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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적] 화신풍花信風
꽤 오래 전에 쓴 것 같지만 모처에 공개한 후, 블로그에 백업.
화신풍花信風 : 꽃이 피려함을 알리는 바람
w. CYGNUS
처음에는 꽤나 얄궂은 운명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졸업한 이후에는 서로가 서로를 찾지 않는 한 우연이라고 하더라도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이 장난이라도 친 것인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단 둘이서만 공유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전의 관계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의 그도, 과거의 자신도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전해 듣게 된다면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라고 단언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정도로 터무니없다면 터무니없는 상황이 지금 벌어지고 것이다.
하지만 머릿속 저편에서 이런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런 게 바로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인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
윈터컵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하면서 문득 생각했다. 지금까지 눌러 앉아 있었던 교토를 떠나 도쿄 쪽으로 진학을 해보는 건 어떨까, 하고. 그런 생각이 듦과 동시에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자마자 바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준비를 했다.
늦다면 늦은 결정이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스트레스와 고됨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고생한 보람이 있었는지 도쿄에 있는 번듯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입학이 확정됨에 따라 거처를 도쿄로 옮기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교토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는 소원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교토에서 고교 생활을 보낼 그와도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
홀로 상경해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은 꽤나 버거운 일이었다. 자유롭다는 것은 좋았지만, 그 자유를 위해서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가끔은 생활 자체가 피곤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하루하루의 생활에 치이며 지내다보니, 교토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추억도, 사람들도, 모두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냈다.
그렇게 아등바등 생활하다보니 어느새 2년이 훌쩍 지나버리고 3학년의 새 학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3학년이란 어감이 왠지 익숙하면서도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고 생각을 하면서, 첫 강의를 듣기 위해 학교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등교 도중, 교정을 가로질러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카시 세이쥬로.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어떻게 이 녀석을 잊고 지낼 수 있었을까. 그 정도로 자신은 지금 이 생활에 고되었던 것일까 싶어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별 시답지도 않은 생각을 하다가 다시 그를 응시했다. 그의 강한 존재감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되니 그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게 되었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철가루처럼, 그가 움직이는 대로 자신의 시선은 그를 따라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반가운 감정이 솟아오르는 듯 했다. 그래서 잠시 말을 걸어볼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만두었다. 꼴에 고등학교 선배랍시고 아는 척 한다고 그가 불쾌해 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온후한’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그건 자신답지 못한 행동인 것 같아서 관두기로 마음먹었다.
그와 보낸 1년은 자신에게 있어서 나름 괜찮은 나날이었지만, 여러모로 씁쓸했던 기억도 남아있었다. 이제는 가볍게 꺼낼 수 있는 옛이야기가 되었지만, 그는 아직 자신과 대면하는 것이 당혹스러울 수도 있었다. 아니, 그 이전에 자신 같은 건 이미 잊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니 괜히 나서지 말고 돌아가자고 생각하며 그에게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이렇게 먼발치에서나마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려 했다. 그 만족감만을 안고 돌아가려고 했다.
그가 자신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면서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목소리는, 이 부름은, 그의 것이었다. 하지만 모른 체하고 넘어가려고 했다. 이대로 사람들 틈에 뒤섞여버린다면 제아무리 그라고 해도 찾아내기 힘들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런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그는 어느새 이쪽으로 걸어 와서 자신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마유즈미 선배.”
“…….”
“제가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그런데도 그냥 가시는 겁니까?”
“…네가 붙잡지 않았더라면 그러려고 했다만.”
“냉정하시네요.”
이게 냉정한 건가, 하고 무심코 생각해버렸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하튼 오랜만입니다, 마유즈미 선배.”
이제는 희미하게만 떠오르는 2년 전의 얼굴이 그의 현재 얼굴 위에 오버랩 되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눈높이가 비슷해진 것 같았다. 이전에는 조금 내려다보아야 했는데도. 그리고 그는 이전보다 더욱 성숙해진 인상을 하고 있었다. 좀 더 차분해지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그걸 눈치 챈 후에야 비로소 2년이라는 시간은 그에게 있어서도 꽤 긴 시간이었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오랜만이다, 아카시.”
***
그 날 인사를 나눈 이후로는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 앞일은 알 수 없다더니, 정말 예기치도 않은 곳에서 그와 마주치곤 했다.
개중에서도 가장 소소한 경우를 고르자면 역시 캠퍼스를 거닐다가 마주치는 것이었다. 자신이 속한 단과대와 아카시가 수업을 듣는 곳은 거리가 좀 있음에도 불구하고 꽤 자주 마주쳤다. 어색하게나마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뜨곤 했다. 그리고 정말 뜻밖의 만남은 학과 일로 총학생회실을 들리게 되었을 때 그곳에서 마주친 것이었다. 총학생회실 안에서 소파에 걸터앉아 서류로 보이는 종이뭉치를 천천히 읽고 있던 그의 모습은, 이곳에서도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건가, 하고 무심코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실상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학과 일로 인해 총학생회실을 방문한 것뿐이었지만.
우연이라는 것이 겹치고 겹쳐 그렇게 계속 얽히게 되다보니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학교 일이 아니더라도 만나서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학과도, 성격도, 나이도 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마치 동기처럼 서로 붙어 다니는 시간이 길어졌다. 다른 사람과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붙어 있다면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몰래 자리를 떴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있는 건 싫지 않았다. 동기들보다도, 선배나 후배와 같이 있는 것보다도 더 편했다. 기본적으로 상대를 먼저 건드리지 않는 성정 탓일지도 모르지만, 상대의 밑바닥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얼핏 볼 수 있었던 이전의 경험 탓일지도 몰랐다.
서로에게 불편했을지도 모르는 경험이 지금은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다는 것이 조금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하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기에 알게 모르게 그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공강 시간에 바람이나 쐴까 해서 책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가 우연히 그와 마주쳤고, 누가 먼저 제안한 것도 아닌데 함께 교정을 거닐었다. 그리고 교정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벤치에 걸터앉아서 사람들이 오고가는 것을 먼발치에서 구경했다. 사람구경도 질릴 무렵 자신은 챙겨온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고, 그는 가방 속에서 종이뭉치를 꺼내들더니 한 장 한 장 들춰보기 시작했다.
이제는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거의 일상이 되어버렸구나 싶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르니, 자신도 모르게 책장을 넘기던 것을 멈추고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소리가 그에게도 들렸는지, 그는 글씨가 빼곡히 새겨진 종이에서 시선을 떼고 자신을 돌아보았다.
“무슨 재미있는 내용이라도 나왔나요?”
“아니, 그건 아닌데.”
“별 일이네요.”
마유즈미 선배는 실없이 웃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라고 그가 덧붙였다. 그 말을 들으니 왠지 미묘한 기분이 되어서, 자신도 가끔은 웃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라고 가볍게 쏘아 붙였다. 그러자 평소처럼 ‘그런가요.’ 라고 나지막이 대답하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이 녀석을 좋아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이봐, 아카시.”
“말씀하십시오.”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은데.”
이 말에 그는 뭐라고 대답을 할지 내심 궁금해졌다. 재미없습니다, 라고 덤덤한 어조로 대답을 할까. 아니면 농담이 지나치다고 물 흐르듯이 흘려 넘기는 어조로 이야기할까. 아니면 괜한 곳에서 꼬투리를 잡으며 상황을 무마하려고 할까. 그것도 아니면 그의 좌우명처럼 신속과단하게 거절의 말을 입에 올릴까. 만약 그에게서 거절에 가까운 말이 나온다면, 농담이었을 뿐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이야기하며 상황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그 어떤 선택지도 고르지 않았다. 그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은 채 침묵하고 있자 오히려 자신이 당혹스러워졌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평정을 잃은 듯 했다. 어느 누가 보아도 그가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적어도 평소의 냉정하고 침착한 그 아카시 세이쥬로가 보일 반응은 아니었다.
“…아카시?”
자신의 부름에, 그가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그리고 한 번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마치 내리기 힘든 결정을 내린 것처럼.
“이봐, 아카….”
“…죄송합니다.”
***
차라리 단칼에 거절을 했더라면. 그랬다면 그나마 나았을지도 몰랐다. 그가 좀 더 단호하게 굴었더라면 자신도 상황을 보다 쉽게 무마할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고심한 끝에 어딘가 침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 답지 않게 확신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거절의 말을 입에 올렸다. 이런 상황은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농담이었다는 말조차 꺼내지도 못하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진심이 다분히 어린 고백이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장난스러운 어조로 던진 말이었다. 가능한 수습하기 쉽도록. 난처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을 쉽게 무마할 수 있도록. 하지만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진심을 담은 답변을 돌려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입에 올렸던 고백 자체가 농담이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자신과 그 사이에, 무언가가 더 어긋나 버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농담으로 얼버무리지 않더라도, 그와 자신의 사이는 어긋나고 말았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연락을 끊을 건 없잖아.”
그 날 이후로 연락이 끊어졌다. 많이는 아니더라도 간간히 주고받던 문자조차 주고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은 어차피 학교에 가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하고 안일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추스르기 위한 시간은 그에게 필요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왠지 모르게 불안해지려 하는 마음을 달랬다.
하지만 학교 그 어디에서도 그를, 아카시 세이쥬로를 만날 수 없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딱히 약속을 잡지 않더라도 길을 걷다 마주치는 것이 그였는데, 이번에는 그런 우연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을 피하고 있어도 길 가다가 한 번 쯤은 만날 수 있을 텐데. 마치 간당간당하게 이어지던 인연이 툭 끊어져버린 것처럼, 그의 붉은 머리카락 한 올조차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충격적이었던 건가.”
도련님도 의외로 속이 좁네, 라고 중얼거리면서 그에게는 닿지도 않을 타박을 쏟아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내저었다. 알고 있다. 그가 속이 좁은 게 아니다. 이 모든 것을 자초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가 연락을 끊어버린 것도, 이런 식으로 자신을 피하게 된 것도 다.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이었다.
농담 섞인 어조로 이야기했다고 하지만, 그 말이 고백이었다는 건 바뀌지 않았다. 멀쩡한 남자가 마찬가지로 멀쩡한 남자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명망 높은 ‘그’ 아카시 가문의 사람. 굳이 알아보려고 하지 않아도 극도로 보수적일 터였다. 게다가 그 본인도 원리원칙에선 그리 벗어나는 타입도 아니었으니, 자신이 입에 올린 고백 자체가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생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니까. 동성을 사랑한다는 그 마음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자신이 안일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자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시간이 날 때마다 밖으로 나와서, 그에게 고백을 했던 이 벤치에 앉아 있는 것도 이제 슬슬 그만두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오늘이라면 그를 볼 수 있을까 싶어서 와서 앉아 있었던 건데, 오늘도 역시나 허탕이었으니까.
지금까지 붙어 지냈던 게 신기한 거였어.
생각해보면 그랬다. 고등학생일 때에도 이렇게 붙어 다닌 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농구부 주장과 일개 농구부원 1로서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승전을 마치고 난 후 아주 조금 심적으로 가까워졌다 한들, 눈에 띌 정도의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그저 서로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에 가까운 정도였을 뿐.
그리고 고교 생활을 마치고 새롭게 시작된 대학 생활에 아카시가 포함될 것이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랬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자신의 상정 외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원래대로, 자신이 이전에 상상했던 원래 생활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아카시라는 존재만 배제된다면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전의 기복 없는 삶으로. 특히 연애 감정으로 인한 기복은 철저하게 사라진 상태로.
“…….”
하지만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존재를 배제할 수 없었다. 그가 더 이상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서 자신을 버렸다고 해도, 자신만큼은 그를 버릴 수 없었다. 그의 존재는 이미 각인된 것처럼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억지로 없애려고, 지우려고 해도 흉터가 남아버릴 터였다. 옅어질지언정, 희미해질지언정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는 흉터가 남을 게 분명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이란 건 꽤 피곤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관자놀이 부근이 저리는 것처럼 아파오는 것 같아서, 눈을 감은 와중에도 잠시 동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통증을 감내하고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떠서 멍하니 교정을 응시했다. 그 순간 한 무리의 사람들이 교정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무리의 중심에는 타오르는 것 같은 선명한 붉은 빛이 있었다.
만나는 것을 포기하려고 할 때에야 얼굴을 보게 되다니. 이게 행운인 것인지 불행인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그에게로 다가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에워싼 사람들을 헤치고 그에게 다가갈 용기는 조금 부족했기에 오늘은 먼발치에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까, 하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에 얼핏 떠오르는 지친 기색을 읽어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
그가 지쳐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어느새 자신은 그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꽤 가까이까지 걸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눈치 챈 것은 오로지 그, 아카시 세이쥬로 뿐이었다.
“가자.”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는 잡힌 손목을 한 번 바라보다가 시선을 옮겨 자신을 응시했다. 무슨 짓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며, 차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은 그걸 무언의 승낙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의 손목을 잡아끌어 사람들 틈바구니를 헤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을 따라 움직인 후에야 비로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도대체 무슨 일이냐면서 소란스러워졌지만, 그 술렁거림을 산뜻하게 무시하고 그와 함께 교정을 빠져나왔다.
***
딱히 어딘가로 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발이 닿는 대로 걷다보니 도착한 곳은 학교 근처에 있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공원이었다. 계속 그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는 것이 생각났지만 굳이 놓아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그대로 잡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아무 말도 없이 산책을 하듯 잠시 거닐다가, 다리가 조금 아파올 즈음 눈에 들어온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고 자신이 먼저 자리에 앉자, 그가 따라 옆에 앉았다. 약 30센티 정도의 거리를 두고. 그게 그와 자신의 거리감이었으며,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얼굴에 피곤한 기색 다 드러난다.”
“…그렇…습니까?”
“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치 못 채겠지만. 적어도 널 잘 아는 사람들에겐 놀라울 정도로 잘 보여.”
“…….”
“냉철한 라쿠잔의 제왕님은 어디로 간 건지, 원.”
“더 이상 라쿠잔 소속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어디론가 가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라고 그가 덧붙였다. 자신이 평소처럼 비꼬듯 말을 건넨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를 에워싸고 있던 경직된 분위기도 조금은 부드럽게 풀린 것 같았다. 하지만 부드러워진 분위기와는 달리 대화는 평탄하게 이어지지 못했고, 이내 침묵이 잠시 내려앉았다. 이건 그나 자신이나 말주변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서 그럴지도 몰랐다. 아니, 말주변이 없는 것은 자신뿐이고, 그는 달리 하고 싶은 말이 없기 때문일지도.
이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를 억지로 끌고 온 것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인데, 이후 대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난처해졌다. 한숨을 잠시 내쉬며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손을 들어 뒷머리를 가볍게 긁적였다. 역시 다시 그 사람들에게로 데려다주는 편이 좋을까, 하고 고민을 하고 있을 즈음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은 우연하게라도 마유즈미 선배를 만날까봐 조심하고 있었습니다만… 다 허사로 돌아가 버렸네요.”
“…피하고 있었냐?”
그는 고개를 끄떡였다. 역시나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 그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한 거였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한 그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서 별 일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기야, 갑자기 동성이, 그것도 고등학교 선배였던 사람이 고백을 했으니 그럴 법도 하지.”
“화… 내지 않는 겁니까?”
“화낼 필요가 있나? 따지고 보면 내가 원인을 제공한 건데. 자업자득이지.”
“…….”
그러니까 자신을 피했다는 사실에 대해선 사과를 하지 말라는 듯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그런 자신을 그는 잠시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한결 어깨에 힘이 빠진 자세로 벤치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마유즈미 선배에게만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소리냐?”
“제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영문을 모르겠다고 답하자, 그는 작게 소리 내어 웃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상태로 그는 말을 이었다.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꽤 오래전에 사랑이란 뭘까,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냐?”
“하하…. 철학적인 고민이긴 하네요.”
“…싱겁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비꼬는 듯이 대꾸하자 아카시는 잠깐 웃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누구에도 말해본 적이 없다고 운을 떼면서 천천히, 속에 담아두고 있던 생각을 읊조리듯 밖으로 꺼냈다.
그에게 있어서 사랑이라는 것은 상처에 가깝다고 했다. 이것만 들어서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끊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다정하고 상냥한, 그리고 자애로운 어머니를 사랑했다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도 그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다고 덧붙였다. 그걸로 끝났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그는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꽤 어린 나이에 잃었다고 했다. 그 이상 어머니에 대한 것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때 지울 수 없는 상처 하나가 그의 가슴에 남았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아버지도 사랑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건 경외와 경애의 경계에 있는 감정이라고도 덧붙였다. 이어서 그는, 그의 아버지가 본인을 사랑하고 있는지 여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엄격한 말들뿐이었기에.
아카시 가문의 사람은 최고여야만 한다. 언제나 모두의 위에 서 있어야만 한다. 승리하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는 듯이 쏟아지는 말들. 그 말들을 묵묵히 따르려고 노력은 했지만 그건 그에게 있어서 무거운 족쇄와도 같았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손에 넣은 것들은 가시로 만든 면류관과도 같았다고 덧붙였다. 제왕만이 쓸 수 있는 관임에도 불구하고, 쓰고 있는 자를 날카롭게 찌르는 것 같았다고. 그리고 그 가시 면류관은 그에게 무수히 많은 상처를 남겼다는 걸, 그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유일한 도피처였던 농구를 사랑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농구를 통해 알게 된 친우들을 사랑했다고 했다. 이것은 동지애에 가까운 마음이었다고 덧붙이며, 그는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하지만 재능이 개화함에 따라서 그들은 어긋났다. 제대로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는 어긋나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망가질 뿐이었다. 그건 그와 그의 친우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수정하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어긋나는 톱니바퀴를 다시 맞물리게 하려고 했던 시도는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한 채, 그의 손끝에 생채기만을 남겼다. 그리고 그 상처가 곪아버리면서 그도 한번 망가져 버리고 말았다.
“단순히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이라는 감정이 세간에선 각기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건 물론 알고 있습니다.”
“…….”
“하지만 제게 있어서 그것들은 그저 감정의 깊이가 다를 뿐, 그것을 이루고 있는 근간은 같습니다. 그래서 당혹스러웠습니다. 상처를 입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뒤집어쓰고 있던 제 가면이 벗겨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내가, 과연 타인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에 그럴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고, 그럴 여력도 없다는 걸 다시 깨달아서 죄송하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무슨 말을 들어도 다 본인 탓이라는 듯이, 그는 고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자신도 입을 열었다.
“난 말이지. 내 자신을 제일 사랑하거든.”
“…….”
“나르시스트라고 불려도 할 말은 없지만, 일단은 그래.”
“이전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 예전에 옥상에서 이야기 했던가.”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다고 덧붙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사랑이라는 건 누적식이라서 말이지. 한 사랑이 내가 원하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하진 않아. 다른 사랑을 찾으면 되거든.”
“…예를 들면?”
“다른 히로인을 찾아 새 소설책을 탐독한다거나?”
“하하.”
“여하튼 원하던 루트가 아니었다고 한들 난 품었던 사랑을 버리거나 할 생각은 없다, 이거지. 상처를 받았다고 해도 계속 안고 간다, 이 말이야. 물론 내 성격상 상처받거나 하는 일은 드물겠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이 되묻는 그의 목소리에, 살짝 미간을 좁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연한 걸 왜 묻는 거냐고 말하는 표정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당연하잖아? 난 내가 좋으니까, 다.”
“…….”
“다른 것들은 외부 영향을 받아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다르게 생각하지 이상 변하지 않는 거거든.”
“…….”
“난 나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거다. 즉, 네가 말한 ‘좋아한다는 감정의 근간’이라는 게 나에게 있어서는 자기애인 거야. 그게 흔들리지 않으니까, 설령 상처를 받게 된다 하더라도 이후에 생겨난 감정까지 포용할 수 있는 거지.”
그렇군요, 하고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이야기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것 같은 그를 응시하고 있다가, 태연자약한 태도로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근데 넌 나와는 달라. 정반대라고나 할까. 넌 너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다른 걸 먼저 사랑한 후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 같거든. 뿌리를 바깥에 두고 있으니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 흔들릴 수밖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결론은 난 타인을 향한 애정 없이도 자기애만 가지고 잘 먹고 잘 살겠지만, 넌 아닐 것 같다는 거다.”
“…….”
“어쩔 수 없네.”
“……?”
“이제 와서 널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한 말을 취소하면, 넌 또 상처를 받겠지? 애정이라는 것은 취소한다는 말 한 마디로 이렇게 간단히 끝나버릴 수 있는 건가, 하고.”
“…그건….”
“그러니까 네 곁에 있어주마, 유리심장 도련님.”
적어도 난, 널 좋아한다고 해서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을 테니까, 하고 뻔뻔하게 덧붙이며 잠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뱉긴 했지만, 속으론 조금 조마조마했다. 이번에도 거절당하는 것은 역시 속이 편치 못했다.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자기애에도 약간의 실금이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하며 조용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웃는 거냐?”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던 그의 입술에서, 이번엔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배가 말 하는 걸 들으면 늘 거짓말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난 거짓말 한 적 없는데.”
“물론 거짓말이 아니지만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거지만요.”
“그러니까, 난 거짓말 한 적 없다니까.”
“선배는 거의 본심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잖아요. 아니지, 제대로 표현할 생각이 없는 쪽에 가까운 거려나.”
“…….”
정곡인가요? 하고 덧붙이며 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하지만 이전에도 말했듯, 제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 어련하시겠어.”
한결 가벼워진 웃음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그 웃음소리에 이끌리듯,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그와 자신의 사이, 약 30센티의 공간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자신은 그 바람 속에서 희미하게 풍기는 꽃향기를 맡았다.
“…고맙습니다, 치히로.”
그가, 아카시 세이쥬로가 진심어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은 꽃이 피려는 것을 알려주는 바람이었다.
어떤 형태로 피어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분명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아름다울, 사랑이라는 꽃이 피어날 것이라는 걸 알려주는 희소식을 안고 날아온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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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ts립] Ambivalence 인포입니다.
카사마츠 여체화이므로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본적으로 원작처럼 농구부 활동을 하고 있는 둘입니다만, 네임버스를 중심 소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1월 21일 황립황 온리전 올포웨딩에 위탁 판매를 맡길 예정입니다.
+ 재차 수정할 수도 있으므로 세부 묘사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되도록 적은 수량을 출력할 예정입니다.
사양 : A5 / 신명조 / 중철제본 / 속표지 포함 36~40p 정도 / 4000원
Ryota Kise x Yukina Kasamatsu
(Yukio Kasamatsu TS)
Written by CYGNUS
사람들은 제각기 다르지만 그래도 본질은 같은, 한 가지의 공통된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 소망은 이 세상 어딘가에 자기 자신만을 위한 공주님이, 혹은 왕자님이 존재할 것이라는 꿈. 자신만을 아껴주고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꿈.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소망을 이루기 전에, 운명의 사람을 만나기도 전에, 현실과 타협해 버리고 만다. 운명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이 사람이야말로 영원토록 나를 사랑해줄 사람일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한다. 그리고 몸에 떠오른 이름을 지우면서,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는 위화감과 마주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애쓴다. 이렇게 되는 것 또한 자신의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몇 번이고 자기 자신을 세뇌시키면서 스스로의 눈을 가려버린다.
어린 시절의 키세 료타는 생각했다. 자기 자신을 속여 가면서까지 운명을 운운할 정도라면, ‘운명의 상대’이라는 것은 애초에 이 세상에 없는 게 아니냐고.
또한 어린 시절의 키세 료타는 이어 생각했다. 만에 하나라도 운명의 상대가 정말 있다고 해도, 운명의 상대라는 것이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일까 하고. 어차피 자신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누가 되었든 적당한 상대를 품에 안음으로써 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 후손을 보는 것. 어른들이 바라는 것은 항상 변함이 없고, 사회가 요구하는 것조차 그와 다를 게 없다. 그 말인 즉, 상대는 누구라도 상관없는 것이 아닐까. 운명의 상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굳이 사랑을 전제로 관계를 구축해나가는 것이 아니더라도.
-이루어지던 이루어지지 않던 별 차이가 없는 거라면, 그건 그냥 헛된 망상일 뿐이잖아?
키세 료타는 운명이라는 단어에 신물이 나 있었다. 운명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어느 누구보다도 안도하고 있었다.
Ambivalence
[키세 군, 할 말이 있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할 나이 정도가 되면 충분히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눈과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운명에 눈이 멀어버린 소녀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그 허황되기 짝이 없는 몽상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사과처럼 불그스레하게 상기된 뺨을 하고, 기대감에 가득 찬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이 나의 운명인 것 같다고, 어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달라고, 어서 나를 사랑해달라고 소리 없이 외쳤다. 그리고 그 소녀들은 하나 같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틀로 찍어낸 것처럼 같은 얼굴이었다.
[미안하지만….]
형식적인 사과의 말을 꺼내는 것도 어쩌다 한 두 번이어야지, 이렇게 자꾸 반복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아무리 마음씨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 정도면 고백 자체에 신물이 날 수 밖에 없을 터였다. 게다가 자신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그리 좋은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지금 이 상황이 마뜩찮았다.
헛된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도 다른 부분이 하나도 없는 것인지. 거푸집으로 찍어낸 것도 아닐 텐데.
그렇게 키세 료타는 오늘도 또 소녀 한 명의 환상을 부수었다. 포장한 말은 그럴듯하고 상냥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 말의 진의를 파고들어가 보면 이보다 잔혹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냉정하고 단호하게 소녀의 운명을 부정했다.
키세는 천천히 복도를 걸어가면서 입술을 살짝 삐죽거렸다. 그리고 모든 게 못마땅하다는 듯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한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헤집듯 흐트러뜨렸다. 그 모습 자체가 비슷한 나이 또래인 소녀들의 연심에 불을 지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짐짓 모른 척 늘 흘려 넘겼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소녀들의 뜨거운 시선을 무시하면서 걸음을 옮기던 중, 그는 앞서 걸어가고 있는 낯익은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 뒷모습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차리기가 무섭게, 키세는 활짝 피어난 꽃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그 쪽을 향해 달려갔다.
“카사마츠 선배!”
반가움이 묻어나는 것인지, 그의 목소리가 평상시보다 한 톤 높아져 있었다. 그런 그의 부름에, 카사마츠라 불린 사람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중략]
카사마츠 유키나를 만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처음 만났던 때는, 농구부 일정과 모델 촬영 일정을 조정하기 위해 남자 농구부 주장인 코보리를 찾아갔던 날이었다. 그러던 중 복도에 서서, 키세 자신보다 한 발 앞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녀를 보게 되었다.
그 순간에는 그냥 주장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구나, 하는 정도의 인식뿐이었다. 그리고 저 대화는 도대체 언제 끝나려나, 하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울 뿐이었다. 대화가 빨리 끝나야 자신도 용건을 이야기하고 빨리 돌아갈 수 있는데, 하는 작은 푸념은 덤이라면 덤이었다.
그렇게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키세가 말을 걸기도 전에 코보리가 먼저 그의 존재를 눈치 채고 아는 척을 해왔다.
[키세?]
[안녕하세요. 일정 좀 조정할까 해서 찾아왔는데…, 이야기 나눌 시간이 안 될 것 같으면 다음에 올까요?]
기왕 저쪽이 먼저 말을 걸어왔으니, 키세는 최대한 빨리 용건을 마무리 짓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야기의 본론에 들어가지는 못하더라도, 의논하고자 했던 내용을 짧게 추려 말했다. 그리고 지금 의논하기 힘들면 이 자리에서 계속 기다리기 보다는 일단 돌아갔다가 다음에 찾아오겠다고 덧붙였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키세의 말에 대답을 한 것은 코보리가 아니었다. 줄곧 그와 대화를 하고 있던 카사마츠였다.
처음 만났을 당시의 그녀는 지금보다도 머리길이가 더욱 짧았다. 굳이 비유를 해보자면 방치해둔 탓에 약간 덥수룩하게 자란 커트머리 정도의 길이였다. 그 탓에 키세는 카사마츠가 여자인 걸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그저 평균보다 키가 조금 클 뿐인, 비실비실한 체격의 남자 선배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스스로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실이지만, 입학 초기의 키세는 상당히 삐뚤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은, 혹은 인정할 수 없는 상대에게는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언동에 신경을 써야 한단 생각 자체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키세는 기분이 나쁜 기색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신한테 안 물어봤는데요?]
[…뭐? 당신?]
당신이라고 지칭을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카사마츠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하지만 키세는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로 계속 내려다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 둘의 신경전에, 본의 아니게 둘 사이에 끼이게 된 코보리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일단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해 그는 카사마츠를 먼저 말려 보려는 것처럼, 그녀의 어깨 위로 가볍게 팔을 두르며 말을 건넸다.
[진정해, 카사마츠.]
[팔 치워봐, 코보리. 이 자식, 선배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선배가 뭐 별 거 있슴까? 고작 나이 한 두 살 많은 것 가지고.]
코보리가 계속 말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오고가는 말은 갈수록 거칠어져만 갔다. 그러다가 키세가 선배가 뭐 대수냐는 듯이 대꾸하자, 그를 응시하고 있는 눈이 차갑게 식어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노로 인해 불꽃이 일렁거리는 것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눈을 하고 있었는데도. 키세가 그 변화에 내심 신기해하고 있을 즈음, 그녀는 감정을 다스리려는 듯이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리고 눈빛만큼이나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너, 농구부지?]
언쟁을 하는 도중이었던 걸 생각하면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키세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린 후 대답했다.
[그런데요.]
[네가 얼마나 잘난 놈인지는 그 건방진 태도를 보니까 잘 알겠는데 말이지….]
그래서요, 라고 되묻는 것 같은 얼굴을 하며 키세는 카사마츠를 직시했다. 이 사람이 만약, 선배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자신을 이겨먹으려고 한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 기세를 꺾어놓고 말겠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이어진 말은 그가 상상하고 있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선배랍시고 떠들어대던 사람들에게 들었던 말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었다.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배 대접을 하라는 게 아냐. 카이조에 입학했으면, 적어도 카이조 농구부에 들어왔으면, 너보다 먼저 들어와 학교와 팀에 헌신하고 있는 선배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라고.]
너도 이제 카이조의 키세 뭐시기일테니까, 라고 말을 맺으면서 카사마츠는 괜히 열을 냈다는 듯 가볍게 혀를 찼다. 그리고 물론 아직 불만은 많지만 이쯤에서 끝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어깨 위에 둘러져 있는 코보리의 팔을 풀어 내렸다. 그리고 코보리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일단 오늘 이야기 나눈 사항에 대해서는 여자 농구부 측에도 전달해둘게.]
[응, 부탁할게. 매번 수고가 많네.]
[…너만 하겠냐.]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 카사마츠는 눈을 가늘게 뜨며 키세를 한 번 힐긋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만 가보겠다고 덧붙이며 코보리에게 손을 가볍게 내저어 보이고는, 아무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다른 곳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잠시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던 키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 같은 어조로 코보리를 향해 말을 건넸다.
[저 선배는…, 뭐하는 사람임까?]
코보리는 의아함이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 질문에 대해 평이하게 대답했다.
[카사마츠 유키나. 카이조 여자 농구부 주장이야.]
*****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의 앞에서 선배 운운하며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아직도 코웃음만 난다. 하지만 그 날, 카사마츠와 나눈 대화는 키세에게 있어서 상당히 인상 깊은 것이었다.
단순히 나이가 많기 때문에 후배에게 대우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후배들보다 먼저 학교에, 팀에 공헌하고 있는 사람들이니 그것에 대해 경의를 표해라.
지극히 수직적인 체육계다운 말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키세에게 있어서 그 말은 색다르게 느껴졌다. 스스로는 이 팀에, 이 학교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 아직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카이조 농구부의 키세’라고 칭해진 순간 소속감이란 것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카이조 농구부의 키세.’ 테이코 시절과는 다른 의미로 꽤 마음에 드는 명칭이라고 생각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녀가 해준 말을 곱씹고 있던 중, 키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카사마츠 유키나라고 하는 농구부 주장을 인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흔들리고 있던 마음의 갈피가 잡힌 만큼, 지금까지의 행동을 빠르게 바로잡기 시작했다. 키세는 자기 나름대로의 친근감을 표현하면서, 적어도 그녀와 남자 농구부 선배들에게만큼은 그들을 선배로서 예우하기 시작했다. 잘 되지는 않더라도 그렇게 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남자 농구부원들은 둘째 치고, 여자 농구부원인 그녀에게까지 살갑게 굴 줄은 몰랐던 것인지 카사마츠는 키세가 다가가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어딘가 의심이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슬쩍 몸을 한 발 뒤로 빼곤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키세의 행동에 꿍꿍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녀도 솔직하게 그를 후배로서 받아들였다. 마치 남매사이처럼, 심정적으로는 형제사이처럼 두 사람의 거리는 서서히 가까워져 갔다.
키세는 이성끼리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이 친밀한 관계가 내심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카사마츠는 키세의 곁에 있다가도 이따금 거리를 두는 것을 반복했다. 방금 전처럼, 그를 뒤에 두고 혼자 앞으로 걸어가 버렸다. 물리적으로도, 심적으로도.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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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빠져나간 그라운드는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아주 조금 외로움과도 닮은 감정을 느끼곤 했다. 실제론 혼자 있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외로워졌다. 자신만이 홀로, 그 텅 빈 그라운드 위에 서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자신을 주시하는 이 하나 없는 마운드 위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것 같아서.
그 기분은, 마운드 위에서 홀로 분전하고 있는 고독감과도 닮아 있었다.
*
째깍째깍.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균일하게 울려 퍼졌다. 평소라면 주변 소음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을 그 소리가, 적나라하다 싶을 정도로 크게 들렸다.
언제 끝나는 거지.
나루미야는 창 너머로 보이는 텅 빈 그라운드를 응시하면서,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미 다른 부원들은 제각기 훈련을 마치고 기숙사나 집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나루미야 본인도 원래대로라면 훈련이 일찍 끝났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 기숙사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을 터였다. 어디까지나 원래대로라면.
이게 벌써 몇 시간째야.
무심코 투덜거리는 어조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자각 없이 흘린 말이었기에 말을 꺼낸 본인이 놀라버렸다. 그리고 이 목소리가 혹시 들렸을까, 괜히 찔끔한 표정을 지으면서 힐끔 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한 소년이 있었다. 나루미야와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 그러나 아직은 앳된 것 같은 얼굴을 한 소년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그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만큼은 어른스럽다고 생각될 정도로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타다노 이츠키. 누가 들으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름이라 오히려 기억에 잘 남는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평범의 극치에 달하는 이름. 그 이름을 가진 소년은 나루미야와 배터리를 꾸리고 있었다. 나루미야는 마운드 위에 서서 팀을 이끄는 에이스 투수. 타다노는 그런 에이스의 공을 받으면서 홈을 지키는 포수. 그라운드 위에서의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라운드 밖에서의 둘은 조금 달랐다.
“이츠키.”
나루미야는 다시 창밖의 그라운드를 내다보면서,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왜 불러요?”
오랫동안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던 탓인지는 몰라도, 평소보다 한 톤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루미야의 부름에 화답했다.
대답을 해주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자신을 방치해둔 것에 화를 내야 하는 것인지. 나루미야는 절로 새어나올 뻔한 한숨을 가까스로 삼키면서, 다시 한 번 입술을 열었다.
“그거, 언제 끝나?”
벌써 두 시간도 넘게 기다렸다고, 하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그제야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인지, 타다노가 스코어북에서 시선을 떼곤 벽에 걸린 시계 쪽을 바라보았다. 나루미야는 다시금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을 확인한 순간 그의 얼굴 위로 얼핏 낭패감과도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루미야의 예리한 눈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언제 보아도 두껍다, 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 스코어북. 타다노는 그걸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읽고 있었다. 스코어를 확인하고 당시 시합 흐름을 복기하는 것이 포수의 역할이라면 역할일 터였다. 그 점은 아무리 투구와 배팅 외에는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나루미야라 할지라도 제대로 숙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변함없지만.
나루미야는 입술을 살짝 삐죽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며, 주섬주섬 스코어북을 챙기기 시작하는 타다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메이 선배?”
“굳이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내가 누군지는 내가 더 잘 알거든?”
“아뇨, 그런 의미로 부른 게 아닌데요.”
타다노가 자신을 부른 이유는, 나루미야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간 자신이,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포옹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꽁꽁 옭아매는 것 같은 이 행동 때문이었다.
“자세도 좀 불편하고, 숨 쉬기도 어째 좀 버거운데요.”
“자업자득이니까 조금만 참아봐.”
“자업자득이라니요….”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라고 그가 이어 말하려는 찰나 나루미야는 그에게로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신의 입술을 그의 입술 위에 가볍게 포갰다.
역시 입을 다물게 하는 건 이게 제일 효과적이라니까.
기습적인 입맞춤으로 인해 딱딱하게 굳어버린 타다노를 좀 더 강하게 끌어안으면서, 그는 입술을 맞대고 있는 상태로 슬쩍 양 입 꼬리를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마음이 내키는 만큼 입술을 잔뜩 부비고 있다가, 어느 정도 충족이 되었다 싶을 즈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입술을 떼어냈다.
“이…이게 무슨…!”
“뭐 어때. 보는 사람들도 없는걸.”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여긴 신성한 그라운드….”
“정확히 말하자면 그라운드는 아니지. 그라운드 옆 덕아웃. 정확히 말하자면 덕아웃에 딸린 방?”
그런 걸 묻자고 이야기 한 게 아니란 거 잘 알잖아요! 하고 그가 외쳤다. 하지만 노르스름한 석양빛과는 달리 조금 더 붉게 물든 뺨과 귓불을 보게 되어, 나루미야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괜찮아, 괜찮아. 그라운드에 있는 야구의 신도 용납해주실 거야.”
것도 그럴게, 우리, 배터리이기 이전에 연인이잖아? 하고 덧붙이며, 나루미야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나루미야 메이와 타다노 이츠키는, 투수와 포수로서 배터리를 꾸리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라운드 위에서의 이야기.
그라운드 밖에서의 두 사람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연인이었다.
자기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려도, 결국은 받아줄 수밖에 없는 그런 사이.
둘은 서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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