸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닿을 것 같으면서도 닿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산들바람이 손끝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


그는 바람과도 같았다. 언제나 자유로워 보였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다. 때로는 땀을 식혀주는 부드러운 바람 같으면서도, 때로는 상대를 얼려버릴 것 같은 북풍과도 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는, 그런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단 의미였으므로.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기 때문에, 본인 기준에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냉정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조금씩이나마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그런 사람이 조금씩 자신을 의지해온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우쭐해질 정도로 기분 좋았다. 그것은 그의 안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점점 커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까. 자신이 그에게 점점 더 큰 영향력을 끼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오만이었다.


바람은 곁에 묶어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가두려고 해도 가둘 수 없는 존재였다. 또한 통제가 되지 않는 존재였다.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감정이 변질되어갈 즈음, 그 또한 변해가기 시작했다.


초기의 변화는 아주 미미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지어보이던, 예의 그 미소가 조금 늘어난 정도였다. 그것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보냈을 땐 이미 늦은 상태였다.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가면 너머로, 그는 까맣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본인도 어떻게 통제를 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인해서. 지울 수 없는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탓에 생겨버린 분노. 사랑의 편린이 변질되어버린 증오. 이 모든 것이 그를 잠식해나가고 있었다. 아니, 이미 그것이 그 자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는 더 이상 바람이 아니었다. 그에게 닿는 것을 모조리 끌어당겨 삼켜버리는, 독을 내뿜은 깊고 깊은 늪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찾아왔다. 그리고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고. 그가 의지하려고 하면 좋아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아닌 척 태연하게 있으려 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고. 눈에 빤히 보이지만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해서 그냥 모르는 체 하고 있었다고.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있었다. 그는 원래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걸 잊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에 취해, 그가 기대어 오곤 한다는 우월감에 취해 스스로 눈을 가려버리고 있었다는 걸 그의 말을 통해서 깨달았다. 새삼 다시 깨달은 사실에 충격을 받고 있자니, 그가 입술을 슬쩍 비틀면서 웃었다. 그것은 예의 천진한 미소도 아니었고, 대외적으로 보이곤 했던 가식적인 미소도 아니었다. 상대의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비꼬고 있는 것이었다. 상대의 우둔함을 비웃고 있는 것이었다.


정곡을 찔린 채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니, 비웃고 있던 그가 건조한 어투로 말을 건넸다. 어차피 다 알고 있으니 한 번 선심 써주겠다고. 게다가 그도 기분을 풀 곳을 찾고 있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니냐면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자신이 입을 다물고 있자, 그는 그것이 승낙의 의미라고 생각을 했는지 손으로 자신의 턱을 가볍게 그러쥐듯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숙여 입을 맞추려고 했다. 그때 자신이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면, 입을 맞추고 끈적하게 혀를 얽었을지도 몰랐다.


[위로해달라는 거야?]


툭 내뱉은 자신의 말에, 다가오던 그의 입술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코앞에 있는 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져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위로? 지금 위로라고 했슴까?]


앙 다물린 그의 입술 사이로, 으르렁 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가 다시 말을 덧붙였다.


[위로 같은 거 바라지 않슴다. 이건, 내가, 당신에게 봉사를 하는 검다.]


몸소 말이죠, 라고 말을 마치는 순간 시야가 어두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다음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자신의 자취방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대강 잠근 뒤 내던져지듯이 침대 위에 눕혀졌다. 일사천리에 모든 것이 마무리 지어졌다. 옷이 벗겨지는 것도, 자신의 맨살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던 그의 손놀림도, 안쪽 깊숙한 곳을 파고드는 격통도.


그때의 기억은 여러 장의 사진을 보는 것처럼 띄엄띄엄,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의 밑에서 반은 울면서, 반은 헐떡거리면서 있던 것. 그렇게 원하던 거면서 왜 우는 거냐고 윽박을 지르는 그의 얼굴. 정신을 놓고 싶은데도 그렇게 되질 않아서, 미약한 목소리로 그에게 그만해달라고 애원한 것. 그리고 난생 처음 느껴보는 이질적인 감각을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정신을 놓았던 것.

눈을 떴을 땐 모든 게 끝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곁에 없었다.


몸에 남아있는 통증을 끌어안으면서 생각했다. 그래도 한 번이라도 그의 사람이 될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인연이 끝날지언정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는 안고 갈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그렇게 상처 입은 자신을 스스로 위안했다.


“그때부터가 문제였던 건가.”


단 한 번이라고 생각했기에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를 추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한동안 자신을 찾아오지 않던 그는, 어느 순간 불쑥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첫날 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눕히고, 이기적인 움직임으로 자신을 안은 뒤 훌쩍 떠나버렸다. 그런 밤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 되었다. 이런 관계는 그만두자고 이야기 할 수 있었던 순간도 많다면 많았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되풀이 되는 행위에 매번 상처를 입으면서도, 그 행위를 하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그를 소유할 수 있단 생각에 실낱같이 이어진 아슬아슬한 관계를 놓을 수가 없었다.


지독하기 짝이 없는 이기심이었다.


그 이기심이 자신을 좀먹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변해버린 그를 더욱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놓아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술을 마신 채로 자신을 찾아왔다. 자신을 찾아올 때면 술을 마시지 않아도 술에 취한 것처럼 거칠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인사불성에 가까웠다. 자신에게 뻗는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비틀비틀 안쪽으로 걸어 들어오는 그를, 안듯이 지탱해주고는 조심스럽게 부축해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대 위에 무너지듯이 몸을 뉘인 그는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윽고 억눌린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누군가의 이름을 읊조리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이름은 흐느낌에 가려져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리도 애달프게 부르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자신은 그에게,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존재였다. 신뢰는 받았을지언정,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을지언정, 자신은 그에게 있어서 사랑이 아니었다. 그가 사랑하는 존재가 될 수 없었다.


그 날만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바닥에 앉아 침대 위에 있는 그의 곁을 지키며 그가 잠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어느새 잠들었고, 다시 깨어났을 땐 이미 그는 떠난 뒤였다. 그리고 자신은 바닥이 아닌,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걸로 아주 조금 그와의 관계가 달라졌다. 아니,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래로 그와 반강제적으로 몸을 섞는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어느 정도 자신을 배려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연인에게 하듯 사랑스러운 키스를 나누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애무가 나날이 다정해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볼 일을 마친 후 바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곁에 좀 더 머물고 가는 날이 점차 많아지면서 그가 시나브로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그의 오래된 사랑을 지우지는 못하고 있더라도, 자신에게 조금씩 정을 주고 있다고 착각해버렸다.


이제는 반쯤 일상처럼 그와 몸을 섞은 뒤 살짝 선잠에 들었었다. 그러던 중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잠에서 깨어났었다. 침대 옆자리에는 그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딘가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 먹은 솜같이 무거운 몸을 간신히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찾았다. 베란다에서 그가 한 손엔 담배를, 다른 한 손엔 핸드폰을 든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키ㅅ...]


그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던 시도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묻히고 말았다.


[어디 있냐고요? 아뇨, 잠시 밖에... 애인 집이냐고요? 하하,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 거 아니에요. ...뭐, 그런 거죠.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사이. 속히 말하는 섹스 파트너라고 할까요. 관계 갖는 것 빼곤 딱히 바라는 것도 없어서 편해요. 임신도 안 하고.]


열어선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가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열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현실을 자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조리 다 착각이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깨닫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자신은 여러모로 편한 섹스 상대였다는 걸, 그의 입을 통해서 만큼은 절대로 확인받고 싶지 않았다.


세상이 무너질 것 같다는 기분이 바로 이런 느낌인걸까.


금방이라도 휘청거릴 것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를 다잡았다. 똑바로 서 있으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다. 그리고 통화 내용을 듣게 되었다는 걸 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워, 애초에 일어난 적이 없는 것처럼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침대 쪽으로 걸어왔다.


[아직도 잠까? 평소보다 더 오래 자는 것 같네.]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건네자, 그제야 다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아, 깼슴까? 실은 나, 이제 곧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

[그럼 다음에 또 올게요.]


다음을 기약하는 그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별 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자신에게 바로 등을 보이며 현관을 빠져나갔으니까. 자동적으로 현관문이 닫히자, 그제야 입을 열고 뒤늦은 대답을 했다.


다음은 없어, 라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가 집으로 찾아와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집에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것이 몇 번 반복되니 그는 집으로 찾아오는 횟수를 줄였다. 대신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회사 근처로 가끔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발견하는 것보다, 자신이 먼저 그를 발견하곤 했기 때문에 다행히도 얼굴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회사 근처에서도 만날 수가 없자 차츰 그에게서 오는 문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 온 문자는 많이 바쁘냐는 내용이었다. 문자 확인은 했지만 답장은 보내지 않고 그대로 삭제해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의 내용은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답지 않게 걱정을 하는 것 같은 늬앙스로 바뀌었다. 이 또한 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런 문자를 보낸 건 또 처음이라, 기념할 겸 메시지 함에 보관해두었다. 다음으로 또 한 번 내용이 바뀌었다. 혹시 자기를 피하고 있는 거냐고. 이번엔 문자와 더불어 전화를 걸어오는 횟수도 늘어났다. 문자 확인은 주기적으로 할지언정 전화는 받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가 다시 문자를 보냈다. 보고 싶다고, 만나고 싶다고. 그래서 이번만큼은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의 위치를 짤막하게 적어서, 주변 풍경을 찍은 사진까지 첨부해서.


문자를 보낸 뒤, 자신은 줄곧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까마득하게만 보이는 지상을 내려다보면서.


끼익, 하고 철문이 열리는 소음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철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가 서 있었다. 늘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머리카락이 한껏 흐트러져있었다. 깨끗한 피부 위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마치 먼 거리를 달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작게 키득거렸다. 그가 서 있는 곳과 자신이 서 있는 곳은 거리가 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코앞에서 본 것 마냥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다 바로 웃음을 거두어들였다. 자신이 보았다고 생각한 그 모습 또한 착각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선배...?”

“오랜만이다, 키세.”


오랜만이라고 살갑게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이, 조심스럽게,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왜, 그런 곳에 서 있는 검까...?”

“이곳이 뭐가 어때서.”

“거긴...”


옥상 난간 바깥쪽이잖슴까, 하는 그의 말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래서 좋은 건데. 아슬아슬, 위태위태. 마치 외줄타기 하는 것처럼.”


게다가 하늘도 땅도 잘 보이는 곳인걸.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금 그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탁 트인 하늘, 그리고 그 아래 덩그러니 서 있는 그의 모습. 그것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꽤나 멋진 풍경이었기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웃고만 있는 자신의 작태에 그는 불안감을 느꼈는지, 다시 한 번 초조한 목소리로 자신을 불렀다.


“이쪽으로 와요. 거긴 위험함다.”

“그래?”

“네.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난 그쪽이 싫은데.”


자신에게 손을 뻗으며 천천히 걸어오던 그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들이곤, 다시 옥상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을 가만히 응시했다.


“키세, 난 말이지, 옥상을 좋아해. 정확히 말하자면 옥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

“여기까지만 올라와도 시계가 달라지거든. 땅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여. 게다가 하늘도 보다 가까운 곳에서 올려다볼 수 있어.”

“...”

“근데 꽤 옛날에 문득 깨달았다? 난간 안쪽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또한 지상에 얽매여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걸 말이야.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 좁은 곳에 갇힌 채로 드넓은 하늘을 동경하는 것과 같다는 걸. 원하고 원하는 것을 눈앞에 두고 있어도 가질 수 없는 것과 같아.”


같은 거다, 키세, 라고 낮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덧붙이며 그에게 한 번 시선을 던졌다. 그의 두 눈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선배, 난... 그...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슴다.”

“응, 모를 거다. 물론 몰라도 상관없는 일이지. 그러니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돼.”

“...”

“옥상에 있는 난간이라는 건 내게 있어서 일종의 벽이었어. 굴레이자 족쇄이기도 했지.”


그래서 벗어나고자 하는 거야.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그를 바라보면서, 이렇게까지 관계가 비틀리기 전에 짓곤 했던 순수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미안하다, 키세. 네 앞에서 이런 짓을 하는 건 내 이기심일지도 몰라. 아니, 내 이기심이야.”

“...선배?”

“너를 위해서라도 네 눈앞에서 조용히 사라져 주고 싶었어. 하지만 나를 위해서 내 존재가 네 기억 속에 남아있었으면 했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죠? 그렇죠?”

“내 충동을 억누르고 있던 마지막 굴레는 너였다, 키세. 비록 스스로 끊어내기로 마음먹었지만 말이야.”

“선배!!!”


땅을 등지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몸을 뉘였다. 난간에 반쯤 몸을 걸치고, 자신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비록 그 얼굴은 점점 멀어지고, 흐릿해졌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의 금발은 마치 태양빛과도 같아서 푸른 하늘과 유독 잘 어울렸으니까. 그 두 가지가 한데 어우러진 풍경을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간의 아픔을 모두 상쇄시킬 정도로 행복했다.


그러다 그의 얼굴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즈음에야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읊조리듯이 한 가지 소원을 빌었다.


[부디 다음에는 나비로 태어날 수 있길. 덧없는 생명일지언정 바람이 가는 대로 자유로이 따라 날갯짓을 할 수 있게. 그 날개가 거칠어진 바람에 찢어지기 쉬울지라도, 그래도 바람 하나만 바라보고 따라 날아다닐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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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온 햇빛에, 살짝 미간을 좁히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새하얀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워있는 상태 그대로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고 있다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몸을 일으켜 앉았을 때, 차가운 무언가가 뺨을 타고 또르륵 흘러내렸다.


또, 인가.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카가미는 작게 중얼거렸다. 손등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가볍게 훑어내었다. 이전에도 이런 일이 가끔 있었다. 꿈속에서 기억이 나지도 않는 과거를 접하게 되면, 간혹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곤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끔이었을 뿐, 요즘처럼 빈번하지는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원인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나왔다. 센티넬, 아니, 그와 만났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온 이후로, 그를 만나게 된 이후로, 자신의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무언가가 시나브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카가미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것만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 변화는 잔잔한 수면 위에 작은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과 같았다. 물의 절대량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떨어진 물 한 방울이 남기고 간 파장만큼은 잔잔한 수면을 흔들면서 길게, 그리고 넓게 퍼져나가는 것처럼. 그와의 만남이라는 작은 계기가, 자신의 내면에 변화라는 너울을 불러 일으켰다는 걸 카가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깨어나면 기억도 못하는 걸.


그와의 만남이 자신을 변하게 만들었다 한들, 지워진 기억을 소생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그저 꿈을 꾸었을 때의 감정만이 남아, 자고 있는 도중 눈물을 흘리게 만들 뿐이었다. 왠지 모르게 속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서 카가미는 씁쓸한 웃음을 한 번 뱉어냈다. 그리고 침대에서 벗어나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겨 욕실로 향했다. 기억이 나지도 않는 꿈에 계속 얽매여 있느니, 찬물로 세수를 하며 가라앉은 기분을, 상념을 털어내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았기에.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에 세안을 하고 난 후, 욕실에 비치되어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가볍게 닦아냈다. 술렁거리던 감정이 흐르는 물에 씻겨 내려간 듯, 조금은 차분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후우, 하고 길게 숨을 한 번 내뱉은 뒤, 사용한 수건을 대충 어깨에 얹고는 욕실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주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욕실과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주방으로 향하면서 잠시 생각했다. 이곳에 머물게 된 지도 벌써 세 달이 넘었건만 아직도 자신은 이방인 같다고. 그도 그럴 것이 그와 자신, 단 둘이 머물기에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넓은 저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끔 고용된 사람들이 와서 청소며 저택 관리를 하고 간다고는 하나, 왠지 모르게 사람 사는 느낌이 거의 묻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툭 떨어뜨려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심코 든 생각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내저었다. 그런 생각보다 식사가 우선이라는 듯이, 주방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호쾌하게 냉장고 문을 열어젖혔다.


"아... 조리해둔 건 어제 다 먹어치웠던가."


냉장고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조리되지 않은 음식 재료들뿐이었다. 평소에는 저택을 오고가는 고용인들이 만들어두고 간 음식을 꺼내다 먹으면 됐는데, 배가 고플 때마다 수시로 꺼내다 데워먹었더니 사람들이 다시 방문하기도 전에 조리해둔 것이 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잠시 동안 냉장고 안 재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몇 가지 야채와 계란, 버터, 우유 등을 꺼내어 챙겨 들었다.


"빵은... 아직 남았네."


꺼내 온 물건들을 테이블 위에 잘 올려놓은 다음, 빵이 보관되어 있는 곳을 확인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먹을 만한 양의 여러 가지 빵이 남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식빵을 꺼내어 손에 들고는 테이블 쪽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찬장과 수납장을 뒤져 요리에 필요한 것들을 찾아내곤 아침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조리되어 있는 것이 없다면 자신이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어차피 남들이 만든 것을 먹는 것보다 스스로 만들어 먹는 것이 더 익숙하기도 했다. 게다가 요리를 하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마 '과거'의 자신도 지금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을 터였다. 흔히 이야기 하듯,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몸은 기억을 하고 있는, 그런 계통의 것일지도 몰랐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손은 열심히 움직여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만한 토스트와 샐러드를 만들었다. 잘 구운 식빵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완성된 음식을 접시에 옮겨 담다가 문득 그를 떠올렸다. 평소라면 의식주가 모두 해결된 상태였으니 굳이 서로를 마주하지 않아도 어찌저찌 생활해 나갈 수 있었지만, 오늘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그가 스스로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지 여부도 알지 못할 뿐더러, 요리를 만들어 놓고 그걸 자신 혼자 다 먹어버리는 것 또한 카가미로선 뭔가 찝찝했다.


"오늘 오후에는 사람이 올지도 모르니까... 일단 그 전까진 챙겨주는 편이 낫겠지."


지금 만들어 놓은 것은 카가미 자신이 먹을 몫뿐이었지만, 또 다시 만들면 된다는 생각에 그리 아깝지는 않았다. 재료가 넉넉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아쉬웠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수납장에서 큰 쟁반 하나를 꺼내어 토스트와 샐러드가 담긴 접시를 옮겨 담았다. 그리고 유리잔 한 가득 우유를 부어 따른 뒤, 그것도 쟁반 위에 올려두었다. 마지막으로 쟁반 위에 덮개를 씌운 뒤, 조심스럽게 쟁반을 들어 올리고는 천천히 주방을 빠져나왔다.


"... 이쪽이던가."


그와 첫 대면을 한 이래로 향해본 적이 없는 복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아침만 건네주고 나오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걷기 시작했는데, 그의 방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묘하게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감정의 파장이 점점 더 짙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걸음을 옮겨, 그의 방문 앞에 멈추어 섰다.


"...들어간다."


살짝 노크를 하며 들어가겠노라고 먼저 이야기를 한 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긴장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쉽게 그의 공간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아오미네?"


열린 방문 안쪽으로 한 걸음만 내딛은 상태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게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을 제지하는 목소리는 이번에도 들리지 않았다. 그것에 용기를 얻어 터벅터벅 방 안으로 들어가는데, 침대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흠칫 놀라, 카가미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은 채로 고개만 천천히 돌려 침대 쪽을 응시했다. 그가 일어나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그는 베개에 고개를 파묻고 엎드린 자세를 한 채 아직까지도 잠들어 있었다.


아까 들린 소리는 뒤척이는 소리였던 건가.


아직 잠들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침대 머리맡 쪽에 있는 테이블 위에 쟁반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침대 가까이로 다가가 잠든 그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은 베개에 파묻혀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자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 같았다. 가이드를 서넛이나 붙여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센티넬도, 잠들어 있을 때는 평범한 사람 같다니.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을 좀 더 자세히 지켜보고 싶어서, 카가미는 자신도 모르게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얼마동안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을까. 그가 베개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자신 쪽으로 살짝 틀었다. 그리고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상태 그대로 미간을 찌푸렸다. 꿈속에서 뭔가 불만스러운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싶어서 살짝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그의 표정이 변함에 따라 카가미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단순히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이라 여겼던 그의 얼굴이 변해갔다. 처음에는 화난 것처럼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서서히 울 것 같은 얼굴로 변했다. 그리고 비통함을 속으로 삼키는 것 같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지켜보고 있는 이가 더욱 가슴이 아플 정도로, 슬픔으로 인해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의 고통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것에 감응한 듯, 무의식적으로 그에게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뺨 위에 가볍게 손을 얹으려고 했다. 순간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손은 그에게 닿았을 터였다.


타이가.


세 음절로 이루어진 말에, 심장이 쿵 하고 크게 뛰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카가미 또한 울고 싶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리만치 술렁이는 감정을 다잡으려 노력하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꾹 감긴 그의 속눈썹 아래로 작은 물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곧 이어 또 한 방울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카가미는 자신의 손으로 그 눈물을 거두어 주었다.


울지 마.


마음속으로 연신 울지 말라는 한 마디만을 반복하면서, 그가 가이드인 자신의 힘에 반응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그의 머리를,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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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그의 취향 연성 2015. 4. 11. 23:47

그가 이전에 인터뷰했던 잡지를 들춰본 것은 한 순간의 변덕일 뿐이었다. 그의 인터뷰가 수록되어있다기에 구매를 한 것도, 이후 방치하고 있다가 뒤늦게야 읽어볼 생각이 든 것 또한. 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남기고 간 영향은 막대하기 짝이 없었다.


*


Q 이번 대담을 통해서 키세 군에 대해서 많은 걸 알 수 있었어요.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겠죠.

A 그런가요? (웃음)

Q 그렇고말고요. 그러니까 하나만 더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A 제가 대답할 수 있는 선에서라면 얼마든지.

Q 아마 전국의 키세 료타 팬들이 물어보고 싶어 하는 질문이 아닐까 싶어요.

A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조금 부담스러운데요. (웃음) 각오하고 있을 테니 얼마든지 물어봐주세요.

Q 질문은 짧습니다. 현재 키세 료타의 이상형은?

A 아, 이상형에 관한 거라... 음... 저를 구속하지 않는 사람? 지금 생각나는 건 이정도 밖에 없네요.


“구속하지 않는 사람.”


인터뷰를 가볍게 읽어 내려가고 있다가, 한 부분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시선이 멈춘 곳은 그가 이상형에 대하여 대답을 한 부분이었다. 구속하지 않는 사람. 다시 한 번 그 문장을 반복해서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 순간, 구속하지 않는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대답을 하는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마 조금 난처하다는 듯이 눈썹 끝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약간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겠지.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 척 하다가, 진심이 어린 대답을 내뱉었겠지. 인터뷰라고 비교적 유하게 돌려 말했지만, 누군가에게 구속당하기 싫다는 것을, 그런 걸 혐오한다는 것을 잘 포장해서 천연덕스럽게 겉으로 드러냈겠지.


그라면, 키세 료타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잡지를 덮었다.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았다. 이 이상 그와 관련된 것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인터뷰가 수록된 잡지 표지 모델이 그였던지라, 잡지를 덮은 순간 표지 속의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가볍게 혀를 차곤 잡지를 아무렇게나 방바닥에 툭 던져두었다. 앞표지의 그가 보이지 않게, 일부러 뒤표지가 위에 오도록.


그 이후로 몇날 며칠 동안 그 인터뷰에 대한 것을 잊으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오히려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그 인터뷰의 내용이 머릿속에 떠올라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대학 들어와서 처음 보게 되는 시험 날짜가 코앞에 닥쳤는데도 불구하고, 전공책의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용 암기를 위해 필기를 옮겨 적고 있던 서브노트에도 어느새, 키세의 이름 넉자와 구속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깊게 새겨지고 있었다. 기억에. 가슴에.


이 상태로는 억지로 책을 붙들고 있다고 해도 공부가 될 것 같진 않았다. 손에 쥐고 있던 샤프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과 그의 이상형으로 빼곡해진 노트 한 페이지를 쭉 찢어 내렸다. 그것을 꾸깃꾸깃 구겨버리고는 책상 옆의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 지금 버려버린 종이마냥 잡지 인터뷰를 읽었던 기억도 쉽게 버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은 녹록치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은 느낌이었다. 깨달음의 계기 치고는 많이 이상했지만.


“...”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 괜스레 뒷머리를 쓱쓱 쓸어내렸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 있다가는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 자신에겐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면 적어도 기분전환을 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밤 9시. 늦다면 늦은 시간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몸에 걸칠 가벼운 상의 하나와 핸드폰을 챙겨든 채 방을 나섰다. 거실에 있던 부모님이 어디 가는 거냐고 묻자, 집중이 안 돼서 휴식 겸 잠시 산책 좀 하고 오겠다는 대답만을 남기고 집 밖으로 빠져 나왔다.


집 밖으로 나오니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핸드폰은 대강 바지 주머니 안쪽에 찔러 넣고, 들고 나온 겉옷을 챙겨 입었다. 봄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밤은 서늘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래도 봄이라고 입김이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미미한 차이로 계절 변화를 다시 한 번 확인한 후에야,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걸음을 옮길 때, 눈앞에 닥친 시험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다음 한 걸음을 옮길 땐,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한 걸음을 옮길 땐,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비우러 나온 것이니 이런 생각조차 부질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그래서 무념무상의 상태로, 목적지 없이 방황하듯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


시험에 대한 생각도, 그 외의 다른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의식이 자신을 이끈 모양이었다. 자신의 무의식은, 갈 곳이 없이 방황하던 발걸음을, 그가 살고 있는 동네 근처로 이끌었다. 그 때문에, 그가 인터뷰한 내용 때문에 여러모로 복잡한 심정이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무의식적으로 그를 찾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미묘한 기분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이래서야 원, 그 녀석이 싫어할 타입에 속할지도 모르겠는걸. 하고.


사귀고 있는 사이라고는 하나, 아무런 언질도 없이 집 근처에 찾아와 있는 것을 보면 그가 당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당황 그 이상으로 정이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후자의 경우를 생각하니 피가 식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들키지 않게 돌아가야겠다.


그가 언급한 ‘구속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에 도리어 자신이 구속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이상형에 신경을 쓰게 되고, 그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자신은...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그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 하나만큼은 자신에게 있어서 불변의 진리나 다름없었다. 밤 산책은 이쯤 하기로 하고, 그에게 들키기 전에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걸음을 좀 더 빨리하면 그에게 들킬 일도 없을 거라 생각하니, 점점 더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가로등 밑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키세?”

“카사마츠 선배?”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집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다 그를 발견한 자신이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그도 이쪽을 바라보더니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곤 더할 나위 없이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이쪽으로 달려왔다.


“여기까진 어쩐 일임까?”

“아, 그냥 밤 산책.”

“선배, 시험 기간이 코앞이라고 해서 데이트는커녕 얼굴 보는 것도 제대로 못했는데... 이렇게라도 만나니까 좋슴다.”

“그러냐.”

“게다가 선배, 최근 들어서 전화도, 문자도 잘 안 하잖슴까.”

“...그건...”


잡지를 읽은 탓이었다. 잡지 인터뷰 내용 중에, 구속하지 않는 사람이 취향이라고 그가 이야기 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화도 문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 자신이 보내고 있는 메시지가 그에게 있어서는 구속하는 것처럼 느껴지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그렇다보니 최근엔 최대한 그의 메시지에 답변만 하는 수준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건?”

“시험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랬어. 미안하다.”

“선배에게 사과 받으려고 물은 건 아님다.”


그가 눈썹 끝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난처하다는 듯이 웃었다. 이전에 자신이 상상했던 얼굴 그대로라, 살짝 웃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아직 교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나저나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아직 교복이야? 남아서 연습하다 온 거냐?”


그 말을 꺼내고 아차, 싶었다. 이렇게 일일이 캐묻는 것 또한 구속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실수를 한 것 같아서, 살짝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반응은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아, 연습도 연습이지만 공부도 조금 하고 왔슴다. 그러다보니 평소보다 귀가가 늦어졌슴다.”

“공부? 네가?”


불과 작년, 아니 몇 개월 전만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스스로 남아서 공부를 하고 온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을 하면서, 약간은 의심이 묻어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짜임다! 농구는 지금도 성실하게 하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공부 쪽에도 좀 더 성실해져 볼까 해서...”

“잘 생각했네. ...근데 예전의 네 모습과 조금 괴리감이 있어서 적응이 안 된다. 미안.”

“그게 뭡니까, 진짜...너무함다.”


칭찬 같으면서도 왠지 칭찬 같지 않다면서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그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사과를 하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자신을 그가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답지 않게 약간 우물쭈물 거리는 것 같은 태도로.


“이런 모습... 좋아함까?”

“응?”

“그러니까... 매사에 성실한 사람, 좋아함까?”


그가 건네는 질문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미간을 살짝 찡그리면서, 의미를 모르겠단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해야 될 것 같아서, 일단은 생각나는 대로 대답을 했다.


“성실한 사람 좋지. 신뢰라고 해야 할지, 절로 마음이 간다고 해야 하나. 그런 사람이 취향...아.”


그런 사람이 취향이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미처 다 끝마치지 못했다. 성실한 사람이 좋다고 대답을 한 이후로, 그의 눈이 약간의 불안감과 기대감 같은 걸로 일렁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신의 취향에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자신의 이상형인 ‘성실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키세.”

“예?”

“너, 누구한테 내 이상형 같은 거 물어봤냐? 모리야마?”


자신의 말에 그의 어깨가 흠칫 하고 크게 떨렸다. 쉽게 대답할 수가 없는지, 그는 시선을 요리조리 피하고 있다가 마침내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모리야마 선배에게 물어봤슴다.”

“나한테 직접 물어보지 그랬냐?”

“그치만, 그렇게 하면 별로 감동이 없잖슴까! 게다가 선배가 절 더 좋아해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변하려고 했다고 그가 덧붙였다. 단지 자신이 그를 좀 더 좋아해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랬다고. 그래서 성실해지려 노력하고 있다고. 그 말을 듣게 되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굳이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나, 너 좋아해.”

“....!”

“하지만 고등학교 입학 당시처럼 돌아가 버리면 발로 걷어차 버릴 거다.”

“...네...”


좋아한다는 말에는 기가 사는가 싶더니, 이내 나태해지면 걷어찰 거란 말에 다시 풀죽어 버린 그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이라면 아무런 사심 없이 그에게 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고 있던 그의 이상형에 대해서.


“키세, 구속하지 않는 사람이 좋냐?”

“편하긴 할 것 같슴다.”

“그럼 내가 널 구속하려고 하면, 시시콜콜 뭔가 자꾸 물어보고 하면, 넌 날 싫어할 거냐?”


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바로 대답했다.


“아뇨! 제가 왜 싫어함까? 그것보다, 선배는 그런 거 하나도 안 하잖아요? 가끔은 해줬으면 한다구요!”

“해줬으면 하다니, 뭘?”

“시시콜콜 자꾸 묻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아니었냐?”

“선배는 경우가 다름다!”

“뭐가 달라, 임마.”


괜한 억지 쓰지 말라며 그의 다리를 아프지 않게 한 번 걷어찼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자꾸만 입술 사이로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의 이상형에 부합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의 취향에 부합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는 자신을 좋아하고 있으니까.


취향을 넘어서서,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특별하게 여겨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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