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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풀었던 썰을 모처에서 정리했던 것.
사망네타 주의
마유즈미 치히로와 아카시 세이쥬로는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었다. 혹은 같은 학교 선후배 사이.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같은 동아리에 속해있던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먼저 도쿄로 상경한 것은 두 살 연상이었던 마유즈미 쪽이었다. 그가 진학하고 싶어했던 학교가 도쿄에 있었기 때문에, 거주지를 옮기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도쿄에 자리를 잡고 산지 2년 째 되던 해, 아카시 세이쥬로가 3년간의 교토 생활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왔다.
그 두 사람의 재회는 불시에 이루어졌다. 둘 중 어느 누구도 상대방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캠퍼스 내 이동을 하던 중 아카시를 보게 된 마유즈미는 답지 않게 적잖이 당황했다. 그리고 아카시 또한 평소의 침착함을 잊고 당황한 기색을 겉으로 드러냈다.
[아카시…?]
[마유즈미 선배?]
인연이자 악연. 좋은 추억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과거. 그것들이 마유즈미 치히로와 아카시 세이쥬로가 공유한 것들이었다.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하고 마유즈미가 어색하게 말을 건넸다. 그 말에 아카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동감입니다, 하고 짤막하게 덧붙였다. 애초에 그들은 남에게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넉살 좋게 잘 지냈냐며 안부를 건네는 쪽도 아니었다. 굳이 정의를 내린다면 그들은 불필요한 말은 주고받지 않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다보니 둘 사이에는 자연스레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 침묵이 불편하게 느껴질 즈음, 서로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듯 인사를 나누며 다소 어색하게 헤어졌다.
어색한 재회 이후로 다시 마주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로의 전공이 상이하게 달랐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행동 범위가 그리 겹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인들이 생각해도 이상하리만치, 캠퍼스를 이동하다보면 높은 확률로 상대방과 조우하곤 했다.
그것이 다소 서먹했던 두 사람의 관계를 바꾼 첫 번째 계기일지도 몰랐다.
계기야 어찌 되었든, 그 둘은 그들의 대학 동기들이 알지 못하는 과거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것이 다소 특별하게 작용했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캠퍼스 내에서의 재회는 어색했을지언정, 만남이 거듭될수록 그들은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유즈미가 4학년이 되고 아카시가 2학년이 되었을 즈음,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인 사이로 발전해 있었다.
연인 사이가 되었다고는 하나, 그들 개개인의 성정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의 명확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서로를 인정한다고 해도, 서로에게만 곁을 내어주었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확고한 경계선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그들은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미래를 내다보는 동반자였고,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자기 자신을 바꾸면서까지 상대의 곁에 있고 싶지는 않다고 주장하는 고집쟁이 동지였다.
그런 고집스러운 성격을 그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아는 만큼 서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마유즈미가 무심한 듯 냉소적인 말을 내뱉을 때도, 아카시가 온후한 것 같으면서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판단을 내릴 때도. 제 3자의 반응은 둘째치고서라도 그들은, 서로를 향한 차가운 말은 아무렇지 않게 흘려 넘겼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게 그 사람의 본래 성격이니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단 한 마디로 일축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대화에 익숙해지지 못한 타인은 가끔 난색을 표하곤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일상일지도 모르는 대화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서로를 향한 힐난에 가까울 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둘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걱정하는 이들을 가볍게 달래어 돌려보내곤 했다.
[그 정도로 심한가, 우리.]
[남들 보기에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일말의 정적이 감돌 즈음 마유즈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고치길 바라냐?]
그 물음에 아카시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의 단호한 부정에, 마유즈미는 재차 물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걱정할 정도인데. 내심 거북해 하고 있는 거 아니냐, 너?]
아카시는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거북했을지도 모릅니다만, 마유즈미 선배니까요.]
그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나는 마유즈미의 성격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의미는 마유즈미이기에, 아카시 세이쥬로의 연인이기에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야기한 말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마유즈미가 아니었다. 그는, 아카시를 응시하고 있던 시선을 거두어들이면서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부끄러운 말을 잘도 한다니까.]
곧 죽어도 자기 자신의 성격을 바꿀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예의상 당사자에게 확인했다. 그리고 본인에게서 괜찮다는 답이 돌아오자, 이젠 마유즈미도 거칠 게 없어졌다.
***
그 대화를 나눈 뒤 조금 시간이 흘렀을 즈음, 마유즈미는 캠퍼스 내에서 아카시를 보게 될 때마다 특정한 한 마디의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너 그렇게 살다간 요절한다.]
처음 그 말을 꺼냈을 때는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가볍게 툭 던진 쪽이었기에, 아카시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흘려 넘겼다. 하지만 그것이 재차 반복되기 시작하자, 아카시 주변을 맴돌던 사람들은 마유즈미의 언동에 불편한 기색을 표했다.
초반에는 대놓고 불편함을 드러내기보다는, 그런 말은 하는 거 아니에요, 라고 살짝 지적하는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마유즈미는 그 말을 거두어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들은 곧 그런 말은 실례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내가 뭐 못할 말이라도 한 건가?]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마유즈미의 태도에, 사람들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 모습을 보고 그는 더욱 냉소적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듣기 싫으면 본인이 듣기 싫다고 이야기하겠지.]
이 말을 듣기 싫으면 본인이 이야기해라. 본인이 무슨 말을 하기 전까지는 제 3자의 말은 듣지 않겠다. 마유즈미가 꺼낸 말은, 그런 의지를 표명하는 것과도 같은 말이었다.
아카시 외의 사람들의 말은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 발걸음을 돌렸다. 사람들은 마유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전전긍긍하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아카시를 돌아보았다. 그는 벌써 저 멀리 보이는 마유즈미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난 괜찮아.]
그 이후로도 비슷한 상황은 자주 조성되었다. 여전히 제 3자가 듣기엔 살벌하기 짝이 없는 대화였다. 하지만 그 둘은 평소와 다름없이 서로를 마주하고, 상대방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바로 다른 화제로 전환해 대화를 나누기를 반복했다. 이 쯤 되니 주변 사람들도 강제적으로 상황에 적응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그들은 어김없이 마유즈미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그 이상의 간섭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이 두 사람의 대화 양상에 한 두 마디 덧붙이는 게 월권에 가까운 행동이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눈치 챈 걸지도 몰랐다.
아카시가 마유즈미가 건넨 말을 듣고도 웃으며 넘길 수 있었던 것은, 그 말의 이면에 있는 의미를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겉으로는 쌀쌀맞고 무례한 것처럼 보일지언정, 그 속뜻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학업 전반에 열심인 바쁜 사람 정도로만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정도였다. 그들은 아카시가 얼마나 많은 것을 등에 짊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떠안고 있는 부담감이 어느 정도의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것들은 범인의 감각으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솔직히 말하자면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들이 그런 자신을 알아주길 바라지도, 이해해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기대감이 전무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마유즈미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아니, 눈치 채고 있었다는 것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그는 아카시가 부담감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 처했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아카시가 자세히 이야기 해준 적은 없으니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같이 보냈던 고교 생활만을 되짚어보아도 충분히 추측 가능했다. 그리고 그는 현재, 대학 내의 어느 누구보다도 아카시 곁에 가장 오래 머물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유즈미는 이와 더불어 또 한 가지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아카시가 짊어지고 있는 것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감당할 수 없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의 자신은 그럴 능력이 없다는 점 또한 자각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그에게 있어 조언자도, 이해자도, 의지처도 될 수 없다.
냉정하게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을 마친 마유즈미는, 그래서 이전보다 더욱 독한 말을 내뱉었다.
자신은 그의 짐을 나누어 질 수 없다. 하지만 스스로를 옥죄고 있는 그에게 여유를 가질 기회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마유즈미는 그 모진 말을 반복했다.
[너 그렇게 살다간, 네 등에 짊어진 걸 모조리 이고 가려고 하다간, 요절한다.]라고.
그것은 쌀쌀맞기 짝이 없는 말이었지만, 그 이면엔 아카시를 걱정하는 그의 마음이 담긴 것이었다. 비록 타인에겐 그저 독설이나 악의에 가득 찬 말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하지만 아카시는 달랐다. 그 역시 마유즈미 곁에서 가장 오래 머무른 사람이었기에, 그 차가운 말의 속뜻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듣고도 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게 될 때마다 아카시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았다.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숨이 막힐 정도로 스스로를 옥죄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예전과 같이 또 다른 나에게로 도피할 정도로 궁지에 몰린 것은 아닌지.
그렇게 자기 자신의 상황을 재차 확인한 후에, 아카시는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가 바랐던 것처럼. 의식적으로나마 여유를 갖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원했던 것처럼.
“다행이야.”
그가 있어서.
“다행이야.”
이렇게 '나'를 질책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나 혼자였으면 힘들었을 거야.”
***
그들이 서로에게만 옆자리를 내어준 것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들은 서로의 시간을 공유했고, 서로의 공간을 공유했다. 그건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열린 창문 틈새로 따뜻한 햇살이 드리워졌다. 그 은은한 빛은 조용하기만 한 방 안을 가득 메워나갔다. 소리는 없을지언정 적막하지 않았다. 그런 곳에서 그 둘은 조용히 독서를 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연인으로 있었으니 이젠 서로에게 물들 법도 하건만, 취향 역시 성격과 마찬가지로 예전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마유즈미는 가볍게 읽어 넘길 수 있는 책을, 아카시는 대개 경제 관련 서적을 찾아 읽곤 했다. 그 날도 마찬가지로, 마유즈미는 시간 죽이기 용으로 집어 들었던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잠시 책에서 시선을 떼고, 맞은편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연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소 끈질기다 싶을 정도로 직시해오는 시선을 무시하고 독서를 계속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카시는 그러지 않았다. 지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는, 그 자신이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심지어 자기 자신보다도.
아카시는 책에서 시선을 떼고 마유즈미를 바라보면서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는 자기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 거냐고 물어보는 것에 가까웠다. 마유즈미는 그 미소에 담긴 뜻을 단번에 읽어냈다. 하지만 그는 아카시와 시선을 마주한 상태 그대로, 한동안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단지 잠잠한 수면과도 같은 눈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마저도 사랑스럽다. 무심코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카시는 다정한 시선으로 마유즈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나한테 또 그렇게 살다간 요절할 거라고 말할 생각 중인건가요?]
요절 운운하는 말은 대학을 졸업한지 꽤 된 그때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도 이젠 가벼운 마음으로 농담 삼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런 아카시의 농담을 듣고도, 마유즈미는 바로 대답을 꺼내지 않았다. 아카시가 의아하게 생각할 즈음에야 비로소 화답하듯 느리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했다.
[아니.]
그 말을 듣고 아카시가 되물었다.
[그럼 달리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왠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인데.]
그 물음에 그의 어깨가 살짝 움찔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답지 않게 잠시 살짝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요절하는 일 없을 거야. 넌 오래 살 거야.]
[그건 또 처음 듣는 소리네요. 사귄 이래로 지금까지 중에서.]
[…시끄러워. 그냥 그렇다는 것만 알아둬.]
처음 듣는 소리라며 아카시가 살짝 웃으면서 농담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자, 마유즈미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만 알아두라고 짤막하게 덧붙였다.
가끔 뜬금없는 대화를 주고받긴 했지만, 이번만큼 뜬금없었던 적도 없던 것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었던 건가, 하고 생각하며 아카시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마유즈미는, 무릎으로 살짝 기듯 움직여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을 건넸다.
[죽지 마라. 죽더라도 늙어 죽도록 해. 일찍 죽을 생각 하지 말고.]
[그 말은 수명 다하고 죽으란 뜻이죠?]
[되묻지 말고 대답이나 해.]
[네. 당신의 말이라면.]
얼른 대답하라며 채근하는 그의 목소리에, 아카시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가 바라는 대로,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했다. 그의 표정이 희미하게나마 안심했다는 듯이 변한 것 같았다.
[있죠, 제 말도 들어주지 않을래요?]
[…뭔데.]
[키스해주세요.]
[…나 원 참. 옛날이나 지금이나.]
부끄러운 줄 모르는 녀석이라니까.
그는 입 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하면서 입을 맞춰왔다.
***
그 대화를 나눈 뒤 며칠 후, 아카시 세이쥬로가 접하게 된 것은 부고였다. 그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마유즈미 치히로가 죽었다는 소식.
사인은 병사였다. 사망 시각을 고한 의사의 말에 따르면, 그는 병을 앓고 있었다고 했다. 조기에 발견했으면 그나마 나았을 것을, 병을 알아채는 것이 너무 늦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덧붙였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의사가 안타깝다는 듯이 덧붙였다. 젊은 나이라는 그 말이,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있어서는 생경하게만 들릴 뿐이었다.
그래서 그 때 그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었던가. 본인에게 남은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 살 거라는 말을 남긴 거였나. 죽지 말라고 이야기를 한 거였나.
마유즈미 본인이 먼저 떠나버리게 되면,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독설을 내뱉을 수 없다. 그 독설로 하여금, 스스로를 옥죄는 아카시에게 숨통을 트이게 하는 기회를 주는 것조차 할 수 없다. 그가 떠나 버리면….
***
'아카시 세이쥬로'는 알고 있었다.
그 말은, 스스로를 몰아세워서 젊은 나이에 죽지 말라는 의미였다는 것을. 되도록이면 오래 오래 살다가 언젠가 마유즈미 본인이 있는 장소로 오라는 뜻이란 것을.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마유즈미가 서툴게나마 상냥하게 진심을 전하려 했다는 것을. 끝까지 솔직하지는 못했지만.
"근데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구나, 치히로."
당신은 그 말을 하지 말아야 했어.
"'나'는 약해."
당신이 곁에 있어야만 했어.
"나 혼자론 힘들어."
당신이 지탱해주길 바랐는데.
"나는 눈물을 닦아줄 수 없거든."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치히로, 당신이 바라던 대로 아카시 세이쥬로는 살아갈 거야."
"하지만 당신의 연인이던 '아카시 세이쥬로'는 아닐 거야."
"'나'는 너무 약해서, 당신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어."
"그러니까, 당신을 따라 잠든 '나' 대신에 약속은 내가 이행할게."
"두 사람과의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던 유일한 사람이."
"좋은 꿈꾸길."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의 두 사람은 아카시 세이쥬로(오레시)와 마유즈미 치히로.
그리고 화자는 아카시 세이쥬로(보쿠시)
보쿠시가 회상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는 []로 표기.
보쿠시가 이야기 하는 부분은 ""로 표기.
보쿠시가 이야기 할 때 나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 '나'라고 하는 것은 오레시.
보쿠시는 오레시 안에서 존재하고 있긴 했음. 하지만 수면 위로 나올 생각은 하지 않고, 오레시의 눈을 통해서 바깥 세상을 보고 있던 쪽. 그래서 적먹이 사귈 때도 1인칭 시점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3인칭 관찰자적 시점모드로 였다던가.
오레시 같은 경우는 마유즈미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실제로 울진 않음. 그러나 마음이 울고 있다는 건 보쿠시만이 알고 있겠지.
연인을 잃은 슬픔과 연인이 남기고 간 마지막 약속 사이에서 오레시는 갈등하다가 보쿠시에게 자리를 넘기고 잠들어버림. 아카시 세이쥬로가 죽을 때까지 깨어나지 않을 예정.
오레시 입장에서는 두 가지를 모두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이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음. 죽은 연인에 대한 애도와 죽은 연인이 남기고 간 약속을 지키는 것 모두. 인격이 나누어져 있다 해도 보쿠시는 아카시 세이쥬로이니까.
구구절절 풀고 싶은 건 많지만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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