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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사랑은 열린 문
7.4데이 기념글
*쌍방 삽질하는 황립이 보고 싶어서 그만...
그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깨달은 것은 꽤 오래 전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마음을 그가 눈치 챈 것 또한 비슷한 시기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항상 겁쟁이였던 자신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짙어지는 감정을 숨기기에만 급급했다. 혹시라도 안 좋은 방향으로 바뀌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그런 노력 때문에, 혹은 그런 노력 덕분에 그와 자신의 관계에는 지금까지 변함없었다. 그와 더불어 그의 마음이 자신을 향해 열리는 일 또한 없었다.
*
"오늘 무슨 일 있슴까?"
"무슨 일이 있어야만 볼 수 있는 사이냐, 우리가?"
그건 아니지만, 하고 키세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그가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슬쩍, 그의 모습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한 번 훑어 내렸다.
무슨 일이 있어야만 볼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도리어 단순한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치곤 지나치게 가까워서, 서로가 내킬 때 시간만 맞으면 만나는 관계였다. 하지만 그런 걸 다 떠나서, 독한 술을 연신 들이키면서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무슨 일이 있냐는 말이 제일 먼저 튀어나가 버리고 만 것뿐이었다.
"뭔가 선배답지 않슴다. 그리고 위스키 한 병을 혼자 다 마실 생각임까?"
"네 손 빌려서 집에 돌아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 마라."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란 거 알잖아여."
이 와중에도 자신에게 선을 긋는 것 같은 그의 태도에, 약간은 서운하다는 듯이 답하며 한숨을 흘렸다. 그러자 그는 되려, 어린 게 선배 앞에서 한숨 쉰다고 가볍게 타박을 하더니 빈 스트레이트 잔에 다시금 위스키를 가득 채웠다.
홀로 술을 채우고 마시려는 그 모습이 왠지 마뜩잖아서, 키세는 그에게서 잔을 빼앗아 들고는 직접 그 잔을 들이켜 비워버렸다. 초콜릿 향과도 비슷한 진득하고 들큰한 특유의 향이 알싸하게 코끝을 맴돌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술이 넘어간 식도에서부터 화끈한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밀려오는 술기운에 키세는 잠시 손으로 부채질을 하다가 그의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왜 그러는 검까? 이유를 알아야 위로든 뭐든 하져."
"위로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인마."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키세에게서 잔을 빼앗아 와 다시 술을 채우기 시작했다. 위스키가 넘칠 듯 말듯 가득 채워졌을 즈음, 술병을 내려놓고 잔을 들어 올리려고 하는 그의 손을 키세가 살며시 잡아 멈추어 세웠다.
"카사마츠 선배."
"……."
"선배."
"알았다, 알았어."
카사마츠는 키세의 끈질김에 졌다는 듯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그리고 속내를 털어 놓을 테니 잡은 손목을 놓아달라고 덧붙였다. 이제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뜻을 표하는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키세는 손을 놓아주었고, 여느 때보다 진지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카사마츠는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듯이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쉬이 말로 내뱉어지지 않는지, 입술을 두어 번 달싹거리다가 살짝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안색이 다시금 어두워지는 것 같더니 묘하게 초조한 기색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 변화에 따라 키세도 괜히 초조해졌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그가 편하게 말을 꺼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어느 샌가 손에 배인 땀을 슬쩍 옷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아, 안 되겠다. 일단 한 잔만 더 마시고."
술 한 잔 더 마시겠다는 말에 키세가 뭐라 답할 새도 없이 카사마츠는 잔을 비워버렸다. 그리고 도수 높은 술이 넘어갈 때 으레 그렇듯, 크으으 하고 술기운이 감도는 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런 뒤 숨을 잠시 고르다가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키세를 불렀다.
"키세."
"네."
"키세."
"네, 말씀하십셔."
"……."
"카사마츠 선배?"
"…열리지 않는 문이 네 눈앞에 있으면 넌 어떻게 할 거냐?"
키세는 그 말을 듣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가 꺼낸 말의 의중을 몰라서 잠시 당혹스러워 하다가, 이내 감정을 수습하면서 질문을 되돌려주었다.
"지금 선배가 말하는 열리지 않는 문이란 건 사람의 마음, 인거져?"
"쓸데없이 날카롭긴. 굳이 되물을 필요까진 없잖아."
"질문의 의도가 명확해야 그에 부응하는 답을 할 수 있으니까여."
"…그건 그러네."
카사마츠는 한 발 늦게 수긍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키세가 들려줄 질문에 부응하는 답을 기다리며, 카사마츠는 술기운으로 흐려져 가는 눈에 힘을 주면서 그를 응시했다. 그 시선에 살짝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키세는 담담하게 자신이 떠올린 대답을 입에 올렸다.
"세상에 열리지 않는 문이란 건 없다고 생각함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리지 않았다는 건 아직 그 문을 열 열쇠를 손에 넣지 못했다거나, 문을 열 방법을 모른다거나…,"
문고리를 쥐고 있는 사람이 문을 열 생각이 없다는 거겠죠.
키세는 밀려오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카사마츠는 그런 그의 고통을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본인이 던진 질문의 답을 내어달라고 종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할 건데?"
"선배…."
"그래서 키세 넌, 어떻게 할 건데."
"……."
…전, 모르겠어요.
*
이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잘 모르겠다는 자신의 대답에 그도 자신도 입을 다문 채 술잔을 기울였고, 집에 돌아가기 힘들 정도로 서로 거나하게 취해버렸다는 것만은 명확했다. 그걸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키세 자신이 일어난 곳이 낯익은 침대가 아닌, 낯설기 짝이 없는 호텔의 침대였기 때문이었다.
아직 숙취와 잠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눈을 한 채로, 키세는 한 손으로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듯 더듬었다. 하지만 손바닥에 닿는 것은 푹신한 침구뿐이었고, 그 자리에선 사람의 온기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옆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키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몸을 돌려 모로 누웠다. 그리고 한 동안 텅 빈 옆자리를 멍하니 응시했다.
[아…앗….]
[…왜…어째서….]
[몰라…. 너도 모르겠다고 했으니까, 나도… 읏!]
[…모르겠슴다. 정말로.]
"…?!"
불현듯 떠오른 어젯밤의 기억에 키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금 전 떠오른 것이 무엇인지, 아직 또렷하지 않는 정신을 억지로 다잡아가며 기억을 되짚어나가기 시작했다.
"일 냈다…."
모르긴 몰라도 어렴풋이 떠오른 기억이며 이불 밑으로 훤히 드러난 나신으로 보아할 때 저지른 게 분명했다. 그는 술기운에 휩쓸려서, 그리고 키세 자신은 술기운과 더불어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에 휘둘려서 일을 친 게 분명했다.
어떡하지.
밀려오는 숙취조차 잊을 정도로 당황하며, 키세는 허둥지둥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제의 정신없었던 상황을 대변하듯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주워 입기 시작했다. 내동댕이쳐져 있던 옷에는 약간 구김이 가 있었지만 매무새를 가다듬으니 아주 못 볼꼴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한 쪽 구석에 내팽개쳐져 있던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혹시나 그가 이곳을 떠나고 난 후에 연락을 하진 않았을까, 아니면 떠나면서 짧게라도 메시지를 남기진 않았을까, 초조함 반 기대감 반인 감정 상태로 핸드폰 알림 창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
자신의 기억이 왜곡된 것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 판단하건대, 그가 연락 한 통, 짧은 메시지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의도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 날의 일은 술기운에 벌어진 단순한 해프닝일 뿐, 그 이상으로 키세 자신과 얽히고 싶지 않다는 것. 그 날의 일을 언급하기조차 싫었다는 것.
꽤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내왔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자신에게 한 톨의 여지도 남겨주지 않는다는 점이 못내 서러웠다. 그의 마음의 문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허상과도 같지만 분명 한 순간의 밤을 같이 보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의 결정을 받아들이겠다는 듯이, 키세는 금방이라도 그에게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연락을 취하려던 손을 반대 손으로 아프게 짝짝 내리쳤다. 연락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결정이라면 그에 따라야지.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 역시 따르는 수밖에 없겠지.
*
피우지도 못한 사랑의 실패를 가슴에 묻은 채로도 시간은 무심할 정도로 변함없이 흘러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실연의 아픔이 시간이 흐를수록 아주 조금씩 옅어지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이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는 듯 키세는 홀로 고소를 짓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키세의 핸드폰으로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름 피곤한 하루를 보낸 터라 일찍 잠자리에 들려던 차였기 때문에, 그는 약간 짜증이 난 상태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하잘 것 없는 일로 연락을 한 거라면 그 상대에게 전화를 해서 배로 피곤하게 만들어주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하지만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그 다짐은 파도에 치인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전의 그 호텔로.]
[첨부파일 : 20160704.jpg]
오랜만에 보낸 메시지치고는 짧기 그지없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메시지와 더불어 날아온, 방 번호가 적힌 카드키를 찍은 사진을 본 순간 알 수 없는 기분이 자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건 기대감일까, 아니면 불안감일까. 술렁거리기 시작하는 가슴을 부여잡으면서, 키세는 지금 자신이 잠자리에 들려 했다는 것도 잊은 채 대강 옷을 챙겨 입은 뒤 집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 그와 하룻밤을 보냈던 호텔에 들어서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가 있을 방문 앞에 선 순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이 문을 열어도 되는 걸까. 그냥 열면 열릴까? 아니면 노크라도 해야 하나? 아니지, 무난하게 벨을 먼저 누르고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는 게 좋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휩싸인 상태로 전전긍긍하고 있을 즈음,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키세가 그 누구보다도 그리워했던 그가 얼굴을 내밀었다.
“뭐야, 왔으면 들어오지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
“들어와.”
들어오라는 짧은 말 한 마디를 남기곤, 카사마츠는 그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방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저 문지방 하나를 넘으면 될 뿐인데도, 키세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상태로 카사마츠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들어오라고 했는데도 뒤에서 따라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의아했던지, 카사마츠는 방 중앙에 서서 키세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뭐해?”
“저…전…….”
“도대체 뭐하는 건데.”
“…제가 들어가도 되는지 모르겠슴다.”
“들어오라는 내 말은 허투루 들었어?”
답지 않게 주저하는 키세의 태도가 마음의 들지 않았는지, 카사마츠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를 불쾌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며 키세는 양 손을 내저어 보이며 의사표시를 했지만 그래도 쉬이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여기로 들어오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카사마츠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한 마디를 툭 내뱉고는, 다시 키세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키세의 손목을 덥석 잡아 끌어당기며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이리 와.”
“…….”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긴장한 것 같은데, 너. …이거라도 마셔라.”
“이게 뭠까?”
“와인.”
많이 마시진 말고 한 모금 정도만 마셔. 조금만.
키세에게 와인 한 모금을 마실 걸 종용한 카사마츠는, 그가 제 말에 따르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난 후에야 만족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할 말이 있으니 일단 편히 앉으라며 키세를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반 강제적으로 침대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키세는 좌불안석하며 카사마츠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카사마츠는 이런 상황에도 아무렇지 않은 것인지, 침착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침대 맞은편 가까운 곳에 위치한 긴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불렀어.”
“무…무슨 말을 하고 싶으시기에….”
“너, 그 날 밤 기억 나냐?”
그 날 밤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반문을 할 뻔하다, 예의 그 날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키세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그 걸 본 카사마츠는 ‘기억하고 있나보네,’ 하고 짧게 한 마디를 내뱉은 뒤 그를 빤히 응시했다. 응시하는 시선이 깊어질수록 키세는 초조함에 몸을 뒤틀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가 잘못했….”
“미안하다.”
“네?”
“응?”
동시에 말을 꺼낸 것도 놀랄 일이었지만, 비슷한 말이 서로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더욱 놀라웠던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반문했다. 그렇게 한 두 차례 더 말이 겹치다가, 결국 상황을 정리하자는 듯이 카사마츠가 손을 한 번 내저었고 키세는 그에 따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잠깐, 네가 잘못했다는 건 무슨 의미야?”
“말 그대로 제가 선배에게 몹쓸 짓을 했으니까여.”
“몹쓸 짓을 한 건 난데?”
“네?”
“그 날 덮친 건 나니까.”
키세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며 혼란스러운 기색을 표했다. 그 날의 자신은 분명 카사마츠를 안고 있었다. 숙취 때문에 자신이 착각한 것이 아닌 이상 그건 변함없는 사실일터였다. 게다가 그 다음 날 일어났을 때 민망한 부위에 이물감이 없었으니 기억엔 이상이 없다는 것에 더욱 신빙성이 있었다.
“하지만 분명 그 날엔 제가 선배를….”
“내가 시작했어. 넌 얼떨결에 휩쓸린 거고.”
카사마츠는 쓴 풀을 씹은 것처럼 얼굴 근육을 약간 비틀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너한테 못할 짓을 한 것 같아서 연락도 못했다.”
“아니, 그건….”
“용서 받기 힘들단 걸 알고 있어도 사과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선배.”
넌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을 텐데.
고요한 방 한 가운데로 카사마츠의 한숨어린 목소리가 흘러 지나갔다. 키세는 순간 그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졌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검까?”
“맞잖아? 너,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던 거니까 내게 감정 한 톨 내어주지 않은 거잖아.”
‘열기 싫으니까’ 문을 열어주지 않은 거잖아.
카사마츠의 목소리가 낮게 침잠했다. 키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그의 침묵이 긍정으로 받아들여진 것인지, 카사마츠는 작게 웃고는 애써 가벼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
“알고 있었어. 쓸데없는 구설수에 휘말리기 싫었을 테니 이해 해. 내가 알기론 너 헤테로기도 하고. 그걸 알면서도 네 평온을 깨뜨린 것 같아서 미안하단 거야. …용서 받기 힘들단 건 알지만 그래도 순전 내 이기심으로 사과하는 거니까.”
소파 위에 아빠다리를 하고 앉은 채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하는 그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여전히 그가 하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머릿속이 마치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생각이 정리될 즈음에야 비로소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카사마츠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지 마십셔.”
“…키세.”
“사과하지 마십셔. 오히려 제가….”
“…….”
“내가 사과해야 함다. 그 날 옳다구나 하고 안은 건 나임다.”
“…뭐?”
“술기운 때문에 저에게 손을 뻗은 선배를 냉큼 안아버린 건 나임다.”
“…….”
“술에 취해서라고 자기 위안을 하면서, 선배를 이용해 스스로의 감정만을 충족시킨 게 바로 나임다.”
선배가 마음을 열어주지 않아도 그 순간을, 그 기회를 놓치기 싫어서 선배를 안아버린 게 바로 나예요.
그러니까 선배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라고 덧붙이면서 키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더듬더듬, 자기 죄를 토로하는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무서웠슴다. 선배는 내가 품은 감정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선배의 마음은 도무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나를 향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드러내기가 무서웠슴다. 그래서 숨기고 또 숨겼슴다. 그러면 하다못해 친한 후배로라도 남을 수 있으니까. 미움 받진 않을 테니까.”
“…키세.”
“열리지 않는 문 같은 건 없다고 그때 말했지만, 난 선배의 문을 열 방법도 모르겠고… 그래서 아예 열 생각조차 하지 못했슴다.”
무서워서. 무섭고 무서워서.
“나도 무서웠어.”
“네?”
“네가 그런 의미로 네 곁을 내어줄 생각이 없어 보여서, 내가 다가갈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아서.”
“…….”
“나한텐 네가 열리지 않는 문 그 자체였는데.”
“선배.”
뭐야, 같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반대편 문고리를 붙잡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거잖아. 밀건 당기건 결과는 똑같은 거였는데.
그렇게 말한 카사마츠가 슬쩍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좋아해.”
“!”
“좋아한다, 키세.”
“…치사함다.”
“뭐가 치사한데.”
“전 아직 그 문을 직접 열지 못했다구여!”
“고백을 못했단 말을 굳이 그렇게 돌려 말할 필요가 있나? 게다가 이젠 다 아는데?”
“제겐 중요함다! 그러니까 잠시 기다려주십셔. 잠시만 기다려주면….”
“싫은데.”
네가 직접 열지 않아도 문은 이미 열려버렸다고. 게다가 이젠 자동문이 되어 버렸어. 네가 다가오면 그냥 열려버리네. 그리고 내가 다가가도 그냥 열려버리겠지.
여전히 장난스러운 어조로 카사마츠가 덧붙이며 웃었다. 그리고 이젠 사과할 이유조차 사라져버렸으니 본인 마음대로 할 거라며 대담하게 내뱉는 말과는 다르게, 약간은 조심스럽게 키세에게로 손을 뻗었다. 키세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손을 맞잡고 카사마츠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닫혀있던 문을 열 열쇠는 자신의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 또한 자신에게 있었다. 예전부터.
키세의 생각 : 나는 내 감정을 인정하고 마음의 문을 열고 나왔는데 닫혀있는 선배의 문을 열기가 무섭슴다 징징징 . 근데 선배의 마음을 열 방법도 모르겠슴다 징징징. 문 앞에서 그냥 울래여 징징징. 이러면 중간은 가겠지.
카사마츠의 생각 : 분명 같은 감정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저 녀석이 마음에 빗장을 걸어잠그고 있다. 나는 괜찮은데. 역시 동성은 좀 그런가. 원래 저 녀석, 헤테로이기도 했고... 저 문을 억지로 열 생각은 하지 말자. 이게 답이겠지.
현실 : 서로 상대방의 마음의 문이라고 생각했던 게 그냥 문 하나. 마음의 접점. 결국 문 하나 사이에 두고 서로 반대편 문고리를 잡고만 있는 채로 지금까지 삽질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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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24 적먹 전력 참여
키워드 : 토끼
토끼가 도망가는 꿈은 재물이나 사람을 잃을 수도 있거나, 하고 있는 일이 잘 안 풀릴 수도 있다는 의미라고 했던가. 아카시는 언젠가 심심풀이로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팔짱을 꼈다.
[늦었군…, 잘나신 여왕폐하가 히스테리 부릴 수도 있으니 어서 서둘러야겠어.]
품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는 ‘토끼’를, 아카시는 먼발치에서 응시했다. ‘토끼’의 얼굴에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토끼’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회중시계를 다시 품 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를 주시하고 있는 아카시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바닥에 나 있는 토끼 굴로 폴짝 뛰어 내렸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던 아카시 또한 발걸음을 움직여, 토끼의 뒤를 따라 굴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
‘토끼’는 체형에 딱 맞게 떨어지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신사의 매너를 보여주는 것처럼, 양 손에는 새하얀 장갑을 끼고 있었다. 또한 높은 지적 소양을 드러내 보이기라도 하는 듯, 날렵한 콧대 위에는 모노클을 걸치고 있었다. 이렇듯 이지적인 신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토끼’는 역시 부정할 수 없는 토끼였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머리카락 위로 새하얀 털이 보송보송 나 있는 토끼 귀가 늘어져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아카시가 ‘토끼’를 주시한 이유는 현실적으론 있을 수 없는, 인간의 외형과 토끼 귀의 미묘한 조합 때문이 아니었다. ‘토끼’가 가지고 있는 얼굴이 그가 잘 알고 있는 한 인물의 얼굴을 쏙 빼닮았던 탓이었다. 무표정으로 있으면 약간 서늘해 보이는, 그리고 어딘가 염세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미형에 가까운 얼굴.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 얼굴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토끼’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연인, 마유즈미 치히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미로처럼 얼기설기 꼬여있는 토끼 굴 통로를 제 앞마당인 것처럼 망설임 없이 달려 나가는 마유즈미를 뒤쫓기 시작했다. 아카시가 거리를 좁히며 집요하게 따라붙어도, 마유즈미는 주기적으로 회중시계로 시간을 확인할 뿐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 아주 살짝, 오기라는 감정이 싹을 틔웠다.
*
마유즈미를 잡고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아카시는 그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희미해져버린 낯익으면서도 낯선 존재들과의 만남들을 뒤로 한 채, 마침내 아카시는 마유즈미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그제야 비로소 ‘토끼’는 그를 돌아보았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인형 같던 그의 표정에 점점 생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잡혔네.]
생기어린 표정과는 달리 웅얼거리듯 흘러나오는 투덜거림에, 아카시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잡았습니다.]
***
“뭐야, 그 꿈은. 자기 전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읽고 잤냐?”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아카시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유즈미는, 어딘가 많이 낯익은 줄거리의 꿈 내용에 미간을 잠시 찌푸렸다. 그리고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잠시 내려놓곤 손을 뻗어 아카시의 이마 위에 손바닥을 가볍게 얹었다. 마치 어디가 아픈 건 아닌가, 하고 가늠을 해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게 아니면 네 성격이나 취향을 볼 때 그런 책을 읽고 잘 리가 없는데. 마유즈미의 얼굴 표정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표정 변화가 그다지 많지 않은 그의 얼굴을 보고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다 들여다보이는 아카시로서는 한숨이 나올 법 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먼저 스킨십을 해주는 것은 나름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한숨을 내쉬는 건 고사하고 그 손 또한 쳐내지 않았다.
“앨리스 시리즈라면 예전에 한 번 정도는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젯밤에 읽고 자진 않았지만.”
그리고 지금 어디 아픈 것도 아닙니다, 라고 물 흐르듯이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자 이마에 닿아있던 그의 손바닥을 통해 그가 순간 움찔한 것이 미미하게나마 전해졌다. 그러나 그 떨림을 못 느낀 것처럼 아카시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유즈미는 조심스럽게 손을 거두어들이더니, 괜히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아카시는 당혹감을 감추려 애쓰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무심코, 꿈이 시작될 즈음 떠올렸던 책의 한 구절을 입에 올렸다.
“그러고 보니, 토끼가 도망가는 꿈은 재물이나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의미라고도 하더라고요.”
커피를 마시며 애써 감정을 수습하던 마유즈미의 표정이 다시금 미묘하게 바뀌었다.
“꿈 해석까지 찾아봤냐? 너답지 않은데.”
아프지 않다고 하는데 실은 어디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닌가. 마유즈미의 눈빛에 의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 눈빛을 읽어낸 아카시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뇨. 전에 흥미 본위로 읽었던 책에 그렇게 쓰여 있었던 걸 떠올린 것뿐입니다.”
“진짜냐?”
“진짭니다.”
일단은 아니라고 하니 믿어주기는 한다만, 하고 마유즈미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는지, 그는 다시 아카시와 시선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근데 사람은 둘째 치고 재물은 잃어봤자, 아니냐? 그 아카시 가문이 망할 리도 없고.”
“혹시 모르죠. 오늘 주가가 폭락한다던가.”
“그런 무서운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하지 마라.”
“재미없어요?”
“…그러니까 다들 네 농담에는 웃어줄 수가 없는 거야.”
“안타깝게 됐네요.”
자신의 농담은 빈번하게 혹평을 듣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아카시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잠시 상념에 잠겼다.
이유는 다르지만 그가 이야기 했던 것처럼 아카시에게 있어서 ‘재물은 잃어봤자’였다. 재물이라는 것은 태어났을 때부터 손안에 쥐고 있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딱히 그것에 대한 집착은 없었다. 물론 잃고 나면 생각이 바뀔지는 모르겠으나 현 상태로서는 그랬다.
하지만 그것보다 마음에 걸리는 점은 사람을 잃는 것이었다. 마유즈미의 얼굴을 하고 있던 토끼. 그리고 그의 얼굴을 하고 있던 토끼가 도망가는 꿈. 그 꿈은 마치, 마유즈미가 아카시의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 답지 않게 해몽에 연연하는 것처럼 토끼를 쫓고, 쫓고 또 쫓다가 마침내 토끼를 붙잡았다.
꿈속에서라도 아카시는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꿈속에서조차 불안요소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마유즈미 치히로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카시?”
상념에 잠겨있는 것이 생각보다 길어진 것인지, 마유즈미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단숨에 현실로 이끌려 나온 아카시는, 지금 떠오른 감정을 슬쩍 감추면서 그에게 다정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꿈속에 나온 것처럼 마유즈미 치히로가 도망가는 토끼라면, 아카시 세이쥬로는 얼마든지 그 뒤를 뒤쫓는 사자가 될 것이다. 끝까지 쫓고, 쫓아서 마지막엔 도망가지 못하도록 목덜미를 물어 곁에 묶어놓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진짜 어디 안 좋은 거 아니냐, 너.”
“아뇨, 괜찮습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치히로.”
“…기습 공격 하지 마라, 심장에 안 좋으니까.”
“하하하.”
하지만 이런 생각은 잠시 묻어두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눈앞에 있는 토끼는 생각보다 사자의 곁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적 : 아, 근데 그거 아세요? 제 꿈속의 토끼는 치히로였습니다.
먹 : 소름돋네.
적 : 잘생긴 토끼였어요.
먹 : 그건 좋네.
적 : 치히로 외형에 하얀 토끼 귀가 달린...
먹 : ... 그거 잘생긴 거 맞냐.
적 : 치히로 얼굴엔 변화가 없었으니까 잘생긴 것 아닐까 합니다만.
먹 : 어... 어, 그래.
적 : (뭔갈 잠시 생각하다가 웃음)
먹 : 뭐냐, 그 웃음은.
적 : 아뇨, 잠시.... 풋.
먹 : 뭔데.
적 : 후후, 토끼는 30초면 끝, 이라고 하잖아요?
먹 : (뭔가 불안하다.)
적 : 그러고 보니 치히로도 꽤 잘 느ㄲ....
먹 : (아카시 입 막음)
먹 : 이 미친 도련님아
적 : (웃음)
섹드립이 난무하는 적먹(개그+캐붕)도 쓰고 싶었는데 쓰던 거랑은 안 어울려서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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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메이이츠로 새드 분위기 나는 걸 써보고 싶었는데 그 끝은 개그...
앵슷이나 그런 건 나에게 무리.
게다가 막판엔 쓰기 귀찮아져서 그냥 쓰고 싶었던 대사만...
누가 보아도 병색이 완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자신을 보고도,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또한 그 누가 보아도 볼품없이 여위어 있는 몸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보고도, 그는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만을 기다린다는 듯이, 입을 굳게 다물고 이쪽을 직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일순 그의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아니, 한순간의 착각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싱그러운 여름 하늘이 떠오르는 푸른빛이었다. 그리고 그늘 한 점, 얼룩 한 점이라고는 없는 말갛기 짝이 없는 눈이었다. 좌절을 할지언정, 길을 헤맬지언정, 다시 한 번 일어나 앞을 직시할 수 있는 강인한 빛을 가지고 있는 눈이었다. 그러니 그런 그의 눈빛이 어둡게 침잠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착각일 것이다.
“메이 선배.”
여전히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 또한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나루미야 선배.”
방금 전에 부른 것과는 약간 달라진 호칭에, 그에게서 작은 반응이 흘러나왔다. 기껏해야 어깨를 가볍게 움찔거린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듯이 자신은 미소를 지었다.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그에게도 이 미소는, 이 웃고 있는 표정은 충분히 보일 터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인상을 찌푸릴 리가 없을 테니까.
자신이 지은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그를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했다. 혹시 그를 비웃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어디 아픈 것 같은데 머리까지 안 좋은 건가, 하고 생각하는 걸까.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었다. 오늘 그를 만나러 나온 것은,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그의 눈치를 살피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어디까지나 이번 만남은, 그와의 관계를 그만두기 위한 것이었다.
그를 옭아매고 있는 ‘연애’라는 관계를 끊어내자, 그렇게 다짐했다.
“늘 생각했습니다. 나루미야 선배는 제게 과분한 사람이라고 말이죠.”
“…이츠키.”
“타다노, 겠죠.”
호칭을 정정해주었더니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다시금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것으로 조금이나마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차려 주었으면 좋겠는데. 원래 눈치가 없는 사람도 아니었으니 이 정도로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이별의 말을 꺼내지 않는 그의 고집이 우스웠다. 그리고 그냥 헤어지자고만 하면 될 걸 꾸역꾸역 변명과도 같은 사족을 덧붙이려고 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래서 실소를 흘렸다.
“선배는 지금도 빛나고 있지만, 고교 시절 때에는 제 우상이었습니다.”
“…이츠키.”
“당시 선배와 보낸 여름은 정말,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이츠키.”
“더워서 숨이 막힐 것 같아도, 하늘을 올려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푸른 빛깔이 참 시원했거든요.”
“내 말 좀 들어봐, 이츠키.”
“그 하늘을 보고 있으면 속이 시원해지기도 하고, 또 선배 생각이 나서 힘든 것도 잊게 되더라고요.”
제게 있어서 여름 하늘의 빛깔은, 선배의 눈동자 색이에요. 그건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거예요.
나지막이 덧붙인 말에, 망가진 레코드처럼 자신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던 그의 입술이 멈추었다. 그도 입을 다물고 자신도 입을 다물자 어느새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러한 침묵의 시간조차 행복했던 때가 있었노라고 무심코 생각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했습니다, 나루미야 선배.”
좋아했다는 과거형의 말 한 마디로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리고 이 말을 꺼낸 것에 대한 사죄라도 하려는 것처럼, 혹은 연인이 아닌 선배에게 예를 표하는 것처럼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실은 이 인사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그의 시선에서 도망친 것뿐이었다. 그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꺼낸 이별의 말에,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확인하는 것조차 무서웠다. 그래서 사과와 예를 표하는 인사를 빌미삼아 회피했다. 또한 무심결에 튀어나올 뻔한 ‘아직도 좋아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속으로 삼켜버렸다. 결국 이건 그의 반응을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감정에서조차 도망치는 행위였다.
헤어짐을 고하는 자신의 말을 들은 이래로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직 이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일까. 허리를 숙인 상태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슬슬 허리 쪽이 뻐근하게 아파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딱 한 번, 그의 얼굴을 보고 떠나자고 다짐하면서 숙인 허리를 곧추세웠다.
“여름이 오면 어떻게 할 거야?”
“…네?”
영문을 알 수 없는 물음이었다. 게다가 허리를 세워 그를 마주한 순간 불시에 치고 들어온 질문이었기에, 다소 어벙하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꽤나 진지한 얼굴과 목소리로 그 질문을 반복했다.
“그러니까, 여름이 오면 어떻게 할 거냐고.”
“어떻게 하냐고 물으셔도….”
“온 하늘이 내 색으로 물들어 있을 텐데, 내 생각 안 날 것 같아?”
“…….”
당당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오만하다고 해야 할지. 의문형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말이었지만, 그 말은 어디까지나 ‘생각 안 날 리가 있나.’ 하는 확신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웃긴 것은, 자신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시기가 겨울인 걸 다행으로 여겨, 이츠키.”
“의미를 모르겠는데요.”
“이대로 헤어졌으면 넌 계절이 바뀌는 절반을 힘들어 했을 테니까.”
“…….”
“여름에는 내 눈 색을 닮은 하늘 때문에 힘들어 했을 테고, 겨울엔 나를 차 버린 기억에 힘들어 했겠지.”
“차버리다니….”
차는 게 아니라 헤어진 거라고 정정을 하려 해도, 양 눈에 힘을 주면서 노려보는 통에 시도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마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자신이 조금이나마 위계질서에 눌리는 모습을 보이자,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콧방귀를 한 번 내뀌곤 다시 말을 이었다.
“차라리 이 같잖은 시도를 여름에 했으면 여름만 싫어지는 걸로 끝났을 텐데. 그렇지?”
자신이 여름을 싫어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괜히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자리를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너랑 헤어질 생각 추호도 없으니까.”
“그래도 제가 헤어지고 싶다고 하면요?”
“나에게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여름을 싫어해보던가.”
네 순수한 열정을 불태웠던 여름을, 나와 함께 그라운드 위에 올랐던 여름을, 그 위에서 땀과 눈물을 흘렸던 여름을, 그리고 내 눈 색을 닮은 하늘이 펼쳐져 있는 그 여름을.
그의 올곧은 시선이 자신에게 그렇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 여름이, 그 추억이 싫어질 때에나 이별을 고하라고. 싫어질 리가 없는데도. 싫어할 리가 없는 걸 알고 있는데도. 자신과 그, 둘 다 대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
“이츠키, 넌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
“쓸데없는 건 아니죠.”
“아니, 쓸데없어.”
“…….”
“이렇게 보면 넌 나랑 참 많이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이래서 연인은 닮아간다 하나?”
“어디가요.”
“애 같은 점!”
“제 어디가요?!”
“뭐, 방향성이 좀 다르긴 하지만.”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닮은 점이네요.”
“난 애 같지만 어른이고, 넌 어른 같지만 애라는 점이 비슷하지 않아?”
“그게 비슷한 거예요?”
“당연하지! 둘 다 어른이자 애니까!”
“납득 못 하겠네요.”
“흥! 여하튼 아무래도 좋아.”
“…….”
“근데 그 얼굴이랑 그 몸은 뭐야? 어디 많이 아파?”
“아, 이거요. 헤어지자고 말하자고 결심했더니 그것 때문에 좀….”
“하여간 쓸데없는 생각 참 많이 해.”
“죄송하게 됐네요.”
“빨리 회복하기나 해. 앞으로 우린 해야 할 거 많으니까. 내가 같이 하고 싶은 것도 많지만.”
“…네, 그렇게 할게요.”
“그래야지.”
“메이 선배.”
“왜 불러, 이츠키?”
“저, 앞으로도 여름이 싫어질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당연한 말을 새삼스럽게 하네.”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이츠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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