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황립] Ringwechsel 키워드 : 카페

입존불가_시그너스 2015. 2. 21. 21:38

딸랑.


문을 살며시 밀어 열자, 문에 걸려있던 풍경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문에 풍경이 걸려있었던 것은 손님이 오고감을 알리기 위함이었는지, 풍경소리가 울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 직원의 부드러운 인사말이 바람처럼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서 오세요, 하고 울린 그 목소리에 가볍게 목례로 대답을 하고는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는 내부에 약간은 만족감이 묻어나는 숨을 작게 내쉬고는, 햇볕이 은은하게 드리우는 창가에 가까이 놓여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4인용 테이블과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4개의 의자. 이곳에 자리를 잡고 앉을 사람은 자신과 그 뿐이건만 자신과 그는 언제나 4인용 테이블을 선호하곤 했다. 딱히 이유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저 좀 더 넓은 자리를 선호해서였을지도 몰랐다. 자신이야 둘째쳐도 그의 키는 동년배 평균을 훌쩍 넘는 정도였으니까. 훤칠한 키의 소유자인, 자신의 애인을 떠올리면서 무의식적으로 옅은 미소를 입술에 걸었다.


이곳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그가 만나고 싶어졌다. 맞은편에 앉아서 상냥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그를 계속, 계속 바라보고 싶었다.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이 마음은 이미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인 것 같았다. 미소인지 조소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을 잠시 흘리고 있는데, 자신이 앉은 자리에 어렴풋이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했다.


“...아.”

“오늘도 ‘그 분’을 기다리시나보네요.”

“...네.”


목소리만큼이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낯익은 인상을 하고 있는 카페 직원이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그 친절함에 보답을 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했지만, 자신의 오래된 고질병은 쉬이 낫질 않아서 그나마 안면이 있는 직원에게조차도 단답식의 대답을 토해내고 말았다. 이 고질병은 언제야 낫는 걸까 싶어서 가벼운 자괴감에 젖어있는데, 직원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연신 말을 건넸다.


“원래는 손님께 함부로 말을 건네면 안 되지만, 두 분은 오랫동안 이곳에 방문해주시기도 해서 뭐랄까, 멋대로 친근감이 들어버려서요.”

“그렇습니까.”

“네. 물론 저만 그런 것은 아니고요. 다른 아르바이트생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

“오늘도 저 두 사람이 왔구나, 하고. 그리고 다음 주에도 또 방문해주실까, 하고.”


다음 주에도 또 방문해주실까 하고 생각했다는 직원의 말에 살짝 움찔했다. 자신이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되면서부터 그와의 스케줄이 잘 맞질 않았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주말 중 하루 정도는 꼭 서로에게 할애하기로 약속 아닌 약속을 나누었었다. 그리고 데이트를 하다 이 카페를 발견하게 된 이후론 언제나 다가오는 토요일마다 이곳에서 서로를 기다리고 만나는 것을 반복하는 암묵적인 룰이 생겼다. 그게 몇 번이고, 몇 십 번이고 반복되었으니 눈앞의 직원이 자신들을 일방적으로 친근하게 여기는 것도 있을 법 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분은 한 주도 빠짐없이 만나고 계시니까, 보고 있는 저희가 다 기분이 좋은 거예요.”

“...네.”


보는 본인들이 더 기분이 좋다는 직원의 말에는 조금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설마하니 그와 자신의 사이를 눈치 챈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자신의 입으로 그와의 관계를 생판 모르는 타인에게 털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만약 들키게 되면 그 관계를 부정하는 말을 꺼낼 생각은 없었다. 부정한다는 것은 그와 자신의 사이가 떳떳치 못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기에. 하지만 예상치 못한 아웃팅에 혹시나 그에게 피해가 갈까 싶어서 조금은 불안한 듯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테이블 밑에 숨기고 있던 양 손에 땀이 차는 것 같았다.


“그런 거 있잖아요? 사이좋은 친구 사이를 보면 흐뭇한 거. 게다가 두 분 다 훤칠하고 잘생겨서 분위기가 살거든요.”

“그...그렇습니까.”

“어머, 제 입이 주책이라... 죄송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주문은 ‘그 분’이 오시면 받겠다고 서둘러 본인의 자리를 돌아가는 직원을 잠시 동안 응시를 하고 있었다.


아웃팅은 아닌 건가.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알아차렸지만 일부러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입에서 확정을 짓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는 것 자체에서 안도감을 느끼면서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모를 아웃팅에 대한 불안감과 초조함이 서서히 가라앉아가자 다시 그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불안감과 초조함을 겪고 나니 그의 얼굴이 새삼 다시 보고 싶어졌다. 상냥하지만 어딘가 얼빠진 것 같기도 하고, 냉정한 얼굴을 할 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를 보게 되면 좀 더 진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뭐, 이걸 솔직하게 알려줄 생각은 없지만.”


테이블 위에 팔을 얹고 손 위에 턱을 가볍게 괴고는 중얼거렸다. 자신은 언제나 그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사그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커지는 것을 애써 숨기고 있었다. 그를 이렇게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어 오는 것을 숨기고 또 숨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보다, 자신이 그를 좋아하는 감정이 더 크다고 해서 졌다고 생각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은 애초에 버린 지 오래였다. 한창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 그를 만나고 그와 연애를 시작했던 그 초기 시점에서부터. 안정기에 접어든 지금에는 밀고 당기는 그런 파워 게임을 할 필요를 전혀 못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해질 수 없는 건 역시...


“우쭐해하는 모습이 보기 싫은 걸지도.”


언제 보아도 잘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여느 때보다 기가 살아서 우쭐해 있는 얼굴을 보면 본능적으로 한 대 때리고 싶단 생각이 들기 때문에 애초에 그 싹을 잘라버리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조차도 다 부질없고 쓸데없는 게 아닌가 싶어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딸랑.


다시 한 번 문에서 풍경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이어 직원이 손님을 맞이하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은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것 같더니, 이곳에 시선을 두게 된 순간 성큼성큼 이곳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약간은 흐릿하게만 보이던 실루엣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선명해지면서 총천연색으로 물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늦어서 미안해요... 컨펌이 늦어지는 바람에...”

“괜찮아. 바로 여기로 온 것 같으니까 봐줄게.”


촬영을 마치고 바로 온 것인지 그의 옷차림새는 여느 때보다 멋졌다. 평소에는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있던 머리카락도 왁스를 발라 가볍게 옆으로 넘겼고, 입술에도 무언가를 발랐는지 평소보다 살짝 광택이 돌고 촉촉해보였다. 그리고 은은하고 부드러운 향이 그에게서 감돌고 있었다. 색으로 따지면 옅은 아이보리색 같은 그런 따뜻하고 밝게 느껴지는 그런 향이.


“오늘 멋지네.”

“전 언제나 멋짐다!”


칭찬을 한 번 해주니 금세 기어오르듯이 우쭐하는 모양새의 그를 바라보며 못된 말을 한 번 던지려고 했다. 하지만 피식 웃어버리곤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도 자신이 그를 괴롭히는 말을 꺼낼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자신이 웃으며 시선을 잠시 돌려버리자 슬쩍 당황하면서 평소와는 다르다며 어디 아픈 것 아니냐는 말을 해댔다. 그래서 그 말에는 평소와 같은 반응을 해주었다.


“기어오르지 마라, 료타.”

“...넵.”


자신의 말 한 마디에 기죽은 강아지처럼 대답을 하는 그의 모습에, 창밖으로 돌렸던 시선을 다시 그에게로 고정시키고는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런 다음 손을 들어 직원을 부른 뒤, 그와 자신이 마실 음료를 한 잔 씩 시킨 다음 돌려보내고는 다시 둘만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료타.”

“네?”

“너, 이 카페 이름 뭔지 알고 있냐?”

“그럼요. 몇 년이나 다닌 곳인 걸요. Ringwechsel이잖슴까.”

“그럼 그 의미는 아냐?”


자신의 마지막 물음에는 그가 우물쭈물하더니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리곤 영어라면 그나마 알 수 있었을 텐데 영어가 아닌 것 같아서 도통 모르겠다고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말에 ‘너, 영어도 잘하는 편은 아니잖아.’ 하고 가볍게 툭 내뱉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내가 너에게 줄 것과 관련된 거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의미를 알아두도록 해.”

“...어디 나라 말인지는 알려주면 안 됨까?”

“싫은데. 스스로 알아서 찾아보도록. 남들에게 물어보는 것도 금지야.”

“그럼 인터넷은...?”

“인터넷도 금지. 어학 사전을 직접 뒤져보도록 해. 뭐, 제대로 나올진 모르겠지만.”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서, 너무하다고 투정을 부리는 그를 바라보면서 조금은 성격 나빠 보이는 미소를 연신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 잠시 생각했다. 역시 ‘그건’ 자신이 그에게 주는 쪽이 타당하다고. 왜냐고 묻는다면,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카페의 이름에 대해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직원이 음료를 가져다주자 그것들을 받아 들어, 하나는 그의 앞에 놓고 하나는 자신의 앞에 두었다. 딸려 나온 티스푼으로 자신의 컵 안을 가볍게 휘저은 다음에 티스푼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잔을 들어 올려 음료로 입술을 축였다. 고민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 때문인지, 아니면 좀 전의 해프닝으로 인해 입 안이 말랐던 것이 음료 덕분에 괜찮아진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절로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프로포즈는 나의 권리이자 의무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좀 더 고민해보도록 해, 료타.’




* Ringwechsel : n. (결혼식에서의) 반지 교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