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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인가의 go out. 남들과는 좀처럼 하지 않는 살가운 스킨십. 이 두 가지만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 하더라도, 미국에서는 충분히 사귀고 있는 사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리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절반 이상을 미국에서 살았던 자신으로서는 그러한 암묵적인 룰이 당연하게만 느껴졌기에, 자신은 그와 자신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연인 사이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며칠 전 그가 흘러가는 듯한 어조로 내뱉은 한 마디의 말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달에 발렌타인 데이가 있다던데. 초콜릿 받으면 그거 다 나 줘.]
물론 그가 달콤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비단 달콤한 것에 국한되는 건 아니었지만. 여하튼 그에게 초콜릿을 주면 기뻐할 것이란 점은 지금까지 겪었던 일을 통해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충격을 받은 부분은 그가 꺼낸 말의 이면에 있었다. 자신이 초콜릿을 받는 것은 그렇다 쳐도 그 사실에 아주 조금도 질투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 바로 그것이었다.
실은 그와 자신이 사귀고 있는 사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즈음부터, 자신에게 고백을 해오는 여자아이들을 부드럽게, 그러나 이전보다 더욱 단호하게 끊어내고 있었다. 이전에는 단지 농구에 전념하고 싶다고, 누군가를 사귈 여력이 없다는 말을 돌려서 이야기를 했던 거라면, 최근 들어서는 연인이 있으니 네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는 식의 대답을 했다.
가끔은 자신의 연인이 누구인지 물어오는 여자아이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반적이지 않은’ 관계라고 정의를 내릴 거란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연인, 무라사키바라 아츠시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자신은 커밍아웃을 해도 상관없었지만 어디까지나 그에게 피해가 돌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래서일까. 자신이 누군가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는지, 여자아이들은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흘리지 않았고 자신은 고백하는 여자아이들을 계속 마주하게 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했는데.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2월이 되면서 나날이 늘어가는 고백과 은근한 시선들에 조금은 지쳐있을 찰나, 질투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 그의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리고 충격을 받은 것에 이어, 설마 그는 자신을 연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설마, 아니겠지. 하루에도 몇 번이고 그런 생각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가 ‘초콜릿을 받으면 달라’는 그 말을 꺼낸 이후로 그를 유심히 지켜보아도 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변함없이 나른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과자를 우물거리고, 귀찮아 보이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연습에는 충실히 참여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일순 권태기인 것일까, 하고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에게 평소와 비슷한 정도의 관심을 주고 있었으니까. 권태기였다면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라도 변화가 있었겠지만 그의 행동은 변한 게 없었다. 그래서 깨닫게 되었다. 그에게 변한 부분이 한 군데도 없다면, 그건 자신이 애초에 착각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그것을 깨닫게 되자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걸 두고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한다고 하던가, 하고 생각하며 조소를 흘렸다.
*
“히무로 선배, 이... 이거 받아주세요.”
“미안하지만 난...”
“사귀는 분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어요. 하지만 제 마음만큼은 전해드리고 싶어서...”
2월 14일 당일,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 상자를 건네는 여자아이를 마주하게 되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거절을 하려고 했지만 여자아이는 본인의 마음만큼은 전하고 싶다며, 조금은 억지를 부리며 초콜릿을 떠넘기려고 했다. 그것에 내심 당혹스러워 하다가도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표정을 잠시 지으며 그 선물을 받아들였다.
“고마워.”
여자아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은 ‘미안해’가 아니라 ‘고마워’라는 말일 것 같았다. 그래서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여자아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한 채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발걸음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해버렸다.
눈물이 고여 있는 그 눈을 보고 있자, 자신이 못할 짓을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며칠 전까지는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달랐으니까. 사귀고 있다는 것은 자신만의 착각이었기 때문에, 거절을 할 때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거짓말과도 같이 느껴져 마음이 불편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여자아이가 사라진 곳을 잠시 동안 응시하고 있다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예비종이 울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자 슬슬 교실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
초콜릿을 전달하는 것은 처음 만났던 그 여자아이가 끝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초콜릿을 건넨 여자아이의 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어느새 소문을 탄 것인지, 쉬는 시간을 포함해서 몇 번이고 밖으로 불려나가 초콜릿 상자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책상 위를 포함해서 자신의 자리로 지정된 곳에 자신이 직접 받지 못한 여러 개의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클래스메이트들은 부럽다며, 본인들도 이렇게 받아보면 여한이 없겠다며 반쯤은 놀리는 듯한 어조로 이야기를 했지만 자신으로서는 난감할 따름이었다. 지금까지 받은 양만 하더라도 기숙사까지 쉬이 나를 수 있는 양이 아니라, 결국 비품실에서 커다란 종이 가방을 구해 와서 그 안에 받은 초콜릿들을 담기 시작했다.
“이정도 양이라면 확실히 혼자 처리하기는 힘들겠네.”
자조어린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어, 초콜릿을 가져다 달라는 그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애초에 착각을 한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을 질책하는 기분으로 초콜릿이 가득 담긴 종이가방을 들고 기숙사로 향했다.
짐이 많아서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간신히 기숙사에 도착해 열쇠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발치에 짐을 내려놓고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자신의 것은 아닌 게 분명한데 어딘가 낯익은 신발 한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발 사이즈보다 더 큰 신발을 신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신발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츠시?”
신발 주인의 이름을 부르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자신의 침대 쪽에 거대한 무언가가 늘어져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종이가방을 다시 들어 침대 머리맡 쪽에 내려놓은 다음, 그 거대한 사람을 향해 다시 말을 건넸다
“또 멋대로 들어온 거야? 그건 실례라고 몇 번이나 말했... 아, 자고 있네.”
그는 가끔가다 멋대로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와 과자를 먹는다거나 낮잠을 자고 가는 경향이 있었다. 현재는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자신으로선 아무리 연인사이여도 프라이버시는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과거에도 그가 이렇게 멋대로 방에 침입할 때면 따끔하게 한 마디를 해두곤 했다. 물론 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지만. 오늘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한 마디를 하려고 했지만, 이미 낮잠에 깊게 빠져든 것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에 결국 말을 끝맺지 못했다.
침대에 대자로 누워 잠들어 있는 그를, 침대 가장자리에 살며시 걸터앉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보아하니 어디선가 과자를 먹고 왔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곧,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착각이 떠오르면서 차츰 표정이 흐려졌다.
착각 속에 빠져서 홀로 키워왔던 애정이 갈 곳을 잃게 되자 스스로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의 자는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을수록 머릿속에서 쿵쿵 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귀에서는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고, 심장이 거칠게 뛰며 난동을 부리는 것 같았다. 일순 숨을 쉬기가 힘든 것 같아서 오른손으로 목에 매인 넥타이를 풀어 내렸다.
자신이 기억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갑갑해서 풀어 내린 넥타이는 한데 모은 그의 양 손목에 묶여있었고, 자신은 그의 복부 위에 가볍게 올라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드러누운 그의 옆에는 자신이 받아온 초콜릿들이 포장지가 벗겨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 무로칭?”
그가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자고 있었던 탓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을 불렀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이성이 흐트러지는 것 같았다.
“무로칭, 내 위에서 뭐해?”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옆에 널브러져 있는 초콜릿 하나를 집어 들어 자신의 입 안에 넣었다. 그리곤 입 안의 초콜릿을 혀로 굴려 살짝 녹인 다음에 곧장 그에게 입을 맞췄다. 평소 느긋하고 느릿한 그의 성정과는 다르게 당황한 기미가 느껴지더니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혀를 밀어 넣어 공간을 확보한 뒤 자신의 입 안에 있던 초콜릿을 그에게로 넘겼다. 그의 입 안에서 초콜릿이 녹아 사라질 때까지 키스를 멈추지 않고 있다가,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고 초콜릿의 흔적이 사라졌다고 느꼈을 즈음에야 입술을 떼어냈다.
맛이 어땠냐고 물으려고 하다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닫고 말았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 사람을 아래에 깔고 억지로 키스를 했다. 심지어 손목까지 묶어둔 채로. 이성끼리라도 문제가 되는 일이었고 동성끼리라 해도 문제가 되는 일이었다.
어디까지 떨어져야 하는 건가, 나는.
동성 간에 역겨운 짓을 했다고 그에게 지탄받아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억지로 한 일이니 그에게 얻어맞는다고 해도 불평 한 마디 꺼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의 크기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나마 스스로를 질타했다. 일단 그에게 한 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얻어맞는 한이 있더라도 그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그의 위에서 내려오려 했다. 그가 꺼낸 한 마디만 아니었다면, 얌전히 위에서 내려온 뒤 사과를 하고 그의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을 거였다.
“이런 플레이 좋아하는 거야, 무로칭은?”
“프..플레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다소 뜬금없었다. 자신에게 욕을 퍼붓기 전에 저런 말이 나오니 당혹스럽기도 했다.
“뭐, 그건 그렇다 쳐도... 무로칭이 받은 초콜릿을 달라고 내가 말하긴 했지만 이렇게 받을 줄은 몰랐는데.”
“...미안.”
“하지만 무로칭이 먼저 입에 넣어버리면 소용없잖아.”
자신이 먼저 입에 넣어버리면 소용없다는 그의 말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아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러자 그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답지 않게 한숨을 내쉬고는 귀찮다는 듯이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무로칭은 먹으면 안 된다는 거야.”
“미안, 의미를 잘 모르겠어.”
“아, 진짜.”
결국은 그의 입술 사이에서 짜증이 섞인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자신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가 좀 더 차분히 설명을 하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느릿느릿한 어조로 이야기를 했다.
“무로칭은 인기 많으니까 초콜릿 많이 받을 거란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어. 하지만 무로칭은 먹으면 안 돼. 내가 다 먹을 거야.”
“어째서?”
“무로칭이 먹어버리면 이거 준 애들 마음 받아들여준 게 되니까 안 돼. 그러니까 내가 먹을 거야.”
“...아츠시.”
“뭐, 그래도 무로칭에게 ‘받은 거’긴 하니까 나도 화이트데이 땐 돌려줄게.”
대수롭지 않다는 어조로 덧붙이는 그의 마지막 한 마디에, 나락으로 떨어졌던 감정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키스 후에도, 자신의 이상행동에도 별 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는 그의 태도에서 ‘착각이라고 여겼던 것’이 착각이었던 건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츠시.”
“응?”
“난 아츠시의 사람이야?”
“응.”
“그럼 아츠시는.. 내 사람이야?”
“당연한 소릴.”
당연한 소릴 반복하게 하지 말라는 듯이, 그가 다소 귀찮다는 어조로 이야기를 하며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그런 태도마저도 자신에겐 사랑스럽게만 느껴져서,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치면서 포옹했다. 무겁다고, 묶인 손목이 눌려서 아프다고 짜증을 부리는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지만, 개의치 않고 그를 한껏 끌어안은 뒤 이마 위에 가볍게 키스를 해주었다. 지금의 자신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초콜릿으로 마음을 전하는 날에, 초콜릿을 통해서 그의 마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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