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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21 [황립] Ringwechsel 키워드 : 카페
- 2015.02.14 [자빙] Valentine day
- 2015.01.24 [니오유시니오] 키워드 : 포커페이스
- 2015.01.21 [자목] 키워드 : 젓가락질
- 2015.01.20 [금꽃] 키워드 : 꽃집
- 2015.01.17 [황립] 천성의 약함 키워드: 거짓말
- 2015.01.17 [황립] In the Library For. 로니
- 2015.01.10 [황립] 작은 꽃 한 송이 AU.나루토
- 2015.01.03 [황립] In a dream
- 2015.01.02 [라쿠잔] 쿠로코의 농구 전력 60분 키워드 : 새해
글
딸랑.
문을 살며시 밀어 열자, 문에 걸려있던 풍경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문에 풍경이 걸려있었던 것은 손님이 오고감을 알리기 위함이었는지, 풍경소리가 울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 직원의 부드러운 인사말이 바람처럼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서 오세요, 하고 울린 그 목소리에 가볍게 목례로 대답을 하고는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는 내부에 약간은 만족감이 묻어나는 숨을 작게 내쉬고는, 햇볕이 은은하게 드리우는 창가에 가까이 놓여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4인용 테이블과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4개의 의자. 이곳에 자리를 잡고 앉을 사람은 자신과 그 뿐이건만 자신과 그는 언제나 4인용 테이블을 선호하곤 했다. 딱히 이유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저 좀 더 넓은 자리를 선호해서였을지도 몰랐다. 자신이야 둘째쳐도 그의 키는 동년배 평균을 훌쩍 넘는 정도였으니까. 훤칠한 키의 소유자인, 자신의 애인을 떠올리면서 무의식적으로 옅은 미소를 입술에 걸었다.
이곳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그가 만나고 싶어졌다. 맞은편에 앉아서 상냥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그를 계속, 계속 바라보고 싶었다.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이 마음은 이미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인 것 같았다. 미소인지 조소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을 잠시 흘리고 있는데, 자신이 앉은 자리에 어렴풋이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했다.
“...아.”
“오늘도 ‘그 분’을 기다리시나보네요.”
“...네.”
목소리만큼이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낯익은 인상을 하고 있는 카페 직원이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그 친절함에 보답을 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했지만, 자신의 오래된 고질병은 쉬이 낫질 않아서 그나마 안면이 있는 직원에게조차도 단답식의 대답을 토해내고 말았다. 이 고질병은 언제야 낫는 걸까 싶어서 가벼운 자괴감에 젖어있는데, 직원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연신 말을 건넸다.
“원래는 손님께 함부로 말을 건네면 안 되지만, 두 분은 오랫동안 이곳에 방문해주시기도 해서 뭐랄까, 멋대로 친근감이 들어버려서요.”
“그렇습니까.”
“네. 물론 저만 그런 것은 아니고요. 다른 아르바이트생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
“오늘도 저 두 사람이 왔구나, 하고. 그리고 다음 주에도 또 방문해주실까, 하고.”
다음 주에도 또 방문해주실까 하고 생각했다는 직원의 말에 살짝 움찔했다. 자신이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되면서부터 그와의 스케줄이 잘 맞질 않았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주말 중 하루 정도는 꼭 서로에게 할애하기로 약속 아닌 약속을 나누었었다. 그리고 데이트를 하다 이 카페를 발견하게 된 이후론 언제나 다가오는 토요일마다 이곳에서 서로를 기다리고 만나는 것을 반복하는 암묵적인 룰이 생겼다. 그게 몇 번이고, 몇 십 번이고 반복되었으니 눈앞의 직원이 자신들을 일방적으로 친근하게 여기는 것도 있을 법 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분은 한 주도 빠짐없이 만나고 계시니까, 보고 있는 저희가 다 기분이 좋은 거예요.”
“...네.”
보는 본인들이 더 기분이 좋다는 직원의 말에는 조금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설마하니 그와 자신의 사이를 눈치 챈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자신의 입으로 그와의 관계를 생판 모르는 타인에게 털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만약 들키게 되면 그 관계를 부정하는 말을 꺼낼 생각은 없었다. 부정한다는 것은 그와 자신의 사이가 떳떳치 못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기에. 하지만 예상치 못한 아웃팅에 혹시나 그에게 피해가 갈까 싶어서 조금은 불안한 듯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테이블 밑에 숨기고 있던 양 손에 땀이 차는 것 같았다.
“그런 거 있잖아요? 사이좋은 친구 사이를 보면 흐뭇한 거. 게다가 두 분 다 훤칠하고 잘생겨서 분위기가 살거든요.”
“그...그렇습니까.”
“어머, 제 입이 주책이라... 죄송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주문은 ‘그 분’이 오시면 받겠다고 서둘러 본인의 자리를 돌아가는 직원을 잠시 동안 응시를 하고 있었다.
아웃팅은 아닌 건가.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알아차렸지만 일부러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입에서 확정을 짓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는 것 자체에서 안도감을 느끼면서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모를 아웃팅에 대한 불안감과 초조함이 서서히 가라앉아가자 다시 그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불안감과 초조함을 겪고 나니 그의 얼굴이 새삼 다시 보고 싶어졌다. 상냥하지만 어딘가 얼빠진 것 같기도 하고, 냉정한 얼굴을 할 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를 보게 되면 좀 더 진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뭐, 이걸 솔직하게 알려줄 생각은 없지만.”
테이블 위에 팔을 얹고 손 위에 턱을 가볍게 괴고는 중얼거렸다. 자신은 언제나 그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사그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커지는 것을 애써 숨기고 있었다. 그를 이렇게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어 오는 것을 숨기고 또 숨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보다, 자신이 그를 좋아하는 감정이 더 크다고 해서 졌다고 생각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은 애초에 버린 지 오래였다. 한창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 그를 만나고 그와 연애를 시작했던 그 초기 시점에서부터. 안정기에 접어든 지금에는 밀고 당기는 그런 파워 게임을 할 필요를 전혀 못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해질 수 없는 건 역시...
“우쭐해하는 모습이 보기 싫은 걸지도.”
언제 보아도 잘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여느 때보다 기가 살아서 우쭐해 있는 얼굴을 보면 본능적으로 한 대 때리고 싶단 생각이 들기 때문에 애초에 그 싹을 잘라버리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조차도 다 부질없고 쓸데없는 게 아닌가 싶어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딸랑.
다시 한 번 문에서 풍경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이어 직원이 손님을 맞이하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은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것 같더니, 이곳에 시선을 두게 된 순간 성큼성큼 이곳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약간은 흐릿하게만 보이던 실루엣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선명해지면서 총천연색으로 물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늦어서 미안해요... 컨펌이 늦어지는 바람에...”
“괜찮아. 바로 여기로 온 것 같으니까 봐줄게.”
촬영을 마치고 바로 온 것인지 그의 옷차림새는 여느 때보다 멋졌다. 평소에는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있던 머리카락도 왁스를 발라 가볍게 옆으로 넘겼고, 입술에도 무언가를 발랐는지 평소보다 살짝 광택이 돌고 촉촉해보였다. 그리고 은은하고 부드러운 향이 그에게서 감돌고 있었다. 색으로 따지면 옅은 아이보리색 같은 그런 따뜻하고 밝게 느껴지는 그런 향이.
“오늘 멋지네.”
“전 언제나 멋짐다!”
칭찬을 한 번 해주니 금세 기어오르듯이 우쭐하는 모양새의 그를 바라보며 못된 말을 한 번 던지려고 했다. 하지만 피식 웃어버리곤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도 자신이 그를 괴롭히는 말을 꺼낼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자신이 웃으며 시선을 잠시 돌려버리자 슬쩍 당황하면서 평소와는 다르다며 어디 아픈 것 아니냐는 말을 해댔다. 그래서 그 말에는 평소와 같은 반응을 해주었다.
“기어오르지 마라, 료타.”
“...넵.”
자신의 말 한 마디에 기죽은 강아지처럼 대답을 하는 그의 모습에, 창밖으로 돌렸던 시선을 다시 그에게로 고정시키고는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런 다음 손을 들어 직원을 부른 뒤, 그와 자신이 마실 음료를 한 잔 씩 시킨 다음 돌려보내고는 다시 둘만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료타.”
“네?”
“너, 이 카페 이름 뭔지 알고 있냐?”
“그럼요. 몇 년이나 다닌 곳인 걸요. Ringwechsel이잖슴까.”
“그럼 그 의미는 아냐?”
자신의 마지막 물음에는 그가 우물쭈물하더니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리곤 영어라면 그나마 알 수 있었을 텐데 영어가 아닌 것 같아서 도통 모르겠다고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말에 ‘너, 영어도 잘하는 편은 아니잖아.’ 하고 가볍게 툭 내뱉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내가 너에게 줄 것과 관련된 거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의미를 알아두도록 해.”
“...어디 나라 말인지는 알려주면 안 됨까?”
“싫은데. 스스로 알아서 찾아보도록. 남들에게 물어보는 것도 금지야.”
“그럼 인터넷은...?”
“인터넷도 금지. 어학 사전을 직접 뒤져보도록 해. 뭐, 제대로 나올진 모르겠지만.”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서, 너무하다고 투정을 부리는 그를 바라보면서 조금은 성격 나빠 보이는 미소를 연신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 잠시 생각했다. 역시 ‘그건’ 자신이 그에게 주는 쪽이 타당하다고. 왜냐고 묻는다면,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카페의 이름에 대해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직원이 음료를 가져다주자 그것들을 받아 들어, 하나는 그의 앞에 놓고 하나는 자신의 앞에 두었다. 딸려 나온 티스푼으로 자신의 컵 안을 가볍게 휘저은 다음에 티스푼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잔을 들어 올려 음료로 입술을 축였다. 고민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 때문인지, 아니면 좀 전의 해프닝으로 인해 입 안이 말랐던 것이 음료 덕분에 괜찮아진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절로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프로포즈는 나의 권리이자 의무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좀 더 고민해보도록 해, 료타.’
* Ringwechsel : n. (결혼식에서의) 반지 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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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인가의 go out. 남들과는 좀처럼 하지 않는 살가운 스킨십. 이 두 가지만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 하더라도, 미국에서는 충분히 사귀고 있는 사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리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절반 이상을 미국에서 살았던 자신으로서는 그러한 암묵적인 룰이 당연하게만 느껴졌기에, 자신은 그와 자신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연인 사이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며칠 전 그가 흘러가는 듯한 어조로 내뱉은 한 마디의 말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달에 발렌타인 데이가 있다던데. 초콜릿 받으면 그거 다 나 줘.]
물론 그가 달콤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비단 달콤한 것에 국한되는 건 아니었지만. 여하튼 그에게 초콜릿을 주면 기뻐할 것이란 점은 지금까지 겪었던 일을 통해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충격을 받은 부분은 그가 꺼낸 말의 이면에 있었다. 자신이 초콜릿을 받는 것은 그렇다 쳐도 그 사실에 아주 조금도 질투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 바로 그것이었다.
실은 그와 자신이 사귀고 있는 사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즈음부터, 자신에게 고백을 해오는 여자아이들을 부드럽게, 그러나 이전보다 더욱 단호하게 끊어내고 있었다. 이전에는 단지 농구에 전념하고 싶다고, 누군가를 사귈 여력이 없다는 말을 돌려서 이야기를 했던 거라면, 최근 들어서는 연인이 있으니 네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는 식의 대답을 했다.
가끔은 자신의 연인이 누구인지 물어오는 여자아이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반적이지 않은’ 관계라고 정의를 내릴 거란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연인, 무라사키바라 아츠시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자신은 커밍아웃을 해도 상관없었지만 어디까지나 그에게 피해가 돌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래서일까. 자신이 누군가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는지, 여자아이들은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흘리지 않았고 자신은 고백하는 여자아이들을 계속 마주하게 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했는데.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2월이 되면서 나날이 늘어가는 고백과 은근한 시선들에 조금은 지쳐있을 찰나, 질투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 그의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리고 충격을 받은 것에 이어, 설마 그는 자신을 연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설마, 아니겠지. 하루에도 몇 번이고 그런 생각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가 ‘초콜릿을 받으면 달라’는 그 말을 꺼낸 이후로 그를 유심히 지켜보아도 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변함없이 나른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과자를 우물거리고, 귀찮아 보이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연습에는 충실히 참여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일순 권태기인 것일까, 하고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에게 평소와 비슷한 정도의 관심을 주고 있었으니까. 권태기였다면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라도 변화가 있었겠지만 그의 행동은 변한 게 없었다. 그래서 깨닫게 되었다. 그에게 변한 부분이 한 군데도 없다면, 그건 자신이 애초에 착각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그것을 깨닫게 되자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걸 두고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한다고 하던가, 하고 생각하며 조소를 흘렸다.
*
“히무로 선배, 이... 이거 받아주세요.”
“미안하지만 난...”
“사귀는 분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어요. 하지만 제 마음만큼은 전해드리고 싶어서...”
2월 14일 당일,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 상자를 건네는 여자아이를 마주하게 되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거절을 하려고 했지만 여자아이는 본인의 마음만큼은 전하고 싶다며, 조금은 억지를 부리며 초콜릿을 떠넘기려고 했다. 그것에 내심 당혹스러워 하다가도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표정을 잠시 지으며 그 선물을 받아들였다.
“고마워.”
여자아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은 ‘미안해’가 아니라 ‘고마워’라는 말일 것 같았다. 그래서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여자아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한 채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발걸음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해버렸다.
눈물이 고여 있는 그 눈을 보고 있자, 자신이 못할 짓을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며칠 전까지는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달랐으니까. 사귀고 있다는 것은 자신만의 착각이었기 때문에, 거절을 할 때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거짓말과도 같이 느껴져 마음이 불편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여자아이가 사라진 곳을 잠시 동안 응시하고 있다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예비종이 울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자 슬슬 교실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
초콜릿을 전달하는 것은 처음 만났던 그 여자아이가 끝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초콜릿을 건넨 여자아이의 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어느새 소문을 탄 것인지, 쉬는 시간을 포함해서 몇 번이고 밖으로 불려나가 초콜릿 상자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책상 위를 포함해서 자신의 자리로 지정된 곳에 자신이 직접 받지 못한 여러 개의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클래스메이트들은 부럽다며, 본인들도 이렇게 받아보면 여한이 없겠다며 반쯤은 놀리는 듯한 어조로 이야기를 했지만 자신으로서는 난감할 따름이었다. 지금까지 받은 양만 하더라도 기숙사까지 쉬이 나를 수 있는 양이 아니라, 결국 비품실에서 커다란 종이 가방을 구해 와서 그 안에 받은 초콜릿들을 담기 시작했다.
“이정도 양이라면 확실히 혼자 처리하기는 힘들겠네.”
자조어린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어, 초콜릿을 가져다 달라는 그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애초에 착각을 한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을 질책하는 기분으로 초콜릿이 가득 담긴 종이가방을 들고 기숙사로 향했다.
짐이 많아서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간신히 기숙사에 도착해 열쇠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발치에 짐을 내려놓고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자신의 것은 아닌 게 분명한데 어딘가 낯익은 신발 한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발 사이즈보다 더 큰 신발을 신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신발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츠시?”
신발 주인의 이름을 부르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자신의 침대 쪽에 거대한 무언가가 늘어져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종이가방을 다시 들어 침대 머리맡 쪽에 내려놓은 다음, 그 거대한 사람을 향해 다시 말을 건넸다
“또 멋대로 들어온 거야? 그건 실례라고 몇 번이나 말했... 아, 자고 있네.”
그는 가끔가다 멋대로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와 과자를 먹는다거나 낮잠을 자고 가는 경향이 있었다. 현재는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자신으로선 아무리 연인사이여도 프라이버시는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과거에도 그가 이렇게 멋대로 방에 침입할 때면 따끔하게 한 마디를 해두곤 했다. 물론 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지만. 오늘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한 마디를 하려고 했지만, 이미 낮잠에 깊게 빠져든 것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에 결국 말을 끝맺지 못했다.
침대에 대자로 누워 잠들어 있는 그를, 침대 가장자리에 살며시 걸터앉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보아하니 어디선가 과자를 먹고 왔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곧,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착각이 떠오르면서 차츰 표정이 흐려졌다.
착각 속에 빠져서 홀로 키워왔던 애정이 갈 곳을 잃게 되자 스스로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의 자는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을수록 머릿속에서 쿵쿵 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귀에서는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고, 심장이 거칠게 뛰며 난동을 부리는 것 같았다. 일순 숨을 쉬기가 힘든 것 같아서 오른손으로 목에 매인 넥타이를 풀어 내렸다.
자신이 기억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갑갑해서 풀어 내린 넥타이는 한데 모은 그의 양 손목에 묶여있었고, 자신은 그의 복부 위에 가볍게 올라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드러누운 그의 옆에는 자신이 받아온 초콜릿들이 포장지가 벗겨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 무로칭?”
그가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자고 있었던 탓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을 불렀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이성이 흐트러지는 것 같았다.
“무로칭, 내 위에서 뭐해?”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옆에 널브러져 있는 초콜릿 하나를 집어 들어 자신의 입 안에 넣었다. 그리곤 입 안의 초콜릿을 혀로 굴려 살짝 녹인 다음에 곧장 그에게 입을 맞췄다. 평소 느긋하고 느릿한 그의 성정과는 다르게 당황한 기미가 느껴지더니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혀를 밀어 넣어 공간을 확보한 뒤 자신의 입 안에 있던 초콜릿을 그에게로 넘겼다. 그의 입 안에서 초콜릿이 녹아 사라질 때까지 키스를 멈추지 않고 있다가,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고 초콜릿의 흔적이 사라졌다고 느꼈을 즈음에야 입술을 떼어냈다.
맛이 어땠냐고 물으려고 하다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닫고 말았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 사람을 아래에 깔고 억지로 키스를 했다. 심지어 손목까지 묶어둔 채로. 이성끼리라도 문제가 되는 일이었고 동성끼리라 해도 문제가 되는 일이었다.
어디까지 떨어져야 하는 건가, 나는.
동성 간에 역겨운 짓을 했다고 그에게 지탄받아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억지로 한 일이니 그에게 얻어맞는다고 해도 불평 한 마디 꺼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의 크기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나마 스스로를 질타했다. 일단 그에게 한 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얻어맞는 한이 있더라도 그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그의 위에서 내려오려 했다. 그가 꺼낸 한 마디만 아니었다면, 얌전히 위에서 내려온 뒤 사과를 하고 그의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을 거였다.
“이런 플레이 좋아하는 거야, 무로칭은?”
“프..플레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다소 뜬금없었다. 자신에게 욕을 퍼붓기 전에 저런 말이 나오니 당혹스럽기도 했다.
“뭐, 그건 그렇다 쳐도... 무로칭이 받은 초콜릿을 달라고 내가 말하긴 했지만 이렇게 받을 줄은 몰랐는데.”
“...미안.”
“하지만 무로칭이 먼저 입에 넣어버리면 소용없잖아.”
자신이 먼저 입에 넣어버리면 소용없다는 그의 말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아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러자 그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답지 않게 한숨을 내쉬고는 귀찮다는 듯이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무로칭은 먹으면 안 된다는 거야.”
“미안, 의미를 잘 모르겠어.”
“아, 진짜.”
결국은 그의 입술 사이에서 짜증이 섞인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자신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가 좀 더 차분히 설명을 하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느릿느릿한 어조로 이야기를 했다.
“무로칭은 인기 많으니까 초콜릿 많이 받을 거란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어. 하지만 무로칭은 먹으면 안 돼. 내가 다 먹을 거야.”
“어째서?”
“무로칭이 먹어버리면 이거 준 애들 마음 받아들여준 게 되니까 안 돼. 그러니까 내가 먹을 거야.”
“...아츠시.”
“뭐, 그래도 무로칭에게 ‘받은 거’긴 하니까 나도 화이트데이 땐 돌려줄게.”
대수롭지 않다는 어조로 덧붙이는 그의 마지막 한 마디에, 나락으로 떨어졌던 감정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키스 후에도, 자신의 이상행동에도 별 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는 그의 태도에서 ‘착각이라고 여겼던 것’이 착각이었던 건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츠시.”
“응?”
“난 아츠시의 사람이야?”
“응.”
“그럼 아츠시는.. 내 사람이야?”
“당연한 소릴.”
당연한 소릴 반복하게 하지 말라는 듯이, 그가 다소 귀찮다는 어조로 이야기를 하며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그런 태도마저도 자신에겐 사랑스럽게만 느껴져서,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치면서 포옹했다. 무겁다고, 묶인 손목이 눌려서 아프다고 짜증을 부리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지만, 개의치 않고 그를 한껏 끌어안은 뒤 이마 위에 가볍게 키스를 해주었다. 지금의 자신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초콜릿으로 마음을 전하는 날에, 초콜릿을 통해서 그의 마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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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훈련을 마치고 나오니 땀투성이가 되어서, 이 상태론 도저히 잠자기는 그른 것 같아 수건 하나와 속옷, 간편한 옷가지를 챙겨 들고 샤워실로 향했다. 체온보다 살짝 높은 온도의 물로 운동 후의 피로를 씻어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느긋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그제야 살짝 노곤한 느낌이 들면서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아, 이제야 좀 살겠구만.”
나지막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새로 가져온 속옷과 옷을 챙겨 입은 후,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가볍게 털어내며 샤워장을 빠져나와 복도를 가로질러 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샤워장에서 자신이 머무는 방으로 이어지는 이 복도는 구조상 숙소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휴게 장소를 지나게 되는데, 평소에도 시끌벅적하긴 했지만 오늘은 유달리 시끄러운 것 같아서 미간을 찌푸리며 그쪽을 향해 흘깃 시선을 던졌다.
“그렇게 운동을 하고도 목소리 높일 힘이 남아있다니... 쓸데없이 혈기왕성하다니까.”
하기야 한창 뛰놀 나이인 중학생들이 모인 곳인데다가, 운동을 하는 애들이었으니 체력 자체는 동년배들에 비해 월등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소란스러워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점차 그 소란스러움의 강도가 거세어지자 이대로 가다간 자신의 방까지 그 소음이 흘러들어올 것만 같아서, 3학년으로서 한 마디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어이, 너그들. 공공장소에서 그렇게 소란스럽게 굴면 민폐라고 부모님께 안 배웠...”
“유-시!!”
덤덤한 목소리로 훈계조의 말을 꺼내고 있는데,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서 살짝 놀란 눈으로 그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이름을 부른 인물은 다름이 아니라, 현재는 잠시 파트너를 맺고 있는 걸 그만 둔 상태이지만, 아직까지도 팀메이트로 함께 묶이곤 하는 무카히 가쿠토였다.
“뭐꼬, 가쿠토.”
“너... 너, 쟤랑 룸메이트지! 쟤 좀 어떻게 해봐! 아, 짜증나! 히요시보다 더 짜증나!”
“쟤?”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할 생각도 없이 짜증난다는 말을 반복하며 발을 구르는 가쿠토의 행동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쟤’라고 지칭한 대상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무표정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상대를 비웃고 있는 것 같은 묘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자신의 현재 룸메이트, 니오 마사하루가 서 있었다.
“...니오, 너 무슨 짓 했나?”
자신의 물음에, 아니, 아무 짓도 안했는데, 하고 대답을 하면서 그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그 태평한 태도가 가쿠토의 기분을 더욱 자극한 것인지, 가쿠토는 연신 짜증난다고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고, 이어 자신에게로 다가와 멱살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안하긴 뭘 안 해! 카드놀이 했는데 사기 쳤다고! 심지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음료수 돌리는 내기 걸었었는데 쟤 때문에 내 돈 다 털리게 생겼어!”
“...사기 친 걸 알았으면 니오에게 내라고 하면 되잖아.”
가쿠토가 그렇게 난리를 칠 정도라면 니오가 사기를 치긴 쳤구나 싶어서 간단하게 대꾸를 했다. 실제로 니오 마사하루라는 녀석은 사기를 치는 게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인물이기도 했기에. 하지만 이런 자신의 말에 그는 한 번 움찔하더니 서서히 작아지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그..그렇지만... 증거가 없어... 하지만 진짜 사기 친 건 맞다고!”
“뭐야, 증거도 없으면서 그런 거냐...”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있다고! 여하튼 네 룸메이트 짜증나!”
파르르 떠는 가쿠토를 달래기는 힘들 것 같아서, 멱살이 잡힌 상태 그대로 다시 한 번 니오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 사건의 주범임에도 불구하고, 이건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는 듯이 유유자적한 태도로 가지고 놀던 카드 패를 만지며 간이 소파 위에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 능글맞아 보이는 미소는 덤이라면 덤이었다.
어디로 보나 사건을 무마시킬 생각이 한 톨만큼도 없어보여서,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가쿠토에게 잡힌 멱살을 슬쩍 풀어내었다. 진심으로 틀어쥘 생각은 없었는지, 자신의 손길에 가쿠토도 쉽게 멱살을 잡은 손을 놓아주었다.
“하아, 결국 뒤처리 담당은 나냐.”
“뭐야, 유시. 네가 대신 돈 내기라도 하려고?”
“아니, 그건 아니지. 그럼 나만 생으로 돈 뜯기는 거니까.”
그럼 어떻게 할 건데, 라고 묻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가쿠토를 응시하고 있다가 발걸음을 니오 쪽으로 돌려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카드 패를 낚아채면서, 그의 귓가에 ‘너, 방에 돌아가서 보자.’ 라는 말을 남기곤 다시 가쿠토에게로 돌아왔다.
가쿠토에게로 돌아갈 즈음 키득거리던 그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남았지만 무시했다.
“니오 건은 없었던 걸로 하고, 나랑 포커 게임을 해서 진 쪽이 음료수 돌리기로 하자고.”
승부욕이 강한 가쿠토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었고, 그렇게 니오의 사기 사건을 무마하기 위한 카드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가쿠토에게서 ‘이 자식! 마음을 닫았어!’ 라고 울분에 가득 찬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포커 게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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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요시~ 아직 밥 먹으려면 멀었구?"
햇살이 드리우는 쇼파 위에 나른하게 드러누워서는, 무료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주방에 있는 그를 불렀다. 조만간 식사를 해야 하니 군것질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며, 늘 그렇듯 웃는 얼굴로, 그러나 어딘가 단호한 어조로 이야기를 하던 그 때문에, 항상 입에 달고 있던 과자도 잠시 멀리하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왠지 모르게 짜증이 밀려오는 것 같아서,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고는 미간을 좁힌 채 주방 쪽을 노려보았다.
"더 기다리게 하면 나 그냥 과자 먹을 거구?"
그 전까진 부산하게 움직이느라 대답이 없던 그가, 자신이 짜증 섞인 어조로 이야기를 하자 그제야 대답을 했다.
"미안, 미안. 이제 거의 다 됐으니까. 기다리기 지루하면 식탁 위에 미리 수저 좀 놔줄래?"
"지금 나한테 일 시키는 거구?"
기다리게 하는 것도 부족해서 일까지 시킨다며,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투덜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식탁 쪽으로 걸어가, 수저통에 가지런히 보관된 수저 두 쌍을 꺼내어 적당히 보기 좋게 세팅해 두었다. 그런 뒤 자연스럽게 식탁 의자 하나를 빼내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식탁의자에 앉으니, 주방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하며 식사 준비를 하는 그의 모습을 좀 더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는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는 그가 바삐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자니, 왠지 웃기기도 하고 한 편으론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키요시 주제에...'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투덜거렸다.
"무슨 말 했어, 무라사키바라?"
"응? 아니, 아무 말도."
잠시 그에 대한 불평을 중얼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어느새 식탁 위에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가정식이 잘 차려져 있었다. 고슬고슬한 흰 쌀밥에서부터 오목한 그릇에 담긴 맑은 장국, 그리고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생선까지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괜히 트집을 잡고 싶어서 입술을 삐죽이며 젓가락을 들어올렸다.
"생긴 것처럼 노친네 입맛이구. 어떻게 미트볼 하나 없어?"
"하하, 미트볼은 저녁 메뉴에 넣어둘게, 그럼."
자신의 투정에 화를 내긴 커녕,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그의 태도에 더욱 못마땅하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밥을 앞에 두고 계속 투덜거리고 싶진 않았기에, 젓가락을 대강 한 손 안에 감아쥐고는 공기 안의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그리곤 당연한 수순처럼 장국을 조금 들이킨 다음, 젓가락 끝으로 생선을 쿡쿡 찔러 살을 발라냈다. 하지만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아서 다시금 인상을 찌푸렸다.
"... 짜증나."
그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인지, 맞은편에 앉은 그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 짓눌러 버릴 거구?"
"미안해. 하지만 말이지..."
무슨 말을 좀 더 하려는 것 같이 말을 흐리더니, 이내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미소를 지어보이는 그였다. 그 미소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가 젓가락을 쥔 손을 뻗는가 싶더니 자신의 몫인 생선에 젓가락을 가져다 댔다.
"치사하게 줬다 뺏는 거?"
"아니, 이렇게 하려고."
그는 잘 발라낸 생선살 한 덩어리를 자신의 입 쪽으로 불쑥 내밀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그는 젓가락을 물릴 생각이 없어 보여서 잠시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결국 천천히 입을 벌려 그걸 받아먹었다. 역시 맛은 괜찮았다.
"... 더 해줘."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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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고르시는 거 도와드릴까요?"
상냥한 미소를 띠고 있는 여직원이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일순 그녀의 도움을 좀 받을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기왕이면 자신이 직접 '그'를 위한 꽃을 골라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다. 직접 고르고 난 후에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익숙하지도 않고, 또한 어색하기 짝이 없는 관동 말씨를 사용하려고 하다 보니, 유달리 딱딱한 어조로, 그리고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손님을 대상으로 사용할 만한 어휘를 사용해서 대답을 하게 되었다. 그 점을 말을 내뱉은 후에야 깨닫고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직원을 한 번 흘깃 바라보았다가, 다시 진열되어 있는 꽃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색도 모양도 향도 가지각색인 꽃들이 한가득이었다. 사람 하나만 간신히 지나다닐 수 있을 것 같이 좁게 나있는 통로를 거닐면서 하나 하나 살펴보고 있자니, 진열된 꽃들이 내뿜는 향기에 취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물이 담긴 보울에 몇 송이 띄워져 있는 꽃을 발견하게 되어,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여러가지 색의 꽃이 물 위에 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새하얀 빛깔의 꽃이 눈에 밟혔다. 물 위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떠 있는 모습이, 왜인지 그를 연상케 했다. 범인들의 세계에서 홀로 부유하고 있는 것 같은 그를. 그럼에도 확고한 본인의 페이스를 갖고 있는 그를.
문제는 그 본인의 페이스라는 것이 남들이 보기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점이지만. 꽃을 잠시동안 내려다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이 꽃, 이름이 뭡니까?"
"수련이라고 해요. 꽃말은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이에요."
청초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서 여성분들께 선물로 드리기 좋은 꽃이에요, 라고 덧붙이는 직원의 목소리에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하지만 사람을 앞에 두고 웃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에, 간신히 웃음을 참곤 그 꽃으로 미니 부케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부케를 만들기 위해 수련 몇 송이를 가지고 다른 곳으로 향하는 직원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그녀가 꽤 멀리 가버렸을 때에야 비로소 참았던 웃음을 흘렸다.
"그 녀석에게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이라는 뜻이 담긴 꽃이라니. 안 어울려도 이렇게 안 어울릴 수가."
악동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꽃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이 꽃을 그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다.
"이 꽃을 받고 질색을 할 녀석을 생각하니... 즐거운걸."
덤으로 친절하게 꽃말에 대해서도 읊어줘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계산을 위해 캐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느 때보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이 가벼운 것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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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이면 ‘그 날’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곤 했다. 무채색으로 물든 풍경. 충격을 받다 못해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모진 말을 내뱉고 있는 자신의 목소리. 그리고 그와 자신을 적시는 빗방울과 바닥으로 떨어져 자잘하게 부서지는 비의 구슬픈 소리.
*
오늘도 ‘그 날’과 마찬가지로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어.]
[어제도 그리 할 일이 없어서, 하루를 만끽한 기분이야.]
[그래도 별로 네 생각을 하거나 하진 않았어.]
아니, 그래도 실은 조금은 했을지도, 하고 자조를 하면서 편지지 위에 글을 써 내리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손에 들려 있던 펜을 툭 내던지듯이 책상 위에 내려놓은 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은 비구름 탓에 옅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닫힌 창문에선 아직도 내리고 있는 빗방울이 부딪히는지 연신 토독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때와 같은 풍경이구나, 하고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듯이 혼잣말을 했다. 그 날도, 자신이 그에게 이별을 고하던 날에도 이렇게 비가 내렸었다.
그 날의 하늘도 지금과 같이 옅은 잿빛이었고, 그 하늘 아래 그와 자신은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마주보고 서있었다. 다소 갑작스럽게 이별을 고하는 자신을 붙잡으려고 그가 손을 뻗었을 때 자신이 그 손을 거세게 내쳐버려 그의 손등이 붉게 물든 것을 제외하면, 그 때의 풍경은 무채색 일색이었다. 다채로운 색을 용납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빛 바래버린 색깔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요...? 제 잘못이 있다면 뭐든 고칠 테니까, 제발 헤어지자고 하지 말아주세요.]
네 잘못은 아무 것도 없었어, 료타. 환청과도 같이 자신의 귓가에 맴도는 그의 목소리에 대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창 밖을 멍하니 내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신의 말 그대로였다. 그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그건 자신에게 있었다. 점점 빛을 발하는 그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혼자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추악한 자신에게. 순수하고 올곧은 마음으로 자신에게 넘치는 사랑을 안겨주었던 그와는 달리, 점점 이기적으로 사랑을 하기 시작했던 글러먹은 자신에게.
[사랑해요. 정말로 사랑해요. 절 버리지 말아주세요.]
버리지 말아달라는 그의 말을 들었던 순간, 그 때의 자신은 아주 잠시 웃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 언제나 과분하리만치 사랑을 안겨주었지만 그 감정에 얽매여 있지는 않았다. 본인에게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와는 다르게, 그에게 건네주는 사랑에는 지나칠 정도로 인색하게 굴면서도 그 감정 하나 하나에 얽매여 있었다. 스스로에게 믿음이 없는 사람의 표본, 그 자체라고 해도 좋았다.
그렇게 자신과는 다르다고 생각되던 그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얽매여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도 자신과 다를 바가 없는 건가 싶어서 웃음이 나왔던 것 같았다.
그래서 버리지 말아달라는 그의 말에 자신은 뭐라고 대답을 했었던가. ‘모델 님이잖아? 그런 모습 어울리지도 않고, 멋지지도 않으니까 그만 둬.’ 라고 했었던 것 같았다. 그런 자신의 대답에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는 그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가는 그의 안색이 여느 때보다 인상 깊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자신은, 평소 보지 못했던 그의 일면을 본 것 같은 기분에 고취되어가고 있었다.
“쓰레기.”
쓰레기 그 자체였다.
그를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혼자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혼자 일어날 힘조차 잃어버리게 되어 자기연민이라는 진흙으로 점철된 바닥을 구르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모든 것은 스스로가 자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그에게 돌려버렸다.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그 때문이라고. 자신이 이렇게 나락까지 떨어지게 되어 버린 것은 모두 그의 탓이라고.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는 창밖을 내다보던 시선을 다시 책상 위로 돌렸다. 쓰다가 만 편지지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비가 내리고 있다는 일상 이야기를 적어내린 편지. 그리고 그 아래에 적은 ‘네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문구.
“거짓말쟁이.”
그의 생각을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머릿속 한 가득, 그 날 보았던 그의 얼굴이 떠오르는데 어떻게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비가 내리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그 날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데 어떻게 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양 손 가득 넘치도록 받은 그의 사랑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마음 속에서, 기억 속에서 자신을 지웠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와의 연은 이미 기한이 끝나버린 소모품 같이 되어버린 인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자신은 그 사랑을 놓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애처롭게 자신을 붙잡던 그의 손을 내쳐버린 당사자가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너와 멈추어버린 나. 줄어들지 않는 그 틈을 무엇으로 메울까.”
무엇 하나도 솔직하게 이야기 할 수 없는 자신으로선, 그 틈을 메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스스로 그를 버려버렸기 때문에 그를 붙잡는 것조차 할 수 없어, 제자리에 멈추어 서서 기다리는 수밖엔 없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를, 영원히, 이 자리에서 기다리는 수밖엔 없다.
“겁쟁이에, 거짓말쟁이에.... 가지가지 한다, 진짜.”
책상 위의 편지지를 집어 들어 양 손 안에 넣고 구겼다. 오늘도 그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가 또 한 장, 쓰레기통 안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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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먼발치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고, 타오르는 격정적인 마음을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경우에는 ‘그 사람’에게 닿음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얻고, 보다 편안해진 마음으로 그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것에 가깝다. 그렇게 키세 료타는 생각했다.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들어 메시지 창을 켜고는 연락처에서 그의 이름을 찾았다. 수신인 이름 자리에 카사마츠 유키오라는 이름이 새겨지자, 조심스럽게 아래쪽에 위치한 본문 창을 톡, 하고 손끝으로 건드렸다. 커서가 아래쪽으로 이동하는 것에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무슨 내용을 써야 하나 잠시 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움직여 천천히 메시지를 적어 내려갔다.
[카사마츠 선배, 혹시 주말에 시간 있슴까? 선배만 괜찮으면 그때 만나고 싶은데요.]
무심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후회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키세 료타’라는 사람은 이렇게 사람을 사귀는 데에 있어서 서툰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상대로 하고 있을 때는 매사에 서툰 사람이 되곤 했다. 말에서부터 행동까지, 서툴지 않은 부분을 찾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 마치 첫사랑을 시작한 어린 아이처럼.
“아, 정말. 좀 더 돌려 말했어야 하는 건데.”
밀고 당기기가 안 되잖아, 이건. 고뇌 어린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고는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카락을 손으로 헝클어뜨렸다. 좀 더 요령 좋게 만날 약속을 잡았어야 하는데, 라는 후회가 자꾸 고개를 들어서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그 순간 핸드폰에서 착신 음이 들렸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서 핸드폰을 집어 들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시간이야 있긴 한데... 너 조만간 시험 아니냐?]
“시험...이긴 한데, 그래도... 만나고... 싶슴다. 전송.”
방금 전까지 서툰 자신을 타박하고 있던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만나고 싶다는 감정만이 앞서 그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은 어조의 메시지를 그에게 보내고 말았다. 역시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난 후에 다시금 후회가 찾아들었지만.
[시험이면 시험에 신경 써야지. 그러다 너 후회한다?]
시험에 신경 쓰라는 그의 답변이 다시 날아오자, 핸드폰을 내려다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시험이 중요하다는 것도, 시험에서 낙제 점수를 받아서 추가시험을 보게 되면 향후 시합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시험에 집중하라는 식으로 나오자 섭섭하기도 하고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그래서 고집스럽게 그에게 주말에 자신과 만나달라고 요구하는 문자를 보내려는 찰나, 그에게서 새로운 문자가 날아왔다.
[시험 앞두고 그냥 놀긴 그러니까, 토요일에 OO역 근처 도서관 앞으로 나와라. 네 공부도 지켜볼 겸 나도 공부나 해야겠다.]
자신이 공부하는 것을 지켜보겠다고, 그러니 주말에 도서관 앞으로 나오라는 문자였지만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기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답장을 그에게 전송했다.
*
그를 만날 수 있는 주말만을 기다리고 있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아, 쟤 주말에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구나.’ 하고 알아챌 정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이, 주중에 간간히 그에게 ‘약속’에 대해 잊지 말아달라는 문자를 보내고, 잊지 않았으니 확인 문자 좀 그만 보내라며 그에게 꾸지람을 듣는 일상을 반복했다.
그렇게 주말이 되고, 여느 때보다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구색을 맞추기 위해 가방 안에 시험 대비용 문제집 두어 권과 필통을 챙겨 넣은 뒤에 집 밖으로 나왔다. 그와 만나기로 한 도서관은 그의 집에서도, 자신의 집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빨리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카사마츠 선배!”
“아, 키세.”
도서관 정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라는 확신이 들어서 달리는 와중에도 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감대로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그였고,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화답했다.
“늦은 것도 아닌데 왜 달려오고 그러냐?”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서 그랬슴다.”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 달려왔다는 자신의 말에, 그는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시선을 돌리고는 손으로 본인의 뒷목을 쓸었다. 그리곤 싱겁긴, 하고 퉁명스러운 어조로 덧붙이고는 들어가자며 살짝 고갯짓을 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서관이었지만 방문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쾌적하고 깔끔하게 꾸며진 도서관 내부를 본 순간 무의식적으로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런 자신의 태도에, 그는 ‘얼마나 이런 곳을 안 와봤으면 그런 반응을 보이냐’며 가볍게 자신의 등을 때렸다. 명목상 그와 공부를 하러 도서관에 왔지만, 자신에게 있어선 도서관 데이트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아무렴 어떠냐는 듯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이곳은 서적 코너뿐만 아니라 열람실 같은 곳도 공부하기 좋게 꾸며져 있더라고. 독서실 같은 책상 있는 곳은 네 공부를 봐주기 힘드니까... 개방형 책상이 있는 곳으로 갈까?”
“전 잘 모르니까, 카사마츠 선배가 편할 대로 하십셔.”
“너, 이제 머지않아 수험생이 될 텐데 공부하려면 관심 좀 가져야 하는 거 아니냐?”
“에이, 어떻게든 되겠죠.”
“방심하다가 큰 코 다친다, 망할 모델 녀석아.”
그의 대답에, 그거 카사마츠 선배의 과거 이야기 하는 검까? 하고 덧붙이니 그의 얼굴색이 울긋불긋한 색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발로 자신의 엉덩이를 세게 걷어찼다. 맞은 부위에서부터 찌릿하게 몸을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울상을 지으면서도, 척척 앞으로 걸어 나가는 그를 따라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자리를 잡은 곳은 창가 바로 앞에 놓인, 직사각형 모양의 4인용 테이블이었다. 그가 창가를 등지고 있는 위치에 있는 의자 하나를 빼내어 앉자, 자신도 따라 그의 오른쪽 옆 자리 의자를 빼내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건너편에 앉아. 바로 옆 자리에 앉으면 공부하기 불편하잖아.”
“제 공부 가르쳐주신다 하지 않았슴까? 그럼 나란히 앉는 편이 낫잖아요.”
“... 지켜본다고 했지, 가르쳐준다고 한 적은 없는데.”
“에이, 그게 그거죠.”
엄연히 다른 말이거든? 하고 대답하는 그의 작은 목소리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자신을 타박하면서도 공부를 가르쳐줄 생각이었는지, 참고서와 문제집을 꺼내들라고 하더니 자신의 시험범위를 물어왔다. 일단 들어둔 게 있긴 해서 어디부터 어디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그가 내용을 한 번 훑어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 내용이라면 어느 정도 도움 줄 수 있겠다. 아직 기억나는 부분이기도 하고.”
“정말요? 살았다. 실은 수업 제대로 못 들었거든요.”
“자랑이다.”
그가 주먹으로 자신의 정수리를 가볍게 쥐어박더니, 시험 범위 초반부 페이지를 펼치곤 차분한 목소리로 천천히 이론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살짝 눈을 내리깔고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단정한 옆얼굴이 묘하게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읊어주는 책 내용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고, 책을 보아야 하는 시선을 그에게 고정시킨 채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설명을 하던 그가 이해했냐고 물어보면서 자신을 돌아보자, 그제야 퍼뜩 현실로 돌아오게 되어서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이해했으니 다행이라고 덧붙이며, 설명은 이쯤하면 된 것 같으니 문제를 풀어보라고 이야기를 했다. 실상은 책 내용은 안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문제를 풀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딴 짓 했다는 것을 그에게 들켜 또 구박을 받고 싶진 않아서 아무 말 없이 주섬주섬 책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문제를 푸는 시늉이라도 하려 하자, 그는 본인의 가방에서 전공 서적으로 보이는 것을 꺼내들고 천천히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
아무리 몰라도 문제 두어 개 정도는 풀어야 할 것 같아서 문제집을 들여다보긴 했다. 하지만 아는 게 없으니 문제를 풀 수 없을뿐더러, 옆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그가 자꾸 신경 쓰였다. 그리고 순간, 책이 아니라 자신을 봐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선은 문제집이 아니라 그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손끝이 그에게로 향하더니 그를 가볍게 툭툭 건드리게 되었다. 마치 어린 남자아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시선을 끌려고 장난을 치는 것처럼. 몇 번은 그도 무시를 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자신이 집요할 정도로 그를 툭툭 건드리고, 자잘한 접촉을 하기 시작하자 그가 슬쩍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돌아보았다. 그가 자신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그는 이내 제 문제집 쪽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더니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문제를 하나도 못 푼 것을 그에게 들키고 말았다는 생각에, 머쓱한 미소를 지으면서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샤프를 빼앗아드는가 싶더니, 문제집 한 쪽 귀퉁이에 무언가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만해라. 공부나 해.]
자신을 돌아본다 싶었더니 역시 돌아오는 말은 그만해라, 공부나 해라, 라는 말 뿐이었다. 시험을 앞두고 있으니 그 말이 옳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름 오랜만에 만난 것인데 이런 말만 주고 받는 것은 조금 섭섭하기도 해서 투정을 부리고 싶어졌다. 애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그와 닿고 싶었으며, 그것을 통해서 그의 애정을 확인하고 싶었다.
“...손잡게 해주세요. 그럼 제대로 공부할 테니까.”
“뭐?”
“다른 것도 아니고, 손만 잡게 해달라는 거예요. 어차피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텐데요?”
그는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자신들이 앉은 곳은 창가를 바로 등지고 있는 테이블이었다. 뒤로 누군가가 지나갈 일도 없었고, 앞으로 누군가가 지나간다고 해도 테이블 위에 놓인 책과 자신들의 얼굴만 보일 터였다. 그러니 아무리 주변 확인을 한다고 한들 들킬 구석이라곤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듯이 약간은 으스대는 것 같은 얼굴을 한 채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작게 신음을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챕터 다 읽을 때까지 만이야. 알았냐?”
“네, 알겠슴다.”
“하여간. 너도 나도 오른손잡인데... 네 왼손 잡으려면 난 오른손을 희생해야 되잖냐.”
불편하다느니 어쩌느니 투덜투덜 말은 많아도, 살짝 테이블 밑으로 손을 잡으니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맞잡아 주었다. 맞닿은 손바닥을 통해서 그의 체온이 전해졌다. 그리고 자신을 생각해주는 그의 애정 또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왠지 꾹 다물린 입술 사이로 즐거움이 묻어나는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자신은, 키세 료타는 그에게 닿아있을 때에야 비로소 안정감을 느끼고, 그 접촉을 통해서 그의 애정을 느끼고 점점 커져가는 자신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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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잠시 마을에 나왔다가, 한 공터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공터에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살짝 시선을 돌려보니 한 아이가 공터 구석진 곳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무리 봐도 모르는 아이였기에 그냥 지나칠까 싶었지만, 자신보다 두어 살 어려보이는 그 아이의 등이 왠지 모르게 외로워 보여서 무의식적으로 그 아이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게 되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자신의 인기척이 느껴질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옆을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답 한 마디 꺼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무시로 일관한 채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무시를 당하는 건 익숙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리 기분 좋은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순 '그냥 갈까' 하고 생각을 했지만 몸은 다시 멋대로 움직여 그 아이의 옆에 같이 쪼그리고 앉게 되었다.
"뭘 보고 있어?"
"..."
"어, 꽃이네?"
아이가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척박한 공터 위에 핀 작은 꽃 한 송이었다. 크고 화려한 다른 꽃들과는 달리 소박하기 짝이 없었지만, 꽃을 구성하고 있는 작은 꽃잎들은 안쪽은 부드러운 노란빛이었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선명한 푸른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어 아기자기하게 예쁘다는 느낌이었다.
"예쁘네. 이 꽃, 좋아해?"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아이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일순 숨을 잠시 들이켰다. 순간적으로 여자아이로 착각한 탓이었다. 물끄러미 꽃을 내려다보고 있는 두 눈가엔 빽빽하고 섬세하게 자란 긴 속눈썹이 자리 잡고 있었고, 오똑한 코며 도톰한 입술 모두 예쁜 여자아이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여자아이가 아니라는 걸 바로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아이가 본래 지니고 있던 분위기 탓일지도 몰랐다. 자신 또래의 어린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또한 어두운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꽃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에야 비로소, 아이는 꽃에서 시선을 떼고 자신을 돌아보았다. 다시 한 번 예쁜 눈이구나 하고 생각할 무렵, 아이는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꽃을 돌아보더니 팍 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얹어 두었던 손을 뻗어, 가련할 정도로 위태위태하게 자라고 있던 들꽃을 거칠게 꺾어버렸다.
"안 좋아해, 이런 꽃."
"..."
"자기가 피어날 장소도 제대로 모르고 피어난 꽃 따위. 어차피 금방 죽어버릴 거잖아."
"..."
"죽어버리면 그만인 거야. 무가치 해."
아이의 목소리에는 분노와도 같은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어렴풋이 슬픈 기색도 묻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강도로 따지자면 분노가 좀 더 강한 것 같았지만, 은연중에 드러난 슬픔이 왠지 자신의 가슴을 울리고 있었기에 이대로 아이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손목을 잡고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이게 언제 적 일이더라."
눈꺼풀 위에 드리우는 아침 햇살에 잠에서 깨어나, 건조해진 눈을 손등으로 가볍게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벌써 20년 가까이 된 일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하품을 한 번 크게 한 후,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서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일상의 당연한 수순대로, 세안과 샤워를 한 뒤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쳤다. 먹은 것 뒷정리까지 끝낸 후에야 아카데미에 출근할 준비를 마치곤 밖으로 나와 현관문을 잠갔다.
"아아, 공기 좋다."
아카데미의 선생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임무에 나간 사람들보다는 늦게, 그리고 일반적인 업무를 보는 사람들보다는 늘 이른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약간은 서늘하지만 상쾌하게만 느껴지는 아침 공기를 기분 좋게 들이마시면서, 여느 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카데미로 향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 카사마츠 선생님. 좋은 아침이에요."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반쯤은 버릇이 되어버린 아침인사를 건네자, 자신보다 먼저 와 있던 선생이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그 선생은 자신이 앉는 자리 맞은편에 앉아 있었는데, 그 자리는 어제까지만 해도 비어있었다.
"임무에서 돌아오셨군요. 이번에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하, 수고는요, 뭘. 교류하고 있는 마을들에 전령으로 다녀온 것뿐인 걸요."
"급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임무는 임무잖습니까. 마을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덤덤한 어조로 그의 공로를 치하하자, 선생은 조금은 쑥스러워 하는 기색을 표하더니 '그런가요?'하고 짧게 덧붙이면서 대화를 마쳤다. 아침 인사는 자신도 이정도로만 하면 될 것 같아서, 그 이상 말을 꺼내지 않은 채 짐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는데 책상 위에 못 보던 것이 있어서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꽃?"
꽃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많이 부족할지도 모르는 작은 들꽃 한 송이였다. 하지만 왜 꽃 한 송이가 여기 놓여있는가 보단 누가 이걸 두고 갔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에, 자신보다 먼저 와 있던 선생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제가 오기 전에 누가 절 찾아왔습니까?"
"네? 적어도 제가 온 후에는 없었는데요."
"그럼 누구지..."
들꽃을 내려다보며 고민을 하고 있자, 선생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카사마츠 선생님이 담당하고 있는 반 아이들이 아닐까요?' 라고 덧붙였다. 그 말에 생각나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가능성을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수업에 성실한 코보리였으나, 자신에게 꽃을 줄 이유는 없었다. 그 다음은 모리야마였는데, 간간히 꺾은 꽃을 남들에게 뿌리고 다니긴 했으나 그 대상은 여자 한정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둘의 이름을 머릿속 리스트에서 지우고, 이어 하야카와와 나카무라의 이름도 리스트에서 소거했다.
"대체 누가....아."
리스트 내의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소거시켜나가며 고민하고 있던 도중, 오늘 아침 일어나기 전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설마."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꽃과 연관된 자신의 추억은 그 때의 일, 단 한 가지뿐이었지만 그 때의 그 아이가 지금 와서 자신에게 꽃을 줄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침에도 떠올렸다시피 벌써 근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바람에 흩날리던 꽃이 열린 창문을 통해 날아 들어와 자신의 자리에 떨어졌다, 정도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려버리자 곧 꽃에 대한 것은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업 준비와, 아카데미를 졸업해 닌자 시험을 칠 아이들의 목록을 추리는 것으로 머리가 가득 차버리고 말았다. 간간히 교실로 수업을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다가 호카게가 자신을 부른다는 말을 전달 받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들에게 잠시 호카게를 뵙고 오겠단 말을 남기고는 아카데미를 빠져나왔다.
아카데미 안에 있을 때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감을 제대로 못 잡고 있었는데, 밖에 나와 하늘을 바라보니 시간이 꽤 흘러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서쪽 하늘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카게 님을 뵙고 나오면 퇴근 시간이겠는걸."
그렇게 생각하니 좀 더 느긋하게 다녀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곧, 임무 수행과 함께 시간 엄수도 목숨같이 여겨야 하는 닌자가, 그것도 그런 닌자를 육성하는 선생이 가질 마음가짐이 못 된다고 스스로를 질책하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시라도 바삐 다녀오려고 발을 움직이고 있는데, 눈앞에 나풀나풀 꽃 한 송이가 떨어졌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시야를 가리는 꽃을 가볍게 낚아챘다. 그러자 더 많은 꽃이, 마치 계절을 잊은 눈이 내리는 것처럼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건?"
일순 눈같이 흩날리는 꽃이 예쁘다고 생각을 했지만, 이내 누군가가 자신에게 환술을 거는 것인가 싶어서 눈빛을 달리하며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환술을 해제할 인을 맺으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누군가에 의해 손목을 붙잡혔다. 그러나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그 손길은 조심스럽고 부드럽기 짝이 없어서, 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자신은 만난 적이 없는 모르는 사람 같았다. 단지 현 시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입고 있는 것과는 다른 '암부'의 복장을 상대가 입고 있었다는 점과, 신상이 드러나지 않도록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는 암부 특유의 흰색 여우가면 너머의 얼굴이 왠지 웃고 있는 것 같단 느낌이 든다는 점이었다.
"암부가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예전과는 다른데요? 예전엔 좀 더 상냥했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그런 모습도 나쁘진 않네요, 라고 암부는 영문을 모를 말을 하면서 작게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같은 나뭇잎 마을의 닌자라고는 하나 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을 육성하는 자신과, 호카게 직속 암살 부대에 속해 있는 상대와는 접점이 없었다. 그런 상대가 마치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기분이 껄끄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욱 무뚝뚝한 어조로 상대에게 대꾸했다.
"볼일이 없으시다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호카게 님의 명을 받고 가는 중이기에."
"'죽어버리면 그만인 거야. 무가치 해.'"
"...!"
이전에 공터에서 만났던 아이가 꺼낸 말이었다. 다른 누구에게도, 심지어 부모님에게도 이야기 한 적이 없었기에, 자신을 제외하곤 그 아이만이 알고 있는 말이었다. 그 말을 어떻게 눈앞에 있는 암부가 알고 있는 것일까.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여우 가면을 쓰고 있는 암부의 얼굴을 응시했다.
"어떻게 그 말을..."
"제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당신이 이렇게 대답을 돌려줬었죠. 꽃이 가득 핀 곳으로 데려가서, 화관을 만들어 주면서."
"..."
"'네가 보기엔, 네 손으로 그렇게 꺾어버린 작은 들꽃이 무가치해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다른 꽃들과 엮어 화관을 만든다면, 어느 누군가를 미소 짓게 해줄 수 있는 가치정돈 갖게 되지 않을까?"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오늘 아침에 꾸었던 꿈의 연장을 보는 것처럼 천천히 읊조리듯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말을 꺼내고 나서 스스로가 놀라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자, 앞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암부는 손을 들어 올려 본인의 가면을 벗어 내렸다.
그때처럼 예쁜 여자아이 같은 느낌은 많이 사라져 있었지만, 그래도 남자이면서도 예쁘장하다고 느낄 정도의 잘생긴 외모가 가면 너머로 서서히 드러났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이렇게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곤 얼른 시선을 돌렸다.
"미안합니다, 암부 신상은 극비인데.."
"아, 괜찮슴다. 어차피 이제 자주 볼 텐데요."
"자주요?"
그런 게 있슴다, 하고 상대는 싱긋 눈웃음을 짓더니 검지를 입술에 살짝 대고는 이 이상은 비밀이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리고 그는 양 입 꼬리를 부드럽게 끌어올려 웃더니 다시 입술을 열었다.
"제 이름, 키세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카사마츠 선생님."
>
왠지 프롤로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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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전력 60분, 키워드 : 기다려줄래(요)?
고등학교 때부터 해온 자율연습은 거의 내재화 된 습관과도 같아서,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나면 간단한 트레이닝을 하거나 근처 공원을 달리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하아.”
달리던 발이 집 근처에 도착할 즈음에야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속도를 더욱 줄여 걷는 수준이 되었을 즈음에는 어느덧 집 현관문 앞이었다.
“땀범벅이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고는, 한 손으로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훔쳐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운동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일상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땀으로 흥건한 트레이닝복이라던가, 주변 공기가 온 몸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듯한 감각은 익숙해질 법 함에도 불구하고 익숙해지지 않았다.
찝찝하다.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바로 입 밖으로 내뱉고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리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 신발을 벗고 안에 들어서면서, 상체 실루엣을 드러낼 것만 같이 들러붙어 있는 상의를 다소 거칠게 벗어 던졌다. 그리곤 달리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바로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나머지 옷을 벗어버린 뒤, 러닝을 하느라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몸을 쿨다운 시킬 겸 체온보다는 아주 조금 낮은 온도의 미지근한 물로 땀으로 흠뻑 젖어있는 몸을 한 번 씻어 내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땀에 푹 젖어있는 머리카락을 샴푸로 말끔하게 감은 후에, 욕실 한 쪽 벽에 걸려 있던 샤워 타올을 집어 들어 바디 워시로 거품을 낸 뒤 몸을 꼼꼼히 닦았다.
처음 몸에 끼얹었던 물보다 조금 더 차가운 온도의 물로 거품마저 싹 씻어 내리고 나자, 한껏 뜨거워져 있던 몸이 조금은 진정을 한듯 평소의 상태를 되찾은 것 같았다. 샤워 후 찾아드는 상쾌함에, 욕실에 들어오기 전 불쾌함이 가득한 얼굴과는 달리, 마치 콧노래라도 흥얼거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한 채로 잘 마른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아냈다. 그리고 젖은 머리카락을 대강 수건으로 감싼 채 밖으로 나와 얼른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야 살 것 같네.”
집에서 입는 편한 옷을 챙겨 입은 후에야 비로소, 어딘가 한숨이 어린 것 같은 목소리로 살 것 같다는 말을 토해냈다. 그리곤 반쯤 버릇처럼 핸드폰을 찾아서 누구에게 연락이 온 것은 없는지 확인을 했다. 아쉽게도 자신에게 연락을 한 사람들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이들 뿐이었다. 오늘도 깨어진 기대감에 살짝 울상인 표정을 지어보이다가, 냉큼 메시지 창을 켜곤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운동하고 왔더니 체력이 제로가 되어 버렸슴다. 아~ 힘들다. 선배는 뭐하고 있슴까?]
원체 답장을 바로 보내는 사람도 아니고, 문자를 일일이 찍고 있는 시간이 아깝고 또한 귀찮다며 연락은 되도록 전화로 하는 사람이었기에 지금 보낸 자신의 문자에 바로 답이 돌아올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일이라도 하며 느긋이 그의 연락을 기다리자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챙겨든 채 침대 위로 올라가 편히 누웠다.
*
그러다 어느 순간 시야가 바뀐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라?”
분명 자신의 방에, 그것도 침대 위에 누워 있을 터였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곳은 늘 보던 자신의 방 전경이 아니라, 익숙하다면 익숙한 카이조의 로커 룸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정말 질릴 정도로 본 풍경이었기에 착각을 하려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지금 자신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자, 시야가 살짝 왜곡되는 것 같더니 로커 룸 한 쪽에 어느 인물의 인영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흐릿하더니 서서히, 마치 ‘진짜 사람’처럼 선명해지기 시작한 그 인영은 어느새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상이 또렷해졌다.
“...카사마츠 선배?”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꿈속에 나타난 인물은, 자신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하는 그 사람이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레귤러 유니폼을 입고 있는 상태로 로커 룸의 간이 의자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는, 자신이 가까이 다가갔을 즈음에야 인기척을 느꼈는지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올린 그와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자신은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그의 눈에서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 것 같은 기색을 읽어낸 탓이었고, 두 번째는 그의 얼굴이 자신이 맨 처음 그를 만났을 때보다 더욱 앳된 탓이었다. ‘지금의 그’도 제 나이로 보이지 않을 만큼 앳된 얼굴이었지만, 꿈속의 그는 그것보다 더욱 어려 보였다.
“카사마츠 선배... 맞죠?”
“... 날 선배라고 부르는 걸 보면 넌 1학년이겠군.”
“네?”
자신을 1학년이라고 단정 짓듯 이야기를 하는 꿈속의 그의 목소리에 조금은 당혹스러움이 묻어나는 어조로 반문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의 말에 반응할 기력도 없다는 듯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그의 한숨에서 깊은 고뇌와도 같은 무언가를 느껴서 고개를 조금 숙여 그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무슨 일 있슴까?”
“알고 있을 텐데? 아니면 아픈 구석을 찔러 죄책감을 이 이상으로 안겨주고 싶은 건가?”
“영문을 모르겠는데요.”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대답을 한 자신을 올려다보면서, 그는 미심쩍은 표정을 잠시 지어보였다. 그리곤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다시 한 번 낮은 한숨을 토해내더니 혼잣말을 내뱉는 것처럼 천천히 읊조리는 것 같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의 시합을 생각하고 있으면 절로 위축되는 기분이 되곤 해.”
“그 때의 시합?”
“... 내 미스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이없게 탈락하는 일은 없었겠지. 아니, 우승을 노려볼 수도 있었겠지.”
그 정도로 강한 팀이었는데, 하고 그가 쓴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이전에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가 2학년이었을 때 그의 실수로 인해서 우승을 노려볼 수 있는 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1회전 탈락이라는 고배를 마셨다고 하는 그 이야기가.
자신은 그때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듣곤, 여느 때보다 승리에 대한 염원을 가슴에 품었었다. 비록 자신이 참전했을 때의 시합 결과는 그의 아픔을 배가시킬 뿐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긍지는 드높기 짝이 없다고 그 때 새삼 다시 생각했었다. 하지만 죄책감을 홀로 끌어안고 있는 시기의 그를 마주하게 되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당시의 그’와 ‘자신이 만났던 시기의 그’는 다른 건 아닐까, 하고.
“그래서 ‘구원받고’ 싶은 겁니까?”
“뭐?”
“과거를 속죄하고 싶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자신의 목소리가 점점 싸늘해져가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도 그걸 느꼈는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얼마간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은 채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싸움 아닌 싸움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그로, 그는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떴다.
설마 포기한 것인가. 왠지 모르게 불안해지는 마음에, 노려보는 것처럼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안감과는 달리, 그의 눈은 여느 때보다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결심을 굳힌 것 같은 그런, 굳건함을 엿볼 수 있는 그런 눈빛이었다.
“과거를 속죄하려 하진 않겠어. 또한 누군가의 구원을 바라지도 않겠어.”
“......”
“내 스스로의 의지로... 다음에는 꼭 이기겠어.”
그의 마지막 말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와 같은 말을 했다. 잠깐 위축되었다고는 해도, 비록 자신이 꾸는 꿈속의 인물일지라도, 그는 변함없이 올곧고 강한 그였다.
“내가 왜 후배에게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헛웃음에 가까운 숨을 잠시 토해내더니 그가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그런 그를 잠시 지켜보고 있다가, 그의 앞에 살짝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양 손으로 그의 한 손을 감싸 쥐고는, 마치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 그 손을 자신의 이마에 가볍게 댔다.
“물론 시합에서 매번 이길 수는 없슴다.”
“......”
“시합에서 지고 난 후 자신을 질책하게 되는, 이번 같은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슴다.”
“......”
“그렇지만 전, 당신에게 받은 게 많으니까 그 보답을 하려고 함다.”
“...보답?”
아무런 대답 없이 듣고만 있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물음에, 살짝 입 꼬리를 끌어올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우승컵을 안겨 주겠슴다. 카이조가 하나로 뭉쳐 얻어낸 결과물을.”
“......”
“그러니까, 기다려줄래요?”
그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일말의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을 즈음, 그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무슨 말을 자신에게 건네고 있었다.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인 것 같았으나, 서서히 꿈에서 깨어나고 있는 탓인지 몰라도 그의 목소리는 자신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
“...아.”
눈을 뜨자 카이조의 로커 룸이 아닌, 익숙한 자신의 방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카사마츠 선배...”
그에게 문자를 보내고 잠든 탓에, 그와 관련된 꿈을 꾸게 된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 베개맡을 손으로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손끝에 걸린 핸드폰을 집어 들어 혹시 답장이 오지는 않았나, 하고 확인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그가 보낸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꿈의 연장선상인지는 몰라도, 괜히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며 그가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미안. 한숨 자고 있었어. 근데 꿈에 네가 나왔더라.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문자를 읽고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그와 자신이 같은 꿈을 꾼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 우연이 과연 그와 자신 사이에 존재할지 여부는 잠시 미루어두고, 한껏 웃고 있다가 느긋한 손놀림으로 그에게 답 문자를 보냈다.
[저도 방금 전까지 선배가 나오는 꿈꾸고 있었는데! 그 꿈을 꿨더니 선배가 더 보고 싶어졌슴다!]
‘그러니까, 기다려줄래요?’
‘기다릴게. 카이조의 우승을. 네가 안겨주는 우승컵을. 내가 졸업한 후라도 좋으니까, 언제까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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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코의 농구 전력 60분 키워드 : 새해
새로운 한 해를 앞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 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그저 이전과 마찬가지로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정도의 감각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분주하게 나갈 준비를 마치고 신사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텔레비전 방송에서 팀을 나누어 아이돌들이 춤추고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어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는 건 추워서 싫은걸. 게다가 저런 것에 흥미도 없고”
집 구조의 특성 상 내부의 공기는 차갑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어깨 위에 걸친 옷을 조금 더 여미면서 꾸물꾸물 코타츠 안으로 기어들어가듯이 자리를 잡았다. 훈훈한 온기가 가득 차 있는 코타츠 안에 몸의 대부분을 밀어 넣고 있으니, 그제야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연휴에는 쉬는 게 제일이지.”
나른한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리고 있다가, 아직까지도 시끄럽게 혼자 떠들고 있는 텔레비전 쪽으로 잠시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텔레비전엔 흥미가 없었다. 코타츠 안에 기어들어가 있는 상태로 손만 쭉 뻗어서 더듬더듬 텔레비전의 리모콘을 찾았다. 손끝에 리모콘이 걸리자 그걸 슬슬 끌어 손에 쥐고는 텔레비전 전원버튼을 눌러 껐다.
핏, 하는 소리와 함께 텔레비전 전원이 꺼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던 소리 또한 함께 사라져버려서, 일순간에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새해랍시고 소란스러운 방송 분위기가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소음이 사라지자 조금은 어색하다 싶을 정도로 방 안에 적막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적막감도 곧 푹 쉴 수 있는 ‘고요함’ 정도로 받아들이게 되어서,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한 채로 코타츠 탁자 위에 엎어 놓았던 책을 다시 집어 들어 읽기 시작했다. 주변이 조용하니 여느 때보다 흰색 종이 위에 나열되어 있는 글자들이 더욱 눈에 잘 들어오는 것 같았다.
얼마나 책에 집중을 하고 있었을까. 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어깨와 목 근육이 결려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잠시 쉬었다 읽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잠시 물이나 한 잔 떠올 겸, 미적미적 코타츠에서 빠져 나와 방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왔다.
“아, 추워.”
난방을 켠다고 해도 이 모양이네. 작게 투덜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고는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가족들은 새해를 밖에서 맞을 모양인지 거실은 사람의 인기척 하나 없이 썰렁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휑한 분위기에도 별 다른 생각이 없었던지라, 바로 부엌으로 향해 머그컵 하나를 꺼내들었다.
방에서 나오기 전 생각했던 것처럼 물이나 한 잔 따라서 가지고 돌아갈까, 하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역시 찬 물보다는 따뜻한 커피가 낫겠지 싶어서 귀찮음을 감수하고 커피를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찬장에서 미리 조금 갈아두었던 원두 가루가 담긴 통을 꺼내어, 커피포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이거, 미리 갈아두면 향이랑 맛이 변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손을 움직여 커피를 내리고 있는 와중, 원두를 선물해준 ‘후배’가 했던 말이 떠올라 다시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일단 맛보다는 따뜻한 무언가를 마시고 싶은 욕구가 더 강했기 때문에, 그리고 먹을 때 즉시 원두를 가는 귀찮은 과정을 매번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렴 어떠냐는 듯한 표정을 잠시 지어보였다.
그렇게 수어 분이 지나자 머그컵 하나는 충분히 채울 수 있을 정도의 커피가 포트 안에 내려져 있었다. 그걸 잠시 지켜보고 있다가 포트를 빼내어 들어 머그컵에 조심스럽게 따라 붓기 시작했다. 포트 안에서 머그컵 안으로, 온기를 머금고 있는 커피가 김을 폴폴 흩뿌리며 옮겨졌다.
“향 좋기만 하네, 뭐.”
후배가 이야기 했던 것과는 달리, 커피에 별 다른 취미가 없는 자신에게도 지금 내린 커피의 향은 좋기만 했다. 물론 입맛이 고급인 사람들은 또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잠깐 동안 생각을 하고는, 머그컵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부엌을 빠져 나왔다.
행여나 바닥에 커피를 쏟을 새라 조심조심 걸어올라 왔더니만, 2층에 위치한 자신의 방에 도착하기까지 수어 분이 걸린 것 같았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나르는, 그런 번거로운 일은 이제 끝났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코타츠 탁자 위에 컵을 내려놓고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다시 컵에 손을 뻗어 커피를 마시려고 한 순간, 책 옆에 두었던 핸드폰이 웅웅대며 울리기 시작했다.
“귀찮게 누구야...”
평소엔 자신에게 연락을 하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고, 심지어 가족들조차도 서로 연락을 잘 주고받는 쪽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시끄럽게 울리는 핸드폰을 보게 된 건 또 새삼 오랜만이다 싶었다. 그래서 누가 이 한밤중에 자신에게 연락을 하는지 궁금함 반 짜증 반인 표정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어 확인을 해보았다.
[마유즈미 상,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유즈미 상, 새해 복!!!!!!! 많이 많이!!!!!!!]
[새해 복]
굳이 메시지 창을 켜지 않고 푸시에 뜬 내용만 보아도 누가 보낸 것인지 대강 알 수 있었다. 이 녀석들에게 새해 안부 인사를 받다니,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답장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핸드폰을 멀찌감치 던져두려고 하는데, 그 순간 다시 한 번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Happy New Year. 지난 한 해, 감사했습니다. 아카시 세이쥬로.]
딱딱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거기다가 마치 회사원이 직장 동료에게 보내듯, 본인의 이름까지 문자 마지막에 꼼꼼히 적어 보냈다.
“예의 차리는 척 하긴. 예전엔 선후배 관계가 다 뭐냐는 듯이 반말해대더니.”
입으로는 문자 내용을 가지고 열심히 불평을 해대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입꼬리는 슬그머니 위로 향하기 시작했다. 후배들에게 이렇게 문자를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연하장은 둘째치고 이런 식의 문자를 받은 건 또 처음일지도 몰랐다.
“아, 모르겠다.”
정말 귀찮지만 답장은 해줘야겠지, 라고 희미하게 웃음기가 어린 얼굴로 문자 창을 켰다. 그리고 자신에게 새해 인사 문자를 보내준 네 명의 이름을 일괄 선택 하곤, 같은 내용을 적어 그들에게로 전송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문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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