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고] AU 썰 네번째 2015. 4. 3. 21:36

미도리마가 사과의 말을 건넨 다음, 타카오는 입을 꾹 다물었음. 마치 미도리마가 건넨 사과의 말을 들은 것처럼. 그럴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미도리마에게는 그렇게 느껴졌음. 타카오는 얼마 동안 이야기를 하지 않다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음. "있지,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 네가 사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평소의 공기? 분위기랑은 다른데, 하고 이전처럼 살짝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타카오는 이야기 했음. 하지만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묻어난다고 해서 그게 진심으로 즐겁다거나 한 건 아니라는 건, 인간의 감정에 둔한 미도리마도 잘 알고 있었음. 그러나 그런 식으로라도 분위기 환기를 하고 싶은 타카오의 심정은 알 것 같았기에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음. 타카오는 이어 이야기를 했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이렇게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난 기뻐. 여기 신 님, 할머니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정말 대단한 분이었구나.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란 생각했던 사람... 아, 사람이 아니지, 여튼 그런 존재를 다시 만나게 해줬어. 진짜 뭐라도 바쳐야 할 것 같은 기분이야. 뭘 바치는 게 좋을까. 이전처럼 오시루코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여기 신 님이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미도리마는 입을 열었음. [너다, 타카오. 너만 있으면 된다.]


미도리마는 자신이 무심코 꺼낸 대답에 스스로도 깜짝 놀랐음. 하지만 이미 자신의 감정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런 말이 나올 법도 하다고 생각했음. 물론 실제로 그를 소원을 이루어준 '대가'로서 거두어 가면 안 되겠지만. 미도리마는 잠시 고개를 내저었음. 그냥 이렇게만 있어주는 걸로도 좋았음. 인간의 삶은 덧없기 짝이 없지만, 그 짧은 시간이나마 그가 본인의 생을 자신과 공유해준다면 그걸로도 만족할 수 있었음. 답지 않게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여튼 그렇다고 생각을 했음. 미도리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타카오는, 이제 서서히 웃음기를 찾아가는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음.

"나... 내일 또 다시 여기 와도 될까? 너를 만나러 오고 싶어. 신 님이 사당 앞을 만남의 장소로 삼는다고 경을 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널 만날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니까... 다시 널 만나러 오고 싶어. 대답은... 역시 들을 수 없겠지? 나 혼자만의 약속이 되겠네." 

마지막 말은 왠지 모르게 씁쓸함이 감도는 것 같았음. 미도리마는 몰랐지만, 타카오는 한 가지 배운 것이 있었음. 한 번 온기를 알아버린 짐승이 그 온기를 갈구하게 되는 것처럼, 온기를 알아버린 짐승이 그 온기를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얼마나 절박해지는지를. 타카오는 '그'라는 존재를 한 번 잃어버렸기 때문에 더욱 절박해져 있는 상태였음. 안 그런 척 노력하고 있었지만, 스스로는 그저 슬프고 슬퍼서 힘들었을 뿐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지만 타카오에게 있어서 미도리마는 이제 놓을 수 없는 존재였음. 놓치기 싫은 존재였음. 

"만나러 올거야."

타카오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이야기를 했음. 미도리마는 타카오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음. 그리고 손을 잠시 움직여 신력을 사용했음. 인간에게는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 없으니, 무너뜨린 돌탑의 돌을 움직였음. 그리고 그에게 대답을 돌려주었음. [ん(응)] 이라는 문자로써.


이런 식으로 타카오에게 직접적으로 대답을 해준 건 처음일지도 몰랐음. 물론 타카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서, 미도리마가 직접 대답을 해준 게 처음일지도 몰랐음. 짧은 한 마디의 대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도리마는 살짝 부끄러워지는 것 같았음. 그가 자신을 기다렸던 것처럼, 자신도 그를 기다렸고, 그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걸 직접적으로 알린 것 같아서. 왠지 마음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음. 타카오는 처음에는 움직이는 돌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음. 그러다가 미도리마가 만든 한 마디의 답을 보고는 다시금 눈물을 뚝뚝 흘렸음."아 진짜... 나 원래 이렇게 눈물 많은 애 아닌데. 다 너 때문이야." 미도리마의 탓으로 돌리는 타카오의 말은 불경한 것일지도 몰랐음. 하지만 미도리마는 그 말을 불경하다고 생각하기는 커녕, 오히려 미안하다고 이야기 하며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고만 생각했음. 타카오는 눈물을 소매로 슥슥 닦고는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음.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음. "내일 올게. 네가 와도 된다고 했으니까... 꼭 올 거야. 내일 만나. 나 기다리고 있어야 해?" 타카오는 장난스럽게 한 마디를 덧붙인 다음, 이제 후련해졌다는 듯이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음. 그리고 미도리마가 있는 곳에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고는 천천히 등을 돌렸음.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진 것처럼 보였음. 

[따라가라.]
사당을 떠나는 타카오의 등을 바라보면서 미도리마는 한 마디를 덧붙였음. 미도리마의 언령에 따라, 바람 한 조각이 날아가 타카오의 등에 살며시 붙었음. 이 바람이 타카오의 행방을, 타카오의 주변 상황을 미도리마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전달할 거였음. 타카오가 미도리마에게 각인되었듯이, 미도리마도 타카오에게 각인된 이상 미도리마는 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음. 타카오의 인생을 하나도 빠짐 없이 지켜봐주겠노라 생각했음. 자신이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서. 


타카오에게 붙여둔 바람은, 타카오의 곁에 머물면서 겪은 것들을 '기억'으로 남겼음. 그리고 그 기억을 고스란히 신에게 보여주었음. 서로 떨어져있다 하더라도, 미도리마는 타카오의 일상 등에 대해서 알 수 있었음. 가족들과 행복하게 웃는 모습,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노는 모습, 때때로 공부를 하면서 머리를 싸매는 모습... 미도리마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일상이었지만, 타카오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 기억은 매우 흥미로웠음. 그가 살고 있는 곳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있는 사당에서, 미도리마는 그 기억을 몇 번이고 돌려보면서 타카오가 자신을 다시 찾아오기만을 기다렸음. 그렇게 그를 만나고, 돌려보내고, 다시 만나고, 또 다시 돌려보내는 일과를 반복했음. 그러다가 여느 때보다 둥글고 큰 보름달이 뜬 날 밤, 미도리마는 사당 밖으로 걸어나왔음. 사당 주변에 친 결계를 빠져나와, 인간세상으로 향했음. 그리고 타카오가 살고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음. 이런 아름다운 밤에는 잠을 청하기도 힘들터인데, 타카오는 그것에 개의치도 않는다는 듯이 쿨쿨 잘도 자고 있었음. 미도리마는 마치 녹아들듯이 타카오의 집 안으로, 방 안으로 향했음. 그리고 곤히 잠들어 있는 그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머리맡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음. [타카오.] 미도리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다가 손을 들어올렸음. 그리고 그의 뺨 위에 가볍게 손을 얹었음. 처음으로 미도리마 쪽에서 인간과 접촉했음. 잠든 그의 심상과 미도리마의 심상이 천천히 연결되기 시작했음.


미도리마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땐 풍경이 바뀌어 있었음. 분명 미도리마가 있는 곳은 타카오가 잠들어 있는 침실일텐데,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아주 낯익은 곳이었음. 다름아닌 미도리마의 사당 근처의 풍경이었음. 미도리마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듯이 그 풍경을 시야에 담았음. 하지만 미도리마가 보고 있던 '진짜' 풍경과는 뭔가가 조금 달랐음. 좀 더 생기가 넘치는 것 같기도 하고 묘하게 왜곡된 부분도 있는 것 같았음. 미도리마가 보고 있는 것은, 타카오의 꿈 속. 타카오가 꿈속에서 보고 있는 심상이었음. 접촉한 것만으로 인간의 꿈속을, 속내를 접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되었음. 물론 직접 시도해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지만,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진짜 되니까 미묘한 그런 심정에 가까웠음.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미도리마는 무의식적으로 꿈 속에 있을 타카오를 찾았음. 하지만 사당 근처에서는 타카오를 볼 수 없었음. [타카오의 꿈이 아니었던가.] 타카오의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타카오가 없었음. 미도리마는 순간 당황했음. 그럼 자신은 누구의 꿈에 흘러들어온 것인가? 미도리마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사당으로 들어오는 입구 쪽에서 타카오로 보이는 인영이 걸어들어오기 시작했음.


[타카오.] 순간 다른 이의 꿈속에 들어온 건가 싶어서 답지 않게 당황했었는데, 타카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안심이 되었음. 그래서 미도리마는 다소 밝은 목소리로 타카오의 이름을 불렀음. 타카오가 점점 더, 미도리마에게 가까이 다가왔음. 그리고 타카오의 발걸음이 어느 위치에서 멈추었을 때, 미도리마는 또 다시 이상한 점을 발견했음. [타카오? ..... 조금 자란 것 같다는 것이다....?] 타카오의 눈높이가 이전보다 조금 더 높아져 있었음. 그리고 체격 또한,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타카오의 체격보다 단단해져 있는 것 같았음. 마치 나이를 먹어서 성숙해진 것처럼. 그것에 생각이 미친 순간 미도리마는 잠시 눈을 크게 떴음. 타카오는 살짝 시선을 들어올려 미도리마를 바라보았음. 타카오의 눈에도 살짝 놀라운 기가 어리는가 싶더니, 이내 타카오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음. "와, 이젠 얼굴까지 보이네. 어디까지 제멋대로인거야, 내 무의식은." 요 근래 사당에 찾아오는 꿈을 평소보다 많이 꾸는가 싶더니, 이제 얼굴까지 상상해서 꾸게 될 줄은 몰랐다며 타카오는 폭소를 터뜨렸음. "그래도 잘생겼네. 분위기도... 숲이랑 닮았어."


[....] 지금 타카오의 눈에 비추이는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미도리마는 알 수 없었음. 하지만 서로의 심상이 연결되었으니, 그에게 자신의 본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을 했음. 그리고 자신의 본 모습이 그에게 보이고, 그가 그 모습을 보고 잘생겼다고 해준 거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음.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본 모습에 호감을 느낀 걸테니까. 미도리마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연심이 담뿍 담긴 잔잔한 눈으로 타카오를 바라보았음. 그리고 잠든 그에게 했던 것처럼, 손을 살짝 들어 올려 타카오의 뺨 위에 가볍게 얹었음. 꿈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타카오의 체온이 손바닥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 같았음. 느닷없는 자신의 행동에 조금 놀랐는지 긴장감이 어린 떨림도, 그러나 이내 마음이 놓였는지 부드럽게 가라앉은 움직임도 모두 미도리마에게 전해졌음. 타카오는 잠시 놀랐지만 이내 눈을 살며시 내리감으면서 미도리마의 손길을 받아들였음. "역시 꿈속에서는 뭐든지 할 수 있다더니... 내가 바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닿을 수 있다니... 행복해. 응, 진짜 행복하다. 요새 꾼 꿈들 중에서 최고의 꿈이야."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타카오는 고개를 움직여 미도리마의 손바닥에 볼을 부비는 것 같은 행동을 취했음. 그리고 장난기 어린, 그러나 어딘가 수줍음도 묻어나는 것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음. 그 미소를 지켜보고 있자니 미도리마의 가슴 한 구석도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었음. 이것이 연인을 바라보는 기분인가. 이것이 연인들 사이의 교감인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된 미도리마는, 다시 한 번 더 타카오의 뺨을 만지작 거리다가 손을 거두어 들였음. 그리고 몸을 살짝 숙여, 드러나 있는 타카오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음. 다소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그 행동은 미도리마에게 설렘을 안겨주었음. 그리고 타카오는 미도리마의 행동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음. "진짜 최고잖아. 나 이마에 키스 받아본 적 없는데! 아니, 부모님이 해주셨을 수도 있지만 내가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사람에겐 받아본 적 없다구? 내 무의식 일 제대로 해서 다행이다 진짜." 그러면서 계속 웃던 타카오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제 손바닥을 주먹으로 통 하고 한 번 쳤음. "그러고 보니 이거 꿈이잖아? 내 멋대로 해도 되는 거 아냐? 그럼 이마의 키스만으로 만족할 순 없지!" 그렇게 이야기 한 타카오는, 양 손을 미도리마에게로 뻗었음. 그리고 약간 높은 위치에 있는 미도리마의 양 어깨에 손을 턱 하고 얹었음. "잘 받아가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타카오는 미도리마의 몸을 자신의 쪽으로 살짝 끌어 당겼음. 그리고 미도리마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음. 이어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이 미도리마의 입술 위에도 본인의 입술을 살며시 겹쳤다 떼어냈음.


미도리마는 얼떨결에 뺨에도 입맞춤을 당하고 입술에도 입맞춤을 당했음. 지금까지 이래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음. 타카오는 그 모습을 보더니 크게 웃음을 터뜨렸음. "반응까지 최고야! 하기사 내가 보고 싶은 모습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이거 진짜 대박인데. 귀엽잖아!" 키도 나보다 큰데, 얼굴도 진짜 잘생겼는데, 분위기도 정말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풀풀 풍기는데도 마치 인간 같다면서, 타카오는 연신 폭소를 하다가 눈물을 흘릴 정도가 되었음. "하...너무 웃었더니 눈물이 다 나네. 배도 아픈 것 같아." 여전히 키득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타카오가 이야기 했음. 미도리마는 딱딱하게 굳어 있다가 시간이 조금 흐르자 정신을 차렸음. 그리곤 타카오를 가볍게 흘기면서, 웃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보였음. 그 얼굴을 올려다 보던 타카오는 다시금 웃음을 터뜨리다가, 웃음이 잦아들 즈음 미도리마의 품에 폭하고 안겼음. 그리고 싱그러운 풀내음이 나는 미도리마의 기모노 위에 얼굴을 살짝 묻었음.

"있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신 님의 신부라던가, 요괴의 신부라던가 하는 이야기. 기본적으론 제물로 바쳐지는 이야기를 곱게 포장한 거라고 하지만... 왠지 너를 알게 된 이후로는 그런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싶었어. 적어도 내게는 사랑이 존재하는 거니까 말이야. 물론 이런 말 하면 다른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 게 분명하니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지만. 지금은 꿈 속이니까 괜찮겠지? .... 네가 요괴든 신이든 좋으니까, 나를 신부로 맞아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 성별은 제쳐두고. 아마 네 이상으로 내가 누군가를 좋아할 것 같지도 않고, 이미 네게 홀려버려서 다른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이렇게 본 적도 없는 네 모습을 상상해서 꿈에 등장하게 할 정도로 말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당으로 찾아가는 것 정도 뿐이니까, 날 맞이하러 오는 건 네가 해줬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


"어때? 날 맞이하러 오지 않겠어? 그만큼 널 사랑하고 있어. 사랑하고 있습니다."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을 속삭이던 타카오가 살짝 고개를 들어올렸음. 미도리마는 타카오의 기나 긴 말을 들으면서 다시금 욕심이 생기는 것 같았음. 그를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는데, 그가 먼저 자신에게 맞이하러 와달라고 이야기를 한 거임. 신의 신부가 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육체를 버리고 그 영혼만이 영생을 사는 것. 즉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한 번 겪어야 한다는 것이었음. 마음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그를 신부로 들이고 싶었지만, 신이 사리사욕을 위해 인간의 명을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음. 그래서 미도리마는 잠시 생각에 잠겼음. 그리고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음. 이것은 평범한 말이 아닌 언령. 인간의 마음에도 울리는 생각의 파동이었음.

[[네게 단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시기는 네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되었을 때...]]
[[네가 성인이 되었을 때, 다시 한 번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그대로 평범한 삶을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내 신부가 될 것인지.]]
[[타카오, 넌 아직 어리고 어리다.]]
[[그러니까 좀 더 생각을 해보도록 해. 날 찾아오지 마라.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나는 사당의 주인, 이 지역을 다스리는 신 '미도리마']]

지금의 말을 '계약'으로 삼아 타카오가 성인이 되었을 때, 선택에 대한 대답을 들으러 가겠노라고, 미도리마는 스스로의 본명을 밝히면서 이야기 했음. 그리고 계약을 확실히 묶기 위해서, 이번엔 미도리마 쪽에서 고개를 숙여 타카오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음. 미도리마의 힘이 계약의 인이 되어 타카오를 옭아맸음. 계약이 끝나자 꿈의 세계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음. 미도리마는 사당에서, 타카오는 인세에서, 서로 만나지 않고 지내게 되는 나날이 시작되었음. 하루가 멀다하고 만나던 것이 마치 한 여름 밤의 꿈이었던 것처럼.


어느덧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잎사귀가 지고, 나무들이 헐벗기 시작했다. 
청량하게만 느껴지던 공기는 또한 어느새 폐부를 얼릴 것처럼 차가워져만 갔다.
더 이상 푸르지 않은, 은회색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면서 숨을 잠시 내쉬었다. 
입술 사이로 희뿌연 김이 새어 나가더니, 곧 공기중으로 스러졌다.

뒤를 돌아보았다. 
다가오는 겨울에도 시들지 않은, 푸르른 내음을 지닌 자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미도리마."

자신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그 손을 잡아주었다. 
겨울에 잠식되어가는 세상이 푸른 녹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신의 이름을 따라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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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시선이 마주쳤음. 아니, 그렇게 느낀 건 미도리마 뿐일지도 몰랐음. 하지만 타카오는 이쪽을 바로 직시하고 있었음. 마치 미도리마의 모습이 보이는 것처럼. 그리고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서 미도리마가 있는 곳으로 한 발짝 한 발짝 걸어오기 시작했음. 약간 멀찍이서 보이던 그의 얼굴엔 긴가민가한 느낌이 감돌았음. 하지만 두 사람의 거리가 차츰 가까워질수록, 타카오의 얼굴은 왠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갔음. 그걸 눈치챈 미도리마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음.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다가, 또 마음을 준 인간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서였음. 인간을 달래는 법을 모르는 미도리마로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음. 손으로 얼굴을 만져줄 수도 없음. 그렇다고 바람을 불러 일으켜 바람으로나마 그를 어루만질 수도 없었음. 겨울 바람은 인간에게 있어선 너무 차가웠으니까. 그렇게 미도리마가 홀로 고민하고 있을 때, 타카오가 다가오다가 살짝 걸음을 멈추었음. 그리고 입을 열었음. "...거기 있는 거 맞지...? 눈 때문에 잘 못 느꼈지만... 거기 있는 거지?"

타카오의 목소리에서는 울음기가 묻어나는 것 같았음. 늘 경박하다 싶을 정도로 가벼운 목소리였는데, 아까의 기도도 그렇고 지금 흘러나오고 있는 목소리도 그렇고 가슴이 절절해질 정도로 슬픈 목소리였음. 타카오는 고개를 한 번 푹 숙이더니 다시 들어올렸음. 그리고 미도리마가 있는 쪽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했음. "미안. 실은 나 보이지 않아...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확신할 수도 없어. 하지만... 그래도 그런 느낌이 드니까...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타카오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음. 그리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음.

"처음에는 말이지... 그냥 조금 공기가 다르다? 그런 느낌이었어. 그런 거 있잖아. 영험한 신사에 가면 그 영험함이 느껴지는 것 같다는 거. 개인적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야. 하지만 몇 번 더 찾아오고 나서 뭔가 알게 된 것 같은 느낌이었어. 조금 떨어진 곳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는 거. 나와는 다른데, 무섭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뭔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그런 느낌이 들었어. 게다가 그쪽은 유달리 좋은 향이 나는 것 같았으니까. 말로는 잘 표현할 수 없겠지만... 굳이 비유를 하자면 풀을 짓이긴 곳에서 나는 그런 향그러운 냄새라고 할까?"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제 말도 제대로 안 나오네. 아, 정말. 타카오는 두서없이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스스로가 답답했는지 손을 들어올려서 본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음. 그리고는 어딘가 기운이 빠진 듯한 미소를 얼굴에 걸면서 다시 미도리마 쪽을 응시했음. 일단 시작한 이야기는 마쳐야겠다고 생각을 했는지, 또 다시 두서없이 이야기 하더라도 그냥 들어만 달라고 덧붙이면서 다시 입을 열었음.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 거야. 이 곳을 들리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거의 반 장난식이었는데... 올 때마다 네가 있는 것 같으니까.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으니까. 이곳이 더할 나위 없이 편해지기 시작해버렸으니까... 가지 않으려고 해도 이젠 스스로를 말리기 힘들 정도가 되어버렸어. 장마가 시작되었을 때는 이래봬도 나도 좀 초조했다고? 몇 번이고 이곳에 오려고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으니까. 그러다가 결국엔 못 참고 우산을 든 채로 집을 뛰쳐나와 버렸던 거야.그리고 여기서 다시 너의 존재를 느꼈어. "

이 모든 말을 미도리마는 듣고만 있었음. 타카오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음.

"그리고 내가 돌아가려고 할 즈음, 빗줄기가 잦아들었을 그 때... 유일하게 널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사람의 뒷모습... 옛날 복장... 그러니까 천이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것 같은 옷을 입고 있는 키 큰 남자의 모습. 물론 아직도 확신은 못 하겠어. 그냥 내가 환영을 본 것 같기도 했거든. 간단하게 말하자면 헛것을 봤다, 정도?"

타카오의 말을 듣고 있던 미도리마는 살짝 놀라서 두 눈을 잠시 동안 크게 뜨고 있었음. 그 날은 유일하게 미도리마 자신이 먼저 타카오에게 등을 보였던 날이었으니까. 그리고 잠시 생각을 했음. 그때라면 분명 영감이 없는 사람이라도 어렴풋이나마 '신의 존재'를 느낄 수도 있었을 거라고. 미약하긴 하지만 신의 향기를 맡을 정도의 감을 가진 타카오라면 그때 자신의 모습을 잘하면 볼 수도 있었을 거라고 판단을 내렸음. 바람을 불러오는 것정도는 신력을 그리 소모하지 않음. 공기를 아주 조금 움직이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자연의 법칙에 따라 거세게 내리는 장맛비를 묶어두는 건, 바람을 불러오는 것의 몇 배에 해당하는 신력을 사용해야 했음. 강한 신인 미도리마에게는 꽤 쉬운 일이긴 했지만. 여튼 짧게 이야기 하자면, 미도리마가 비를 묶어두기 위해 힘을 사용했고, 그 때 사용한 신력이 작용하는 범위 내에선 영감이 있는 존재들이 그 힘에 반응해 감이 예민해진다 해도 어폐가 없었음. 그렇게 생각을 하니 그때 처음으로 타카오가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는 것도 이해가 갔음. 그 당시 타카오에게는 감이 전혀 없다고 생각해 먼저 등을 돌린 자신의 행동이, 처음으로 아쉽게 느껴지는 미도리마였음.

지금 미도리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타카오는, 여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었음. 그 날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지만, 이 지대는 비가 내리면 위험하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려서 장마기간에는 역시 제대로 들리지 못했다고. 그리고 장마기간이 끝났을 땐, 못 만난 분량을 다 채우겠다는 듯이 더욱 많이 찾아왔다고. 그리고 자신이 올 때마다, 아니 방문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본인이 느끼고 있던 '기운'이 더할 나위 없이 온화해지고 부드러워지고, 따뜻해져서 서서히 중독되어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고 덧붙였음. 그러다가 타카오는 본인에게 있어 난생 처음으로 참새를 만져보았던 때의 이야기를 꺼냈음.

"물론 그때도 네가 바위 근처에 있다는 것 같은 느낌은 들었어. 참새는... 참새에게는 미안하지만, 참새는 구실이었을지도 몰라.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척 하고 네게 다가갈 구실. 물론 내가 다가가면 참새는 바로 날아가 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라서 깜짝 놀랐어. 혹시 그것도 네가 도와준 거야? 아니라고 이야기 하지는 말아줘. 뭐, 나는 그 대답을 들을 수도 없지만. 물론 볼 수도 없고. 그냥 내 멋대로 그렇다고 생각해 버릴거야. 여하튼... 그때 참새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꾸며서 내 이름을 알려주려고 했어. 생각해보니까 그렇게 자주 찾아왔는데도 불구하고 내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는 것 같더라고. ... 나는 네 이름도 모르는데 참 불공평하지? 하지만 내 자기만족이니까 상관 없어."

불공평하다는 타카오의 말에, 미도리마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음. [미도리마... 미도리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타카오에게는 닿을 리가 없었음. 타카오가 가지고 있는 '열린 감각'은 아무래도 후각와 육감 정도인 것 같았으니까. 미도리마는 약간 침울해진 얼굴을 했음. 그리고 자연스레 미도리마의 어깨가 아래로 살짝 축 쳐졌음. 하지만 그런 미도리마 자신의 감정보다, 타카오의 이야기가 더욱 중요한 것 같았기에 타카오가 다시 말을 시작하는 것을 얌전히 기다리기 시작했음.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타카오는 다시 말을 꺼냈음.

"근데 말이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되었던 걸까? 내가 이름을 알려준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너... 사라졌잖아. 내가 이곳으로 찾아왔는데 네가 없었던 적... 그때까지는 없었잖아. 처음에는 그냥 엇갈린 건줄 알았어. 살다보면 가끔 엇갈리는 일도 있겠거니 싶어서, 그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 하지만 그 날이 거듭 반복되고... 공물을 바쳐도 없고, 돌탑을 벌써 여러 개 쌓아올릴 정도의 시간이 흘러도 널 느낄 수 없게 되다보니까... 그 때에야 비로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 그리움은 계속 늘어만 가는데... 이곳에 넌 없었어. 아니, 지금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단지 내가 널 느끼지 못한 것뿐일까? ... 그런 건 아무래도 좋지만. 기다림이라는 건, 그리움이라는 건 진짜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슬프고 아팠어.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좀 슬프고 아파. 이유를 물을 수도 없다는 게, 대답을 들을 수도 없다는 게 더 슬프고 아파. 그래서 오늘이 끝이라고 생각했어. 더 이상 오지 않을테니까, 너만큼은 이곳에서 편히 쉬라고. 그래서 사당의 주인인 신님에게 빌었어. 만나게 해달라고. 하지만 만날 수 없다면... 이 모든 감정을 지워달라고. 힘들어... 힘들었어..."

그런데 참 웃기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네가 있네. 타카오는 말꼬리를 흐리면서 이야기를 했음. 방금 전까지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참고 있는 목소리였다면, 지금은 완연히 울음기 어린 목소리였음. 아니, 그의 얼굴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젖어들어가고 있었으니까 그냥 우는 목소리라고 해도 좋았음. 타카오는 그렇게 한동안 눈물을 흘리고 있었음. 그리고 감정이 조금이나마 진정되었을 때, 소맷자락으로 슥슥 본인의 눈가를 닦았음. 울었던 것 때문인지, 아니면 소매로 눈가를 문질러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타카오의 양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음. 그 붉은 빛이 안타깝게 느껴져서, 미도리마는 손을 들어올려 그에게 뻗었다가 거두었다가를 반복했음. 타카오는 심호흡을 두어 번 하다가 많이 진정된 목소리로 다시 말을 꺼냈음.

"신 님이 내 소원을 들어준 걸까? 그런 줄 알았으면 공물을 바치는 거나 돌탑을 쌓는 것말고 바로 치성이나 올려볼걸. .... 오늘처럼."

미도리마가 신체에서 나온 건 오늘 일이었으니, 아마 이전에 치성을 올렸다고 해도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음. 하지만 그 일을 타카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지는 않았음. 그래서 그저 안쓰러운 눈으로, 보듬어 안아주고 싶다는 눈으로 타카오를 바라보고 있었음.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닿지 않을 사과의 말을 건넸음. [기다리게 해서 미안했단 것이다. 슬프게 해서 미안했단 것이다. 그리고... 널 사랑하는 내가, 널 아프게 해서 미안했단 것이다. 미안하다, 타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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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수고하셨습니다.]


이건 농구부 은퇴식 이후의 한 마디.


[졸업, 축하드립니다.]


이건 졸업식 이후의 한 마디.


상투적이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가 건넨 저 두 마디의 말은, 마치 가시처럼 자신의 가슴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졸업한지 2년 가까이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코끝이 시리다고 생각할 정도로 날씨가 점점 추워지기 시작하면 어렴풋이 그때의 잔상이 떠올랐다. 그리고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겨울이 지나고 졸업식 시즌을 맞이하게 되면 그 잔상은 여느 때보다 선명해졌다. 그러다 날이 서서히 풀리고 벚나무에 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면, 그 잔상은 벚꽃의 분홍빛 물결에 휩싸여 아스라이 무너져 내렸다.


벌써 2년 가까이 되었구나.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상하리만치 감상적인 어조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상은 가을 분위기에 한껏 젖어 있었다. 하늘은 높고 푸르며, 공기는 서늘하지만 상쾌하다고 느낄 정도로 가벼웠다. 나뭇잎들은 스스로를 알록달록하게 물들이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높고 푸르던 가을 하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신 하늘은 옅은 회색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공기는 날이 갈수록 차갑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선명하게 물들어 있던 잎사귀들은 점점 색이 바래가면서 땅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조금씩 변해가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새삼 겨울이 다시 돌아오고 있음을 체감했다.


생각해보니 그 때로부터 2년이 지났다고 하면, 녀석도 3학년.


그냥 그 때로부터 시간이 지났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지난 시간만큼, 자신이 나이를 먹는 만큼, 그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사실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1학년이었을 때조차도 2,3학년들 위에 군림하던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앞에서는 나이가 많고 적음은 무의미해 보였다.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그는 모두의 위에 고고하게 올라서 있는 존재였다.


잊고 지냈던 그, 아카시 세이쥬로에 대한 기억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하자 절로 조소에 가까운 웃음이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사람들을 쥐락펴락 하는 모습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리고 자신도 그 사람들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더욱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렇게 네 생각이 나는 걸 보니, 역시 겨울이 다가오고 있긴 한가보다.


풍경이 변하는 것을 보고 계절이 바뀌었음을 깨닫고,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림으로써 계절이 변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2년이라는 시간은 그리 길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짧은 것도 아니었다. 크고 작은 일들이 무수히 많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넘치는 그런 기간이었다. 자신의 경우만 해도, 대학에 입학을 했고 학교 내에서 여러 타입의 사람과 만나고 또한 스쳐 지나갔다. 평범한 일상이라면 평범한 일상이고,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변해버린 일상이라면 그런 일상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분명 기억을, 추억을 하나하나 쌓아갔을 터였다.


그러면 2년 전의 기억은 조금은 흐려질 법도 한데.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순간 입술 사이에서 하얀 김이 새어나왔다가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옛 기억이라는 것은 지금 흘러나온 입김처럼, 새로이 쌓이는 기억에 묻혀 사라져버리기 쉬운 것일 터였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기억은, 잊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 이전 해보다 더욱 선명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과연 모든 것에 승리하는 아카시. 남의 기억에서조차도 우위를 점하겠다는 것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다시 천천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의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는데, 그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는 바람에 무심코 발걸음이 느려졌었다. 그 탓에 몸이 식어가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날씨에 비해 가벼운 복장으로 나온 터라, 추위를 한 번 인지하자 더욱 춥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걸음걸이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빨리 집에 돌아가서 난방을 틀어야지. 따뜻하게 해둔 다음에 이불을 두르고 있어야지. 그러고 보니 도쿄에 상경한 이후 코타츠의 코 자도 못 본 것 같네. 교토보다는 추우니까 역시 하나 장만하는 편이 좋을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추운 것보다는 나으니까. 아, 근데 지난번에 오버클럭 시도한 후에 돈이 얼마만큼 남았더라. 설마 이번 달 생활비 간당간당한 거 아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자취하고 있는 맨션 앞에 도착했다. 주머니를 뒤져 현관 열쇠를 꺼내 들고 맨션 안으로 들어서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맨션 앞 담장 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다른 주민을 만나러 온 건가. 이곳까지 자신을 만나러 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기에, 당연히 자신의 손님은 아니겠거니 하고 생각을 하면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생각을 배신하기라도 하듯이, 그 사람은 자신을 불러 세웠다.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로.


“마유즈미 선배.”

“.....?!”


기척이 옅어서 순간 못 보고 놓칠 뻔 했습니다, 하고 그가 태연자약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지금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인물이 정말 실존하는 그인지, 아니면 순간 미쳐서 환상이 보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 있었더니, 그가 단정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 위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날씨가 많이 서늘해졌는데, 꽤나 가벼운 옷차림이네요.”

“...아...아카시...?”

“네, 아카시 세이쥬로입니다. 오랜만입니다, 마유즈미 선배.”


네가 어떻게 여기에, 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 그 말을 막았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여기서 이야기를 하기엔 선배의 복장이 너무 가볍다며,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자고. 마치 주인이 손님을 안내하는 것처럼 그가 태연하게 이야기를 하는 걸, 평소라면 시니컬한 어조로 받아칠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경황이 없었던지라, 그가 이야기를 하는 대로 그와 함께 무심코 자취방 안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생각보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방이군요. 책장에 특정 장르의 책이 유독 많은 것을 제외하면.”

“....내버려둬.”


홈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는 방 안에 들어오고 나서야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옛 후배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은 역시 당혹스러운 일이라, 다소 퉁명스러운 어조로 그의 말에 대답을 했다.


가정교육을 잘 받은 것이 분명한 후배는, 앉으라는 자신의 말이 따로 없자 움직이는데 거슬리지 않는 위치에서 단정한 자태로 서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자리에 앉으라고 이야기 하고 싶진 않았지만, 방에 들인 이상 그도 자신의 손님이었다. 반쯤은 몸에 밴 습관처럼, 그에게 아무데나 대충 앉으라고 이야기를 하곤 방의 난방 스위치를 켰다.


“왜 안 앉고 있어?”

“아. ...실례하겠습니다.”

“이제 와서 실례는 무슨. 이미 들어오자마자 방 평가 했으면서.”

“인상 깊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말은 잘 한다.”


여전히 매끄러운 화법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퉁명스럽게 대답을 했다. 방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의 맞은편에 앉으려고 몸을 숙이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초대한 적 없는 손님이라고는 해도 손님은 손님인데 차 한 잔 정도는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이.


“아, 잠시만 기다려라. 녹차라도 한 잔 가져올 테니까. 물론 비싼 품종도 아니고, 마트에서 파는 값싼 티백이야. 입맛에 안 맞아도 참아라. 있는 게 그거뿐이거든.”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침착함을 잃지 않는 그의 태도에, 괜히 칫 하고 혀를 한 번 차고는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주전자에 생수를 받아 물을 끓이면서, 찻잔 두 개를 꺼내 티백을 하나씩 넣어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다 끓자, 데워진 물을 잔에 부어 차를 우려내고 티백을 건져내 버렸다. 그 다음, 잔을 챙겨 들고 그에게로 돌아왔다.


“자.”

“감사합니다.”

“그래서... 뭐냐?”


아카시 손에 잔을 쥐어주고는, 자신의 잔을 한 손에 쥔 채로 맞은편에 앉으면서 대뜸 물었다. 아카시는 김이 폴폴 나는 녹차 잔을 한 번 내려다보고 있다가, 시선을 들어 올려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뜨거운 녹차 잔을 슬쩍 옆에 내려놓았다.


“대뜸 뭐냐고 물으시니 어떤 의도인지 파악하기가 힘들군요. 어떻게 찾아 온 거냐고 물으시는 거라면, 마유즈미 선배와 같은 곳으로 진학한 히구치 선배를 통해서 선배의 주소를 얻었습니다.”

“히구치 그 녀석...”

“히구치 선배를 탓하진 마십시오. 후배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신 것뿐이니까.”

“간절 좋아하시네.”


일순 변했나 싶었는데 여전히 시니컬하시군요, 라고 그가 덧붙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찾아온 의도를 묻는 거라면... 솔직히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마유즈미 선배를 뵙고 싶어서였습니다.”

“...!”


아직 난방이 원활하게 돌지 않아 방 안에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 녹차로 몸이라도 녹여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잔을 들어 올려 차를 한 모금 마시려던 차였다. 그러던 중 그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때문에,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차를 뱉어낼 뻔했다.


“너...너...!”

“손수건 빌려드릴까요?”


삼키려고 했지만 미처 다 삼키지 못했는지, 흘러나온 녹차가 한 줄기,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더럽다고 기겁을 할 만한 상황에도, 아카시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손수건을 빌려 주냐고 물었다. 어쩜 이 상황에서도 저렇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됐어. 괜찮아.”

“네.”

“그건 그렇고, 보고 싶... 아니 만나고 싶었다니, 그건 또 무슨 의미야?”


그는 자신을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는 것 같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뵙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 그대로의 의미도 이해가 안 간다니까? 이유가 뭔데?”

“보고 싶은 것에 대한 이유를 말하라니... 그건 저로서도 대답하기 힘든 문제입니다만.”

“...”

“그래도 답을 내어보자면, 역시 마유즈미 선배가 계속 생각나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부끄럽지만 그렇게 밖에는 설명을 못 하겠습니다, 라고 덧붙이며 그가 어느 정도 식은 것 같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말로는 부끄럽다 어쩐다 이야기를 하지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역시 속을 읽어내기가 힘들었다. 겨울이 찾아올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에 휘둘리는 것으로도 족한데, 이제는 실제 인물이 찾아와 자신을 휘둘러대니 머리가 조금 아파오는 것 같았다. 그런 자신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녹차로 가볍게 입술을 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짧은 인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짧았지만, 그래도 강렬했던 그런 인연이라고. 물론 선배의 성격상 이 연은 선배가 졸업을 하는 순간 끊어질 거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달리 집착하려고 하진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붙잡고 있는 인연은 여러모로 오래가기 힘드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을 잠시 끊고는, 본인 손에 들린 찻잔 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보이는 건 옅은 녹색의 물뿐일 텐데도, 그는 오래도록 찻잔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불현듯 선배가 생각나곤 했습니다. 은퇴식 이후에 개인적으로 따로 만났을 때의 모습. 졸업식이 끝나고 만나게 되었을 때의 모습. 그리고 졸업장을 한 손에 쥔 채 교정을 떠나던 뒷모습. ...그 모습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가 이야기 하는 것을 들으면서,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깜짝 놀랐다. 자신이 겨울이 될 때마다 떠올리고 하는 그의 잔상과 비슷한 시기의 장면이구나 싶어서. 하지만 그 생각은 속으로만 담아둔 채, 그가 이어 말하는 것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작년에 졸업하는 미부치, 네부야, 하야마를 전송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배가 제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건, 떠나는 뒷모습뿐이었구나 하는 점을. 그것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선배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제가 서 있는 곳의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뒷모습이 아니라, 저를 바라보고 있는 선배가 보고 싶었습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 너 말이야.”

“네.”

“작년에 깨달았다며. 근데 왜 1년 후에 온 건데?”


자신의 질문에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기존의 포커페이스 위로 살짝 감정을 드러냈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는 것 같은 감정이 어렴풋이, 물 위로 떠오르는 것처럼 얼굴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니까요.”

“잘 안 들려.”

“겨울이 지나고 제가 졸업을 하게 되면, 또 다시 선배와 같은 지점에 설 수 있으니까,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


그는 본인 손에 들린 잔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조심스럽게 이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 위에 가볍게 손을 겹쳐 잡더니, 살짝 흔들리는 눈으로 이쪽을 응시했다.


“제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을, 선배와의 새로운 시작으로 삼고 싶습니다.”

“...”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단지... 선배에게도 그럴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졸업식에 와주세요.”

“...”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다는 그의 말에, 이번에는 자신의 시선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 겨울을 거치며 보았던 그의 잔상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그 이미지가 반복되다가, 다시 처음 지점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자신이 그에게 수고가 많았다고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그에게 졸업 축하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서 등을 돌려 돌아가는, 2년 전 자신이 보았던 풍경이 아니라 다른 장면이 이어졌다. 이제는 얼추 시선 높이가 비슷해진 그와 마주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만개한 꽃 같지는 않지만, 부드럽게 피어나는 것 같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자신은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벚꽃이 피어났다. 끝없는 분홍빛 융단이 펼쳐진 것 같은 장관 아래서, 그가 다시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교복이 아닌, 성인의 복식을 갖춘 채로 자신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이것은 미래다. 그가 바라고 있고, 자신이 내심 바랐을지도 모르는 그런 미래.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니까 어쩔 수 없네. 갈게.”


2년 전과는 다를, 네 졸업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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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고] AU 썰 두번째 2015. 3. 17. 12:59

미도리마는 그 감정에 감화가 되었기에, 손을 뻗어서 그 돌탑을 살며시 건드렸음. 처음에는 손끝에 가볍게 닿는 정도였지만, 접촉을 통해서 감정이 더욱 많이, 빠르게 흘러들어오게 되자 이제는 손바닥을 사용해서 부드럽게 쓸어내릴 정도가 되었음. 접촉 면적이 넓어질수록 점점 더 많은 감정이 전해졌음. 그 감정과 동화가 되어가는 것인지, 미도리마의 마음에도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솟아나기 시작했음. 그리고 그리움과 더불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음. 마치 인간처럼. 토지신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음. 신에게 있어서 희노애락이라는 것은 거의 무의미한 것이나 다름 없었기에. 그저 자신만의 기준으로 벌을 내릴지 아니면 상을 내릴지 결정하는 것뿐이었음. 미도리마도 역시 그런 삶을 살아왔음. 그래서 지금 이 감정이 당혹스러우면서도 점점 더 짙게 물들어갔음. 누구를 그리워하기에 이렇게도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있느냐. 누구를 위해 이 돌탑을 쌓으며 기다림을 지속하고 있었던 것이냐. 누군지 모를 돌탑의 주인을 향해 속으로 말을 건네면서 미도리마는 연신 돌탑을 쓰다듬듯이 만졌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이 품고 있전 한 가지 기억을 읽어냈음. 돌탑을 만든 인간의 모습이 담겨 있는 기억을. 미도리마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어 그 인간의 이름을 불렀음. [타카오?]


사당 옆에 돌탑을 만든 것은 타카오였음. 돌탑을 만져서 감정을 읽어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타카오는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돌탑을 만들기 시작했었음. 하지만 탑이 점점 높아지고, 사용하는 돌이 많아질수록 그리움 또한 쌓이기 시작한 것 같았음. [어째서 네가...] 미도리마는 돌의 기억속에 자리잡은 타카오에게 말을 건네듯이 중얼거렸음. 타카오가 그리워하는 대상에 대해서 미도리마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무심결에 나온 말이었음. 자신에게 찾아와 이야기를 할 때의 타카오는, 특정 대상에게 연심을 품은 것 같아 보이지 않았음. 물론 호감을 품고 있는 대상 또한 없어 보였음. 한없이 가벼워 보였던 타카오에게도 이런 마음을 가지게 하는 존재가 있었구나. 이토록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 감정을 품게 되는 대상이 있었구나. 그 상대는 분명 같은 인간이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미도리마는, 무의식중에 가슴 부근 옷자락을 손으로 움켜쥐었음. 가슴 속이 답답해져오는 기분이었음.


타카오의 나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미도리마가 보는 타카오는 열 너댓 살 정도 되어보였음. 미도리마는 중얼거리듯이 이야기를 했음. [그 정도 나이라면 누군가를 은애할 수도 있을 법한 나이지.] 하고. 머리로는 납득을 할 수 있었지만, 감정은 그걸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음. 이 또한 아무래도 자신이 타카오라는 인물을 받아들인 탓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미도리마는 한숨을 내뱉었음. 장성한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의 감정이 이런 것인가. 아니면 친우를 떠나보내는 이의 감정이 이런 것인가. 미도리마는 여러가지 생각을 하면서 돌탑에서 떨어져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음. 그렇게 무의식중에 향한 곳은 멀리 있는 곳도 아닌, 자신이 칩거하기 전 타카오와 접촉했던 그 바위였음. [...타카오]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되뇌면서, 미도리마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는 그 바위에 걸터 앉았음. 그리고 그의 손과 자신의 손이 겹쳐졌던 그 위치에, 조심스럽게 다시 자신의 손을 얹었음. 눈이 소복히 쌓여 있었으니 냉기가 느껴질 법도 하지만, 자신에게 있어서는 이전에 그가 남기고 간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음. 신에게 온기나 한기 같은 물리적인 요소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제하고서라도.


[타카오] [타카오] [타카오] 손끝으로 그의 온기를 찾아 헤매이듯이 움직이면서 연거푸 그의 이름을 불러댔음. 하지만 다른 존재에게는, 인간에게는 미도리마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음. 그 사실이 이다지도 슬픈 것이었다는 걸 미도리마는 깨닫게 되었음.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그 현실은, 미도리마를 더할 나위 없이 슬프게 했음. 미도리마가 신체에서 나온 이래로 흐린 하늘만 펼쳐져 있었을 뿐이었음. 그러나 곧 미도리마의 감정 변화에 반응하기라도 하듯, 하늘은 눈을 떨어뜨리기 시작했음. 차가운 눈송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신을 위로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가볍게, 포근하게 에워싸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솜같은 가벼운 눈송이들이 하늘하늘 내려와 바닥에 안착했음. 미도리마가 앉은 바위 위에도, 미도리마의 신체가 모셔진 사당 위에도, 그리고 이전에 내린 눈으로 흰 융단이 펼쳐진 것 같이 변해버린 땅 위에도. 미도리마는 그렇게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음. 내리는 눈송이의 형태가 사람의 인영으로도 보이기도 하고, 내리는 눈송이의 기척이 사람의 기척으로 느껴지기도 했음. [가관이구나, 미도리마.] 미도리마는 자조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음.  


그렇게 눈 내리는 풍경을 감상하듯이 응시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사당을 향해 걸어오는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음. 하지만 미도리마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음. 그러나 그 인영에 시선을 두려 하지 않았음. 타카오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이 칩거해 있는 동안 타카오는 돌탑을 쌓으면서 마음 속의 연인을 향한 그리움을 키우고 있었을 터였음. 그렇게 신실한 마음으로 기원을 했는데, 소원을 이루어줄 신이 없는 상태였으니 소원이 이루어질 리가 없고, 그 사실에 분명 실망하고 떠났을 거였음. 아니면 신의 힘을 빌리려 하지 않고, 본인의 힘으로 연정을 쟁취하러 떠났을 거였음. 타카오라는 인간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으니까.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니 미도리마는 아직 다른 '인간'들을 보고 싶지 않아졌음. 하지만 타카오의 기척이 남아 있는 이 장소에서 떠나지 않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라, 그저 고개를 돌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음.  '인간'은 눈을 밟으며 사당쪽으로 걸어왔음. 그리고 사당 앞에 무언가를 내려놓곤 무릎을 꿇고 앉는 듯 했음. 그런 기척이, 그런 소리가 미도리마에게 전해졌음. "...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이름 모를 신 님." 보지 않으려 했던 '인간'에게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미도리마가 그렇게도 듣고 싶어하던 목소리와 닮아 있었음. 아니, 완전히 일치했음.


듣고 싶었던 그 목소리에, 미도리마는 아직 다른 인간을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도 있고 시선을 사당쪽으로 돌리고 말았음. 내리는 눈송이에 모습이 살짝 살짝 가리긴 했지만, 틀림 없는 그였음. 평소의 가벼운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 합장을 하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음. 장난기 어린 것처럼 보이는 눈동자는, 살짝 내려 감긴 눈꺼풀 안에 감춰져 있었음. 
-만나고 싶어요.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지만.
-그저 '여기 있다'는 사실 밖에는 모르지만.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요.
-다시 한 번, 여기 있다는 걸 느끼고 싶어요.
사당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것은, 신에게 닿는 유일한 방법. 신의 눈이 인간을 지켜보고, 신의 귀가 소리를 듣고 있고, 신의 입술이 열려있다면, 신은 간절히 비는 소원을 듣고 그에 응하는 답을 내려줄 터. 칩거 상태의 미도리마는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입을 다물고 있는 상태여서 몰랐지만, 지금은 달랐음. 지금의 미도리마에게는, 타카오가 비는 소원이 하나도 빠짐 없이 전달되고 있었음. 만나고 싶다는 감정. 이름 모를 대상을 향한 그리움. 그 모든 것이.


미도리마가 그리워하던 그가 저곳에 있었음. 바위에 남은 희미한 온기의 기척이 아니라, 더욱 따뜻한 체온을 가진 실체가 저곳에 있었음. 미도리마는 금방이라도 타카오에게 달려가 그를 감싸 안고 싶었음. 그 감정은 가련한 피조물을 위로하는 신의 마음이 아니었음. 잘 표현은 할 수 없지만, 그건 아마도 연심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했음. 누가 본다면 이 세상에서 제일 신분 차이가 날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도 있는 그런 감정이었음. 하지만 미도리마는 바위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음. 그 와중에도 타카오의 기도는 계속 미도리마에게로 흘러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랑이 아닐지도 몰라요.
-하지만 사랑일 수도 있어요.
-남들이 알면 미쳤다고 이야기 하겠지만...
-신 님, 제발 한 번 만이라도...
-아니면, 이 마음을 멈추게 해주세요.
"... 지워주세요."
마지막 기원은 울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토해내졌음. 하지만 타카오는 울지 않았음. 마지막 말을 꺼낸 다음, 눈꺼풀을 들어 올리더니 사당을 물끄러미 응시했음.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눈을 가볍게 털어내고는, 돌아가려는 듯이 몸을 돌렸음. 떠나는 건가. 그런 소원만을 남기고 떠나는 건가. 미도리마는 그제서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음. 떠나는 그를 이대로는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음. 달리 무언가를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도리마의 목소리는 인간에게 닿지 않았음. 그리고 미도리마가 인간과 접촉한다고 해도, 인간이 그걸 눈치 챌 거란 법도 없었음. 어떻게 하면 타카오를 돌려 세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타카오가 이쪽을 보게 만들 수 있을까. 미도리마는 그 짧은 시간에 무수히 많은 생각을 했음. 그리고 한 가지를 떠올렸음. 미도리마는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음. 그리고 그간 타카오가 공들여서 세운 돌탑을, 신의 힘을 사용해서 무너뜨렸음. 와르르, 하고 탑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음. 돌들이 데구르르 굴러가는 소리도 들렸음.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걸어가고 있던 타카오에게도 돌탑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는지 다시금 이쪽을 돌아보았음. 정확히는 사당 쪽을 바라본 것이겠지만, 미도리마는 그가 이쪽을 다시 본 것만으로도 좋았음. 그가 공들여 쌓았던 탑을 무너뜨리는 것은 분명 해서는 안 되는 행동에 가까웠지만, 미도리마는 한편으론 속 시원한 기분이 들기도 했음. 그의 지고지순한 기다림을 무너뜨려서,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으니까. 그래, 이건 질투일지도 몰랐다. 타카오가 기다리고 있는 상대에 대한 깊은 질투심. 타카오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탑이 무너진 것을 바라보고 있었음. 그러다가 살짝 시선을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두 눈을 크게 떴음. "......어?" 미도리마는 타카오의 시선이 바로 자신에게 꽂혔다고 느꼈음. 그럴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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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 리퀘2 연성 2015. 3. 15. 01:02

청화 테이코 흑화미네 + 타교생 카가미


승리를 하고 난 후에야 맛볼 수 있던 극상의 기쁨. 그것을 느끼지 못한 게 벌써 얼마나 되었는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이 원래 자신의 양 손 안에 있었던 것처럼. 마치 날 때부터 한 몸이었던 것 마냥. 그래서인지 승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이 점점 떨어져갔다. 분명히 이기고 나서 미소를 지었던 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덤덤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번도 미소를 지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과거의 기억이 왜곡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도 지는 것보다는 낫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맞붙는 이들의 얼굴이 패색으로 얼룩지고, 그 얼굴에 포기라는 단어가 떠올랐을 때 깨달았다. 이건 아니다, 라고. 자신의 능력과는 별개로, 타인이 포기해버린 승부를 반쯤 어부지리로 쟁취하는 것은 더럽기 짝이 없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원하지 않은 선물을 억지로 떠안겨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을 완벽하게 막아 세울 수는 없더라도, 자신을 묶어두는 것이 비록 버겁다 하더라도, 끈질기게 맞서 싸워주길 바랐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투쟁심이라는 것을, 호승심이라는 것을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신의 바람을 백지로 되돌려버렸다. 시합포기라는 형태로 말이다.


“...”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간 더운 숨결이, 하얀 김이 되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숨을 한 번 들이켰다. 폐부를 얼려버릴 것 같은 시린 공기가, 몸 안을 가득 메웠다. 몸도 마음도 얼어가기 시작했다.


“지루해.”


휘적휘적 움직이고 있는 다리에 누군가가 납을 매달아 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걸을 때마다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손목 또한 무겁기 짝이 없었다.


“따분해.”


머리 안쪽에서 쾅쾅 울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분명 직시하고 있을 터인 시야가 빙그르르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싫다. 정말.”


생각하는 것도, 몸을 움직이는 것도 싫어져 버렸다. 지독하리만치 깊은 권태로움을 뱉어내면서, 발걸음을 강둑 쪽으로 옮겨버렸다. 강둑 가장자리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살얼음이 낀 강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 강은 여느 때보다 고독하고 쓸쓸해 보이는구나, 하고 무심코 생각해버렸다.


얼핏 보면 단단해 보이는 얼어버린 강. 하지만 발을 잘못 디딘다면, 얄팍하게 얼어 있는 얼음이 파스스 부서져 내릴 터였다. 그리고 부서져 버린 얼음 틈으로 발이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강 밑바닥으로 잠기게 될 것이다. 차가운 물에 먼저 닿아버린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위로, 위로 냉기가 침투하면서 온 몸이 굳어갈 것이다.


그리고 최후엔 꽁꽁 얼어버린 채로, 어두운 강 밑바닥에서 몸을 뉘인 채 잠들어 버리겠지. 아무도 구해줄 수 없는 곳에서. 영원히.


“핫, 나도 미쳐가나 보네.”


기분이 더욱 가라앉는 것 같아서, 괜히 짧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만약 그때, 근처에 앉아 있던 누군가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대로 집에 돌아갔을 것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얼굴에, 자신이 이따금 짓곤 했던 표정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말을 건네게 되었다.


“야. 정말 좋아했던 게, 갑자기 지루하고 따분해지면 어떨 것 같냐?”


자신의 물음에, 강을 응시하고 있던 그의 시선이 움직였다. 차갑게 식은 듯 했지만, 아주 희미하게 열기를 품고 있는 것 같은 눈동자가 이쪽을 주시했다.


“그 지루함이랑 따분함이 도를 지나칠 정도라 만사가 귀찮아질 정도면 어떨 것 같냐?”


이어 질문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하. 세상 참 편하게 사는구만.”

“그게 뭐가 잘못 됐는데.”


자신의 말이 거슬렸는지, 그가 다소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건 조금 슬플 것 같네.”

“...뭐?”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 감정이 변해버리다니. 분명 뭔가 본인에게 있어서 큰 변화가 있었던 거겠지 싶어서.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말이지.”


잘은 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어, 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으로 툭툭 본인의 옷을 털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으나,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자신과 비슷한 신장의 소유자라는 것을. 그것에 아주 조금 호기심이 동했다. 그래서 그가 자리를 뜨기 전에 서둘러 말을 건넸다.


“야, 너 어디 다니냐?”

“... 교복을 보아하니 너네 학교는 아니겠네.”


그는 힐끔, 자신의 교복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어딘가 애매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이 무언가를 더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발걸음을 돌려 어딘가로 떠나가 버렸다.


*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고등학교 1학년 여름. 인터하이 경기장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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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 : 센티넬버스 AU

키워드 : 두 손을 등 뒤로, 얼음 호수, 빠져 나갈 수 없는 미로


[싫어!] [안 가!] [못 가!] [∎∎∎!!]


거칠지만 아직은 앳된 티가 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것은 환청에 가까운 것으로, 자신만이 듣는 목소리라는 것을 카가미는 알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예전부터 들렸던 것으로, 불현듯 찾아와 머릿속을 잠식해가곤 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통증을 수반했다.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라, 카가미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카가미 씨, 괜찮습니까?”


운전석에 앉아 운전을 하고 있던 사람이, 백미러 너머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카가미는 두통으로 인해 흐릿해지는 눈의 초점을 다 잡으면서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안 좋은 꿈이라도 꾼 모양이군요.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꿈이라고 해야 할지... 예전 기억에 가까운 거였습니다.”


이런 자신의 말에, 운전을 하고 있던 사람이 무심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카가미 씨는 기억상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하고. 그러나 그 본인도 말실수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황급히 입을 다물곤 시선을 돌려 정면을 주시했다. 카가미는 그 모습을 백미러에 반사된 이미지를 통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그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불의의 사고로 인해 과거의 기억 대부분을 잃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의 단절, 그리고 남겨진 추억의 소멸을 뜻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기억해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아무 것도 떠올리지 못한 채 입원해 있던 중, 한 단체에 소속된 사람이 접촉해왔다. 그리고 짤막하게 대화를 나눈 뒤, 이내 그 단체 소속 병원으로 자신을 호송해갔다.


타의로 이동하게 된 병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센티넬. 가이드. 이전에는 없던 케이스. 개화된 힘. 아마 그 이야기들은 자신이 멀쩡한 상태였다고 해도 이해하기 힘들었을 거라고,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카가미는 무심코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의 자신은 의지할 곳이 달리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이 될지도 모르는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들은 자신의 재활 훈련을 도와줄 뿐만 아니라 과거 기억을 일깨우는 것에도 신경을 써주었다.

그것이 가이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데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


차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가로등들이 잔상을 남기며 뒤로 흘러 지나갔다. 카가미는 그것을 응시하고 있다가 이내 눈을 다시 감아버렸다.


이렇게 눈을 감고 있으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과거를 일깨울 때 가장 먼저 되찾은 기억이었다. 그리고 자신만 들을 수 있는 그 목소리와도 관련된 것이었다.


이미 과거와 한 번 단절되었기 때문에, 그 기억 속의 자신이 카가미 자신이라는 강한 확신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 때의 감정만큼은 자신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자신은 어린 소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어린 소년은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두 셋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끌려가기 시작했다. 소년은 거칠게 저항했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간신히 한 팔을 뻗었다. 손을 잡아달라고, 구해달라고 외치는 듯한 얼굴로. 하지만 자신은 그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그에게 양 손을 뻗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두 손을 등 뒤로 숨길 뿐이었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이별, 발치에 떨어지는 것은 눈물이었다.


떨어지는 눈물이 발치에 고이기 시작했다. 고인 눈물은 이내 호수가 되었고, 호수는 시린 이별로 인해 꽁꽁 얼어붙었다. 그 얼음 호수 위에서 ‘카가미’는 발이 묶인 것처럼 멈추어 서 있었다. 흐려져만 가는 소년의 자취를 더듬으면서.


[미안해.]


과거의 왜곡된 기억을 따라 읊조리듯이, 카가미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리고 이내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려 현실로 돌아왔다.


“카가미 씨, 곧 도착하니까 내릴 준비 하십시오.”

“...네.”


그 말을 주고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탄 차는 한 저택의 출입구 안으로 미끄러지듯이 진입했다. 사회적 고위층이 살고 있을 거라고 해도 믿을 법한 번지르르한 저택을, 차 안에서 스쳐지나가듯 감상했다. 하지만 번듯한 외견과는 달리...


“공기는 험악하군.”

“역시 느껴지시는 겁니까? 확실히 가이드는 다른가봅니다.”


준비된 공간에 차를 주차하면서 그가 이야기를 했다. 이곳에는 좀처럼 통제하기 힘든 센티넬이 살고 있다고. 통제하기 힘든 만큼, 능력 하나는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센티넬이. 그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통상 능력의 가이드 네 다섯 명이 붙어야 하지만, 카가미 씨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거란 사족 또한 덧붙였다.


자신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그의 말에, 카가미는 작게 조소를 흘렸다. 가이드로서의 능력은 둘째 치고 자신은 각성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사람에게 통제 불능의 센티넬을 붙이려고 하다니. 그 센티넬이 얼마나 골칫덩이였으면 이렇게 떠넘기려 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생각했다. 이용당해도 별 수 없지, 하고. 어찌 되었든 재활 치료를 도와주고, 기억을 되찾아주려 노력한 보답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마중 겸 저택 안내역을 맡은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오자, 그를 따라서 저택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점점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공기를 통해서 누군가의 감정을 감지했다.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 처절함만큼은, 자신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소년의 목소리와도 같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곧 사라져 버렸다. 안내역을 맡은 사람이 어느 문 앞에 서서, 그 문을 열어젖힌 순간에.


“....!!”


방 안에 있던 한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소파 위에 나른하게 드러누워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무언가에 깜짝 놀란 것처럼, 상체는 반쯤 일으켜 세우고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카가미는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저 남자가 센티넬이구나, 하고. 그리고 처절하게 울부짖는 것 같은 감정을 발산하고 있었던 사람이 저 남자구나, 하고. 그리고 또한 시선이 마주친 순간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기억 상실이라는 빠져 나갈 수 없는 미로에 갇혀버린 자신에게 있어서, 저 남자는 미궁을 빠져나갈 하나의 단서이자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거란 사실을. 왠지 모르게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앞으로 네 전속 가이드가 될 카가미다. ...잘 부탁한다.”


>

센티넬 아오미네 + 가이드 카가미. 

카가미는 사고 후 기억상실, 그리고 후에 가이드 능력 각성.

[∎∎∎!!] 는 아오미네가 카가미를 '타이가' 라고 부른다는 그런.. 거... ㅇ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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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고] AU 썰 2015. 3. 10. 20:23
평범한 중학생 타카오와 그 지역 토지신 미도리마가 보고 싶다. 토지신 미도리마 능력이 아주 짱짱해서 정말 무리인 소원 아니면 완벽하게 들어줄 수 있는데, 문제는 그 조건이 너무 까다로움. 어떤 소원은 진인사를 다하지 않았다고 퇴짜 놓고, 어떤 소원은 본인의 도덕적 기준에서 어긋났다고 퇴짜놓고, 어떤 소원은 공물로 오시루코 주지 않았다고 퇴짜놓음. 하지만 정말 순수하고 열성을 다한 소원은 들어줌. 그래서 연령대 높고 신실한 마음을 갖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층에선 유명.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손들에게도 전해지는 쪽인데, 어린층으로 올수록 그런 신실한 마음이 사라져서 '저거 구라 아냐?'하는 소리를 듣게 됨. 믿음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자 미도리마의 사당에 찾아오는 사람이 줄게 되고, 미도리마는 차츰 외로워지기 시작함. 하지만 그 외로움을 표현하진 않음. 미도리마는 토지신이니까 다른 인외적 존재에게도 경외의 대상임. 아무도 함부로 쉬이 다가갈 수 없음. 그렇게 혼자만의 삶을 보내게 됨. 그러다가 사당 근처를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타카오가 잠시 멈춰섬. 그리 고 꾸며진 미도리마의 사당을 요모조모 뜯어보기 시작함. 당시 미도리마는 사당 근처를 산책하던 중이었음. 그러다가 자신의 사당에 관심을 갖는 어리석은 인간을 발견하게 됨.

저 어리석은 인간이 내 사당에 손을 대는 것인가, 하고 미도리마는 생각했음. 하지만 곧 신경을 끄기로 마음 먹었음. 사당을 망치거나 하면 신벌을 내리면 그만이라고 생각을 했으니까. 어차피 인간은 미도리마 에게 있어건 자신이 내리는 신벌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워 하는 약한 존재일뿐이었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음. 하지만 인간에게서 흘러나온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게 되었음. "왓, 먼지 완전 대박. 여기 사람이 오는 사당이긴 한 거야? .... 분위기 자체는 꽤 괜찮은데.." 사람이 안 오는 것 같은 점 빼면 스산한 점도 없고, 꽤 멋지게 꾸며지기도 했고.. 하면서 인간은 혼잣말을 연거푸 내뱉고 있었음. 미도리마는 가만히 서서 그 소리를 잠자코 듣고만 있었음. 스스로 먼지를 치울 수는 없어 냅두고 있었지만, 솔직히 자신이 깃들 수 있는 곳을 멋지다고 해주는 말은 기분 나쁘지 않았음.

그러나 미도리마의 태도는 '저 인간이 얼마나 더 떠드나 보자'라는 것에 가까웠음. 언제 질릴까 하는 생각이기도 했고. 인간은 사당 요모조모를 세심히 살펴보면서 혼잣말로 이런저런 평가를 했음. 대체적으론 좋은 평이었지만 간간히 '촌스러~'라고 해서 미도리마를 자극하기도 했음. 물론 인간은 토지신인 미도리마가 그 자리에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음. 인간은 인외적인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영감은 눈꼽만치도 없어보였음. 미도리마는 시간낭비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준 인간에게 좁쌀만한 호기심이 생겼음. 그렇게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데, 인간이 갑자기 숨을 길게 내쉬더니 양 팔을 걷어붙였음. "기분이다. 먼지 정도만 청소해보고 가볼까~" 잘은 모르지만 신이 있다고 믿어지는 장소인데 먼지가 그득하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며, 인간은 스포츠백 속에서 수건을 꺼내들었음.그리고 사당 근처에 있는 작은 우물에서 물을 퍼올려 수건을 적셨음. 그런 다음 수건을 꼭 짜서 사당으로 다시 돌아왔음. 이후로 슥슥 닦기 시작하는 인간의 모습을 미도리마는 빠짐 없이 보고 있었음.

수건 한 장으로 사당을 다 닦는 건 무리였는지, 인간은 몇 번이고 우물로 향해 수건을 빨고 다시 돌아오는 걸 반복했음. 웬만한 먼지가 다 사라졌을 즈음에야 인간은 수건을 잠시 내려놓곤 기지개를 쭉 켰음. 그리고 혼잣말을 했음. "아, 체육관 청소도 하고 왔는데 사당 청소까지 하다니. 어디까지 청소 좋아하는 거야, 나." 하고. 물론 그 다음에 좋아한다는 건 장난이지만☆하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음. 깨끗해진 사당을 보는 건 오랜만인 미도리마는 기분이 살짝 좋아졌음.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인 듯 했음. 인간은 만족감에 가득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사당을 한 번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자전거를 세워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음. 솔직히 지금의 미도리마라면, 인간이 소원 하나를 빌고간다면 들어줄 마음이 가득했음. 좀 경박해보이는 인간이었지만 그래도 청소를 해준 대가로 들어줄 수는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인간은 청소를 끝낸 것만으로도 만족했다는 듯이 훌쩍 떠나버렸음. 미도리마는 다시 홀로 남겨졌음.

이번 인간이 떠난 이후로 미도리마는 또 한동안 인간을 볼 기회가 없겠구나 싶었음. 하지만 미도리마의 예상은 빗나갔음.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 인간이 다시 치링치링 자전거 차임을 울리면서 사당으로 찾아왔기 때문에. 참 신기한게, 미도리마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영역에 포함되는 토지를 멀리, 오래 산책하곤 라는데, 그 인간은 미도리마가 사당 근처에 도착했을 때 꼭 들르곤 했음. 처음 한 두 번은 우연이겠거니 싶었는데 거의 매번 그러자 놀라울 정도였음. 여하튼 인간이 와서 하는 건 별 거 없었음. 사당에 먼지가 좀 앉았다 싶으면 전처럼 수건으로 닦아줄 뿐, 기본적으론 혼자 수다를 떨다 갈 뿐이었음. 미도리마는 자신이 있다고는 하지만 인간이 느끼기엔 혼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데 어쩜 저리 말이 많을까 싶었음. 순간 요즘 인간들은 다 저런 건가 하는 편견이 생길 것 같았음. 오늘도 인간은 주구장창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음에 또 올게.'하는 누구에게 남긴 건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치링치링 소리를 울리면서 떠났음.

매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꽤 자주 방문해주는 인간의 존재때문인지는 몰라도, 미도리마는 하루 하루가 꽤 즐거워졌음. 물론 스스로는 절대 즐거운 게 아니라며, 저런 경박한 인간의 말을 듣는 건 고역이란 것이다, 하고 스스로를 속이려고 하고 있었지만. 무료함에 젖어있던 일상에서 벗어나게 되자, 미도리마의 힘이 닿는 토지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음. 이전에는 그냥 그곳에 있을 뿐인 자연이라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좀 더 충만한 느낌이 가득해졌음. 초목을 이루는 잎사귀들은 좀 더 싱그러워졌고, 땅 위에 흐르고 또 땅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들은 좀 더 청량해져갔음. 공기 또한 이전보다 더욱 맑아져갔음. 토지신이란 그 존재 자체가 토지에 영향을 미치곤 했음. 즉 미도리마는 인정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경박한 인간'이라고 칭한 존재에게 꽤 관심을 두게 된 건 확실했음. 게다가 인간이 사당에 놀러와서, "이야, 여기는 날이 갈수록 공기가 맑아지는 것 같은데. 기분 좋다."하고 이야기라도 하게 되면 그 다음 날은 여느 때보다 날씨가 쾌청해지곤 했음.

인간이 주기적으로 방문한 것도 계절이 조금 흘러서 여름이 되었음. 인간의 의복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반팔을 입은 건 또 처음 보는 것 같아서, 미도리마는 내심 신기해했음. 그리고 자신이 입은 옷을 내려다보았음. 길게 치렁치렁 늘어진 의복이었음. 하지만 미도리마는 더위에도 추위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별 생각이 없었음. 인간을 만나기 전까지는. 하지만 인간이 반팔을 입고 오자, 슬쩍 자신의 소맷자락을 걷어올려 보았음. 의복 위에 감추어져 있던 자신의 하얀 피부가 겉으로 드러났음. 그걸 본 후에야 지금 자신이 경박하게 속살을 드러내 보인 건가 하고 충격을 받아 얼른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음. 인간이 이런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다 싶었음. 인간은 사당 앞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아 손으로 부채질을 했음. "아, 덥다... 여긴 그래도 다른 곳보단 시원하긴 하지만... 그래도 바람이 없으니 덥네." 여전히 가벼운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에서 약간 지친 기색이 묻어나는 것 같았음. 그걸 듣고 미도리마는 한 손을 가볍게 들어올렸음. 한 줄기 바람이 부드럽게 인간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음. 소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도리마는 인간의 바람을 들어주었음. 공물을 바치고, 인사를 다해 치성을 올린 것도 아닌데 미도리마는 바람을 불러왔음. 이것이 미도리마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변화인지 인간은 죽어도 모를 거였음.

미도리마의 힘으로 바람이 불고 지나가자 인간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음. 그리고 다시 입술사이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도 활력이 생긴 것 같았음. "아, 살 것 같다. 완전 기분 좋다."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인간이 활짝 미소를 지었음. 그 모습을 보게 된 미도리마는 다시 한 번 바람을 불게 해주려고 마음먹었음. 그래서 손을 들어올리는데, 인간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혼잣말을 했음. 바람은 이쯤하면 됐으니 슬슬 돌아가봐야지~하고. 그리곤 언제나처럼 다음에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훌쩍 돌아가버렸음. 돌아가버리는 인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미도리마는 무심코 손을 뻗을 뻔 했음. 하지만 미도리마의 손이 인간에게 닿을 리가 없었고, 인간이 미도리마의 기척을 눈치챌리가 없었음. 난생 처음으로 인간에게 손을 뻗고자 한 미도리마의 행동은 아무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흘러가버리고 말았음. 그때 미도리마는 아쉬움이라는 감정을 배운 것 같았음.

초여름이 지날 즈음이 되자 장마 기간이 찾아들었음. 이전의 미도리마라면 비가 내릴 땐 자연스럽게 주변 청소가 되어서 좋아했을 터인데, 이번만큼은 장마가 달갑지 않았음. 그 이유는 당연히 인간이 찾아오기 힘들어져서였음. 벌써 인간이 이곳에 들리지 못한 지도 이레가 지나고 있었음. 분명 장마가 오기 전, 인간이 장마 기간이 되면 아마 들르기 힘들 것 같다고 이야기를 흘리듯이 했지만 이레라는 시간이 흐를 정도일줄은 몰랐음. 이까짓 비가 뭐라고, 하고 미도리마는 혼잣말을 흘렸음. 기분이 점차 가라앉는 것 같았음. 그러자 미도리마의 주변에 있던 초목들에게도 변화가 나타났음. 이파리나 줄기 등에서 생기가 점점 사라지고 풀죽은 것 같은 느낌이 되었음. 미도리마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혀를 가볍게 차고는 자신의 토지를 둘러보러 산책을 나가려고 했음. 사당에 붙어 있어봤자 '그'를 만날 수 있을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푸른 녹색 우산을 쓴 누군가가 사당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음. 우산에 가려져 있었지만 미도리마는 바로 알 수 있었음. 그였어.

"나 왔어. 와, 엄청 오랜만에 온 것 같다." 여전히 가벼운 어조로 그가 이야기를 했어. 미도리마는 산책을 나가려고 했던 걸음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음. 무슨 말이라도 그에게 하고 싶었어. 왜 이제 온 것이냐. 인간이란 비가 오면 밖에 나오기 힘든 것이냐. 아니면 비를 싫어하는 것이냐. 그럼 나에게 소원을 빌거라. 비록 자연의 섭리를 위반할 수는 없지만, 네가 오는 날이만이라도 맑게 해주겠다. 라고. 하지만 미도리마의 말이 그에게 닿을리가 없었음. 그래서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응시하고만 있었음. 그는 평소라면 사당 앞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겠지만, 지금은 온통 비에 젖어 있어서 미처 앉진 못하고 어정쩡하게 쭈그리고 앉아 있었음. 우산을 쓰고 있는 그는 젖은 사당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손을 뻗어 손끝으로 가볍게 빗방울을 떨궈내었음. "비가 오니까 먼지도 안 앉겠는걸. 이야, 청소 안 해도 된다. 비도 좋은 점이 다 있네." 여전히 그는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혼잣말을 했음. 혼잣말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미도리마는 대답했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미도리마의 말은 그에게는 닿지 않았음.

둘 사이에는 침묵이 내려 앉았음. 들리는 것은 내리는 빗소리 뿐이었음.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빗소리만 듣고 있었겠지, 하고 미도리마는 생각했음. 그 사실에 미도리마는 씁쓸함이라는 감정을 배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음. 미도리마는 하늘을 한 번 바라보았음. 이대로 둔다면 빗줄기가 더 거세어질 조짐이었음. 비가 거세어지면 그가 돌아가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음. 그리고 일순 돌아가기 힘들어지면 그가 이곳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음. 하지만 미도리마는 고개를 내저었음.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우산 하나 가지고 버텨내기엔, 인간은 너무 약한 존재였음. 그러니 최대한 그를 돌려보내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음. 미도리마는 숨을 한 번 짧게 내쉬고는 다시 한 번 손을 들어올렸음. 그를 위해서 바람을 불러왔을 때처럼. 그러자 짙게 먹구름이 껴 있던 하늘이 조금씩 조금씩 색이 옅어지기 시작했음. 빗줄기도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음. 그의 얼굴을 거의 다 가리고 있던 우산이 살짝 들리는가 싶더니, 우산 밑으로 그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음. 그의 시선은 하늘로 고정되어 있었지만, 미도리마는 그걸로도 만족했음. [비는 잠시동안 묶어둘테니 그 사이에 돌아가라는 것이다.] 미도리마는 그에게 닿지 않을 게 분명한데도 말을 건넸음. 그리고 먼저 자리를 떠났음.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던 타카오가 시선을 내려, 그가 걸어가고 있는 쪽을 잠깐 바라본 걸 눈치채지 못했음.

장마기간 동안은 역시 그를 보기 힘들었음. 하지만 장마가 끝나고 한여름이 되자, 그는 그간 못 온 걸 만회하겠다는 듯이 더욱 자주 오기 시작했음. 많을 땐 하루에 두 번 이상 들릴 때도 있었음. 그러다가 하루는 그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사당 쪽으로 걸어왔음. 미도리마는 사당 근처에 놓인 바위 위에 걸터 앉아 그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음. 그러다가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보게 되었음. [공물인가?] 미도리마는 이제 버릇처럼 말을 건넸음. 그의 목소리는 바로 돌아오지 않았음. 그래도 미도리마는 평소처럼 그가 주절주절 떠들어 대는 걸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음. 아니나 다를까, 그는 손에 들린 걸 사당 앞에 슬쩍 내려 놓더니 자리를 잡고 앉아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음. "그러고 보니 이런 걸 들고 오는 건 처음인 것 같네. 이게 뭔지 알아? 오시루코라는 건데 말이지, 캔에 담긴 것도 있더라고. 이런 걸 누가 먹어? 라고 막 웃음을 터트릴 뻔 하다가 이걸 주신 할머니께 등짝 맞을 뻔 했다니까. 실은 내가 여기 자주 간다는 걸 알고, 동네에 연세 많은 할머니가 공양 올리라고 준 거야. 그 할머니 거동이 불편하시니까 할머니 대신 내가~라고나 할까." 그치만 역시 사당에 오는 거면 나도 공양을 꾸준히 올리는 편이 좋았을까, 하고 그는 말을 마치곤 웃었음. 미도리마는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음. [공양은 아무래도 좋으니, 그 경박한 웃음부터 어떻게 해보라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일방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고, 한쪽에서는 쌍방 대화가 이루어지는 미묘한 풍경이 자아내졌음. 미도리마는 그걸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걸 포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걸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음.

분명 자신의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않을 거였음. 자신의 모습 또한 그에겐 보이지 않을 거였음. 그래도 미도리마는 지금의 관계를 포기할수가 없었음. 토지신으로서 매우 긴 세월을 보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애착이 가는 인간이 생긴 것은 처음이었음. 한숨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음. 이 애착이라는 감정은, 자신에게 있어서 다양한 감정을 연이어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고 미도리마는 생각했음. 그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질 즈음, 사당 주변을 날아다니던 참새 두 마리가 미도리마가 앉은 바위에 자리를 잡았음. 그리곤 그 참새 두 마리는 작은 머리를 들어올려 미도리마를 바라보다가,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미도리마의 손가락 끝에 머리를 부볐음. 미도리마는 그 참새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음. 그때, 그가 미도리마 쪽으로 고개를 돌렸음. 그리고 몸을 일으키더니 미도리마가 있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어오기 시작했음. 미도리마는 순간 움찔했음. 감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참새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는 그거였음. 자신을 보고 다가온 게 아니라, 참새를 보고 다가온 거였음. 그 한 마디에 미도리마는 복잡한 심경이 되었음. 자신을 봐주길 바랐으면서도 못 봐서 다행이다 싶은 그런 마음이 뒤섞였음. 그가 다가왔다고는 하나 자신이 먼저 자리를 피하는 것도 신으로서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것 같아서, 미도리마는 꿋꿋히 그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음. 그는 바위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미도리마 손끝에 머리를 부비고 있는 참새를 가만히 바라보았음. "보통은 사람을 보면 도망가기 바쁘던데, 너희는 도망가지도 않네. 신기하다." 참새가 도망가지 않는 이유는 별 거 없었음. 미도리마 앞이었기 때문이었음. 그 지역을 지키는 토지신 아래, 모든 만물은 평등했음. 토지의, 토지신의 은혜를 받은 생명체라는 점에서. 비유해서 말하자면 참새라는 개체와 인간이라는 개체는 상성이 좋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버지 격에 해당하는 토지신 아래에서는 그냥 사이 나쁜 형제와도 같은 거였음. 그러니 미도리마 앞에서는 참새도 인간을 피할 이유가 없었던 거임. 미도리마가 자리잡은 곳은 일종의 성역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이런 걸 알리가 없는 그는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음. "자, 착하지." 그는 참새를 만지고 싶다는 듯이 바위 위에 손을 가만히 얹었음. 그의 시각에서는 분명 그랬을 거임. 하지만 미도리마의 시각에서는 달랐음. 그의 손은 바위가 아니라 미도리마의 손등 위에 얹어져 있었음. 체온이라는 것이 존재할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도리마는 자신의 손이 뜨거워지는 것 같다고 생각해버렸음.

자기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참새는 조금 고민을 하는 것 같았음. 그러다가 그 작은 머리를 들어올려 미도리마를 바라보았음. 미도리마는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느낌을 받으면서도, 참새에게는 가볍게 눈짓을 했음.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라고. 토지신이 그렇게 의지를 전달하자, 참새는 그걸 얌전히 따랐음. 그의 손끝에 가볍게 올라타서, 미도리마에게 했던 것처럼 머리를 슥슥 부비적거리기 시작했음. 그 행동을 본 그의 얼굴에서는 밝은 미소가 떠올랐음. 언제나 히죽히죽 웃는 얼굴에 가까웠지만 이런 미소는 또 처음 보는 것 같다고 미도리마는 무심코 생각해버렸음. 그러다 그가 다시 말을 꺼내자 미도리마는 침을 한 번 삼키고 그를 주시했음. "있지, 내 이름은 타카오야. 타카오 카즈나리. 이름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타카(매)인데 이렇게 친근하게 굴어도 되는 거야? 응? 천적이라구?" 그는 마치 사당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참새에게도 마치 사람 대하듯이 말을 걸고 있었음. 그 사실을 깨달은 미도리마는 약간 씁쓸해지면서도,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는 조금 들뜨고 말았음. 그의 이름은 타카오, 타카오 카즈나리. [타카오.] 미도리마의 입술 사이에서, 난생 처음으로 인간의 이름이 흘러나왔음.

그 날 하루는 어떻게 흘렀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음. 얼마 지나지 않아 참새가 날아가 버리고, 그가 그 모습을 보며 아쉬워하면서 손을 거두어 들이고, 자신은 그가 손을 거두어 들인 것에 아쉬워 했다는 것만 기억이 났음. 시간이 흐를 수록 미도리마는 타카오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되었다는 걸 깨닫게 되고, 또 그걸 인정하게 되었음. 하지만 그건 쉬운 과정이 아니었음. 미도리마는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에서만큼은 만물의 아버지라 불려도 좋은 존재였음. 그런 존재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은 큰 파장을 불러올 수도 있었음. 모든 것에서 중립이어야 할 존재에게 한 가지 기준이 생겨버린 거나 다름 없으니까. 그래서 미도리마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사당에 모셔진 자신의 신체神体에 들어가 한동안 칩거했음. 외부와는 차단된 곳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을 가다듬기 시작했음. 그 안에서 타카오에 대해서 특별하다고 인정하고,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지금까지 해온 토지신으로서의 역할은 성실히 수행할 것을 스스로와 약속했음. 특정 존재에게 편향된 애정을 주는 것은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후자 같은 경우는 당연한 걸지도 몰랐음. 그렇게 칩거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계절이 바뀌어 있었음. 신체에 들어갔던 건 여름이었는데, 나와보니 세상은 온통 눈으로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음.

예전이라면 계절이 몇 번 바뀐 것 같은 정도는 그리 신경쓰지 않았을 거였음. 그만큼 오랜 시간을 살아오기도 했고, 별 다른 일이 없는 이상 그 이상의 시간을 살아갈 미도리마였기 때문이었음. 하지만 지금의 미도리마는 이전과는 달랐음. 혼자서 그렇게 물 흘러가듯 시간을 흘려보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유난히 짧은 생을 사는 인간, 타카오에게 마음을 준 상태였기 때문이었음. 미도리마 본인에 비하면 눈 깜빡할 순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이었기에, 조금은 초조해지기 시작했음. 설마 자신의 칩거 기간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길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타카오가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마지막 생각에 미치게 되자 미도리마는 온 몸이 차갑게 식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음. 인간이 말하는 '피가 식는다'라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싶었음. 불안함이 점점 커져가기 시작했음.

타카오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미도리마는 무의식적으로 타카오를 찾아가려고 했음. 뭣하면 토지신으로서의 능력까지 사용할 참이었음. 그렇게 사당을 떠나려고 몸을 돌렸을 때, 미도리마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음. 언제 놔둔 건지 알 수 없는 몇 개의 오시루코 캔. 그리고 그 근처에 만들어져 있는 네 다섯 개의 돌탑. 미도리마는 자기도 모르게 그 돌탑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음. 그리 크기가 큰 것은 아니었기에 금방 만들려고 하면 충분히 금방 만들 수 있는 돌탑이었지만, 미도리마는 쉽게 만든 돌탑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가 있었음. 돌탑에 사용된 작은 돌 하나 하나에, 탑을 만든 이의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음. 맨 밑에 깔려 있는 돌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감정이었음. 이렇게 돌탑을 쌓아보면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묻어나기도 했음. 하지만 점점 탑의 상층부로 향할 수록, 탑을 만든 이의 그리움이 묻어났음. 보고싶다고 몇 번이고 중얼거리는 것 같은 마음이 묻어났음. 소원을 이루어주는 신으로서의 미도리마 또한, 그 마음에 감화될 것만 같을 정도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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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하는 것은 약을 챙겨 먹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새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몸으로 태어난 것을 기리는 의식과도 비슷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히무로에게 있어서는 아니었다. 더할 나위 없이 번거롭기 짝이 없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통칭 히트 사이클이라고 하는 그 때가 올 때를 대비해, 주변에 무분별하게 향을 흘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약. 그 약을 입 안에 털어 넣고, 히무로는 빈 유리잔에 물을 한 가득 따랐다. 그리고 물을 반절 이상 들이켜 약을 단번에 삼켜버렸다. 일상생활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챙겨 먹는 것이라고는 하나, 매번 약의 개수며 복용 횟수를 신경 써야 하는 건 귀찮기 짝이 없었다. 어쩌다 자신은 이런 몸으로 태어나게 된 것일까. 그렇게 고민했던 것도 히무로에게 있어서는 반쯤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약을 먹지 않으면 몸이 나른해지니까.


나른해지다, 라는 표현은 조금 틀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추상적으로나마 몸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선 그 단어가 제일인 것 같았다. 약을 복용하지 않고 있다 보면, 예의 그 때가 다가오기 시작할 즈음 몸이 녹진하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허리를 곧추세우는 것조차 힘들어지고, 손의 악력을 비롯해 근육을 사용하는 것이 버거워졌다.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그런 애매모호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자신을 자극하는 향기를 맡게 되면, 일순 전신을 자극하는 것 같은 강렬한 감각에 절로 자리에 주저앉게 되었다.


자기 자신의 몸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 운동선수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이던가. 자칫 향을 맡게 되어서 주저앉게 되고, 그 때문에 시합에 영향을 주게 된다면... 생각만으로도 진절머리가 나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있어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히무로의 프라이드는, 외부 요소로 인해 자신의 루틴이 망가지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위기는 언제나 예상치 못할 때 찾아오곤 했다. 히무로의 오메가 형질은 통상적인 오메가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래서 미국에 있었을 때부터 개인 형질에 맞추어 제작한 약을 수시로 먹고 있었다. 하지만 요 근래 특정 알파의 페로몬에 견디기 위해서 평상시보다 많은 양의 약을 먹어댄 탓인지는 몰라도,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약을 소비하고 말았다.


낭패다, 하고 히무로는 입술을 짓이기듯이 깨물었다. 새 약이 도착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더 걸릴 터였다. 시중에 유통되는 오메가 약을 사다가 먹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 약으로도 충분했을 거면 예전부터 복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페로몬을 견뎌가며 생활을 하자니 왠지 모르게 무서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늘 한 명의 알파와 붙어 지내고 있었으니까. 약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페로몬을 견딜 수 있었던 거지, 만약 지금처럼 약이 없다면...


분명 그에게 달려들고 말거야.


눈이 풀린 채로, 색욕의 노예가 되어서 그에게 달라붙겠지. 본능이 이끄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여타 사람들은 말하지만, 히무로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도, 이해하기도 싫은 생각이었다. 그 사람 자체에 대한 감정보다 육체적인 욕망이 앞서 상대를 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이었다. 하지만 그런 냉정한 생각과는 반대로 서서히 몸은 녹아내려가기 시작했다. 시작은 손끝의 감각이 둔해지는 것부터였다. 그리고 그 감각은 서서히 팔을 타고 올라와 전신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종국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려서,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 앉아버렸다.


입술 사이에서 뜨거운 숨결이 흘러나갔다. 입 안에선 단내가 도는 것 같았다. 이성은 점점 흐릿해지고 자신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갈구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체온. 달콤한 애무. 그리고 자손을 남길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씨를.


실낱같이 남아 있는 이성은 그런 본능을 거부했다. 하지만 본능은 재차 이성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꼭 저 세 가지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그저 알파만이 자신에게 선사해줄 수 있는 그 아릿하고도 흥분되는 감각만을 달라고. 그것만으로도 자기는 괜찮다며 이성을 어르고 달래듯이 꾀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이성은 본능에 파묻혀 버렸다. 그와 동시에 히무로도 살며시 눈을 내리 감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무로칭, 왜 오늘은 나 데리러 안 왔구? ...어라?”


무로칭,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거야? 라고 묻는 그의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하지만 자신의 귀에는 멀리서 웅웅대는 소리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히무로는 감았던 눈을 뜨고, 어딘가 몽롱해 보이는 시선으로 무라사키바라를 응시했다.


“아...츠시....”

“볼이 좀 빨간 것 같은데. 어디 아파?”


큰 키의 소유자인 그는 주저앉아 있는 자신을 살피기가 번거로웠는지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리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자신과 시선을 마주했다. 히무로는 자신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면서 상태를 확인하는 무라사키바라를 응시했다.


좋은 냄새가 난다. 아니,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온 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그런 냄새가 난다. 손발이 저릿저릿하다. 온 몸의 근육이 이완되었다가도 다시 흥분해서 수축하기 시작한다. 머릿속이 핑글핑글 돈다. 체온이 점점 더 상승하기 시작한다. 이제 생각하기도 힘들어. 저 사람을 안고 싶어. 저 사람에게 안기고 싶어. 단지 그뿐이야.


“아츠시... 안아줘...”


안아달라는 히무로의 말에, 무라사키바라는 예의 나른한 표정을 지우고 슬쩍 옅은 당혹감을 드러냈다. 어떤 의도로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히무로로서는 그것에 대해 자세히 풀어 설명할 이성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열에 들뜬 숨을 연거푸 토해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무라사키바라는, 히무로의 별칭을 한 번 되뇌듯이 부르고는 양 팔로 그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커다랗고 두툼한 손으로, 다소 서툴지만 상냥하게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기도 하고 토닥여주기도 했다.


내가 바라는 건 이게 아니야. 히무로의 머릿속에서 본능이 외쳤다.

내가 원하는 것은 좀 더 깊은 교감. 좀 더 진한 쾌감. 본능이 이어 외쳤다.


“Atsushi."

"...응?“

“I mean, I want to sleep with you."


말을 마친 후, 히무로는 가까이에 있는 그의 목덜미를 살며시 깨물었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깨문 부위를 가볍게 핥아 올렸다. 평소에는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진성 알파의 짙고 짙은 페로몬이 자신을 휘감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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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에 드리워진 블라인드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부드러운 햇살. 보송보송한 감촉의 이불. 이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나른하게만 느껴지는 주말의 아침이었다. 가능하다면 좀 더 잠을 청하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허전한 느낌을 받은 무라사키바라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눈을 떠보니 품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분명히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품 안엔 같이 잠을 청하던 이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무로칭?

입을 열어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잠에서 막 깨어난 탓인지 몰라도, 입술 사이에서는 목소리가 아닌 살짝 거친 바람소리 같은 게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것이 불만이라는 듯이, 무라사키바라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리곤 다소 거칠게 베개에 고개를 파묻곤 부비적거렸다. 그렇게 아무 의미도 없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을 즈음, 침실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점점 가까워지는 인기척과 함께, 나지막한 허밍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서 들리기 시작하던 허밍은 이내 곧 잦아들었다. 그 대신 침대 한 쪽이 꺼지는 것 같은 느낌이 전해졌다. 침대 가장자리에 누군가가 걸터앉은 것처럼.

“아츠시, 일어났어?”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 위에 살짝 안착하는 것을 느꼈다. 무라사키바라는 베개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슬쩍 돌려, 그 손길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샤워를 하고 나온 것인지 촉촉하게 젖어있는 머리카락이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옅은 샤워 코롱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서서히 깨어나는 감각 하나 하나로 상대를 인지한 다음에야 비로소 무라사키바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무로칭.”
“좋은 아침이야, 아츠시.”

사귀기 전부터 불러왔던 별칭으로 무라사키바라가 그를 부르자, 히무로는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좋은 아침이라고 이야기를 하며, 습관처럼 고개를 숙여 무라사키바라의 이마 위에 가볍게 키스를 남겼다. 살며시 눈을 감았다 뜨며 그 키스를 얌전히 받아들이던 무라사키바라가 다시금 운을 뗐다.

“무로칭, 어디 가?”
“아, 응. 저번에 이야기 안 했던가?”

타이가 만나러 갈거야, 하고 히무로는 말을 끝맺었다. 그리고 잠시 무라사키바라를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거두어 들였다. 마저 밖에 나갈 준비를 마쳐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처럼 보였다. 무라사키바라는 그런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손을 뻗어서 그의 손목을 가볍게 잡은 뒤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불시에 끌어당겨진 탓에 히무로의 몸이 기우뚱했다. 누운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를 취한 채로 그는 슬쩍 당혹감을 표했다.

“아츠시?”

서로의 눈에 서로의 모습이 비칠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 이상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무라사키바라는 히무로의 손목을 잡아당긴 이유를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저 빤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침묵이 다소 불편해질 즈음, 히무로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여간, 아츠시도 참.”

갑작스럽게 이런 행동을 하는 건 좀 자제해줬으면 좋겠어, 하고 히무로가 가볍게 타박을 하듯이 말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붙잡힌 손목을 슬쩍 비틀어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무라사키바라는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이, 좀 더 강하게 손목을 잡고 있었다.

무엇이 그의 심사를 뒤틀리게 한 것일까. 히무로는 속으로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보아도 딱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물론 막 깨어났을 때의 무라사키바라는 대개 저기압이긴 했지만, 이렇게 묵묵부답으로 자신에게 투정을 부린 적은 드문 편에 속했다. 일단은 달래는 편이 좋을까. 히무로는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그에게 붙잡히지 않은 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뭐 때문에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만 놓아주겠어?”

슬슬 나갈 준비를 하지 않으면, 하고 덧붙였다. 무라사키바라는 그 마지막 말에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타츠야. 가지마.”

연신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던 히무로의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 지금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걸까. 히무로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한지 모른 채, 입술만을 달싹이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사귀어왔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이렇게 이름을 불러준 것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무로칭’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어미를 붙인 별칭으로 히무로를 불러왔기 때문에. 그 때문에 지금 불린 실제 이름이 더할 나위 없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낯선 감각은 곧 거센 심장박동을 불러일으켰다. 쿵쿵, 하고 가슴 속이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어... 그러니까...”
“가지마, 타츠야. 아니면 나랑 같이 가.”

히무로가 그 답지 않게 당황하는 기색을 겉으로 드러내자, 무라사키바라는 슬쩍 입 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그리고 쐐기를 박는 것처럼 다시 한 번 그를 타츠야, 라고 부르면서 특유의 칭얼대는 듯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나도 금방 씻고 나올 테니까 먼저 나가지 말구.”

확답을 얻어내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던 무라사키바라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하품을 크게 한 번 하더니, 곧 욕실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히무로는 그렇게 침실에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아직도 거세게 뛰는 심장은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복잡한 심경이 담긴 영어 욕설을 가볍게 내뱉곤, 히무로는 그대로 침대 위에 엎어졌다. 그 와중에도 방심했다는 말과, 심장에 좋지 않다는 말을 반복해댔다.

>

모처에서 받은 리퀘.
느닷없이 이름으로 불려서 부끄러워 하는 히무로... 라는 시츄에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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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꾸어진 정원에서 피어난 꽃. 그런 꽃과도 닮았던 자신의 어머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꽃처럼 교태로운 미소를 짓고, 수면 위에 드리우는 달처럼 거울 속에 비치는 본인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매무새를 다듬고 또 다듬었던 어머니. 어린 시절에는 그래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까 싶어서, 단장을 하는 어머니 뒤에 서서 하염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차츰 나이를 먹어가면서 깨달았다. 저것은 한낱 꽃일뿐이라고. 자신의 아버지라는 태양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아름다움이라는 싹을 틔워나가는 한 떨기 연약한 꽃일뿐이라는 것을.

그걸 완전히 인지한 순간, 남자를 기다리는 여인이라는 존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겹게 느껴졌다.

*

어머니의 존재로 인해 이성에 대해서 환멸을 갖게 된 이후로, 유키오는 좀처럼 이성을 편하게 대할 수 없었다. 말 한 마디 건네는 것조차, 얼굴 표정을 다스리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것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을 것 같아서, 스스로도 완치되는 것을 반쯤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후궁 정원으로 산책을 나왔는데 왠지 소란스러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무슨 일이지.

유키오는 그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호기심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그것에 대해서 신경을 끄기로 마음 먹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키오는 이 넓디 넓은 궁 내에서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몇 번째인지 손에 꼽을 수도 없는 후궁의 소생. 권력 구도에서 밀려난 황자. 언제 내쳐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운명. 그랬기 때문에 언제나 숨을 죽이고 살아가고 있었기에, 시끌벅적한 분위기라는 것은 좀처럼 느껴본 적이 없었다. 무엇이 기쁘다고 즐겁게 지내겠는가. 무엇이 행복하다고 웃으며 지내겠는가. 웃었다고 목숨이 달아날 수도 있었고, 행복해 보인다고 정실 태생의 형제에게 있어서 눈엣가시가 될 수도 있는 게 유키오의 현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닫고 지내는 게 신상에 좋았다.

그래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신경을 끄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 소란스러움이 서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유키오는 그 분위기에 휩쓸리기 전에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정원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쪽을 주시했다. 그리고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듯이 어렴풋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에 띄어버리고 만 것인가.

유키오는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그리고 힐끔, 그 사람들에게로 한 번 시선을 돌렸다. 무리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여자들이었다. 게다가 이성이라는 것 이상으로 유키오 자신이 불편하게 여기는 이복 누나라는 존재들이었다. 무시하고 정원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까. 아니, 그렇게 한다면 분명 비난의 화살이 고스란히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에게 돌아올 터였다. 비록 어머니에게 환멸을 느꼈다고는 하나, 어머니를 그런 상황에 처하게 만드는 것은 아들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로 있는 것뿐이었다. 이 행동은 유키오 자신의 자존심을 스스로 꺾어버리는 것일지는 모르나, 지금의 조용한 삶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들이 자신에게 말을 건네질 않길 바라면서, 최대한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기 전까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생각했던 인기척들이 서서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사박사박 하고 천 스치는 소리와 함께, 흙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딛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릴 정도가 되자 등 뒤로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손 끝에 닿은 옷자락을 자신도 모르게 꾹 움켜쥐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유키오 아닙니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높은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 뻔 했다. 하지만 간신히 참아내고는 좀 더 고개를 아래로 숙여, 지금 인사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 겉으로 좀 더 드러내었다.

지금 유키오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사람은 정비의 첫째 딸이었다. 황위 계승권은 없으나, 적자라는 이유 하나로 황제의 귀여움을 사고 있는 여자였다. 남자로 태어났으나 계승권도 아비의 사랑도 받아본 적이 없는 자신과는 천지차이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성격에서 또한, 유키오 자신과 사뭇 달랐다. 좋게 말하면 고고한 성격, 나쁘게 말하면 거만한 성격이었다.

"이 내가 말하는데 인사는 그것으로 끝인 겁니까?"

이전이라면 분명 천출의 태생이라 그 모양이니 뭐니 하는 소리가 돌아왔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좀 다른 것 같아서 아주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것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은 채,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움직여 다시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황녀님께 유키오가 인사 올립니다. 평안하셨는지요."

불편함을 이겨내도 육성으로 다시 인사를 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무시뿐이었다. 이런 여자였다. 직접적으로 모욕을 주기 힘들 땐, 인사 등을 빌미로 모멸감을 안겨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떻게 자신이 마주치게 되는 여자들은 다 이런 걸까, 하고 자조적인 생각을 하면서 유키오는 고개를 살짝 들어올렸다. 그러나 시선만은 그들과 마주치지 않게 바닥에 꽂은 채였다.

"신, 키세 료타. 제국의 황자님께 인사 올립니다. 평안하셨는지요."

귓가에서 윙윙대고 울리는 여자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어딘가 청량감이 느껴지는 것 같은 시원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 자신이 했던 같은 인삿말에, 유키오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들어올리고 말았다.

금빛. 제일 먼저 인식한 것은 태양빛을 받아 한결 더 빛나고 있는 화려한 금발이었다. 그 다음으로 인식한 것은 금발만큼이나 화려한 이목구비였다. 꽤 잘생긴 상판이구나, 하고 생각할 무렵 그의 얼굴 위에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 미소가 걸려 있는 걸 보게 되었다. 그리고 유키오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사람은 정중한 척 하고 있지만 속으로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점을 말이다.

"공 덕분에...."
"키세 공, 이제 그만 이 정원에서 나가 다른 곳을 거닐도록 하죠. 보고 싶지 않은 풍경을 보았더니 눈이 많이 피로해진 것 같습니다."

그의 인사를 받아 말을 되돌려 주려고 하자, 떼 지어 있는 이복 누이들 중 하나가 끼어들었다. 유키오는 자신의 목소리가 허공으로 스러지는 것이 왠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아무런 불평도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다시 시선을 땅에 꽂았다.

"저하께서 그러시다면야,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편이 낫겠군요."

그는 그를 에워싼 여자들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곧 그들 무리를 이끌고 다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키오는 떠나가는 그들 무리를 응시하고 있다가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그가 떠나기 직전 자신을 한 번 돌아보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표정에서 또 한 가지 말을 읽어낼 수 있었다. 마치 질투하고 있냐고 묻고 있는 듯 했다. 자신감을 넘어선, 오만함에 가까운 그 미소가 뇌리에 박혀 사라지질 않았다.

가슴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흔들리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질투인가. 유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이 감정이 질투라면, 자신은 그를 질투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곁을 차지하고 있는 누이들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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