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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28 [황립] 무제. 키워드 : 질투하고 있습니까?
- 2015.02.21 [황립] Ringwechsel 키워드 : 카페
- 2015.01.17 [황립] 천성의 약함 키워드: 거짓말
- 2015.01.17 [황립] In the Library For. 로니
- 2015.01.10 [황립] 작은 꽃 한 송이 AU.나루토
- 2015.01.03 [황립] In a dream
- 2014.12.27 [황립] 키워드 : 나이
- 2014.12.20 [황립] 키워드 : 매니큐어
글
그걸 완전히 인지한 순간, 남자를 기다리는 여인이라는 존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겹게 느껴졌다.
*
어머니의 존재로 인해 이성에 대해서 환멸을 갖게 된 이후로, 유키오는 좀처럼 이성을 편하게 대할 수 없었다. 말 한 마디 건네는 것조차, 얼굴 표정을 다스리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것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을 것 같아서, 스스로도 완치되는 것을 반쯤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후궁 정원으로 산책을 나왔는데 왠지 소란스러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무슨 일이지.
유키오는 그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호기심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그것에 대해서 신경을 끄기로 마음 먹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키오는 이 넓디 넓은 궁 내에서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몇 번째인지 손에 꼽을 수도 없는 후궁의 소생. 권력 구도에서 밀려난 황자. 언제 내쳐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운명. 그랬기 때문에 언제나 숨을 죽이고 살아가고 있었기에, 시끌벅적한 분위기라는 것은 좀처럼 느껴본 적이 없었다. 무엇이 기쁘다고 즐겁게 지내겠는가. 무엇이 행복하다고 웃으며 지내겠는가. 웃었다고 목숨이 달아날 수도 있었고, 행복해 보인다고 정실 태생의 형제에게 있어서 눈엣가시가 될 수도 있는 게 유키오의 현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닫고 지내는 게 신상에 좋았다.
그래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신경을 끄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 소란스러움이 서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유키오는 그 분위기에 휩쓸리기 전에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정원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쪽을 주시했다. 그리고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듯이 어렴풋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에 띄어버리고 만 것인가.
유키오는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그리고 힐끔, 그 사람들에게로 한 번 시선을 돌렸다. 무리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여자들이었다. 게다가 이성이라는 것 이상으로 유키오 자신이 불편하게 여기는 이복 누나라는 존재들이었다. 무시하고 정원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까. 아니, 그렇게 한다면 분명 비난의 화살이 고스란히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에게 돌아올 터였다. 비록 어머니에게 환멸을 느꼈다고는 하나, 어머니를 그런 상황에 처하게 만드는 것은 아들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고개를 숙인 채로 있는 것뿐이었다. 이 행동은 유키오 자신의 자존심을 스스로 꺾어버리는 것일지는 모르나, 지금의 조용한 삶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들이 자신에게 말을 건네질 않길 바라면서, 최대한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기 전까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생각했던 인기척들이 서서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사박사박 하고 천 스치는 소리와 함께, 흙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딛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릴 정도가 되자 등 뒤로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손 끝에 닿은 옷자락을 자신도 모르게 꾹 움켜쥐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유키오 아닙니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높은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 뻔 했다. 하지만 간신히 참아내고는 좀 더 고개를 아래로 숙여, 지금 인사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 겉으로 좀 더 드러내었다.
지금 유키오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사람은 정비의 첫째 딸이었다. 황위 계승권은 없으나, 적자라는 이유 하나로 황제의 귀여움을 사고 있는 여자였다. 남자로 태어났으나 계승권도 아비의 사랑도 받아본 적이 없는 자신과는 천지차이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성격에서 또한, 유키오 자신과 사뭇 달랐다. 좋게 말하면 고고한 성격, 나쁘게 말하면 거만한 성격이었다.
"이 내가 말하는데 인사는 그것으로 끝인 겁니까?"
이전이라면 분명 천출의 태생이라 그 모양이니 뭐니 하는 소리가 돌아왔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좀 다른 것 같아서 아주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것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은 채,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움직여 다시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황녀님께 유키오가 인사 올립니다. 평안하셨는지요."
불편함을 이겨내도 육성으로 다시 인사를 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무시뿐이었다. 이런 여자였다. 직접적으로 모욕을 주기 힘들 땐, 인사 등을 빌미로 모멸감을 안겨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떻게 자신이 마주치게 되는 여자들은 다 이런 걸까, 하고 자조적인 생각을 하면서 유키오는 고개를 살짝 들어올렸다. 그러나 시선만은 그들과 마주치지 않게 바닥에 꽂은 채였다.
"신, 키세 료타. 제국의 황자님께 인사 올립니다. 평안하셨는지요."
귓가에서 윙윙대고 울리는 여자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어딘가 청량감이 느껴지는 것 같은 시원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 자신이 했던 같은 인삿말에, 유키오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들어올리고 말았다.
금빛. 제일 먼저 인식한 것은 태양빛을 받아 한결 더 빛나고 있는 화려한 금발이었다. 그 다음으로 인식한 것은 금발만큼이나 화려한 이목구비였다. 꽤 잘생긴 상판이구나, 하고 생각할 무렵 그의 얼굴 위에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 미소가 걸려 있는 걸 보게 되었다. 그리고 유키오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사람은 정중한 척 하고 있지만 속으로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점을 말이다.
"공 덕분에...."
"키세 공, 이제 그만 이 정원에서 나가 다른 곳을 거닐도록 하죠. 보고 싶지 않은 풍경을 보았더니 눈이 많이 피로해진 것 같습니다."
그의 인사를 받아 말을 되돌려 주려고 하자, 떼 지어 있는 이복 누이들 중 하나가 끼어들었다. 유키오는 자신의 목소리가 허공으로 스러지는 것이 왠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아무런 불평도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다시 시선을 땅에 꽂았다.
"저하께서 그러시다면야,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편이 낫겠군요."
그는 그를 에워싼 여자들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곧 그들 무리를 이끌고 다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키오는 떠나가는 그들 무리를 응시하고 있다가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그가 떠나기 직전 자신을 한 번 돌아보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표정에서 또 한 가지 말을 읽어낼 수 있었다. 마치 질투하고 있냐고 묻고 있는 듯 했다. 자신감을 넘어선, 오만함에 가까운 그 미소가 뇌리에 박혀 사라지질 않았다.
가슴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흔들리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질투인가. 유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이 감정이 질투라면, 자신은 그를 질투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곁을 차지하고 있는 누이들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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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
문을 살며시 밀어 열자, 문에 걸려있던 풍경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문에 풍경이 걸려있었던 것은 손님이 오고감을 알리기 위함이었는지, 풍경소리가 울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 직원의 부드러운 인사말이 바람처럼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서 오세요, 하고 울린 그 목소리에 가볍게 목례로 대답을 하고는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는 내부에 약간은 만족감이 묻어나는 숨을 작게 내쉬고는, 햇볕이 은은하게 드리우는 창가에 가까이 놓여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4인용 테이블과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4개의 의자. 이곳에 자리를 잡고 앉을 사람은 자신과 그 뿐이건만 자신과 그는 언제나 4인용 테이블을 선호하곤 했다. 딱히 이유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저 좀 더 넓은 자리를 선호해서였을지도 몰랐다. 자신이야 둘째쳐도 그의 키는 동년배 평균을 훌쩍 넘는 정도였으니까. 훤칠한 키의 소유자인, 자신의 애인을 떠올리면서 무의식적으로 옅은 미소를 입술에 걸었다.
이곳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그가 만나고 싶어졌다. 맞은편에 앉아서 상냥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그를 계속, 계속 바라보고 싶었다.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이 마음은 이미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인 것 같았다. 미소인지 조소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을 잠시 흘리고 있는데, 자신이 앉은 자리에 어렴풋이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했다.
“...아.”
“오늘도 ‘그 분’을 기다리시나보네요.”
“...네.”
목소리만큼이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낯익은 인상을 하고 있는 카페 직원이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그 친절함에 보답을 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했지만, 자신의 오래된 고질병은 쉬이 낫질 않아서 그나마 안면이 있는 직원에게조차도 단답식의 대답을 토해내고 말았다. 이 고질병은 언제야 낫는 걸까 싶어서 가벼운 자괴감에 젖어있는데, 직원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연신 말을 건넸다.
“원래는 손님께 함부로 말을 건네면 안 되지만, 두 분은 오랫동안 이곳에 방문해주시기도 해서 뭐랄까, 멋대로 친근감이 들어버려서요.”
“그렇습니까.”
“네. 물론 저만 그런 것은 아니고요. 다른 아르바이트생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
“오늘도 저 두 사람이 왔구나, 하고. 그리고 다음 주에도 또 방문해주실까, 하고.”
다음 주에도 또 방문해주실까 하고 생각했다는 직원의 말에 살짝 움찔했다. 자신이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되면서부터 그와의 스케줄이 잘 맞질 않았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주말 중 하루 정도는 꼭 서로에게 할애하기로 약속 아닌 약속을 나누었었다. 그리고 데이트를 하다 이 카페를 발견하게 된 이후론 언제나 다가오는 토요일마다 이곳에서 서로를 기다리고 만나는 것을 반복하는 암묵적인 룰이 생겼다. 그게 몇 번이고, 몇 십 번이고 반복되었으니 눈앞의 직원이 자신들을 일방적으로 친근하게 여기는 것도 있을 법 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분은 한 주도 빠짐없이 만나고 계시니까, 보고 있는 저희가 다 기분이 좋은 거예요.”
“...네.”
보는 본인들이 더 기분이 좋다는 직원의 말에는 조금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설마하니 그와 자신의 사이를 눈치 챈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자신의 입으로 그와의 관계를 생판 모르는 타인에게 털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만약 들키게 되면 그 관계를 부정하는 말을 꺼낼 생각은 없었다. 부정한다는 것은 그와 자신의 사이가 떳떳치 못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기에. 하지만 예상치 못한 아웃팅에 혹시나 그에게 피해가 갈까 싶어서 조금은 불안한 듯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테이블 밑에 숨기고 있던 양 손에 땀이 차는 것 같았다.
“그런 거 있잖아요? 사이좋은 친구 사이를 보면 흐뭇한 거. 게다가 두 분 다 훤칠하고 잘생겨서 분위기가 살거든요.”
“그...그렇습니까.”
“어머, 제 입이 주책이라... 죄송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주문은 ‘그 분’이 오시면 받겠다고 서둘러 본인의 자리를 돌아가는 직원을 잠시 동안 응시를 하고 있었다.
아웃팅은 아닌 건가.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알아차렸지만 일부러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입에서 확정을 짓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는 것 자체에서 안도감을 느끼면서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모를 아웃팅에 대한 불안감과 초조함이 서서히 가라앉아가자 다시 그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불안감과 초조함을 겪고 나니 그의 얼굴이 새삼 다시 보고 싶어졌다. 상냥하지만 어딘가 얼빠진 것 같기도 하고, 냉정한 얼굴을 할 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를 보게 되면 좀 더 진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뭐, 이걸 솔직하게 알려줄 생각은 없지만.”
테이블 위에 팔을 얹고 손 위에 턱을 가볍게 괴고는 중얼거렸다. 자신은 언제나 그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사그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커지는 것을 애써 숨기고 있었다. 그를 이렇게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어 오는 것을 숨기고 또 숨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보다, 자신이 그를 좋아하는 감정이 더 크다고 해서 졌다고 생각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은 애초에 버린 지 오래였다. 한창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 그를 만나고 그와 연애를 시작했던 그 초기 시점에서부터. 안정기에 접어든 지금에는 밀고 당기는 그런 파워 게임을 할 필요를 전혀 못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해질 수 없는 건 역시...
“우쭐해하는 모습이 보기 싫은 걸지도.”
언제 보아도 잘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여느 때보다 기가 살아서 우쭐해 있는 얼굴을 보면 본능적으로 한 대 때리고 싶단 생각이 들기 때문에 애초에 그 싹을 잘라버리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조차도 다 부질없고 쓸데없는 게 아닌가 싶어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딸랑.
다시 한 번 문에서 풍경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이어 직원이 손님을 맞이하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은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것 같더니, 이곳에 시선을 두게 된 순간 성큼성큼 이곳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약간은 흐릿하게만 보이던 실루엣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선명해지면서 총천연색으로 물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늦어서 미안해요... 컨펌이 늦어지는 바람에...”
“괜찮아. 바로 여기로 온 것 같으니까 봐줄게.”
촬영을 마치고 바로 온 것인지 그의 옷차림새는 여느 때보다 멋졌다. 평소에는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있던 머리카락도 왁스를 발라 가볍게 옆으로 넘겼고, 입술에도 무언가를 발랐는지 평소보다 살짝 광택이 돌고 촉촉해보였다. 그리고 은은하고 부드러운 향이 그에게서 감돌고 있었다. 색으로 따지면 옅은 아이보리색 같은 그런 따뜻하고 밝게 느껴지는 그런 향이.
“오늘 멋지네.”
“전 언제나 멋짐다!”
칭찬을 한 번 해주니 금세 기어오르듯이 우쭐하는 모양새의 그를 바라보며 못된 말을 한 번 던지려고 했다. 하지만 피식 웃어버리곤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도 자신이 그를 괴롭히는 말을 꺼낼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자신이 웃으며 시선을 잠시 돌려버리자 슬쩍 당황하면서 평소와는 다르다며 어디 아픈 것 아니냐는 말을 해댔다. 그래서 그 말에는 평소와 같은 반응을 해주었다.
“기어오르지 마라, 료타.”
“...넵.”
자신의 말 한 마디에 기죽은 강아지처럼 대답을 하는 그의 모습에, 창밖으로 돌렸던 시선을 다시 그에게로 고정시키고는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런 다음 손을 들어 직원을 부른 뒤, 그와 자신이 마실 음료를 한 잔 씩 시킨 다음 돌려보내고는 다시 둘만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료타.”
“네?”
“너, 이 카페 이름 뭔지 알고 있냐?”
“그럼요. 몇 년이나 다닌 곳인 걸요. Ringwechsel이잖슴까.”
“그럼 그 의미는 아냐?”
자신의 마지막 물음에는 그가 우물쭈물하더니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리곤 영어라면 그나마 알 수 있었을 텐데 영어가 아닌 것 같아서 도통 모르겠다고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말에 ‘너, 영어도 잘하는 편은 아니잖아.’ 하고 가볍게 툭 내뱉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내가 너에게 줄 것과 관련된 거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의미를 알아두도록 해.”
“...어디 나라 말인지는 알려주면 안 됨까?”
“싫은데. 스스로 알아서 찾아보도록. 남들에게 물어보는 것도 금지야.”
“그럼 인터넷은...?”
“인터넷도 금지. 어학 사전을 직접 뒤져보도록 해. 뭐, 제대로 나올진 모르겠지만.”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서, 너무하다고 투정을 부리는 그를 바라보면서 조금은 성격 나빠 보이는 미소를 연신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 잠시 생각했다. 역시 ‘그건’ 자신이 그에게 주는 쪽이 타당하다고. 왜냐고 묻는다면,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카페의 이름에 대해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직원이 음료를 가져다주자 그것들을 받아 들어, 하나는 그의 앞에 놓고 하나는 자신의 앞에 두었다. 딸려 나온 티스푼으로 자신의 컵 안을 가볍게 휘저은 다음에 티스푼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잔을 들어 올려 음료로 입술을 축였다. 고민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 때문인지, 아니면 좀 전의 해프닝으로 인해 입 안이 말랐던 것이 음료 덕분에 괜찮아진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절로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프로포즈는 나의 권리이자 의무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좀 더 고민해보도록 해, 료타.’
* Ringwechsel : n. (결혼식에서의) 반지 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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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이면 ‘그 날’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곤 했다. 무채색으로 물든 풍경. 충격을 받다 못해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모진 말을 내뱉고 있는 자신의 목소리. 그리고 그와 자신을 적시는 빗방울과 바닥으로 떨어져 자잘하게 부서지는 비의 구슬픈 소리.
*
오늘도 ‘그 날’과 마찬가지로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어.]
[어제도 그리 할 일이 없어서, 하루를 만끽한 기분이야.]
[그래도 별로 네 생각을 하거나 하진 않았어.]
아니, 그래도 실은 조금은 했을지도, 하고 자조를 하면서 편지지 위에 글을 써 내리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손에 들려 있던 펜을 툭 내던지듯이 책상 위에 내려놓은 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은 비구름 탓에 옅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닫힌 창문에선 아직도 내리고 있는 빗방울이 부딪히는지 연신 토독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때와 같은 풍경이구나, 하고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듯이 혼잣말을 했다. 그 날도, 자신이 그에게 이별을 고하던 날에도 이렇게 비가 내렸었다.
그 날의 하늘도 지금과 같이 옅은 잿빛이었고, 그 하늘 아래 그와 자신은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마주보고 서있었다. 다소 갑작스럽게 이별을 고하는 자신을 붙잡으려고 그가 손을 뻗었을 때 자신이 그 손을 거세게 내쳐버려 그의 손등이 붉게 물든 것을 제외하면, 그 때의 풍경은 무채색 일색이었다. 다채로운 색을 용납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빛 바래버린 색깔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요...? 제 잘못이 있다면 뭐든 고칠 테니까, 제발 헤어지자고 하지 말아주세요.]
네 잘못은 아무 것도 없었어, 료타. 환청과도 같이 자신의 귓가에 맴도는 그의 목소리에 대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창 밖을 멍하니 내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신의 말 그대로였다. 그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그건 자신에게 있었다. 점점 빛을 발하는 그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혼자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추악한 자신에게. 순수하고 올곧은 마음으로 자신에게 넘치는 사랑을 안겨주었던 그와는 달리, 점점 이기적으로 사랑을 하기 시작했던 글러먹은 자신에게.
[사랑해요. 정말로 사랑해요. 절 버리지 말아주세요.]
버리지 말아달라는 그의 말을 들었던 순간, 그 때의 자신은 아주 잠시 웃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 언제나 과분하리만치 사랑을 안겨주었지만 그 감정에 얽매여 있지는 않았다. 본인에게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와는 다르게, 그에게 건네주는 사랑에는 지나칠 정도로 인색하게 굴면서도 그 감정 하나 하나에 얽매여 있었다. 스스로에게 믿음이 없는 사람의 표본, 그 자체라고 해도 좋았다.
그렇게 자신과는 다르다고 생각되던 그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얽매여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도 자신과 다를 바가 없는 건가 싶어서 웃음이 나왔던 것 같았다.
그래서 버리지 말아달라는 그의 말에 자신은 뭐라고 대답을 했었던가. ‘모델 님이잖아? 그런 모습 어울리지도 않고, 멋지지도 않으니까 그만 둬.’ 라고 했었던 것 같았다. 그런 자신의 대답에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는 그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가는 그의 안색이 여느 때보다 인상 깊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자신은, 평소 보지 못했던 그의 일면을 본 것 같은 기분에 고취되어가고 있었다.
“쓰레기.”
쓰레기 그 자체였다.
그를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혼자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혼자 일어날 힘조차 잃어버리게 되어 자기연민이라는 진흙으로 점철된 바닥을 구르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모든 것은 스스로가 자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그에게 돌려버렸다.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그 때문이라고. 자신이 이렇게 나락까지 떨어지게 되어 버린 것은 모두 그의 탓이라고.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는 창밖을 내다보던 시선을 다시 책상 위로 돌렸다. 쓰다가 만 편지지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비가 내리고 있다는 일상 이야기를 적어내린 편지. 그리고 그 아래에 적은 ‘네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문구.
“거짓말쟁이.”
그의 생각을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머릿속 한 가득, 그 날 보았던 그의 얼굴이 떠오르는데 어떻게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비가 내리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그 날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데 어떻게 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양 손 가득 넘치도록 받은 그의 사랑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마음 속에서, 기억 속에서 자신을 지웠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와의 연은 이미 기한이 끝나버린 소모품 같이 되어버린 인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자신은 그 사랑을 놓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애처롭게 자신을 붙잡던 그의 손을 내쳐버린 당사자가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너와 멈추어버린 나. 줄어들지 않는 그 틈을 무엇으로 메울까.”
무엇 하나도 솔직하게 이야기 할 수 없는 자신으로선, 그 틈을 메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스스로 그를 버려버렸기 때문에 그를 붙잡는 것조차 할 수 없어, 제자리에 멈추어 서서 기다리는 수밖엔 없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를, 영원히, 이 자리에서 기다리는 수밖엔 없다.
“겁쟁이에, 거짓말쟁이에.... 가지가지 한다, 진짜.”
책상 위의 편지지를 집어 들어 양 손 안에 넣고 구겼다. 오늘도 그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가 또 한 장, 쓰레기통 안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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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먼발치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고, 타오르는 격정적인 마음을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경우에는 ‘그 사람’에게 닿음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얻고, 보다 편안해진 마음으로 그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것에 가깝다. 그렇게 키세 료타는 생각했다.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들어 메시지 창을 켜고는 연락처에서 그의 이름을 찾았다. 수신인 이름 자리에 카사마츠 유키오라는 이름이 새겨지자, 조심스럽게 아래쪽에 위치한 본문 창을 톡, 하고 손끝으로 건드렸다. 커서가 아래쪽으로 이동하는 것에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무슨 내용을 써야 하나 잠시 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움직여 천천히 메시지를 적어 내려갔다.
[카사마츠 선배, 혹시 주말에 시간 있슴까? 선배만 괜찮으면 그때 만나고 싶은데요.]
무심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후회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키세 료타’라는 사람은 이렇게 사람을 사귀는 데에 있어서 서툰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상대로 하고 있을 때는 매사에 서툰 사람이 되곤 했다. 말에서부터 행동까지, 서툴지 않은 부분을 찾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 마치 첫사랑을 시작한 어린 아이처럼.
“아, 정말. 좀 더 돌려 말했어야 하는 건데.”
밀고 당기기가 안 되잖아, 이건. 고뇌 어린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고는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카락을 손으로 헝클어뜨렸다. 좀 더 요령 좋게 만날 약속을 잡았어야 하는데, 라는 후회가 자꾸 고개를 들어서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그 순간 핸드폰에서 착신 음이 들렸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서 핸드폰을 집어 들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시간이야 있긴 한데... 너 조만간 시험 아니냐?]
“시험...이긴 한데, 그래도... 만나고... 싶슴다. 전송.”
방금 전까지 서툰 자신을 타박하고 있던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만나고 싶다는 감정만이 앞서 그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은 어조의 메시지를 그에게 보내고 말았다. 역시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난 후에 다시금 후회가 찾아들었지만.
[시험이면 시험에 신경 써야지. 그러다 너 후회한다?]
시험에 신경 쓰라는 그의 답변이 다시 날아오자, 핸드폰을 내려다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시험이 중요하다는 것도, 시험에서 낙제 점수를 받아서 추가시험을 보게 되면 향후 시합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시험에 집중하라는 식으로 나오자 섭섭하기도 하고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그래서 고집스럽게 그에게 주말에 자신과 만나달라고 요구하는 문자를 보내려는 찰나, 그에게서 새로운 문자가 날아왔다.
[시험 앞두고 그냥 놀긴 그러니까, 토요일에 OO역 근처 도서관 앞으로 나와라. 네 공부도 지켜볼 겸 나도 공부나 해야겠다.]
자신이 공부하는 것을 지켜보겠다고, 그러니 주말에 도서관 앞으로 나오라는 문자였지만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기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답장을 그에게 전송했다.
*
그를 만날 수 있는 주말만을 기다리고 있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아, 쟤 주말에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구나.’ 하고 알아챌 정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이, 주중에 간간히 그에게 ‘약속’에 대해 잊지 말아달라는 문자를 보내고, 잊지 않았으니 확인 문자 좀 그만 보내라며 그에게 꾸지람을 듣는 일상을 반복했다.
그렇게 주말이 되고, 여느 때보다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구색을 맞추기 위해 가방 안에 시험 대비용 문제집 두어 권과 필통을 챙겨 넣은 뒤에 집 밖으로 나왔다. 그와 만나기로 한 도서관은 그의 집에서도, 자신의 집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빨리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카사마츠 선배!”
“아, 키세.”
도서관 정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라는 확신이 들어서 달리는 와중에도 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감대로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그였고,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화답했다.
“늦은 것도 아닌데 왜 달려오고 그러냐?”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서 그랬슴다.”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 달려왔다는 자신의 말에, 그는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시선을 돌리고는 손으로 본인의 뒷목을 쓸었다. 그리곤 싱겁긴, 하고 퉁명스러운 어조로 덧붙이고는 들어가자며 살짝 고갯짓을 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서관이었지만 방문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쾌적하고 깔끔하게 꾸며진 도서관 내부를 본 순간 무의식적으로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런 자신의 태도에, 그는 ‘얼마나 이런 곳을 안 와봤으면 그런 반응을 보이냐’며 가볍게 자신의 등을 때렸다. 명목상 그와 공부를 하러 도서관에 왔지만, 자신에게 있어선 도서관 데이트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아무렴 어떠냐는 듯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이곳은 서적 코너뿐만 아니라 열람실 같은 곳도 공부하기 좋게 꾸며져 있더라고. 독서실 같은 책상 있는 곳은 네 공부를 봐주기 힘드니까... 개방형 책상이 있는 곳으로 갈까?”
“전 잘 모르니까, 카사마츠 선배가 편할 대로 하십셔.”
“너, 이제 머지않아 수험생이 될 텐데 공부하려면 관심 좀 가져야 하는 거 아니냐?”
“에이, 어떻게든 되겠죠.”
“방심하다가 큰 코 다친다, 망할 모델 녀석아.”
그의 대답에, 그거 카사마츠 선배의 과거 이야기 하는 검까? 하고 덧붙이니 그의 얼굴색이 울긋불긋한 색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발로 자신의 엉덩이를 세게 걷어찼다. 맞은 부위에서부터 찌릿하게 몸을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울상을 지으면서도, 척척 앞으로 걸어 나가는 그를 따라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자리를 잡은 곳은 창가 바로 앞에 놓인, 직사각형 모양의 4인용 테이블이었다. 그가 창가를 등지고 있는 위치에 있는 의자 하나를 빼내어 앉자, 자신도 따라 그의 오른쪽 옆 자리 의자를 빼내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건너편에 앉아. 바로 옆 자리에 앉으면 공부하기 불편하잖아.”
“제 공부 가르쳐주신다 하지 않았슴까? 그럼 나란히 앉는 편이 낫잖아요.”
“... 지켜본다고 했지, 가르쳐준다고 한 적은 없는데.”
“에이, 그게 그거죠.”
엄연히 다른 말이거든? 하고 대답하는 그의 작은 목소리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자신을 타박하면서도 공부를 가르쳐줄 생각이었는지, 참고서와 문제집을 꺼내들라고 하더니 자신의 시험범위를 물어왔다. 일단 들어둔 게 있긴 해서 어디부터 어디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그가 내용을 한 번 훑어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 내용이라면 어느 정도 도움 줄 수 있겠다. 아직 기억나는 부분이기도 하고.”
“정말요? 살았다. 실은 수업 제대로 못 들었거든요.”
“자랑이다.”
그가 주먹으로 자신의 정수리를 가볍게 쥐어박더니, 시험 범위 초반부 페이지를 펼치곤 차분한 목소리로 천천히 이론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살짝 눈을 내리깔고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단정한 옆얼굴이 묘하게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읊어주는 책 내용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고, 책을 보아야 하는 시선을 그에게 고정시킨 채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설명을 하던 그가 이해했냐고 물어보면서 자신을 돌아보자, 그제야 퍼뜩 현실로 돌아오게 되어서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이해했으니 다행이라고 덧붙이며, 설명은 이쯤하면 된 것 같으니 문제를 풀어보라고 이야기를 했다. 실상은 책 내용은 안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문제를 풀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딴 짓 했다는 것을 그에게 들켜 또 구박을 받고 싶진 않아서 아무 말 없이 주섬주섬 책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문제를 푸는 시늉이라도 하려 하자, 그는 본인의 가방에서 전공 서적으로 보이는 것을 꺼내들고 천천히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
아무리 몰라도 문제 두어 개 정도는 풀어야 할 것 같아서 문제집을 들여다보긴 했다. 하지만 아는 게 없으니 문제를 풀 수 없을뿐더러, 옆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그가 자꾸 신경 쓰였다. 그리고 순간, 책이 아니라 자신을 봐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선은 문제집이 아니라 그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손끝이 그에게로 향하더니 그를 가볍게 툭툭 건드리게 되었다. 마치 어린 남자아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시선을 끌려고 장난을 치는 것처럼. 몇 번은 그도 무시를 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자신이 집요할 정도로 그를 툭툭 건드리고, 자잘한 접촉을 하기 시작하자 그가 슬쩍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돌아보았다. 그가 자신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그는 이내 제 문제집 쪽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더니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문제를 하나도 못 푼 것을 그에게 들키고 말았다는 생각에, 머쓱한 미소를 지으면서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샤프를 빼앗아드는가 싶더니, 문제집 한 쪽 귀퉁이에 무언가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만해라. 공부나 해.]
자신을 돌아본다 싶었더니 역시 돌아오는 말은 그만해라, 공부나 해라, 라는 말 뿐이었다. 시험을 앞두고 있으니 그 말이 옳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름 오랜만에 만난 것인데 이런 말만 주고 받는 것은 조금 섭섭하기도 해서 투정을 부리고 싶어졌다. 애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그와 닿고 싶었으며, 그것을 통해서 그의 애정을 확인하고 싶었다.
“...손잡게 해주세요. 그럼 제대로 공부할 테니까.”
“뭐?”
“다른 것도 아니고, 손만 잡게 해달라는 거예요. 어차피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텐데요?”
그는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자신들이 앉은 곳은 창가를 바로 등지고 있는 테이블이었다. 뒤로 누군가가 지나갈 일도 없었고, 앞으로 누군가가 지나간다고 해도 테이블 위에 놓인 책과 자신들의 얼굴만 보일 터였다. 그러니 아무리 주변 확인을 한다고 한들 들킬 구석이라곤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듯이 약간은 으스대는 것 같은 얼굴을 한 채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작게 신음을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챕터 다 읽을 때까지 만이야. 알았냐?”
“네, 알겠슴다.”
“하여간. 너도 나도 오른손잡인데... 네 왼손 잡으려면 난 오른손을 희생해야 되잖냐.”
불편하다느니 어쩌느니 투덜투덜 말은 많아도, 살짝 테이블 밑으로 손을 잡으니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맞잡아 주었다. 맞닿은 손바닥을 통해서 그의 체온이 전해졌다. 그리고 자신을 생각해주는 그의 애정 또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왠지 꾹 다물린 입술 사이로 즐거움이 묻어나는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자신은, 키세 료타는 그에게 닿아있을 때에야 비로소 안정감을 느끼고, 그 접촉을 통해서 그의 애정을 느끼고 점점 커져가는 자신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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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잠시 마을에 나왔다가, 한 공터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공터에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살짝 시선을 돌려보니 한 아이가 공터 구석진 곳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무리 봐도 모르는 아이였기에 그냥 지나칠까 싶었지만, 자신보다 두어 살 어려보이는 그 아이의 등이 왠지 모르게 외로워 보여서 무의식적으로 그 아이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게 되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자신의 인기척이 느껴질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옆을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답 한 마디 꺼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무시로 일관한 채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무시를 당하는 건 익숙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리 기분 좋은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순 '그냥 갈까' 하고 생각을 했지만 몸은 다시 멋대로 움직여 그 아이의 옆에 같이 쪼그리고 앉게 되었다.
"뭘 보고 있어?"
"..."
"어, 꽃이네?"
아이가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척박한 공터 위에 핀 작은 꽃 한 송이었다. 크고 화려한 다른 꽃들과는 달리 소박하기 짝이 없었지만, 꽃을 구성하고 있는 작은 꽃잎들은 안쪽은 부드러운 노란빛이었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선명한 푸른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어 아기자기하게 예쁘다는 느낌이었다.
"예쁘네. 이 꽃, 좋아해?"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아이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일순 숨을 잠시 들이켰다. 순간적으로 여자아이로 착각한 탓이었다. 물끄러미 꽃을 내려다보고 있는 두 눈가엔 빽빽하고 섬세하게 자란 긴 속눈썹이 자리 잡고 있었고, 오똑한 코며 도톰한 입술 모두 예쁜 여자아이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여자아이가 아니라는 걸 바로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아이가 본래 지니고 있던 분위기 탓일지도 몰랐다. 자신 또래의 어린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또한 어두운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꽃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에야 비로소, 아이는 꽃에서 시선을 떼고 자신을 돌아보았다. 다시 한 번 예쁜 눈이구나 하고 생각할 무렵, 아이는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꽃을 돌아보더니 팍 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얹어 두었던 손을 뻗어, 가련할 정도로 위태위태하게 자라고 있던 들꽃을 거칠게 꺾어버렸다.
"안 좋아해, 이런 꽃."
"..."
"자기가 피어날 장소도 제대로 모르고 피어난 꽃 따위. 어차피 금방 죽어버릴 거잖아."
"..."
"죽어버리면 그만인 거야. 무가치 해."
아이의 목소리에는 분노와도 같은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어렴풋이 슬픈 기색도 묻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강도로 따지자면 분노가 좀 더 강한 것 같았지만, 은연중에 드러난 슬픔이 왠지 자신의 가슴을 울리고 있었기에 이대로 아이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손목을 잡고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이게 언제 적 일이더라."
눈꺼풀 위에 드리우는 아침 햇살에 잠에서 깨어나, 건조해진 눈을 손등으로 가볍게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벌써 20년 가까이 된 일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하품을 한 번 크게 한 후,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서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일상의 당연한 수순대로, 세안과 샤워를 한 뒤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쳤다. 먹은 것 뒷정리까지 끝낸 후에야 아카데미에 출근할 준비를 마치곤 밖으로 나와 현관문을 잠갔다.
"아아, 공기 좋다."
아카데미의 선생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임무에 나간 사람들보다는 늦게, 그리고 일반적인 업무를 보는 사람들보다는 늘 이른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약간은 서늘하지만 상쾌하게만 느껴지는 아침 공기를 기분 좋게 들이마시면서, 여느 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카데미로 향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 카사마츠 선생님. 좋은 아침이에요."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반쯤은 버릇이 되어버린 아침인사를 건네자, 자신보다 먼저 와 있던 선생이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그 선생은 자신이 앉는 자리 맞은편에 앉아 있었는데, 그 자리는 어제까지만 해도 비어있었다.
"임무에서 돌아오셨군요. 이번에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하, 수고는요, 뭘. 교류하고 있는 마을들에 전령으로 다녀온 것뿐인 걸요."
"급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임무는 임무잖습니까. 마을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덤덤한 어조로 그의 공로를 치하하자, 선생은 조금은 쑥스러워 하는 기색을 표하더니 '그런가요?'하고 짧게 덧붙이면서 대화를 마쳤다. 아침 인사는 자신도 이정도로만 하면 될 것 같아서, 그 이상 말을 꺼내지 않은 채 짐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는데 책상 위에 못 보던 것이 있어서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꽃?"
꽃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많이 부족할지도 모르는 작은 들꽃 한 송이였다. 하지만 왜 꽃 한 송이가 여기 놓여있는가 보단 누가 이걸 두고 갔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에, 자신보다 먼저 와 있던 선생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제가 오기 전에 누가 절 찾아왔습니까?"
"네? 적어도 제가 온 후에는 없었는데요."
"그럼 누구지..."
들꽃을 내려다보며 고민을 하고 있자, 선생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카사마츠 선생님이 담당하고 있는 반 아이들이 아닐까요?' 라고 덧붙였다. 그 말에 생각나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가능성을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수업에 성실한 코보리였으나, 자신에게 꽃을 줄 이유는 없었다. 그 다음은 모리야마였는데, 간간히 꺾은 꽃을 남들에게 뿌리고 다니긴 했으나 그 대상은 여자 한정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둘의 이름을 머릿속 리스트에서 지우고, 이어 하야카와와 나카무라의 이름도 리스트에서 소거했다.
"대체 누가....아."
리스트 내의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소거시켜나가며 고민하고 있던 도중, 오늘 아침 일어나기 전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설마."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꽃과 연관된 자신의 추억은 그 때의 일, 단 한 가지뿐이었지만 그 때의 그 아이가 지금 와서 자신에게 꽃을 줄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침에도 떠올렸다시피 벌써 근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바람에 흩날리던 꽃이 열린 창문을 통해 날아 들어와 자신의 자리에 떨어졌다, 정도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려버리자 곧 꽃에 대한 것은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업 준비와, 아카데미를 졸업해 닌자 시험을 칠 아이들의 목록을 추리는 것으로 머리가 가득 차버리고 말았다. 간간히 교실로 수업을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다가 호카게가 자신을 부른다는 말을 전달 받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들에게 잠시 호카게를 뵙고 오겠단 말을 남기고는 아카데미를 빠져나왔다.
아카데미 안에 있을 때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감을 제대로 못 잡고 있었는데, 밖에 나와 하늘을 바라보니 시간이 꽤 흘러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서쪽 하늘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카게 님을 뵙고 나오면 퇴근 시간이겠는걸."
그렇게 생각하니 좀 더 느긋하게 다녀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곧, 임무 수행과 함께 시간 엄수도 목숨같이 여겨야 하는 닌자가, 그것도 그런 닌자를 육성하는 선생이 가질 마음가짐이 못 된다고 스스로를 질책하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시라도 바삐 다녀오려고 발을 움직이고 있는데, 눈앞에 나풀나풀 꽃 한 송이가 떨어졌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시야를 가리는 꽃을 가볍게 낚아챘다. 그러자 더 많은 꽃이, 마치 계절을 잊은 눈이 내리는 것처럼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건?"
일순 눈같이 흩날리는 꽃이 예쁘다고 생각을 했지만, 이내 누군가가 자신에게 환술을 거는 것인가 싶어서 눈빛을 달리하며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환술을 해제할 인을 맺으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누군가에 의해 손목을 붙잡혔다. 그러나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그 손길은 조심스럽고 부드럽기 짝이 없어서, 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자신은 만난 적이 없는 모르는 사람 같았다. 단지 현 시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입고 있는 것과는 다른 '암부'의 복장을 상대가 입고 있었다는 점과, 신상이 드러나지 않도록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는 암부 특유의 흰색 여우가면 너머의 얼굴이 왠지 웃고 있는 것 같단 느낌이 든다는 점이었다.
"암부가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예전과는 다른데요? 예전엔 좀 더 상냥했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그런 모습도 나쁘진 않네요, 라고 암부는 영문을 모를 말을 하면서 작게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같은 나뭇잎 마을의 닌자라고는 하나 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을 육성하는 자신과, 호카게 직속 암살 부대에 속해 있는 상대와는 접점이 없었다. 그런 상대가 마치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기분이 껄끄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욱 무뚝뚝한 어조로 상대에게 대꾸했다.
"볼일이 없으시다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호카게 님의 명을 받고 가는 중이기에."
"'죽어버리면 그만인 거야. 무가치 해.'"
"...!"
이전에 공터에서 만났던 아이가 꺼낸 말이었다. 다른 누구에게도, 심지어 부모님에게도 이야기 한 적이 없었기에, 자신을 제외하곤 그 아이만이 알고 있는 말이었다. 그 말을 어떻게 눈앞에 있는 암부가 알고 있는 것일까.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여우 가면을 쓰고 있는 암부의 얼굴을 응시했다.
"어떻게 그 말을..."
"제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당신이 이렇게 대답을 돌려줬었죠. 꽃이 가득 핀 곳으로 데려가서, 화관을 만들어 주면서."
"..."
"'네가 보기엔, 네 손으로 그렇게 꺾어버린 작은 들꽃이 무가치해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다른 꽃들과 엮어 화관을 만든다면, 어느 누군가를 미소 짓게 해줄 수 있는 가치정돈 갖게 되지 않을까?"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오늘 아침에 꾸었던 꿈의 연장을 보는 것처럼 천천히 읊조리듯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말을 꺼내고 나서 스스로가 놀라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자, 앞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암부는 손을 들어 올려 본인의 가면을 벗어 내렸다.
그때처럼 예쁜 여자아이 같은 느낌은 많이 사라져 있었지만, 그래도 남자이면서도 예쁘장하다고 느낄 정도의 잘생긴 외모가 가면 너머로 서서히 드러났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이렇게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곤 얼른 시선을 돌렸다.
"미안합니다, 암부 신상은 극비인데.."
"아, 괜찮슴다. 어차피 이제 자주 볼 텐데요."
"자주요?"
그런 게 있슴다, 하고 상대는 싱긋 눈웃음을 짓더니 검지를 입술에 살짝 대고는 이 이상은 비밀이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리고 그는 양 입 꼬리를 부드럽게 끌어올려 웃더니 다시 입술을 열었다.
"제 이름, 키세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카사마츠 선생님."
>
왠지 프롤로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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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전력 60분, 키워드 : 기다려줄래(요)?
고등학교 때부터 해온 자율연습은 거의 내재화 된 습관과도 같아서,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나면 간단한 트레이닝을 하거나 근처 공원을 달리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하아.”
달리던 발이 집 근처에 도착할 즈음에야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속도를 더욱 줄여 걷는 수준이 되었을 즈음에는 어느덧 집 현관문 앞이었다.
“땀범벅이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고는, 한 손으로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훔쳐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운동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일상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땀으로 흥건한 트레이닝복이라던가, 주변 공기가 온 몸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듯한 감각은 익숙해질 법 함에도 불구하고 익숙해지지 않았다.
찝찝하다.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바로 입 밖으로 내뱉고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리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 신발을 벗고 안에 들어서면서, 상체 실루엣을 드러낼 것만 같이 들러붙어 있는 상의를 다소 거칠게 벗어 던졌다. 그리곤 달리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바로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나머지 옷을 벗어버린 뒤, 러닝을 하느라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몸을 쿨다운 시킬 겸 체온보다는 아주 조금 낮은 온도의 미지근한 물로 땀으로 흠뻑 젖어있는 몸을 한 번 씻어 내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땀에 푹 젖어있는 머리카락을 샴푸로 말끔하게 감은 후에, 욕실 한 쪽 벽에 걸려 있던 샤워 타올을 집어 들어 바디 워시로 거품을 낸 뒤 몸을 꼼꼼히 닦았다.
처음 몸에 끼얹었던 물보다 조금 더 차가운 온도의 물로 거품마저 싹 씻어 내리고 나자, 한껏 뜨거워져 있던 몸이 조금은 진정을 한듯 평소의 상태를 되찾은 것 같았다. 샤워 후 찾아드는 상쾌함에, 욕실에 들어오기 전 불쾌함이 가득한 얼굴과는 달리, 마치 콧노래라도 흥얼거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한 채로 잘 마른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아냈다. 그리고 젖은 머리카락을 대강 수건으로 감싼 채 밖으로 나와 얼른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야 살 것 같네.”
집에서 입는 편한 옷을 챙겨 입은 후에야 비로소, 어딘가 한숨이 어린 것 같은 목소리로 살 것 같다는 말을 토해냈다. 그리곤 반쯤 버릇처럼 핸드폰을 찾아서 누구에게 연락이 온 것은 없는지 확인을 했다. 아쉽게도 자신에게 연락을 한 사람들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이들 뿐이었다. 오늘도 깨어진 기대감에 살짝 울상인 표정을 지어보이다가, 냉큼 메시지 창을 켜곤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운동하고 왔더니 체력이 제로가 되어 버렸슴다. 아~ 힘들다. 선배는 뭐하고 있슴까?]
원체 답장을 바로 보내는 사람도 아니고, 문자를 일일이 찍고 있는 시간이 아깝고 또한 귀찮다며 연락은 되도록 전화로 하는 사람이었기에 지금 보낸 자신의 문자에 바로 답이 돌아올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일이라도 하며 느긋이 그의 연락을 기다리자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챙겨든 채 침대 위로 올라가 편히 누웠다.
*
그러다 어느 순간 시야가 바뀐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라?”
분명 자신의 방에, 그것도 침대 위에 누워 있을 터였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곳은 늘 보던 자신의 방 전경이 아니라, 익숙하다면 익숙한 카이조의 로커 룸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정말 질릴 정도로 본 풍경이었기에 착각을 하려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지금 자신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자, 시야가 살짝 왜곡되는 것 같더니 로커 룸 한 쪽에 어느 인물의 인영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흐릿하더니 서서히, 마치 ‘진짜 사람’처럼 선명해지기 시작한 그 인영은 어느새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상이 또렷해졌다.
“...카사마츠 선배?”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꿈속에 나타난 인물은, 자신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하는 그 사람이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레귤러 유니폼을 입고 있는 상태로 로커 룸의 간이 의자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는, 자신이 가까이 다가갔을 즈음에야 인기척을 느꼈는지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올린 그와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자신은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그의 눈에서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 것 같은 기색을 읽어낸 탓이었고, 두 번째는 그의 얼굴이 자신이 맨 처음 그를 만났을 때보다 더욱 앳된 탓이었다. ‘지금의 그’도 제 나이로 보이지 않을 만큼 앳된 얼굴이었지만, 꿈속의 그는 그것보다 더욱 어려 보였다.
“카사마츠 선배... 맞죠?”
“... 날 선배라고 부르는 걸 보면 넌 1학년이겠군.”
“네?”
자신을 1학년이라고 단정 짓듯 이야기를 하는 꿈속의 그의 목소리에 조금은 당혹스러움이 묻어나는 어조로 반문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의 말에 반응할 기력도 없다는 듯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그의 한숨에서 깊은 고뇌와도 같은 무언가를 느껴서 고개를 조금 숙여 그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무슨 일 있슴까?”
“알고 있을 텐데? 아니면 아픈 구석을 찔러 죄책감을 이 이상으로 안겨주고 싶은 건가?”
“영문을 모르겠는데요.”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대답을 한 자신을 올려다보면서, 그는 미심쩍은 표정을 잠시 지어보였다. 그리곤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다시 한 번 낮은 한숨을 토해내더니 혼잣말을 내뱉는 것처럼 천천히 읊조리는 것 같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의 시합을 생각하고 있으면 절로 위축되는 기분이 되곤 해.”
“그 때의 시합?”
“... 내 미스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이없게 탈락하는 일은 없었겠지. 아니, 우승을 노려볼 수도 있었겠지.”
그 정도로 강한 팀이었는데, 하고 그가 쓴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이전에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가 2학년이었을 때 그의 실수로 인해서 우승을 노려볼 수 있는 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1회전 탈락이라는 고배를 마셨다고 하는 그 이야기가.
자신은 그때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듣곤, 여느 때보다 승리에 대한 염원을 가슴에 품었었다. 비록 자신이 참전했을 때의 시합 결과는 그의 아픔을 배가시킬 뿐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긍지는 드높기 짝이 없다고 그 때 새삼 다시 생각했었다. 하지만 죄책감을 홀로 끌어안고 있는 시기의 그를 마주하게 되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당시의 그’와 ‘자신이 만났던 시기의 그’는 다른 건 아닐까, 하고.
“그래서 ‘구원받고’ 싶은 겁니까?”
“뭐?”
“과거를 속죄하고 싶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자신의 목소리가 점점 싸늘해져가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도 그걸 느꼈는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얼마간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은 채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싸움 아닌 싸움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그로, 그는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떴다.
설마 포기한 것인가. 왠지 모르게 불안해지는 마음에, 노려보는 것처럼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안감과는 달리, 그의 눈은 여느 때보다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결심을 굳힌 것 같은 그런, 굳건함을 엿볼 수 있는 그런 눈빛이었다.
“과거를 속죄하려 하진 않겠어. 또한 누군가의 구원을 바라지도 않겠어.”
“......”
“내 스스로의 의지로... 다음에는 꼭 이기겠어.”
그의 마지막 말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와 같은 말을 했다. 잠깐 위축되었다고는 해도, 비록 자신이 꾸는 꿈속의 인물일지라도, 그는 변함없이 올곧고 강한 그였다.
“내가 왜 후배에게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헛웃음에 가까운 숨을 잠시 토해내더니 그가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그런 그를 잠시 지켜보고 있다가, 그의 앞에 살짝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양 손으로 그의 한 손을 감싸 쥐고는, 마치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 그 손을 자신의 이마에 가볍게 댔다.
“물론 시합에서 매번 이길 수는 없슴다.”
“......”
“시합에서 지고 난 후 자신을 질책하게 되는, 이번 같은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슴다.”
“......”
“그렇지만 전, 당신에게 받은 게 많으니까 그 보답을 하려고 함다.”
“...보답?”
아무런 대답 없이 듣고만 있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물음에, 살짝 입 꼬리를 끌어올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우승컵을 안겨 주겠슴다. 카이조가 하나로 뭉쳐 얻어낸 결과물을.”
“......”
“그러니까, 기다려줄래요?”
그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일말의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을 즈음, 그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무슨 말을 자신에게 건네고 있었다.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인 것 같았으나, 서서히 꿈에서 깨어나고 있는 탓인지 몰라도 그의 목소리는 자신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
“...아.”
눈을 뜨자 카이조의 로커 룸이 아닌, 익숙한 자신의 방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카사마츠 선배...”
그에게 문자를 보내고 잠든 탓에, 그와 관련된 꿈을 꾸게 된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 베개맡을 손으로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손끝에 걸린 핸드폰을 집어 들어 혹시 답장이 오지는 않았나, 하고 확인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그가 보낸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꿈의 연장선상인지는 몰라도, 괜히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며 그가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미안. 한숨 자고 있었어. 근데 꿈에 네가 나왔더라.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문자를 읽고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그와 자신이 같은 꿈을 꾼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 우연이 과연 그와 자신 사이에 존재할지 여부는 잠시 미루어두고, 한껏 웃고 있다가 느긋한 손놀림으로 그에게 답 문자를 보냈다.
[저도 방금 전까지 선배가 나오는 꿈꾸고 있었는데! 그 꿈을 꿨더니 선배가 더 보고 싶어졌슴다!]
‘그러니까, 기다려줄래요?’
‘기다릴게. 카이조의 우승을. 네가 안겨주는 우승컵을. 내가 졸업한 후라도 좋으니까, 언제까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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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키워드 : 나이
언젠가 한 번, 그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졸업하고 난 후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냐고. 그 질문을 들었을 당시엔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은 채 가볍게 대꾸를 했던 것 같았다. 진학을 생각하고 있으니 당연히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을 갈 테고, 대학에 가고 난 후에도 농구를 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이런 자신의 대답에, 그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냥 웃음으로 무마하는가 싶더니 ‘그렇군요...’ 하고 반응할 뿐이었다. 그때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속 시원히 하라고, 구박을 하듯 그를 쥐어박았지만 그래도 그는 이야기 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이 맞으면서도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리고 졸업을 앞두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가 미처 하지 못했던 그 말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가 있었다.
*
“...츠.”
“...카사마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어올렸다. 약간은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동기를 마주하면서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 인사를 했다.
“미안. 잠깐 다른 생각을 했어.”
“그럴 것 같더라. 눈이 완전 풀렸었어.”
레포트, 많이 힘드냐? 라고 동기가 덧붙이더니 한 손에 들고 있던 캔 커피를 자신에게 가볍게 던졌다. 그 캔 커피를 받아 들고는 고맙다는 말을 덧붙인 뒤, 바로 캔 뚜껑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캔 커피 특유의 들척지근한 맛이 입 안에 감돌자, 무의식적으로 혀로 입술을 가볍게 훑어 올렸다.
“그냥 그렇지, 뭐. 워낙 악명 높은 교수님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되도록 안 들으려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뤄두는 강의라던데.. 넌 왜..”
“그러게. 사람들이 괜히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넌 쓸데없이 고지식해, 라고 동기가 이야기를 하곤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캔 커피를 낚아채더니 본인이 쭉쭉 들이키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주는 캔 커피가 아니었나, 하고 순간 생각했지만 어차피 다 마시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에 별 다른 대꾸는 하지 않은 채 동기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숨 한 번 안 쉬고 남은 커피를 모두 마셔버린 동기는, 마치 가득 찬 술잔을 비운 사람처럼 크으, 하는 소리를 잠깐 내더니 손등으로 본인의 입술을 슥 문질러 닦았다. 어딘가 과장된 듯한 그 모습이 웃기게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 고등학교 시절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것 같기도 해서 작게 웃음을 흘렸다.
“커피 마신 주제에 술 마신 것처럼 굴긴.”
“기분이지, 기분.”
폼생폼사야 말로 남자의 미덕이라며 본인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대해서 구구절절 늘어놓는 동기의 말을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리고 있다가, 이제 슬슬 본론에 들어가 줬으면 하는 바람에 그를 바라보면서 툭 말을 던졌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무심한 사람. 단도직입적으로 그렇게 물으면 어떡해? 그러니까 여자가 안 생기는 거야.”
“여자는 관계없잖아!”
콤플렉스에 가까운 부분을 동기가 찌르자 일순 발끈해서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그에게 대꾸했다. 그러자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 같아 움찔하곤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흠흠, 여하튼 신세한탄 하러 온 거면 빨리 하라고.”
멍석을 깔아주듯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주자, 동기는 본인의 인생관을 늘어놓았던 때처럼 현재 본인의 고민에 대해서 장황하게 토로하기 시작했다.
고민의 주제는 아니나 다를까 동기가 현재 만나고 있는 고등학생 여자 친구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대학생과 고등학생 커플이지만, 듣자하니 고등학생 시절부터 만나고 있던 사이로 일전에 자신도 동기의 소개로 그 상대를 한 번 만난 적이 있기도 했다. 그 때 그리 소득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예쁘게 잘 사귀고 있다는 건 여자에 익숙하지 못한 자신으로서도 잘 알 수 있었기에 뭐가 문제인 건가 싶었다.
그래서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이제야 길고 긴 서론이 끝나고 본론에 들어가는 것인지 동기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이야기에는 사족이 많이 붙어 순간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어진 부분도 몇 군데 있었지만, 대략적으로 요약을 해보니 ‘고등학생인 여자 친구가, 대학생인 자신이 다른 곳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다’ 는 것이었다.
“여자 친구 입장에선 걱정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그건 나도 알지. 하지만 아무리 걱정 말라고 해도, 나한텐 너밖에 없다고 납득을 시키려고 해도 혼자 힘들어 하더라니까. 이전에 나 고등학교 졸업할 때도 졸업하지 말라고 울고불고 얼마나 성화였던지.”
“그 이야기는 많이 들었으니까 이제 그만 해라.”
동기의 뻔한 과거사 레퍼토리가 다시 시작될 것 같아 단호하게 끊어냈다. 이런 자신의 태도에 동기는 살짝 토라진 것 같은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이내 다시 근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는 자신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의견을 구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여자의 심리를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라, 자신에게 의견을 구한다고 해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해서 천천히 운을 떼기 시작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얼마 차이가 나지 않더라도 나이가 서로 다른 커플이라면 어쩔 수 없는 문제 같다. 이야기를 많이 하고 안심시켜주는 수밖엔.”
“역시 그러려나...”
“자기 시야 내에 상대방이 없고, 자기 세상에 더 이상 상대방이 속해있지 않으면 불안한 건 당연한 거니까.”
진지하게 대답을 해주자, 동기도 동기 나름대로 느낀 바가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긴 채 핸드폰을 꺼내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가 싶더니 자리를 떴다. 분명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등을 기대어 앉아, 자신이 동기에게 해주었던 말에 대해서 천천히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자기 시야 내에 상대방이 들어와 있지 않으면, 자기 세상에 더 이상 상대방이 속해있지 않으면 불안한 것은 당연하다. 동기에게 이 말을 해주었을 때, 무심코 머릿속으로 ‘그’를 떠올렸었다. 고등학교 시절, 자신이 아낀다면 아꼈고, 애정을 주었다면 애정을 주었다고 할 수 있는 카이조의 에이스를.
물론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가 카이조라는 팀에 애정을 가져주기만을 바랐을 때라, 한시라도 빨리 카이조라는 울타리 내에서 그가 안정을 느낄 수 있도록 ‘주장으로서’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든 신경은 그에게로 쏠렸고, 이런 자신의 노력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그도 간간히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자신을 통해서 그가 카이조를 인지하고 있었고, 자신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카이조에 애착을 가지게 된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조금 변하게 된 것은, 대학 합격 발표가 나고 졸업식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졸업식 며칠 전, 그가 자신을 찾아왔었다. 처음엔 졸업이 얼마 안 남았으니 홀가분하겠다며, 평소 같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던 그였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한 쪽 손을 잡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도 안 되는 억지라는 것을 알지만 졸업하지 말아달라고, 자기 시야에서 벗어나 멀리 가지 말아달라고, 그 답지 않게 애원하고 울먹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어, 자기는 아직 어려서 쫓아가는 것밖에는 못한다며, 어딘가 서러움이 묻어나는 어조로 덧붙이고는 고개를 푹 숙였었다.
“아직 어려서 쫓아가는 것밖에는 못한다, 라...”
벌써 일 년 가까이 지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멀리 떠나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 그의 세상과는 동떨어진 곳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의 말을 통해서 다른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존재가 자신의 시야 밖에 자리하게 된 것이며 또한 자신의 세상 밖에서 그가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졸업한 후, 선배의 미래에는 ‘제’가 존재함까?]
이게 바로 그가 그 때, 자신에게 정말로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어 생각했다. 그럼 자신이 졸업하고 난 후, ‘그’의 미래에는 자신이 존재할까? 하고.
“애초에 나이가 많고 적고는 관계없었던 거야.”
어느 한 쪽의 나이가 많고 적음은 관계없었다. 나이 차이가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그저 상대를 향한 애정에서 기인한 걱정 그리고 불안감일 뿐이었다. 상대의 미래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을지, 상대의 마음에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있을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한 쪽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향하는 두 사람 모두의 마음일터였다.
“키세, 나는 말이지... 너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이 부럽고, 질투나.”
그에게는 전해지지 않을 말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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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키워드 : 매니큐어
사람에게 어울리는 색이란 천차만별이다. 어느 사람에게는 밝고 부드러운 계통의 색이 어울린다면, 어느 사람에게는 화려하다 싶을 정도로 짙고 독특한 색이 어울리기도 한다. 하지만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를 떠나서, 한 번쯤은 상대가 이런 색을 몸에 걸쳐보는 건 어떨까, 하고 상상을 해보는 건 개인의 자유일 것이다. 마치 자신이 그를 지켜보다가 아주 가끔, 이전에 보게 되었던 그의 붉은 손톱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
늘 그렇듯 수업이 끝나면 습관처럼 체육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푼 뒤 본격적으로 훈련에 돌입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뭔가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누락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무의식적으로 두리번거리며 체육관 이곳저곳에 시선을 두었다.
“키세, 뭘 그리 찾고 있어?”
“아, 모리야마 선배...”
뭘 그리 찾고 있냐는 모리야마의 말에, 그를 돌아보며 멋쩍은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라 그래야하지.. 오늘은 뭔가 어제와는 좀 다른 것 같아서..”
“아아, ‘그게’ 없으니 허전한가보네.”
모리야마의 애매모호한 말에, 그 말의 의미를 전혀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손끝으로 볼을 가볍게 긁적였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슴다.”
“‘그거’ 말이야, ‘그거’. 널 열심히 구박하는 카사마츠의 애정 어린 손길이 없잖아.”
사람의 부재를 그런 걸로 깨닫다니, 네가 파블로스의 개도 아니고,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처럼 말을 툭 내뱉고 코트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모리야마의 뒷모습을 잠시 동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삼 다시 깨달았다. 늘 체육관에 가장 먼저 와서 훈련 지시를 내리고 있던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 사람이 훈련에 지각할 리가 없는데. 언제나 규칙에 엄격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한 사람이었기에 지각 같은 것은 그의 사전에 분명 없는 단어일 터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상하리만치 그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얼굴 표정이 확 굳어버렸다. 모리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행방을 물어야 할까, 아니면 지금 바로 체육관을 뛰쳐나가 그를 찾아나서는 게 좋을까. 머릿속으로 어느 선택지가 더 효율적인지 고려하면서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려는 찰나, 굳게 닫혀있던 체육관 문이 활짝 열렸다.
“늦어서 미안하다. 다들 연습 속행하도록.”
“... 카사마츠 선배!”
찾으러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상대가 눈앞에 나타나자, 반색하며 단숨에 그의 쪽으로 다가갔다.
“뭐, 뭐냐, 키세.”
“부 활동 시작했는데 선배가 안 보여서 깜짝 놀랐슴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구요.”
“쓸데없는 걱정이다. 가서 슛 연습이나 해.”
평소와 마찬가지로, 매정하리만치 딱딱한 그의 말에 오히려 안정을 되찾으며 씩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곤 그의 명령에 따르겠다는 듯이 과장되게 거수경례를 해보이려 하는데, 문득 그의 오른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손끝,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새끼손가락 한 마디정도가 하얀색 테이프로 꼼꼼히 테이핑이 되어 있었다. 마치 손톱의 보호를 위해 평상시 테이핑을 하고 있는 중학교 시절 동창인 미도리마처럼.
하지만 그는 미도리마와는 달랐다. 미도리마는 본인의 슛 터치 감각에 영향이 가지 않도록 다소 집착적으로 손톱관리를 하는 쪽이었지만, 그는 부상에만 유의할 뿐 손 관리에 신경을 곤두세우지도 않았다. 더욱이 자신 또한 그가 손과 관련된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를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생각할 수 있는 쪽은 단 하나.
“선배, 이 손... 어떻게 된 겁니까?”
개구지게 웃으려던 것을 그만두고, 싹 식어버린 얼굴로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는 듯이 자신을 올려보다가, 자신의 시선이 그의 오른손에 꽂힌 것을 깨닫곤 아차, 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무 것도 아냐. 가서 연습이나 해.”
“하지만, 선배...!”
“가서 연습이나 하라고 했다.”
“읏...!”
이 이상의 관심은 필요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끊어 내버리는 그의 태도에, 결국 캐묻지 못하고 몸을 돌려 연습을 하러 가는 수밖엔 없었다. 하지만 연습을 하는 내내 그에게, 그의 새끼손가락에 시선이 가는 것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
뒤늦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집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오늘의 열쇠 당번이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자신이 늦게까지 남아있으면 민폐이겠구나 싶어서 가능한 빨리 짐을 챙겨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레귤러 전용 로커실의 문을 열었다.
“어?”
“아, 이제 왔냐.”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네,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간이 의자에 앉아있던 그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이어 자기가 열쇠 당번이니 망정이니 다른 사람이었으면 항의가 들어올 뻔했다며 덧붙이는 그의 목소리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갈 준비 안 해? 빨리 짐 싸.”
“... 카사마츠 선배.”
자신의 부름에, 뭐냐, 하고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며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걸 또 잠시 동안 지켜보고 있다가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가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채듯이 쥐고는 자신의 눈높이 정도로 들어 올렸다.
“이 손가락... 어쩌다 이렇게 된 겁니까?”
“하?”
“대답을 아직 못 들었슴다. 대답해주십쇼.”
“아까도 말했잖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아무 것도 아닌데 테이핑을 할 정도임까? 제가 그렇게 바보로 보입니까?”
계속 아무 것도 아니라며 대답하길 기피하는 그의 태도에, 자연스럽게 언성이 높아졌다. 그는 평소와 달리 목소리를 높이는 자신의 태도에 조금은 놀랐는지 눈을 살짝 크게 뜨는가 싶더니, 이내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썼다. 그리곤 잡힌 손을 빼내더니, 테이핑이 된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어깨를 강하게 후려갈겼다.
“어디서 선배한테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 건방지게.”
“아, 아픔다!”
손바닥으로 맨살을 가격당한 터라 찌릿한 통증이 어깨에서부터 전해지는 것 같았다. 맞은 부위가 화끈화끈 거리는 것 같아서 울상을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는데, 그는 한숨을 푹 내쉬는가 싶더니 그 오른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별 거 아니라고. 다친 것도 아닌데 네가 그렇게 호들갑 떠니까 더 민망하다.”
“다친 게... 아닙니까?”
“그래.”
그럼 왜 테이핑을... 하고 묻는 것 같은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자, 그는 답지 않게 조금 주저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오른손에 감긴 테이핑을 왼손으로 서툴게 풀어 내렸다. 그의 새끼손가락에는 부상의 흔적 따윈 보이지 않았다. 단지 보이는 것이라곤 그의 새끼손톱 위에 물들인 것처럼 남아있는 붉은 매니큐어의 흔적뿐이었다.
“우리 집 꼬맹이.. 그러니까 막내 동생이 어디서 났는지는 몰라도 매니큐어를 빌려와서 말이지.”
“.......”
“방심한 틈을 타서 여기에 칠해버렸어.”
“그... 그럼 아세톤으로 지우면 되는 거 아님까...?”
애초에 매니큐어도 없는 집에 아세톤이라고 있겠냐? 하고 그가 덤덤하게 대꾸하자, 그것도 그렇다 싶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게 아니었다. 농구를 하는데 지장이 가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자신에게 패스를 해줄 수 있었다. 부상이 아니었으니까.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불안감은 어느새 지워지고 그 빈자리를 안도감이 메워나가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에요, 선배.”
“그래. 난 네 덕분에 피곤했지만. 사람이 번거롭게 보건실까지 가서 테이핑하고 왔는데.”
이게 떨어져나가거나 자연스레 지워질 때까지 테이핑으로 가릴 생각이었는데, 너 때문에 글렀어, 하고 덧붙이는 그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하하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는 다시 인상을 쓰면서 자신의 어깨를 툭 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웃음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제가 내일 아세톤 빌려드릴게요.”
“오, 그래준다면 고맙지.”
화색을 띠며 자신에게 고맙다고 이야기를 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정말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 때문에 곤란해 하고 있었구나 싶어서 다시금 웃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올 뻔 했다. 하지만 또 한 번 그에게 맞을까 싶어서 간신히 웃음을 참아내고는, 그에게서 살짝 떨어져 자신에게 할당된 로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내던져 둔거나 다름없이 방치한 가방 속에 로커 안의 짐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말임다, 선배.”
“엉?”
“그 붉은 매니큐어, 은근히 잘 어울리네요.”
지금 놀리는 거냐면서 그가 수건을 집어던졌지만, 그걸 공중에서 손으로 낚아채며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조라는 군단을 이끄는 명장인 그에게는 역시 푸른빛이 제일 잘 어울렸지만, 그의 타오르는 것 같은 기질을 닮은 붉은빛도 꽤 잘 어울리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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