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포트 한 가득 내려두었던 커피를 머그컵에 옮겨 담았다. 넘치지 않을 정도로만 넉넉히 잔을 채우고, 조심스럽게 머그컵을 들어 올려 미리 창가에 비치해두었던 간이 의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엌과 거실을 가로질러 의자가 있는 곳에 도달하였을 때, 집 안쪽으로 도드라져 있는 창문틀 위에 잔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리곤 간의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히 앉았다.


창문틀 위에 내려놓았던 머그컵을 다시 집기 위해 잠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안과 밖의 기온 차로 인해 희끄무레하게 서리가 내려앉은 창문 너머로 일루미네이션이 어른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흘러버린 건가,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머그컵을 집어 올리곤 입가에 가까이 댔다.


이곳에 겨울이라는 계절이 찾아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집집마다 집 앞 마당을 작고 아기자기한 전구들로 귀엽게, 때로는 화려하다 싶을 정도로 꾸미기 시작하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가올 크리스마스와 새롭게 시작될 한 해를 맞이하기 위해서.


이전이라면 자신도 분위기를 타서 집 앞 정원을 전구로 잔뜩 장식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한껏 부풀어가는 기대감과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였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자신의 집을 방문해 분위기를 살려줄 알렉스도 이 지역을 잠시 떠나있는 상태였고, 어린 시절처럼 자신을 찾아와 살갑게 말을 건네줄 의형제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그 또한 이 나라에 없었다.


그를 떠올린 순간 가슴 한 구석이 지끈거려오는 것 같아서, 손에 들려있던 머그컵을 다시 창틀 쪽에 내려놓고는 한숨을 잠깐 내쉬었다. 잠시 그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뿐이었는데, 그와 함께한 기억이 잠시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었는데, 일순 숨이 멈출 것만 같았다.


“중증이네.”


한숨이 뒤섞인 목소리로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살짝 눈을 내리감았다.


*


고등학교 일학년 때 그를 경기장 내에서 처음 만났을 땐, 주체할 수 없는 투쟁심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격돌하게 되었을 땐 그의 강함을 인정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젠가 일대일로 맞붙어서 이기고 싶은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 번의 접전과 만남이 되풀이 되었을 때, 어느 샌가 자신은 그의 빛에 이끌리듯 그라는 존재 자체에 이끌리고 있었고, 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은 호승심을 뛰어넘어 일종의 연애 감정으로 변해 있었다.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게 된 자신을 스스로 인지하게 되었을 땐 이미 감정을 추스르기엔 너무 늦어버린 상태였다. 이제 손 쓸 수도 없는 지경까지 오게 된 자신에게 구역질이 날 것 같으면서도, 혹여 이 마음을 그 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들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초조함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 한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이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그를 찾고 있어도, 그들은 그저 이전과 마찬가지로 ‘농구 시합에서 1대1로 맞붙어 이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다행인 점이 있었다면, 그와의 만남에 집착하는 것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 또한 집요할 정도로 자신과의 1대1 농구 시합에 몰두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를 찾아가는 횟수를 의식적으로 줄이면, 으레 당연하다는 듯이 그가 자신에게 연락을 해왔다. 그러한 점에 안도를 하면서도, 역시 그에게 자신은 그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수 있는 경합을 벌이는, 그저 단순한 라이벌일 뿐인 건가 싶어서 씁쓸해지기도 했다.


자신의 곁을 지키던 그림자가 언젠가 이렇게 한 번 물었던 적이 있었다. ‘카가미 군은 지금 이 순간이 즐거운가요?’ 하고. 농구에만 몰두하고, 이기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던 이전의 자신이었더라면 분명 순간순간이 즐거워서 참을 수 없다고 대답을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을 들었을 당시엔 농구 외의 다른 존재에 시선을 빼앗겼던 터라 그렇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상황을 무마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옅은, 어딘가 공허한 미소를 지어버렸던 것 같았다.


원래는 좀처럼 생각을 읽어낼 수 없는, 그림자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일순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도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냐고 되물을 수도 없을 정도로, 자신은 이미 마음의 균형을 조금씩,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아, 춥다.”

“..... 겨울이니까.”

“그건 나도 알거든?”


윈터컵 이후 그와의 재회는 쿠로코의 권유로 이루어졌다. 윈터컵 기간 전부터, 계절이 바뀌어 겨울에 접어들고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간간히 눈이 내리면서 지면이 어는 바람에 길거리 농구를 할 수 없게 되어버려, 그와 밖에서 만나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던 와중 쿠로코가 윈터컵도 끝났으니 셋이서 한 번 같이 모여서 필요한 농구 물품을 구매하러 가자고 흘러가는 듯한 어조로 권유를 했던 것이었다.


“셋이 모여서 물건 사러가자 그러더니 권유를 한 사람은 안 나오고 말이지.”

“쿠로코는 갑작스럽게 할머님의 부탁을 받아서 어쩔 수 없는 상태였잖아. 정확히 말하자면 못 나온 거지.”

“나도 테츠 문자 받아서 알거든? 일일이 토 달지 마.”

“그런데 왜 불평하고 난리야?”


그런데 왜 불평하고 난리냐는 자신의 물음에, 그는 잠시 입을 꾹 다물며 침묵하는가 싶더니 패딩 양쪽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는 휘적휘적 다리를 움직이며 먼저 앞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휘적휘적 움직이는 그의 움직임에, 발치에 소복하게 쌓여있던 눈이 채여서 가루가 되어 가볍게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다가 그가 먼저 앞으로 나아가버리니, 자신도 따라 보폭을 크게 해 그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 잖아.”

“응? 제대로 안 들렸어, 아오미네.”

“쇼핑도 제대로 못하게 됐으면 농구라도 해야 하는데, 날씨가 이래선 아무 것도 못 하잖아. 길도 이 모양이니 농구장 바닥도 글러먹었을 테고.”

“뭐야. 욕구불만이냐?”

“하?”


욕구불만이냐는 자신의 말에,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반응하는 그의 대꾸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별 다른 의미를 담은 웃음은 아니었다. 단지, 그는 언제까지고 이렇게 ‘농구’만을 목표로, 피가 끓어오를 것만 같은 시합을 갈구하고 살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웃음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자신의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을 조금 더 구기며 이쪽을 응시했다.


“비웃는 거냐, 너.”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런 건 아니라는 말에 더 이상 대꾸는 못하고 그저 투덜거리면서 그는 다시 앞서 걷기 시작했다. 조금은 불량해보이기도 하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서서 바라보고 있다가, 그가 혼자 가버릴까 싶어 발걸음을 재촉하며 다시 그의 곁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그리곤 고개를 살짝 돌려 그의 옆얼굴을 응시하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오미네.”

“왜.”

“진학 건.... 말인데.”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가 싶었더니, 하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그가 잠시 지었다. 그리곤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툭툭 내뱉듯이 대답했다.


“사츠키도 요즘 그걸로 시끄러운데 너까지 그러냐.”

“뭐, 우리도 이번 겨울만 지나면 졸업이니까.”

“솔직히 난 바로 실업팀으로 가도 상관은 없을 거 같지만, 주변에서 시끄러우니까 스카우트 온 곳 중에서 골라 진학해야지, 뭐.”

“그렇군.....”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하고 되물으면서 아오미네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직시해오는 그의 눈에 새삼 기분이 좋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도 진학은 하겠지만, 여긴 아니야.”


자신의 대답에 그의 발이 멈추었다. 자신은 몇 발자국 더 걸어 나가다가 걸음을 멈추곤 그를 돌아보았다.


“여긴 아니야, 아오미네.”

“너... 그게... 무슨 소리냐?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


농구를 할 때의 거칠고 오만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농구를 하지 않고 있을 때의, 귀찮음으로 가득한 나른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살짝 떨림이 묻어나는 것 같은, 그 답지 않은 목소리였다. 이런 목소리는 또 처음 듣는구나 싶어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 지금 웃냐? 장난해?”

“아, 미안. 하지만 장난은 아니야.”

“......”

“미국으로 돌아가게 됐어. 실은 이전부터 아버지가 부르긴 했지만.. 고등학교 졸업이 머지않았으니까 미루고 미뤄뒀었지.”


꽤 오래전부터 혼자 살고 있었다. 그것도 세간의 기준으로 따지면 어린 나이에 말이다. 자신이야 그 사실 자체에 별 생각이 없긴 했지만, 편부 슬하의 외동아들이기도 했고, 심지어 타국에 홀로 나가 사는 것이었으니 일정 주기로 한 번씩 아버지에게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냐는 연락이 오곤 했었다. 아직은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의사를 존중해 아버지는 강제로 자신을 불러들인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는 걸 미루는 것도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선택했다. 고등학교 생활을 마치면 미국으로 돌아가겠노라고. 농구를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래도 진학 자체는 일본이 아니라 미국에서 하겠노라고. 그리고 그 때에는, 이제는 자신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이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겠다고.


“작별이다, 아오미네.”


아직 작별을 논하기에는 이를지도 몰랐지만, 같이 농구를 하기 힘든 상황인 이상 이렇게 그를 다시 만나는 것은 졸업 전까지는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미리, 그에게 작별인사를 하기로 했다. 무거운 돌을 얹어놓은 것 마냥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져오는 것 같았지만, 애써 그 감각을 무시했다.


“아직 쿠로코에게도 이야기 안 했어. 네가 처음이다.”

“......”

“그녀석이야 학교에서든 어디서든 쉽게 만날 수 있으니까 좀 더 있다가 이야기해도 되겠지.”


하지만 넌 아니잖아, 라는 말은 미처 꺼내지 못한 채 다시금 살짝 입술을 끌어올려 웃었다. 이제 이 마음을, 이 감정을 털어버릴 때가 되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심장 고동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난 말이지, 아오미네. 너도, 네 농구도...”

“......”

“좋아...했어.”


차마 좋아해, 라고 현재형으로 이야기할 수 없어 간신히 과거형으로 바꾸어 말했다. 아니, 토해냈다는 쪽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이 폭탄 같은 말을 쏟아낸 다음에도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차라리 그가 이 말의 본의를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좋겠다, 라고. 자신이 꺼낸 좋아했다는 말이, 연애 감정이 아니라 그저 호불호의 개념에서의 좋아한다는 말이라고 착각해줬으면 좋겠다, 라고.


그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을 모조리 다 꺼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마음이 후련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것도 곧 나아질 거라 생각하며, 아직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은 그를 마주하고 있기 힘들어 눈만 살짝 내리감았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땐, 모든 감정을 지운 채 그를 ‘친구로서’ 바라보겠노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읏!”


눈을 뜨고 그를 마주하려는 순간,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었다.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눈뭉치였다. 눈뭉치는 이미 피하기 힘들 정도로 인접해 있어서 결국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날아오는 눈뭉치를 얼굴로 받아냈다.


“아오미네, 너 이 자식...! 지금 너한테 고백한 사람한테 할 행동이냐, 이게!”


얼굴에 묻은 눈을 손으로 털어내면서, 눈뭉치 던지지 말라고 외치기도 전에 그는 어느 샌가 여러 개 만들어 둔 눈뭉치를 자신에게 던져대기 시작했다. 처음이야 방어를 할 틈도 없었기에 안면 직격이었지만, 지금은 또 상황이 달랐기에 날아오는 눈뭉치를 피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 아오미네! 던지지 말라고!”

“뭐래.”


자신의 항변을 가볍게 무시한 그는 무자비하게 연속으로 눈뭉치를 던져댔다. 그 움직임에, 스스로가 ‘고백’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그에게 대응하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주변에 널려 있는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그의 선제공격을 받고 자신이 그것에 응전하기 시작한 것을 기점으로 주변에 널려 있는 눈이란 눈을 모두 끌어 모아 서로를 향해 던져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이상 끌어다 쓸 눈이 없어질 즈음에야 치열하기 짝이 없던 전투는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이미 입고 있던 옷도, 머리카락도 흩날린 눈 부스러기에 의해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장갑도 끼고 있지 않았던 손은 이미 빨갛게 얼어붙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농구를 한 것만큼 격하게 움직였던 탓에,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숨결만큼은 다른 어떤 것보다 뜨겁게 느껴졌다.


“하아...... 쓸데없는 데에 힘 뺐네....”

“네가 할 소리냐...... 먼저 시작한 게 누군데.”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 하고 그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 말 역시 평소의 그의 목소리와는 달리, 어딘가 힘이 빠졌다고 해야 하나 영 맥을 못 추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의아함과 동시에 걱정스러움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아오미네. 있잖아...”

“야, 카가미.”

“어?”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건네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데, 거의 동시에 그가 자신을 불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듯 하면서도 시선을 살짝 빗겨 던진 상태로 입술을 천천히 움직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


어느덧 무거워져 있는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눈앞의 풍경이 천천히 전환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삼학년 시절의 겨울에서 벗어나, 천천히, 현재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집안의 풍경으로. 추웠지만 그와 더불어 뜨겁기 짝이 없었던 일본의 겨울에서, 상대적으로 따뜻하지만 그래도 춥게만 느껴지는 로스 엔젤러스의 겨울로 되돌아왔다.


“.......”


돌이켜 생각할수록 입맛이 써지는 느낌이라, 떠오른 기억을 털어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좌우로 흔들고는 창가에 놓아두었던 머그컵 쪽으로 손을 옮겼다.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냉기가 도는 창가 근처에 놓여있던 머그컵은 차가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커피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이건 마실 게 못 된다고 생각을 하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커피포트에서 새로 커피를 따라와야겠다고 이어 생각하면서 차가워진 머그컵을 들어 올리고는 천천히 부엌으로 향했다. 식어버린 커피를 개수대에 부어 버리곤, 따뜻한 물로 컵 안을 한 번 가볍게 헹군 뒤 커피포트가 놓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컵 한 가득 커피를 따르기 시작했다.


얼추 가득 찼다 싶을 즈음 커피를 따르던 손을 멈추곤 포트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머그컵에 손을 대려는 순간, 주머니 안쪽에 넣어두고 잊어버렸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는 아닌데...”


이 시간에 자신에게 문자를 보낼 사람이 누가 있나 싶어서 의아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손을 주머니에 넣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익숙한 손놀림으로 화면을 터치해 메시지 창을 확인했다.


“송신인..... 아오미네?”


로스 엔젤러스에 돌아온 이래로 그가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에게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간 것처럼, 마치 서로의 인생에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렇게 상대를 지우고, 또한 상대에 의해 지워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다르게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단지 잠자코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거칠고 공격적인 그의 성향과는 다르게, 어울리지도 않게 얌전하고 어른스럽게. 그런 이질적인 그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 미국 간다. 미리 준비하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일전에 못했던 대답 들려줄 테니까, 바보 카가미.]


‘지금은 네 말, 못 들은 걸로 할 거다. 내가 언젠가 미국에 가게 되면 그때 다시 말해. 그러면 그땐 제대로 대답해줄 테니까.’


“너무 오래 걸린 것 아니냐, 바보.”


그에게 전해질 리도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을 꺼내는 순간에도 목이 메어오는 것만 같았다. 자칫하면 볼을 타고 흐를 뻔한 눈물을 손등으로 대강 훔쳐내고는 그의 메시지에 답변을 적어 회신했다.


[Still waitin' for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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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 바람개비]


거리는 낮이든 밤이든 언제나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만 낮과 밤에 차이가 있다고 하면, 낮의 거리는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한적하다는 점이었고, 밤의 거리는 은은하게 빛나는 홍등과 함께 남녀의 웃음소리가 넘실거린다는 점이었다.


요시와라吉原. 끝없이 이어진 붉은 등의 거리. 이 거리 내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녀 구분할 것 없이 입술에 붉은 연지를 바르고 교태어린 손짓으로 이곳을 거쳐 가는 사람들을 유혹하곤 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런 그들의 행동이 천박하다고도, 꼴 보기 싫다고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자신에게 있어서는 태어난 곳이며 또한 자란 곳이고 앞으로 숨을 거둘 장소였기에.


열린 창문 사이로 흘러들어온 바람에 짙은 푸른빛의 머리카락이 살짝 흐트러졌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으로 천천히 빗어내려 매무새를 가다듬곤 바람이 많이 서늘해졌구나 하고, 한숨을 토해내듯이 살며시 중얼거렸다.


계절은 변하고 또 변해 어느새 한여름이 지나고 초가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에 따라 숨이 막힐 듯한 습기를 머금고 불어오던 바람도 서서히 가벼워지는 것 같더니 이따금 차가운 한기를 머금고 창문 틈으로 흘러들어올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자신은 습관처럼 미약한 기침을 뱉어내곤 했다.


이곳에 터를 잡고 있는 이들에 비해 자신이 약하다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올해는 버틸 수 있을까, 이번 계절은 버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몸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보겠다는 듯이 끈질기게도 영혼을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비가 오려나.”


다시금 불어온 바람에서 옅은 물내음이 느껴졌다. 구체적으로 설명은 할 수는 없으나, 짓이겨진 풀 냄새 같기도 하고, 가끔은 비릿하게 느껴지는 고인 물과도 같은 냄새. 이따금 맡게 되는 이 향기는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비를 몰고 오곤 했다.


비가 들이치면 방 안을 꾸며놓은 너울거리는 붉은 천들이 젖어버릴 것이었다. 하룻밤의 연인을 위해 준비해놓은 침구가 젖어버릴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메마를 대로 메말라 버린 자신의 마음 또한 젖어 버릴 터였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옅은 연지를 바른 입술을 살짝 끌어올려 웃으며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 창문을 닫아야....”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길게 늘어진 옷자락을 대강 추스르면서 천천히 창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기나긴 소맷자락 속에 감추었던 손을 뻗어 창틀에 대었을 즈음, 창문 바깥쪽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밝고 화려한 붉은 빛이 가득한 이곳에서는 보기 힘든, 유달리도 옅은 흰 빛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기이한 것이 붉은 빛의 존재감에 눌릴 법도 한데도, 그는 하늘하늘, 흐느적흐느적, 마치 강렬한 붉은 빛을 희롱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유연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옅은 색소를 가진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손님이신가요?”


그는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가 다시 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그러시군요.”


짤막하게 흘러나온 부정에, 별 다른 미련이 없다는 듯이 평이하게 대답을 했다. 그렇게 대화가 끝나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다시금 창문에 손을 뻗었다. 그리곤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앉아서 거리를 바라보고 있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다음 이쪽을 향해 몸을 돌리는가 싶더니, 창틀 너머로 본인의 상체를 살짝 들이밀며 얼굴을 익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빤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넌 좀 다르네.”

“어떤 점에서 다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이런 점이.”


영문을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조금은 당혹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해가 가는 방향으로 대답을 해줄 생각이 없다는 듯이, 얇은 입술 끝을 살며시 끌어올리며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살며시 눈을 내리감았다 뜨며, 그로 인해서 흐트러질 뻔한 감정을 추슬렀다.


“조만간 비가 올지도 모르니 다른 거처를 찾으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손님’이 아닌 인물과의 대화는 좋지 못했다. 말 그대로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이 없었기에. 이쯤에서 사담은 접어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그를 보내려고 하자, 그는 좀 더 진한 미소를 입가에 거는가 싶더니 창문을 통해서 방 안으로 훌쩍 뛰어 넘어 들어왔다.


“여기서 머물지 뭐.”

“손님이 아니라고 하셨잖습니까?”

“‘손님’은 아니지. 굳이 말하자면... 불청객?”


불청객이라고 해도 ‘객’인 이상 손님이 아닌가, 하는 말은 미처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는 신발을 벗어 한쪽에 던져두더니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로 보료를 깔아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제 안방인 것 마냥 보료 위에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서 자신을 응시했다.


“뭐해? 이리 오지 않고.”

“.......”


말로는 아니라고 해도 역시 ‘손님’인 것인가. 연지를 바른 입술 사이로 한숨이 흘러나올 뻔 했다. 하지만 요시와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서 익힌 자태는 이런 순간에서도 빛을 발했고, 자연스럽게 하룻밤의 상대를 맞이할 때처럼 요요한 빛이 어린 미소를 입가에 걸며 자신을 부르는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한 걸음 옮길 때 옷깃에 꽂아 놓은 장신구 하나를 풀어 떨구었다. 또 한 걸음 옮길 때 허리띠를 고정시키고 있던 가는 끈 하나를 풀어 내렸다. 그리고 또 한 걸음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 치렁치렁하게 늘어지는 허리띠를 풀어 내리고 단정하게 여며져 있던 붉은 옷을 느슨하게 했다. 마지막 한 걸음을 남기고 그의 앞에 살포시 자리에 앉자 그의 어깨에 손을 가볍게 얹고는 입술을 겹치기 위해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의 손 또한 자신의 어깨 위에 얹어지는 것이 어렴풋이나마 느껴졌다.


“...이게 훨씬 낫네.”

“......?”


서로의 입술이 닿으려는 찰나, 그의 손이 자신의 붉은 겉옷을 벗겨 내렸다. 그리곤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그는 몸을 밀착하고 있는 자신을 가볍게 밀어내고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나른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보료 위로 길게 몸을 뉘였다.


“어울리지도 않는 붉은 색보단 흰색이 나아.”

“그렇습니까.”

“그게 비록 내의라고 해도 말이지.”


누워서 자신을 바라보던 그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건 비웃음이라기보다는 그의 자유로운 천성을 드러내는 듯 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상한다거나 그런 부정적인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는 붉은 빛보다는 이런 옅은 빛깔이 더 잘 어울리는구나 싶을 뿐이었다.


“......저..”

“아, 비 온다.”


새장 속의 새와도 같은 자신. 바깥 세계를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들고양이 같은 그. 그런 차이를 어렴풋이 느끼게 되자 그에 대해서 작은 호기심이 생겨, 그에 대해 알아보고자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하지만 그는 그걸 듣지 못했는지 창문을 가리키며 비 온다는 말을 꺼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창 쪽으로 걸어갔던 것도 행여 비가 올까 창문을 닫기 위함이었던 것을 떠올리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고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혹여 폐가 되지 않는다면... 뭘 하시는 분인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는 이젠 보료 위에 엎드려서 작은 탁자 위에 있는 종이를 손으로 슬슬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리곤 자신의 질문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태도를 유지하며 종이를 접으며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실례였다면 죄송합니다.”

“별로. 그냥 내가 뭘 했더라 하고 생각하고 있던 것뿐이라?”

“네?”


연신 종이를 접고 접어 모양을 만들고, 또 다시 탁자에서 종이를 집어 무언가를 만들면서 그는 나른한 어조로 다시 말을 이었다.


“여행도 다니고, 구경도 하고, 물건도 팔고, 사기도 치고.”


뭔가 신뢰성이 떨어지는 어조로 이야기를 하는지라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했다면 농담으로 치부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왠지 그는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별 다른 대답을 하지 못한 채로 종이를 접고 있는데 몰두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닫힌 창문 너머로 들리던 빗소리도 어느새 잦아들어가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무의식적으로 창문을 돌아보게 되었다. 종이 접기에 몰두하고 있던 그도 자신을 따라서 창문을 한 번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곤 접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가시는 겁니까?”

“비도 그쳤으니까.”

“하룻밤 머물다 가셔도 괜찮습니다.”

“그건 내가 사양하고 싶은데.”


그는 다시금 키득거리며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쭉 펴더니 신발을 던져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신발을 챙겨 신더니 창가로 향해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물 내음을 머금고 있는 바람이 열린 창문 틈 사이로 흘러들어왔다.


“비 잘 피했다. 다음에 또 놀러올 테니까 그동안 그거 가지고 놀고 있어.”

“그거?”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 그가 있던 보료 위를 한 번 돌아보았다가 다시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그는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사라져버린 뒤였다.


“바람 같은 분.”


한 곳에 머물지 않는 바람과도 같은 이였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가 자신에게 남기고 간 여운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가 남기고 간 종잇조각들을 집어 들었다.


“....이건?”


어렸을 적 많이 보던 것이었다. 그리고 어렸을 적 스스로 만들어 가지고 놀아본 적도 있는 것이었다. 종이의 네 귀퉁이를 길게 찢어 만들곤 했던 바람개비. 그는 비를 피하는 동안 탁자위의 종이로 여러 가지 종류의 바람개비를 만들어 두었다. 그가 다시 놀러오기 전까지 가지고 놀고 있으라며.


바람은 눈으로 볼 수 없다. 또한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단지 그 외의 감각을 통해 자신을 찾아왔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 바람을, 아무도 속박할 수 없는 자유로운 바람을 다른 누구보다도 환영하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바람개비. 바람이 없으면 한 곳에 얽매여 멈추어버리는, 다시 불어올 바람을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을 바람개비.


이보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게 또 어디 있을까, 하고 살짝 자조어린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남기고 간 바람개비를 마치 소중한 정표인 것 마냥 품에 안았다.


“다시 오실 그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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