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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먼발치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고, 타오르는 격정적인 마음을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경우에는 ‘그 사람’에게 닿음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얻고, 보다 편안해진 마음으로 그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것에 가깝다. 그렇게 키세 료타는 생각했다.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들어 메시지 창을 켜고는 연락처에서 그의 이름을 찾았다. 수신인 이름 자리에 카사마츠 유키오라는 이름이 새겨지자, 조심스럽게 아래쪽에 위치한 본문 창을 톡, 하고 손끝으로 건드렸다. 커서가 아래쪽으로 이동하는 것에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무슨 내용을 써야 하나 잠시 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움직여 천천히 메시지를 적어 내려갔다.
[카사마츠 선배, 혹시 주말에 시간 있슴까? 선배만 괜찮으면 그때 만나고 싶은데요.]
무심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후회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키세 료타’라는 사람은 이렇게 사람을 사귀는 데에 있어서 서툰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상대로 하고 있을 때는 매사에 서툰 사람이 되곤 했다. 말에서부터 행동까지, 서툴지 않은 부분을 찾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 마치 첫사랑을 시작한 어린 아이처럼.
“아, 정말. 좀 더 돌려 말했어야 하는 건데.”
밀고 당기기가 안 되잖아, 이건. 고뇌 어린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고는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카락을 손으로 헝클어뜨렸다. 좀 더 요령 좋게 만날 약속을 잡았어야 하는데, 라는 후회가 자꾸 고개를 들어서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그 순간 핸드폰에서 착신 음이 들렸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서 핸드폰을 집어 들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시간이야 있긴 한데... 너 조만간 시험 아니냐?]
“시험...이긴 한데, 그래도... 만나고... 싶슴다. 전송.”
방금 전까지 서툰 자신을 타박하고 있던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만나고 싶다는 감정만이 앞서 그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은 어조의 메시지를 그에게 보내고 말았다. 역시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난 후에 다시금 후회가 찾아들었지만.
[시험이면 시험에 신경 써야지. 그러다 너 후회한다?]
시험에 신경 쓰라는 그의 답변이 다시 날아오자, 핸드폰을 내려다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시험이 중요하다는 것도, 시험에서 낙제 점수를 받아서 추가시험을 보게 되면 향후 시합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시험에 집중하라는 식으로 나오자 섭섭하기도 하고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그래서 고집스럽게 그에게 주말에 자신과 만나달라고 요구하는 문자를 보내려는 찰나, 그에게서 새로운 문자가 날아왔다.
[시험 앞두고 그냥 놀긴 그러니까, 토요일에 OO역 근처 도서관 앞으로 나와라. 네 공부도 지켜볼 겸 나도 공부나 해야겠다.]
자신이 공부하는 것을 지켜보겠다고, 그러니 주말에 도서관 앞으로 나오라는 문자였지만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기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답장을 그에게 전송했다.
*
그를 만날 수 있는 주말만을 기다리고 있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아, 쟤 주말에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구나.’ 하고 알아챌 정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이, 주중에 간간히 그에게 ‘약속’에 대해 잊지 말아달라는 문자를 보내고, 잊지 않았으니 확인 문자 좀 그만 보내라며 그에게 꾸지람을 듣는 일상을 반복했다.
그렇게 주말이 되고, 여느 때보다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구색을 맞추기 위해 가방 안에 시험 대비용 문제집 두어 권과 필통을 챙겨 넣은 뒤에 집 밖으로 나왔다. 그와 만나기로 한 도서관은 그의 집에서도, 자신의 집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빨리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카사마츠 선배!”
“아, 키세.”
도서관 정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라는 확신이 들어서 달리는 와중에도 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감대로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그였고,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화답했다.
“늦은 것도 아닌데 왜 달려오고 그러냐?”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서 그랬슴다.”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 달려왔다는 자신의 말에, 그는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시선을 돌리고는 손으로 본인의 뒷목을 쓸었다. 그리곤 싱겁긴, 하고 퉁명스러운 어조로 덧붙이고는 들어가자며 살짝 고갯짓을 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서관이었지만 방문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쾌적하고 깔끔하게 꾸며진 도서관 내부를 본 순간 무의식적으로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런 자신의 태도에, 그는 ‘얼마나 이런 곳을 안 와봤으면 그런 반응을 보이냐’며 가볍게 자신의 등을 때렸다. 명목상 그와 공부를 하러 도서관에 왔지만, 자신에게 있어선 도서관 데이트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아무렴 어떠냐는 듯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이곳은 서적 코너뿐만 아니라 열람실 같은 곳도 공부하기 좋게 꾸며져 있더라고. 독서실 같은 책상 있는 곳은 네 공부를 봐주기 힘드니까... 개방형 책상이 있는 곳으로 갈까?”
“전 잘 모르니까, 카사마츠 선배가 편할 대로 하십셔.”
“너, 이제 머지않아 수험생이 될 텐데 공부하려면 관심 좀 가져야 하는 거 아니냐?”
“에이, 어떻게든 되겠죠.”
“방심하다가 큰 코 다친다, 망할 모델 녀석아.”
그의 대답에, 그거 카사마츠 선배의 과거 이야기 하는 검까? 하고 덧붙이니 그의 얼굴색이 울긋불긋한 색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발로 자신의 엉덩이를 세게 걷어찼다. 맞은 부위에서부터 찌릿하게 몸을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울상을 지으면서도, 척척 앞으로 걸어 나가는 그를 따라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자리를 잡은 곳은 창가 바로 앞에 놓인, 직사각형 모양의 4인용 테이블이었다. 그가 창가를 등지고 있는 위치에 있는 의자 하나를 빼내어 앉자, 자신도 따라 그의 오른쪽 옆 자리 의자를 빼내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건너편에 앉아. 바로 옆 자리에 앉으면 공부하기 불편하잖아.”
“제 공부 가르쳐주신다 하지 않았슴까? 그럼 나란히 앉는 편이 낫잖아요.”
“... 지켜본다고 했지, 가르쳐준다고 한 적은 없는데.”
“에이, 그게 그거죠.”
엄연히 다른 말이거든? 하고 대답하는 그의 작은 목소리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자신을 타박하면서도 공부를 가르쳐줄 생각이었는지, 참고서와 문제집을 꺼내들라고 하더니 자신의 시험범위를 물어왔다. 일단 들어둔 게 있긴 해서 어디부터 어디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그가 내용을 한 번 훑어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 내용이라면 어느 정도 도움 줄 수 있겠다. 아직 기억나는 부분이기도 하고.”
“정말요? 살았다. 실은 수업 제대로 못 들었거든요.”
“자랑이다.”
그가 주먹으로 자신의 정수리를 가볍게 쥐어박더니, 시험 범위 초반부 페이지를 펼치곤 차분한 목소리로 천천히 이론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살짝 눈을 내리깔고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단정한 옆얼굴이 묘하게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읊어주는 책 내용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고, 책을 보아야 하는 시선을 그에게 고정시킨 채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설명을 하던 그가 이해했냐고 물어보면서 자신을 돌아보자, 그제야 퍼뜩 현실로 돌아오게 되어서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이해했으니 다행이라고 덧붙이며, 설명은 이쯤하면 된 것 같으니 문제를 풀어보라고 이야기를 했다. 실상은 책 내용은 안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문제를 풀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딴 짓 했다는 것을 그에게 들켜 또 구박을 받고 싶진 않아서 아무 말 없이 주섬주섬 책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문제를 푸는 시늉이라도 하려 하자, 그는 본인의 가방에서 전공 서적으로 보이는 것을 꺼내들고 천천히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
아무리 몰라도 문제 두어 개 정도는 풀어야 할 것 같아서 문제집을 들여다보긴 했다. 하지만 아는 게 없으니 문제를 풀 수 없을뿐더러, 옆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그가 자꾸 신경 쓰였다. 그리고 순간, 책이 아니라 자신을 봐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선은 문제집이 아니라 그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손끝이 그에게로 향하더니 그를 가볍게 툭툭 건드리게 되었다. 마치 어린 남자아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시선을 끌려고 장난을 치는 것처럼. 몇 번은 그도 무시를 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자신이 집요할 정도로 그를 툭툭 건드리고, 자잘한 접촉을 하기 시작하자 그가 슬쩍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돌아보았다. 그가 자신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그는 이내 제 문제집 쪽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더니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문제를 하나도 못 푼 것을 그에게 들키고 말았다는 생각에, 머쓱한 미소를 지으면서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샤프를 빼앗아드는가 싶더니, 문제집 한 쪽 귀퉁이에 무언가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만해라. 공부나 해.]
자신을 돌아본다 싶었더니 역시 돌아오는 말은 그만해라, 공부나 해라, 라는 말 뿐이었다. 시험을 앞두고 있으니 그 말이 옳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름 오랜만에 만난 것인데 이런 말만 주고 받는 것은 조금 섭섭하기도 해서 투정을 부리고 싶어졌다. 애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그와 닿고 싶었으며, 그것을 통해서 그의 애정을 확인하고 싶었다.
“...손잡게 해주세요. 그럼 제대로 공부할 테니까.”
“뭐?”
“다른 것도 아니고, 손만 잡게 해달라는 거예요. 어차피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텐데요?”
그는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자신들이 앉은 곳은 창가를 바로 등지고 있는 테이블이었다. 뒤로 누군가가 지나갈 일도 없었고, 앞으로 누군가가 지나간다고 해도 테이블 위에 놓인 책과 자신들의 얼굴만 보일 터였다. 그러니 아무리 주변 확인을 한다고 한들 들킬 구석이라곤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듯이 약간은 으스대는 것 같은 얼굴을 한 채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작게 신음을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챕터 다 읽을 때까지 만이야. 알았냐?”
“네, 알겠슴다.”
“하여간. 너도 나도 오른손잡인데... 네 왼손 잡으려면 난 오른손을 희생해야 되잖냐.”
불편하다느니 어쩌느니 투덜투덜 말은 많아도, 살짝 테이블 밑으로 손을 잡으니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맞잡아 주었다. 맞닿은 손바닥을 통해서 그의 체온이 전해졌다. 그리고 자신을 생각해주는 그의 애정 또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왠지 꾹 다물린 입술 사이로 즐거움이 묻어나는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자신은, 키세 료타는 그에게 닿아있을 때에야 비로소 안정감을 느끼고, 그 접촉을 통해서 그의 애정을 느끼고 점점 커져가는 자신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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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잠시 마을에 나왔다가, 한 공터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공터에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살짝 시선을 돌려보니 한 아이가 공터 구석진 곳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무리 봐도 모르는 아이였기에 그냥 지나칠까 싶었지만, 자신보다 두어 살 어려보이는 그 아이의 등이 왠지 모르게 외로워 보여서 무의식적으로 그 아이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게 되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자신의 인기척이 느껴질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옆을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답 한 마디 꺼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무시로 일관한 채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무시를 당하는 건 익숙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리 기분 좋은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순 '그냥 갈까' 하고 생각을 했지만 몸은 다시 멋대로 움직여 그 아이의 옆에 같이 쪼그리고 앉게 되었다.
"뭘 보고 있어?"
"..."
"어, 꽃이네?"
아이가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척박한 공터 위에 핀 작은 꽃 한 송이었다. 크고 화려한 다른 꽃들과는 달리 소박하기 짝이 없었지만, 꽃을 구성하고 있는 작은 꽃잎들은 안쪽은 부드러운 노란빛이었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선명한 푸른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어 아기자기하게 예쁘다는 느낌이었다.
"예쁘네. 이 꽃, 좋아해?"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아이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일순 숨을 잠시 들이켰다. 순간적으로 여자아이로 착각한 탓이었다. 물끄러미 꽃을 내려다보고 있는 두 눈가엔 빽빽하고 섬세하게 자란 긴 속눈썹이 자리 잡고 있었고, 오똑한 코며 도톰한 입술 모두 예쁜 여자아이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여자아이가 아니라는 걸 바로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아이가 본래 지니고 있던 분위기 탓일지도 몰랐다. 자신 또래의 어린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또한 어두운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꽃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에야 비로소, 아이는 꽃에서 시선을 떼고 자신을 돌아보았다. 다시 한 번 예쁜 눈이구나 하고 생각할 무렵, 아이는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꽃을 돌아보더니 팍 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얹어 두었던 손을 뻗어, 가련할 정도로 위태위태하게 자라고 있던 들꽃을 거칠게 꺾어버렸다.
"안 좋아해, 이런 꽃."
"..."
"자기가 피어날 장소도 제대로 모르고 피어난 꽃 따위. 어차피 금방 죽어버릴 거잖아."
"..."
"죽어버리면 그만인 거야. 무가치 해."
아이의 목소리에는 분노와도 같은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어렴풋이 슬픈 기색도 묻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강도로 따지자면 분노가 좀 더 강한 것 같았지만, 은연중에 드러난 슬픔이 왠지 자신의 가슴을 울리고 있었기에 이대로 아이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손목을 잡고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이게 언제 적 일이더라."
눈꺼풀 위에 드리우는 아침 햇살에 잠에서 깨어나, 건조해진 눈을 손등으로 가볍게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벌써 20년 가까이 된 일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하품을 한 번 크게 한 후,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서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일상의 당연한 수순대로, 세안과 샤워를 한 뒤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쳤다. 먹은 것 뒷정리까지 끝낸 후에야 아카데미에 출근할 준비를 마치곤 밖으로 나와 현관문을 잠갔다.
"아아, 공기 좋다."
아카데미의 선생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임무에 나간 사람들보다는 늦게, 그리고 일반적인 업무를 보는 사람들보다는 늘 이른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약간은 서늘하지만 상쾌하게만 느껴지는 아침 공기를 기분 좋게 들이마시면서, 여느 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카데미로 향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 카사마츠 선생님. 좋은 아침이에요."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반쯤은 버릇이 되어버린 아침인사를 건네자, 자신보다 먼저 와 있던 선생이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그 선생은 자신이 앉는 자리 맞은편에 앉아 있었는데, 그 자리는 어제까지만 해도 비어있었다.
"임무에서 돌아오셨군요. 이번에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하, 수고는요, 뭘. 교류하고 있는 마을들에 전령으로 다녀온 것뿐인 걸요."
"급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임무는 임무잖습니까. 마을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덤덤한 어조로 그의 공로를 치하하자, 선생은 조금은 쑥스러워 하는 기색을 표하더니 '그런가요?'하고 짧게 덧붙이면서 대화를 마쳤다. 아침 인사는 자신도 이정도로만 하면 될 것 같아서, 그 이상 말을 꺼내지 않은 채 짐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는데 책상 위에 못 보던 것이 있어서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꽃?"
꽃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많이 부족할지도 모르는 작은 들꽃 한 송이였다. 하지만 왜 꽃 한 송이가 여기 놓여있는가 보단 누가 이걸 두고 갔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에, 자신보다 먼저 와 있던 선생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제가 오기 전에 누가 절 찾아왔습니까?"
"네? 적어도 제가 온 후에는 없었는데요."
"그럼 누구지..."
들꽃을 내려다보며 고민을 하고 있자, 선생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카사마츠 선생님이 담당하고 있는 반 아이들이 아닐까요?' 라고 덧붙였다. 그 말에 생각나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가능성을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수업에 성실한 코보리였으나, 자신에게 꽃을 줄 이유는 없었다. 그 다음은 모리야마였는데, 간간히 꺾은 꽃을 남들에게 뿌리고 다니긴 했으나 그 대상은 여자 한정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둘의 이름을 머릿속 리스트에서 지우고, 이어 하야카와와 나카무라의 이름도 리스트에서 소거했다.
"대체 누가....아."
리스트 내의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소거시켜나가며 고민하고 있던 도중, 오늘 아침 일어나기 전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설마."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꽃과 연관된 자신의 추억은 그 때의 일, 단 한 가지뿐이었지만 그 때의 그 아이가 지금 와서 자신에게 꽃을 줄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침에도 떠올렸다시피 벌써 근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바람에 흩날리던 꽃이 열린 창문을 통해 날아 들어와 자신의 자리에 떨어졌다, 정도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려버리자 곧 꽃에 대한 것은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업 준비와, 아카데미를 졸업해 닌자 시험을 칠 아이들의 목록을 추리는 것으로 머리가 가득 차버리고 말았다. 간간히 교실로 수업을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다가 호카게가 자신을 부른다는 말을 전달 받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들에게 잠시 호카게를 뵙고 오겠단 말을 남기고는 아카데미를 빠져나왔다.
아카데미 안에 있을 때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감을 제대로 못 잡고 있었는데, 밖에 나와 하늘을 바라보니 시간이 꽤 흘러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서쪽 하늘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카게 님을 뵙고 나오면 퇴근 시간이겠는걸."
그렇게 생각하니 좀 더 느긋하게 다녀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곧, 임무 수행과 함께 시간 엄수도 목숨같이 여겨야 하는 닌자가, 그것도 그런 닌자를 육성하는 선생이 가질 마음가짐이 못 된다고 스스로를 질책하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시라도 바삐 다녀오려고 발을 움직이고 있는데, 눈앞에 나풀나풀 꽃 한 송이가 떨어졌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시야를 가리는 꽃을 가볍게 낚아챘다. 그러자 더 많은 꽃이, 마치 계절을 잊은 눈이 내리는 것처럼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건?"
일순 눈같이 흩날리는 꽃이 예쁘다고 생각을 했지만, 이내 누군가가 자신에게 환술을 거는 것인가 싶어서 눈빛을 달리하며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환술을 해제할 인을 맺으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누군가에 의해 손목을 붙잡혔다. 그러나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그 손길은 조심스럽고 부드럽기 짝이 없어서, 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자신은 만난 적이 없는 모르는 사람 같았다. 단지 현 시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입고 있는 것과는 다른 '암부'의 복장을 상대가 입고 있었다는 점과, 신상이 드러나지 않도록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는 암부 특유의 흰색 여우가면 너머의 얼굴이 왠지 웃고 있는 것 같단 느낌이 든다는 점이었다.
"암부가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예전과는 다른데요? 예전엔 좀 더 상냥했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그런 모습도 나쁘진 않네요, 라고 암부는 영문을 모를 말을 하면서 작게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같은 나뭇잎 마을의 닌자라고는 하나 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을 육성하는 자신과, 호카게 직속 암살 부대에 속해 있는 상대와는 접점이 없었다. 그런 상대가 마치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기분이 껄끄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욱 무뚝뚝한 어조로 상대에게 대꾸했다.
"볼일이 없으시다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호카게 님의 명을 받고 가는 중이기에."
"'죽어버리면 그만인 거야. 무가치 해.'"
"...!"
이전에 공터에서 만났던 아이가 꺼낸 말이었다. 다른 누구에게도, 심지어 부모님에게도 이야기 한 적이 없었기에, 자신을 제외하곤 그 아이만이 알고 있는 말이었다. 그 말을 어떻게 눈앞에 있는 암부가 알고 있는 것일까.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여우 가면을 쓰고 있는 암부의 얼굴을 응시했다.
"어떻게 그 말을..."
"제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당신이 이렇게 대답을 돌려줬었죠. 꽃이 가득 핀 곳으로 데려가서, 화관을 만들어 주면서."
"..."
"'네가 보기엔, 네 손으로 그렇게 꺾어버린 작은 들꽃이 무가치해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다른 꽃들과 엮어 화관을 만든다면, 어느 누군가를 미소 짓게 해줄 수 있는 가치정돈 갖게 되지 않을까?"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오늘 아침에 꾸었던 꿈의 연장을 보는 것처럼 천천히 읊조리듯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말을 꺼내고 나서 스스로가 놀라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자, 앞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암부는 손을 들어 올려 본인의 가면을 벗어 내렸다.
그때처럼 예쁜 여자아이 같은 느낌은 많이 사라져 있었지만, 그래도 남자이면서도 예쁘장하다고 느낄 정도의 잘생긴 외모가 가면 너머로 서서히 드러났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이렇게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곤 얼른 시선을 돌렸다.
"미안합니다, 암부 신상은 극비인데.."
"아, 괜찮슴다. 어차피 이제 자주 볼 텐데요."
"자주요?"
그런 게 있슴다, 하고 상대는 싱긋 눈웃음을 짓더니 검지를 입술에 살짝 대고는 이 이상은 비밀이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리고 그는 양 입 꼬리를 부드럽게 끌어올려 웃더니 다시 입술을 열었다.
"제 이름, 키세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카사마츠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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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프롤로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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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전력 60분, 키워드 : 기다려줄래(요)?
고등학교 때부터 해온 자율연습은 거의 내재화 된 습관과도 같아서,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나면 간단한 트레이닝을 하거나 근처 공원을 달리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하아.”
달리던 발이 집 근처에 도착할 즈음에야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속도를 더욱 줄여 걷는 수준이 되었을 즈음에는 어느덧 집 현관문 앞이었다.
“땀범벅이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고는, 한 손으로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훔쳐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운동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일상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땀으로 흥건한 트레이닝복이라던가, 주변 공기가 온 몸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듯한 감각은 익숙해질 법 함에도 불구하고 익숙해지지 않았다.
찝찝하다.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바로 입 밖으로 내뱉고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리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 신발을 벗고 안에 들어서면서, 상체 실루엣을 드러낼 것만 같이 들러붙어 있는 상의를 다소 거칠게 벗어 던졌다. 그리곤 달리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바로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나머지 옷을 벗어버린 뒤, 러닝을 하느라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몸을 쿨다운 시킬 겸 체온보다는 아주 조금 낮은 온도의 미지근한 물로 땀으로 흠뻑 젖어있는 몸을 한 번 씻어 내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땀에 푹 젖어있는 머리카락을 샴푸로 말끔하게 감은 후에, 욕실 한 쪽 벽에 걸려 있던 샤워 타올을 집어 들어 바디 워시로 거품을 낸 뒤 몸을 꼼꼼히 닦았다.
처음 몸에 끼얹었던 물보다 조금 더 차가운 온도의 물로 거품마저 싹 씻어 내리고 나자, 한껏 뜨거워져 있던 몸이 조금은 진정을 한듯 평소의 상태를 되찾은 것 같았다. 샤워 후 찾아드는 상쾌함에, 욕실에 들어오기 전 불쾌함이 가득한 얼굴과는 달리, 마치 콧노래라도 흥얼거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한 채로 잘 마른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아냈다. 그리고 젖은 머리카락을 대강 수건으로 감싼 채 밖으로 나와 얼른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야 살 것 같네.”
집에서 입는 편한 옷을 챙겨 입은 후에야 비로소, 어딘가 한숨이 어린 것 같은 목소리로 살 것 같다는 말을 토해냈다. 그리곤 반쯤 버릇처럼 핸드폰을 찾아서 누구에게 연락이 온 것은 없는지 확인을 했다. 아쉽게도 자신에게 연락을 한 사람들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이들 뿐이었다. 오늘도 깨어진 기대감에 살짝 울상인 표정을 지어보이다가, 냉큼 메시지 창을 켜곤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운동하고 왔더니 체력이 제로가 되어 버렸슴다. 아~ 힘들다. 선배는 뭐하고 있슴까?]
원체 답장을 바로 보내는 사람도 아니고, 문자를 일일이 찍고 있는 시간이 아깝고 또한 귀찮다며 연락은 되도록 전화로 하는 사람이었기에 지금 보낸 자신의 문자에 바로 답이 돌아올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일이라도 하며 느긋이 그의 연락을 기다리자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챙겨든 채 침대 위로 올라가 편히 누웠다.
*
그러다 어느 순간 시야가 바뀐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라?”
분명 자신의 방에, 그것도 침대 위에 누워 있을 터였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곳은 늘 보던 자신의 방 전경이 아니라, 익숙하다면 익숙한 카이조의 로커 룸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정말 질릴 정도로 본 풍경이었기에 착각을 하려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지금 자신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자, 시야가 살짝 왜곡되는 것 같더니 로커 룸 한 쪽에 어느 인물의 인영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흐릿하더니 서서히, 마치 ‘진짜 사람’처럼 선명해지기 시작한 그 인영은 어느새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상이 또렷해졌다.
“...카사마츠 선배?”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꿈속에 나타난 인물은, 자신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하는 그 사람이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레귤러 유니폼을 입고 있는 상태로 로커 룸의 간이 의자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는, 자신이 가까이 다가갔을 즈음에야 인기척을 느꼈는지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올린 그와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자신은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그의 눈에서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 것 같은 기색을 읽어낸 탓이었고, 두 번째는 그의 얼굴이 자신이 맨 처음 그를 만났을 때보다 더욱 앳된 탓이었다. ‘지금의 그’도 제 나이로 보이지 않을 만큼 앳된 얼굴이었지만, 꿈속의 그는 그것보다 더욱 어려 보였다.
“카사마츠 선배... 맞죠?”
“... 날 선배라고 부르는 걸 보면 넌 1학년이겠군.”
“네?”
자신을 1학년이라고 단정 짓듯 이야기를 하는 꿈속의 그의 목소리에 조금은 당혹스러움이 묻어나는 어조로 반문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의 말에 반응할 기력도 없다는 듯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그의 한숨에서 깊은 고뇌와도 같은 무언가를 느껴서 고개를 조금 숙여 그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무슨 일 있슴까?”
“알고 있을 텐데? 아니면 아픈 구석을 찔러 죄책감을 이 이상으로 안겨주고 싶은 건가?”
“영문을 모르겠는데요.”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대답을 한 자신을 올려다보면서, 그는 미심쩍은 표정을 잠시 지어보였다. 그리곤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다시 한 번 낮은 한숨을 토해내더니 혼잣말을 내뱉는 것처럼 천천히 읊조리는 것 같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의 시합을 생각하고 있으면 절로 위축되는 기분이 되곤 해.”
“그 때의 시합?”
“... 내 미스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이없게 탈락하는 일은 없었겠지. 아니, 우승을 노려볼 수도 있었겠지.”
그 정도로 강한 팀이었는데, 하고 그가 쓴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가 이전에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가 2학년이었을 때 그의 실수로 인해서 우승을 노려볼 수 있는 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1회전 탈락이라는 고배를 마셨다고 하는 그 이야기가.
자신은 그때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듣곤, 여느 때보다 승리에 대한 염원을 가슴에 품었었다. 비록 자신이 참전했을 때의 시합 결과는 그의 아픔을 배가시킬 뿐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긍지는 드높기 짝이 없다고 그 때 새삼 다시 생각했었다. 하지만 죄책감을 홀로 끌어안고 있는 시기의 그를 마주하게 되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당시의 그’와 ‘자신이 만났던 시기의 그’는 다른 건 아닐까, 하고.
“그래서 ‘구원받고’ 싶은 겁니까?”
“뭐?”
“과거를 속죄하고 싶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자신의 목소리가 점점 싸늘해져가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도 그걸 느꼈는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얼마간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은 채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싸움 아닌 싸움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그로, 그는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떴다.
설마 포기한 것인가. 왠지 모르게 불안해지는 마음에, 노려보는 것처럼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안감과는 달리, 그의 눈은 여느 때보다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결심을 굳힌 것 같은 그런, 굳건함을 엿볼 수 있는 그런 눈빛이었다.
“과거를 속죄하려 하진 않겠어. 또한 누군가의 구원을 바라지도 않겠어.”
“......”
“내 스스로의 의지로... 다음에는 꼭 이기겠어.”
그의 마지막 말에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와 같은 말을 했다. 잠깐 위축되었다고는 해도, 비록 자신이 꾸는 꿈속의 인물일지라도, 그는 변함없이 올곧고 강한 그였다.
“내가 왜 후배에게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헛웃음에 가까운 숨을 잠시 토해내더니 그가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그런 그를 잠시 지켜보고 있다가, 그의 앞에 살짝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양 손으로 그의 한 손을 감싸 쥐고는, 마치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 그 손을 자신의 이마에 가볍게 댔다.
“물론 시합에서 매번 이길 수는 없슴다.”
“......”
“시합에서 지고 난 후 자신을 질책하게 되는, 이번 같은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슴다.”
“......”
“그렇지만 전, 당신에게 받은 게 많으니까 그 보답을 하려고 함다.”
“...보답?”
아무런 대답 없이 듣고만 있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물음에, 살짝 입 꼬리를 끌어올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우승컵을 안겨 주겠슴다. 카이조가 하나로 뭉쳐 얻어낸 결과물을.”
“......”
“그러니까, 기다려줄래요?”
그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일말의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을 즈음, 그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무슨 말을 자신에게 건네고 있었다.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인 것 같았으나, 서서히 꿈에서 깨어나고 있는 탓인지 몰라도 그의 목소리는 자신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
“...아.”
눈을 뜨자 카이조의 로커 룸이 아닌, 익숙한 자신의 방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카사마츠 선배...”
그에게 문자를 보내고 잠든 탓에, 그와 관련된 꿈을 꾸게 된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 베개맡을 손으로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손끝에 걸린 핸드폰을 집어 들어 혹시 답장이 오지는 않았나, 하고 확인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그가 보낸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꿈의 연장선상인지는 몰라도, 괜히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며 그가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미안. 한숨 자고 있었어. 근데 꿈에 네가 나왔더라.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문자를 읽고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그와 자신이 같은 꿈을 꾼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 우연이 과연 그와 자신 사이에 존재할지 여부는 잠시 미루어두고, 한껏 웃고 있다가 느긋한 손놀림으로 그에게 답 문자를 보냈다.
[저도 방금 전까지 선배가 나오는 꿈꾸고 있었는데! 그 꿈을 꿨더니 선배가 더 보고 싶어졌슴다!]
‘그러니까, 기다려줄래요?’
‘기다릴게. 카이조의 우승을. 네가 안겨주는 우승컵을. 내가 졸업한 후라도 좋으니까, 언제까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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