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 꿈을 꾸었을 때 보았던 장면은, 새하얀 시로무쿠를 입은 누군가가 다소곳한 걸음걸이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꾸었던 꿈에서는 시점이 약간 바뀌어, 시로무쿠를 입고 앞으로 걸어가는 새 신부를 먼발치에서 에워싼 하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반복해서 꾸면 꿀수록 꿈의 장면은 점점 더 구체적이고 선명해져서, 어느 샌가 근처에 서 있는 부인이 입고 있는 쿠로토메소데의 포인트 무늬가 어떤 것인지, 어떤 젊은 여인이 입은 이로토메소데의 오비 색이 무엇인지 한 눈에 인식할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구체적인 꿈을 꾸게 된 이후로도, 그 꿈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시점은, 시로무쿠를 입고 걸어가던 신부의 시점이라는 것을. 그리고 먼발치에서 신부를 기다리고 있는 신랑의 얼굴이 점점 선명해져간다는 것을.
왜 자신이 신부이고, 신랑을 향해 걸어가는지조차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저 꿈을 반복해서 꿀 때마다, 조금씩 신랑에게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갈 뿐이었다. 자석의 인력이 작용하는 것처럼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듯이, 이치에 거스르지 않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마지막 꿈에선 드디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었다. 신랑에게서 두어 발자국 떨어진 위치에 멈추어 서있자, 짙은 색 하오리와 하카마를 입은 신랑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누가 보아도 남자라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지는, 조각같이 아름답지만 단단해 보이는 손바닥이 시야에 들어왔다.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로무쿠를 입고 있는 꿈속의 ‘자신’은, 그 손 위에 소맷자락 속에 감추고 있던 손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얹었다. 상대가 자신의 손을 가볍게 그러쥐듯 잡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아래로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있던 머리카락이, 오늘만큼은 단정하게 올려 뒤로 넘겨져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느끼하게 보였을 법도 하건만, 그의 얼굴은 그 어떤 스타일링이라 하더라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다는 듯이 빛나고 있는 듯 했다.
여느 때보다 유독 멋진 그가, 더욱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어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유키나 씨] 하고.
***
“유키... 배.”
“유키....씨!”
“저기, 유키오?”
낯익은 목소리가 낯선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자, 그제야 퍼뜩 잠에서 깨어나듯 현실로 돌아왔다.
“식 거의 끝나가는데여?”
“아, 응. 근데….”
“?”
“너, 누가 멋대로 내 이름만 부르래? 호칭 제대로 안 하냐?”
그와는 알고 지낸 시간이 좀 되었기도 해서, 카사마츠라는 성에서 유키오라는 이름으로 바꿔 부르는 건 꽤 오래 전에 허락해줬다. 하지만 이름만 단독으로 부르는 것은 연상으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에 꼬박꼬박 선배라느니 -씨라느니 그런 부차적인 호칭을 붙여 부르게 했다. 그리고 그도 이런 자신의 요구에 별 다른 생각은 없었는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자신의 말에 얌전히 따랐다.
하지만 요 근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몰라도, 이따금 다른 호칭은 다 떼어버리고 순수하게 이름만으로 자신을 부를 때가 있었다. 마치 지금처럼.
“저번에도 그렇게 불렀다가 맞은 기억이 있으면서도 또 그렇게 부르다니… 넌 학습 능력이 없냐?”
“저번엔 유키오 선배의 발이 자유로웠지만 오늘은 아니잖아여!”
“내 발은 언제나 자유롭거든?”
그 말에 키세는 검지로 어느 한 쪽을 슬쩍 가리켰다. 자신도 따라 그쪽을 바라보았다.
“…….”
“새 신랑과 새 신부, 그리고 양가 부모님이 있는 곳인데여?”
“…이게….”
그와 자신, 단 둘만이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다시 자각했다. 게다가 이곳은 결혼식을 올리는 곳. 그리고 자신은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한 쌍의 부부를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평소처럼 내키는 대로 그를 구박하거나 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 녀석의 누님이 식을 올린 거니까.
그를 살짝 흘겨보았다. 이미 자신의 생각 같은 건 다 읽어낸 지 오래라는 듯이, 키세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만면에 걸고 있었다. 그 모습이 볼을 꼬집고 흔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지만, 남들 몰래 슬쩍, 발을 한 번 지그시 밟아주는 것으로 끝냈다.
“그런데 아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한 검까? 몇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도 안할 정도로.”
밟은 발을 내려다보며 아픔을 호소하던 그가, 일순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별 생각 안 했는데.”
“거짓말.”
“거짓말 아니거든?”
“거짓말임다.”
자신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는데도, 계속 거짓말이라고 우기는 그의 태도에 슬금슬금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른들 앞에서 성질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눈에 힘을 주고 그를 한 번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과 마주하게 된 순간 저절로 눈에 들어간 힘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슬쩍 피해버리고 말았다. 여느 때보다 진지하고 깊은 그의 눈동자에 왠지 속내를 읽혀버린 것만 같았기에.
“유키오 선배는 늘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남한테 말해주려고 하지 않잖슴까.”
“…….”
“아까 무슨 생각을 한 거예여.”
“…정말 별 거 아니었어.”
다시 한 번 반복된 자신의 대답에,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또…!”
“…단지, 내가 여자가 되고 싶은 건가? 하고 생각했던 것뿐이야.”
“…?!”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딱히 여자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
“그러니까 별 거 아니라고 한 거다, 이 바보.”
***
먼 걸음을 해준 하객들을 위해 준비된 전통 여관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방 안에 들어서니 왠지 모르게 어깨가 무거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걸치고 있던 옷을 한 겹 한 겹 벗어 내렸다. 그리고 그것들을 잘 접어 방 한 구석에 놓아 두었다.
입고 왔던 옷을 그렇게 대강 보관해둔 다음, 가방 속에서 아무 무늬도 없는 티셔츠와 반바지를 꺼내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창문 근처에 놓인 간이 테이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테이블 밑에 수납되어 있던 의자를 빼내어 그곳에 걸터앉은 뒤,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왜 그런 꿈을 꾼 것일까.
여자가 되고 싶단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왜 나는, 왜 꿈속의 나는, 왜.
아무리 생각해도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왜 꿈속의 자신이 여자였는지도, 왜 시로무쿠를 입고 있었는지도, 그리고 하오리와 하카마를 입고 있던 그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며 ‘유키나’라고 불렀을 때 행복했는지도. 모두 다 알 수 없었다.
사실 꿈 자체에는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반복해서 꾸다보니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자신이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탓일 수도 있었다.
괜히 쓸데없이.
이상한 것에 정신력을 소모하지 말자고 생각하며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자신의 어깨 위에 부드럽지만 묵직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
이게 뭐야, 하면서 어깨 쪽에 손을 얹어 확인을 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덥썩 잡았다. 자신의 손 밑에 있는 것은 부드러운 천이었으며, 자신의 손 위에 있는 것은 누군가의 떨리는 손이었다. 다소 상반된 그 두 가지 감각에, 자신도 모르게 손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키세?”
그라는 것은 보면 알 수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올려다보아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던 중 그에게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나의…선물임다.”
“무슨 소리야?”
“‘나는 오늘 이걸 입고 행복했으니까, 유키오 씨도 행복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주는 선물.’”
“…….”
“‘정식으로 인정받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다르지 않으니까.’”
“…….”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
자신의 손을 잡아주고 있던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그 손길이 아쉽게만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살짝, 안타까움이 섞인 신음을 토해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곧 그의 손이, 팔이, 천과 함께 자신을 휘감았다.
“누나의 시로무쿠지만, 왠지….”
“…….”
“신부의 웨딩드레스 같네여.”
“…….”
“유키오 선배는 파랑색이 제일 잘 어울리지만, 흰색도 정말 잘 어울림다.”
“…그래서, 지금 날 신부 삼겠다고?”
“그러면 안 되는 검까? 신부의 예복까지 챙겨왔는데여.”
“네가 직접 챙긴 건 아니잖아. 누님이 선물로 준 거지.”
이거나 그거나 다를 바가 없다며, 살짝 투덜거리는 중얼거림이 귓가에 닿았다. 그 어린애 같은 투덜거림에 작게 웃음을 터뜨리다가, 그에게 살짝 손짓을 했다. 귓속말을 하고 싶으니 좀 더 가까이 다가오라는 것처럼.
“단 둘뿐인데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하려구여?”
“일단 숙여봐.”
요구사항이 많다며 투덜거리면서도 그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했다. 무슨 말을 속삭일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고개를 살짝 돌려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런 다음에야 그에게 작게 소근거리기 시작했다.
“신부로 맞이하고 싶거든, 반지 챙겨서 정식으로 프로포즈부터 해봐.”
“…유키오 선배!”
“물론 그 프로포즈가 늦어지거나, 내 마음에 안 들면 내가 널 신부로 맞으러 갈 거다.”
“……!”
“그 땐 이 시로무쿠도 입힐 테니까 각오해.”
꿈속의 카사마츠 유키오가 카사마츠 유키나였던 건, 잘생긴 키세의 옆자리는 왠지 아리따운 여자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카사마츠의 무의식 발현. 키세를 좋아하고 키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자각은 확실하게 하고 있지만, 저런 무의식 때문에 여자의 모습으로 키세와 결혼하는 꿈을 꾸었던 거라는 설정.
절대로 여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님.
결혼에 대한 약간의 환상 -> 상대는 당연히 키세 -> 키세에게 어울릴 법한 이상형 -> 아리따운 여자(무의식) -> ‘유키나’로 키세와 결혼하는 꿈 꿈. 정도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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