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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코의 농구 전력 60분 키워드 : 새해
새로운 한 해를 앞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 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그저 이전과 마찬가지로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정도의 감각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분주하게 나갈 준비를 마치고 신사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텔레비전 방송에서 팀을 나누어 아이돌들이 춤추고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어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는 건 추워서 싫은걸. 게다가 저런 것에 흥미도 없고”
집 구조의 특성 상 내부의 공기는 차갑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어깨 위에 걸친 옷을 조금 더 여미면서 꾸물꾸물 코타츠 안으로 기어들어가듯이 자리를 잡았다. 훈훈한 온기가 가득 차 있는 코타츠 안에 몸의 대부분을 밀어 넣고 있으니, 그제야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연휴에는 쉬는 게 제일이지.”
나른한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리고 있다가, 아직까지도 시끄럽게 혼자 떠들고 있는 텔레비전 쪽으로 잠시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텔레비전엔 흥미가 없었다. 코타츠 안에 기어들어가 있는 상태로 손만 쭉 뻗어서 더듬더듬 텔레비전의 리모콘을 찾았다. 손끝에 리모콘이 걸리자 그걸 슬슬 끌어 손에 쥐고는 텔레비전 전원버튼을 눌러 껐다.
핏, 하는 소리와 함께 텔레비전 전원이 꺼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던 소리 또한 함께 사라져버려서, 일순간에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새해랍시고 소란스러운 방송 분위기가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소음이 사라지자 조금은 어색하다 싶을 정도로 방 안에 적막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적막감도 곧 푹 쉴 수 있는 ‘고요함’ 정도로 받아들이게 되어서,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한 채로 코타츠 탁자 위에 엎어 놓았던 책을 다시 집어 들어 읽기 시작했다. 주변이 조용하니 여느 때보다 흰색 종이 위에 나열되어 있는 글자들이 더욱 눈에 잘 들어오는 것 같았다.
얼마나 책에 집중을 하고 있었을까. 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어깨와 목 근육이 결려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잠시 쉬었다 읽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잠시 물이나 한 잔 떠올 겸, 미적미적 코타츠에서 빠져 나와 방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왔다.
“아, 추워.”
난방을 켠다고 해도 이 모양이네. 작게 투덜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고는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가족들은 새해를 밖에서 맞을 모양인지 거실은 사람의 인기척 하나 없이 썰렁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휑한 분위기에도 별 다른 생각이 없었던지라, 바로 부엌으로 향해 머그컵 하나를 꺼내들었다.
방에서 나오기 전 생각했던 것처럼 물이나 한 잔 따라서 가지고 돌아갈까, 하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역시 찬 물보다는 따뜻한 커피가 낫겠지 싶어서 귀찮음을 감수하고 커피를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찬장에서 미리 조금 갈아두었던 원두 가루가 담긴 통을 꺼내어, 커피포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이거, 미리 갈아두면 향이랑 맛이 변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손을 움직여 커피를 내리고 있는 와중, 원두를 선물해준 ‘후배’가 했던 말이 떠올라 다시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일단 맛보다는 따뜻한 무언가를 마시고 싶은 욕구가 더 강했기 때문에, 그리고 먹을 때 즉시 원두를 가는 귀찮은 과정을 매번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렴 어떠냐는 듯한 표정을 잠시 지어보였다.
그렇게 수어 분이 지나자 머그컵 하나는 충분히 채울 수 있을 정도의 커피가 포트 안에 내려져 있었다. 그걸 잠시 지켜보고 있다가 포트를 빼내어 들어 머그컵에 조심스럽게 따라 붓기 시작했다. 포트 안에서 머그컵 안으로, 온기를 머금고 있는 커피가 김을 폴폴 흩뿌리며 옮겨졌다.
“향 좋기만 하네, 뭐.”
후배가 이야기 했던 것과는 달리, 커피에 별 다른 취미가 없는 자신에게도 지금 내린 커피의 향은 좋기만 했다. 물론 입맛이 고급인 사람들은 또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잠깐 동안 생각을 하고는, 머그컵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부엌을 빠져 나왔다.
행여나 바닥에 커피를 쏟을 새라 조심조심 걸어올라 왔더니만, 2층에 위치한 자신의 방에 도착하기까지 수어 분이 걸린 것 같았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나르는, 그런 번거로운 일은 이제 끝났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코타츠 탁자 위에 컵을 내려놓고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다시 컵에 손을 뻗어 커피를 마시려고 한 순간, 책 옆에 두었던 핸드폰이 웅웅대며 울리기 시작했다.
“귀찮게 누구야...”
평소엔 자신에게 연락을 하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고, 심지어 가족들조차도 서로 연락을 잘 주고받는 쪽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시끄럽게 울리는 핸드폰을 보게 된 건 또 새삼 오랜만이다 싶었다. 그래서 누가 이 한밤중에 자신에게 연락을 하는지 궁금함 반 짜증 반인 표정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어 확인을 해보았다.
[마유즈미 상,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유즈미 상, 새해 복!!!!!!! 많이 많이!!!!!!!]
[새해 복]
굳이 메시지 창을 켜지 않고 푸시에 뜬 내용만 보아도 누가 보낸 것인지 대강 알 수 있었다. 이 녀석들에게 새해 안부 인사를 받다니,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답장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핸드폰을 멀찌감치 던져두려고 하는데, 그 순간 다시 한 번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Happy New Year. 지난 한 해, 감사했습니다. 아카시 세이쥬로.]
딱딱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거기다가 마치 회사원이 직장 동료에게 보내듯, 본인의 이름까지 문자 마지막에 꼼꼼히 적어 보냈다.
“예의 차리는 척 하긴. 예전엔 선후배 관계가 다 뭐냐는 듯이 반말해대더니.”
입으로는 문자 내용을 가지고 열심히 불평을 해대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입꼬리는 슬그머니 위로 향하기 시작했다. 후배들에게 이렇게 문자를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연하장은 둘째치고 이런 식의 문자를 받은 건 또 처음일지도 몰랐다.
“아, 모르겠다.”
정말 귀찮지만 답장은 해줘야겠지, 라고 희미하게 웃음기가 어린 얼굴로 문자 창을 켰다. 그리고 자신에게 새해 인사 문자를 보내준 네 명의 이름을 일괄 선택 하곤, 같은 내용을 적어 그들에게로 전송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문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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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키워드 : 나이
언젠가 한 번, 그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졸업하고 난 후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냐고. 그 질문을 들었을 당시엔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은 채 가볍게 대꾸를 했던 것 같았다. 진학을 생각하고 있으니 당연히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을 갈 테고, 대학에 가고 난 후에도 농구를 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이런 자신의 대답에, 그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냥 웃음으로 무마하는가 싶더니 ‘그렇군요...’ 하고 반응할 뿐이었다. 그때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속 시원히 하라고, 구박을 하듯 그를 쥐어박았지만 그래도 그는 이야기 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이 맞으면서도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리고 졸업을 앞두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가 미처 하지 못했던 그 말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가 있었다.
*
“...츠.”
“...카사마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어올렸다. 약간은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동기를 마주하면서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 인사를 했다.
“미안. 잠깐 다른 생각을 했어.”
“그럴 것 같더라. 눈이 완전 풀렸었어.”
레포트, 많이 힘드냐? 라고 동기가 덧붙이더니 한 손에 들고 있던 캔 커피를 자신에게 가볍게 던졌다. 그 캔 커피를 받아 들고는 고맙다는 말을 덧붙인 뒤, 바로 캔 뚜껑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캔 커피 특유의 들척지근한 맛이 입 안에 감돌자, 무의식적으로 혀로 입술을 가볍게 훑어 올렸다.
“그냥 그렇지, 뭐. 워낙 악명 높은 교수님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되도록 안 들으려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뤄두는 강의라던데.. 넌 왜..”
“그러게. 사람들이 괜히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넌 쓸데없이 고지식해, 라고 동기가 이야기를 하곤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캔 커피를 낚아채더니 본인이 쭉쭉 들이키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주는 캔 커피가 아니었나, 하고 순간 생각했지만 어차피 다 마시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에 별 다른 대꾸는 하지 않은 채 동기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숨 한 번 안 쉬고 남은 커피를 모두 마셔버린 동기는, 마치 가득 찬 술잔을 비운 사람처럼 크으, 하는 소리를 잠깐 내더니 손등으로 본인의 입술을 슥 문질러 닦았다. 어딘가 과장된 듯한 그 모습이 웃기게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 고등학교 시절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것 같기도 해서 작게 웃음을 흘렸다.
“커피 마신 주제에 술 마신 것처럼 굴긴.”
“기분이지, 기분.”
폼생폼사야 말로 남자의 미덕이라며 본인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대해서 구구절절 늘어놓는 동기의 말을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리고 있다가, 이제 슬슬 본론에 들어가 줬으면 하는 바람에 그를 바라보면서 툭 말을 던졌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무심한 사람. 단도직입적으로 그렇게 물으면 어떡해? 그러니까 여자가 안 생기는 거야.”
“여자는 관계없잖아!”
콤플렉스에 가까운 부분을 동기가 찌르자 일순 발끈해서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그에게 대꾸했다. 그러자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 같아 움찔하곤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흠흠, 여하튼 신세한탄 하러 온 거면 빨리 하라고.”
멍석을 깔아주듯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주자, 동기는 본인의 인생관을 늘어놓았던 때처럼 현재 본인의 고민에 대해서 장황하게 토로하기 시작했다.
고민의 주제는 아니나 다를까 동기가 현재 만나고 있는 고등학생 여자 친구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대학생과 고등학생 커플이지만, 듣자하니 고등학생 시절부터 만나고 있던 사이로 일전에 자신도 동기의 소개로 그 상대를 한 번 만난 적이 있기도 했다. 그 때 그리 소득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예쁘게 잘 사귀고 있다는 건 여자에 익숙하지 못한 자신으로서도 잘 알 수 있었기에 뭐가 문제인 건가 싶었다.
그래서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이제야 길고 긴 서론이 끝나고 본론에 들어가는 것인지 동기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이야기에는 사족이 많이 붙어 순간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어진 부분도 몇 군데 있었지만, 대략적으로 요약을 해보니 ‘고등학생인 여자 친구가, 대학생인 자신이 다른 곳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다’ 는 것이었다.
“여자 친구 입장에선 걱정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그건 나도 알지. 하지만 아무리 걱정 말라고 해도, 나한텐 너밖에 없다고 납득을 시키려고 해도 혼자 힘들어 하더라니까. 이전에 나 고등학교 졸업할 때도 졸업하지 말라고 울고불고 얼마나 성화였던지.”
“그 이야기는 많이 들었으니까 이제 그만 해라.”
동기의 뻔한 과거사 레퍼토리가 다시 시작될 것 같아 단호하게 끊어냈다. 이런 자신의 태도에 동기는 살짝 토라진 것 같은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이내 다시 근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는 자신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의견을 구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여자의 심리를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라, 자신에게 의견을 구한다고 해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해서 천천히 운을 떼기 시작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얼마 차이가 나지 않더라도 나이가 서로 다른 커플이라면 어쩔 수 없는 문제 같다. 이야기를 많이 하고 안심시켜주는 수밖엔.”
“역시 그러려나...”
“자기 시야 내에 상대방이 없고, 자기 세상에 더 이상 상대방이 속해있지 않으면 불안한 건 당연한 거니까.”
진지하게 대답을 해주자, 동기도 동기 나름대로 느낀 바가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긴 채 핸드폰을 꺼내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가 싶더니 자리를 떴다. 분명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등을 기대어 앉아, 자신이 동기에게 해주었던 말에 대해서 천천히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자기 시야 내에 상대방이 들어와 있지 않으면, 자기 세상에 더 이상 상대방이 속해있지 않으면 불안한 것은 당연하다. 동기에게 이 말을 해주었을 때, 무심코 머릿속으로 ‘그’를 떠올렸었다. 고등학교 시절, 자신이 아낀다면 아꼈고, 애정을 주었다면 애정을 주었다고 할 수 있는 카이조의 에이스를.
물론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가 카이조라는 팀에 애정을 가져주기만을 바랐을 때라, 한시라도 빨리 카이조라는 울타리 내에서 그가 안정을 느낄 수 있도록 ‘주장으로서’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든 신경은 그에게로 쏠렸고, 이런 자신의 노력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그도 간간히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자신을 통해서 그가 카이조를 인지하고 있었고, 자신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카이조에 애착을 가지게 된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조금 변하게 된 것은, 대학 합격 발표가 나고 졸업식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졸업식 며칠 전, 그가 자신을 찾아왔었다. 처음엔 졸업이 얼마 안 남았으니 홀가분하겠다며, 평소 같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던 그였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한 쪽 손을 잡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도 안 되는 억지라는 것을 알지만 졸업하지 말아달라고, 자기 시야에서 벗어나 멀리 가지 말아달라고, 그 답지 않게 애원하고 울먹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어, 자기는 아직 어려서 쫓아가는 것밖에는 못한다며, 어딘가 서러움이 묻어나는 어조로 덧붙이고는 고개를 푹 숙였었다.
“아직 어려서 쫓아가는 것밖에는 못한다, 라...”
벌써 일 년 가까이 지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멀리 떠나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 그의 세상과는 동떨어진 곳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의 말을 통해서 다른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존재가 자신의 시야 밖에 자리하게 된 것이며 또한 자신의 세상 밖에서 그가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졸업한 후, 선배의 미래에는 ‘제’가 존재함까?]
이게 바로 그가 그 때, 자신에게 정말로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어 생각했다. 그럼 자신이 졸업하고 난 후, ‘그’의 미래에는 자신이 존재할까? 하고.
“애초에 나이가 많고 적고는 관계없었던 거야.”
어느 한 쪽의 나이가 많고 적음은 관계없었다. 나이 차이가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그저 상대를 향한 애정에서 기인한 걱정 그리고 불안감일 뿐이었다. 상대의 미래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을지, 상대의 마음에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있을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한 쪽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향하는 두 사람 모두의 마음일터였다.
“키세, 나는 말이지... 너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이 부럽고, 질투나.”
그에게는 전해지지 않을 말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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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키워드 : 매니큐어
사람에게 어울리는 색이란 천차만별이다. 어느 사람에게는 밝고 부드러운 계통의 색이 어울린다면, 어느 사람에게는 화려하다 싶을 정도로 짙고 독특한 색이 어울리기도 한다. 하지만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를 떠나서, 한 번쯤은 상대가 이런 색을 몸에 걸쳐보는 건 어떨까, 하고 상상을 해보는 건 개인의 자유일 것이다. 마치 자신이 그를 지켜보다가 아주 가끔, 이전에 보게 되었던 그의 붉은 손톱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
늘 그렇듯 수업이 끝나면 습관처럼 체육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푼 뒤 본격적으로 훈련에 돌입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뭔가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누락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무의식적으로 두리번거리며 체육관 이곳저곳에 시선을 두었다.
“키세, 뭘 그리 찾고 있어?”
“아, 모리야마 선배...”
뭘 그리 찾고 있냐는 모리야마의 말에, 그를 돌아보며 멋쩍은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라 그래야하지.. 오늘은 뭔가 어제와는 좀 다른 것 같아서..”
“아아, ‘그게’ 없으니 허전한가보네.”
모리야마의 애매모호한 말에, 그 말의 의미를 전혀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손끝으로 볼을 가볍게 긁적였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슴다.”
“‘그거’ 말이야, ‘그거’. 널 열심히 구박하는 카사마츠의 애정 어린 손길이 없잖아.”
사람의 부재를 그런 걸로 깨닫다니, 네가 파블로스의 개도 아니고,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처럼 말을 툭 내뱉고 코트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모리야마의 뒷모습을 잠시 동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삼 다시 깨달았다. 늘 체육관에 가장 먼저 와서 훈련 지시를 내리고 있던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 사람이 훈련에 지각할 리가 없는데. 언제나 규칙에 엄격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한 사람이었기에 지각 같은 것은 그의 사전에 분명 없는 단어일 터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상하리만치 그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얼굴 표정이 확 굳어버렸다. 모리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행방을 물어야 할까, 아니면 지금 바로 체육관을 뛰쳐나가 그를 찾아나서는 게 좋을까. 머릿속으로 어느 선택지가 더 효율적인지 고려하면서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려는 찰나, 굳게 닫혀있던 체육관 문이 활짝 열렸다.
“늦어서 미안하다. 다들 연습 속행하도록.”
“... 카사마츠 선배!”
찾으러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상대가 눈앞에 나타나자, 반색하며 단숨에 그의 쪽으로 다가갔다.
“뭐, 뭐냐, 키세.”
“부 활동 시작했는데 선배가 안 보여서 깜짝 놀랐슴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구요.”
“쓸데없는 걱정이다. 가서 슛 연습이나 해.”
평소와 마찬가지로, 매정하리만치 딱딱한 그의 말에 오히려 안정을 되찾으며 씩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곤 그의 명령에 따르겠다는 듯이 과장되게 거수경례를 해보이려 하는데, 문득 그의 오른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손끝,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새끼손가락 한 마디정도가 하얀색 테이프로 꼼꼼히 테이핑이 되어 있었다. 마치 손톱의 보호를 위해 평상시 테이핑을 하고 있는 중학교 시절 동창인 미도리마처럼.
하지만 그는 미도리마와는 달랐다. 미도리마는 본인의 슛 터치 감각에 영향이 가지 않도록 다소 집착적으로 손톱관리를 하는 쪽이었지만, 그는 부상에만 유의할 뿐 손 관리에 신경을 곤두세우지도 않았다. 더욱이 자신 또한 그가 손과 관련된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를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생각할 수 있는 쪽은 단 하나.
“선배, 이 손... 어떻게 된 겁니까?”
개구지게 웃으려던 것을 그만두고, 싹 식어버린 얼굴로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는 듯이 자신을 올려보다가, 자신의 시선이 그의 오른손에 꽂힌 것을 깨닫곤 아차, 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무 것도 아냐. 가서 연습이나 해.”
“하지만, 선배...!”
“가서 연습이나 하라고 했다.”
“읏...!”
이 이상의 관심은 필요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끊어 내버리는 그의 태도에, 결국 캐묻지 못하고 몸을 돌려 연습을 하러 가는 수밖엔 없었다. 하지만 연습을 하는 내내 그에게, 그의 새끼손가락에 시선이 가는 것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
뒤늦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집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오늘의 열쇠 당번이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자신이 늦게까지 남아있으면 민폐이겠구나 싶어서 가능한 빨리 짐을 챙겨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레귤러 전용 로커실의 문을 열었다.
“어?”
“아, 이제 왔냐.”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네,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간이 의자에 앉아있던 그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이어 자기가 열쇠 당번이니 망정이니 다른 사람이었으면 항의가 들어올 뻔했다며 덧붙이는 그의 목소리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갈 준비 안 해? 빨리 짐 싸.”
“... 카사마츠 선배.”
자신의 부름에, 뭐냐, 하고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며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걸 또 잠시 동안 지켜보고 있다가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가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채듯이 쥐고는 자신의 눈높이 정도로 들어 올렸다.
“이 손가락... 어쩌다 이렇게 된 겁니까?”
“하?”
“대답을 아직 못 들었슴다. 대답해주십쇼.”
“아까도 말했잖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아무 것도 아닌데 테이핑을 할 정도임까? 제가 그렇게 바보로 보입니까?”
계속 아무 것도 아니라며 대답하길 기피하는 그의 태도에, 자연스럽게 언성이 높아졌다. 그는 평소와 달리 목소리를 높이는 자신의 태도에 조금은 놀랐는지 눈을 살짝 크게 뜨는가 싶더니, 이내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썼다. 그리곤 잡힌 손을 빼내더니, 테이핑이 된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어깨를 강하게 후려갈겼다.
“어디서 선배한테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 건방지게.”
“아, 아픔다!”
손바닥으로 맨살을 가격당한 터라 찌릿한 통증이 어깨에서부터 전해지는 것 같았다. 맞은 부위가 화끈화끈 거리는 것 같아서 울상을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는데, 그는 한숨을 푹 내쉬는가 싶더니 그 오른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별 거 아니라고. 다친 것도 아닌데 네가 그렇게 호들갑 떠니까 더 민망하다.”
“다친 게... 아닙니까?”
“그래.”
그럼 왜 테이핑을... 하고 묻는 것 같은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자, 그는 답지 않게 조금 주저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오른손에 감긴 테이핑을 왼손으로 서툴게 풀어 내렸다. 그의 새끼손가락에는 부상의 흔적 따윈 보이지 않았다. 단지 보이는 것이라곤 그의 새끼손톱 위에 물들인 것처럼 남아있는 붉은 매니큐어의 흔적뿐이었다.
“우리 집 꼬맹이.. 그러니까 막내 동생이 어디서 났는지는 몰라도 매니큐어를 빌려와서 말이지.”
“.......”
“방심한 틈을 타서 여기에 칠해버렸어.”
“그... 그럼 아세톤으로 지우면 되는 거 아님까...?”
애초에 매니큐어도 없는 집에 아세톤이라고 있겠냐? 하고 그가 덤덤하게 대꾸하자, 그것도 그렇다 싶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게 아니었다. 농구를 하는데 지장이 가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자신에게 패스를 해줄 수 있었다. 부상이 아니었으니까.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불안감은 어느새 지워지고 그 빈자리를 안도감이 메워나가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에요, 선배.”
“그래. 난 네 덕분에 피곤했지만. 사람이 번거롭게 보건실까지 가서 테이핑하고 왔는데.”
이게 떨어져나가거나 자연스레 지워질 때까지 테이핑으로 가릴 생각이었는데, 너 때문에 글렀어, 하고 덧붙이는 그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하하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는 다시 인상을 쓰면서 자신의 어깨를 툭 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웃음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제가 내일 아세톤 빌려드릴게요.”
“오, 그래준다면 고맙지.”
화색을 띠며 자신에게 고맙다고 이야기를 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정말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 때문에 곤란해 하고 있었구나 싶어서 다시금 웃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올 뻔 했다. 하지만 또 한 번 그에게 맞을까 싶어서 간신히 웃음을 참아내고는, 그에게서 살짝 떨어져 자신에게 할당된 로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내던져 둔거나 다름없이 방치한 가방 속에 로커 안의 짐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말임다, 선배.”
“엉?”
“그 붉은 매니큐어, 은근히 잘 어울리네요.”
지금 놀리는 거냐면서 그가 수건을 집어던졌지만, 그걸 공중에서 손으로 낚아채며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조라는 군단을 이끄는 명장인 그에게는 역시 푸른빛이 제일 잘 어울렸지만, 그의 타오르는 것 같은 기질을 닮은 붉은빛도 꽤 잘 어울리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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