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황립] In the Library For. 로니

입존불가_시그너스 2015. 1. 17. 21:29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먼발치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고, 타오르는 격정적인 마음을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경우에는 ‘그 사람’에게 닿음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얻고, 보다 편안해진 마음으로 그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것에 가깝다. 그렇게 키세 료타는 생각했다.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들어 메시지 창을 켜고는 연락처에서 그의 이름을 찾았다. 수신인 이름 자리에 카사마츠 유키오라는 이름이 새겨지자, 조심스럽게 아래쪽에 위치한 본문 창을 톡, 하고 손끝으로 건드렸다. 커서가 아래쪽으로 이동하는 것에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무슨 내용을 써야 하나 잠시 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움직여 천천히 메시지를 적어 내려갔다.


[카사마츠 선배, 혹시 주말에 시간 있슴까? 선배만 괜찮으면 그때 만나고 싶은데요.]


무심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후회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키세 료타’라는 사람은 이렇게 사람을 사귀는 데에 있어서 서툰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상대로 하고 있을 때는 매사에 서툰 사람이 되곤 했다. 말에서부터 행동까지, 서툴지 않은 부분을 찾는 것이 힘들 정도였다. 마치 첫사랑을 시작한 어린 아이처럼.


“아, 정말. 좀 더 돌려 말했어야 하는 건데.”


밀고 당기기가 안 되잖아, 이건. 고뇌 어린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고는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카락을 손으로 헝클어뜨렸다. 좀 더 요령 좋게 만날 약속을 잡았어야 하는데, 라는 후회가 자꾸 고개를 들어서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그 순간 핸드폰에서 착신 음이 들렸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서 핸드폰을 집어 들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시간이야 있긴 한데... 너 조만간 시험 아니냐?]

“시험...이긴 한데, 그래도... 만나고... 싶슴다. 전송.”


방금 전까지 서툰 자신을 타박하고 있던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만나고 싶다는 감정만이 앞서 그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은 어조의 메시지를 그에게 보내고 말았다. 역시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난 후에 다시금 후회가 찾아들었지만.


[시험이면 시험에 신경 써야지. 그러다 너 후회한다?]


시험에 신경 쓰라는 그의 답변이 다시 날아오자, 핸드폰을 내려다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시험이 중요하다는 것도, 시험에서 낙제 점수를 받아서 추가시험을 보게 되면 향후 시합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시험에 집중하라는 식으로 나오자 섭섭하기도 하고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그래서 고집스럽게 그에게 주말에 자신과 만나달라고 요구하는 문자를 보내려는 찰나, 그에게서 새로운 문자가 날아왔다.


[시험 앞두고 그냥 놀긴 그러니까, 토요일에 OO역 근처 도서관 앞으로 나와라. 네 공부도 지켜볼 겸 나도 공부나 해야겠다.]


자신이 공부하는 것을 지켜보겠다고, 그러니 주말에 도서관 앞으로 나오라는 문자였지만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기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답장을 그에게 전송했다.


*


그를 만날 수 있는 주말만을 기다리고 있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아, 쟤 주말에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구나.’ 하고 알아챌 정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이, 주중에 간간히 그에게 ‘약속’에 대해 잊지 말아달라는 문자를 보내고, 잊지 않았으니 확인 문자 좀 그만 보내라며 그에게 꾸지람을 듣는 일상을 반복했다.


그렇게 주말이 되고, 여느 때보다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구색을 맞추기 위해 가방 안에 시험 대비용 문제집 두어 권과 필통을 챙겨 넣은 뒤에 집 밖으로 나왔다. 그와 만나기로 한 도서관은 그의 집에서도, 자신의 집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빨리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카사마츠 선배!”

“아, 키세.”


도서관 정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라는 확신이 들어서 달리는 와중에도 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감대로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그였고,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화답했다.


“늦은 것도 아닌데 왜 달려오고 그러냐?”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서 그랬슴다.”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 달려왔다는 자신의 말에, 그는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시선을 돌리고는 손으로 본인의 뒷목을 쓸었다. 그리곤 싱겁긴, 하고 퉁명스러운 어조로 덧붙이고는 들어가자며 살짝 고갯짓을 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서관이었지만 방문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쾌적하고 깔끔하게 꾸며진 도서관 내부를 본 순간 무의식적으로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런 자신의 태도에, 그는 ‘얼마나 이런 곳을 안 와봤으면 그런 반응을 보이냐’며 가볍게 자신의 등을 때렸다. 명목상 그와 공부를 하러 도서관에 왔지만, 자신에게 있어선 도서관 데이트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아무렴 어떠냐는 듯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이곳은 서적 코너뿐만 아니라 열람실 같은 곳도 공부하기 좋게 꾸며져 있더라고. 독서실 같은 책상 있는 곳은 네 공부를 봐주기 힘드니까... 개방형 책상이 있는 곳으로 갈까?”

“전 잘 모르니까, 카사마츠 선배가 편할 대로 하십셔.”

“너, 이제 머지않아 수험생이 될 텐데 공부하려면 관심 좀 가져야 하는 거 아니냐?”

“에이, 어떻게든 되겠죠.”

“방심하다가 큰 코 다친다, 망할 모델 녀석아.”


그의 대답에, 그거 카사마츠 선배의 과거 이야기 하는 검까? 하고 덧붙이니 그의 얼굴색이 울긋불긋한 색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발로 자신의 엉덩이를 세게 걷어찼다. 맞은 부위에서부터 찌릿하게 몸을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울상을 지으면서도, 척척 앞으로 걸어 나가는 그를 따라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자리를 잡은 곳은 창가 바로 앞에 놓인, 직사각형 모양의 4인용 테이블이었다. 그가 창가를 등지고 있는 위치에 있는 의자 하나를 빼내어 앉자, 자신도 따라 그의 오른쪽 옆 자리 의자를 빼내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건너편에 앉아. 바로 옆 자리에 앉으면 공부하기 불편하잖아.”

“제 공부 가르쳐주신다 하지 않았슴까? 그럼 나란히 앉는 편이 낫잖아요.”

“... 지켜본다고 했지, 가르쳐준다고 한 적은 없는데.”

“에이, 그게 그거죠.”


엄연히 다른 말이거든? 하고 대답하는 그의 작은 목소리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자신을 타박하면서도 공부를 가르쳐줄 생각이었는지, 참고서와 문제집을 꺼내들라고 하더니 자신의 시험범위를 물어왔다. 일단 들어둔 게 있긴 해서 어디부터 어디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그가 내용을 한 번 훑어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 내용이라면 어느 정도 도움 줄 수 있겠다. 아직 기억나는 부분이기도 하고.”

“정말요? 살았다. 실은 수업 제대로 못 들었거든요.”

“자랑이다.”


그가 주먹으로 자신의 정수리를 가볍게 쥐어박더니, 시험 범위 초반부 페이지를 펼치곤 차분한 목소리로 천천히 이론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살짝 눈을 내리깔고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단정한 옆얼굴이 묘하게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읊어주는 책 내용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고, 책을 보아야 하는 시선을 그에게 고정시킨 채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설명을 하던 그가 이해했냐고 물어보면서 자신을 돌아보자, 그제야 퍼뜩 현실로 돌아오게 되어서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이해했으니 다행이라고 덧붙이며, 설명은 이쯤하면 된 것 같으니 문제를 풀어보라고 이야기를 했다. 실상은 책 내용은 안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문제를 풀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딴 짓 했다는 것을 그에게 들켜 또 구박을 받고 싶진 않아서 아무 말 없이 주섬주섬 책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문제를 푸는 시늉이라도 하려 하자, 그는 본인의 가방에서 전공 서적으로 보이는 것을 꺼내들고 천천히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


아무리 몰라도 문제 두어 개 정도는 풀어야 할 것 같아서 문제집을 들여다보긴 했다. 하지만 아는 게 없으니 문제를 풀 수 없을뿐더러, 옆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그가 자꾸 신경 쓰였다. 그리고 순간, 책이 아니라 자신을 봐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선은 문제집이 아니라 그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손끝이 그에게로 향하더니 그를 가볍게 툭툭 건드리게 되었다. 마치 어린 남자아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시선을 끌려고 장난을 치는 것처럼. 몇 번은 그도 무시를 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자신이 집요할 정도로 그를 툭툭 건드리고, 자잘한 접촉을 하기 시작하자 그가 슬쩍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돌아보았다. 그가 자신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그는 이내 제 문제집 쪽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더니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문제를 하나도 못 푼 것을 그에게 들키고 말았다는 생각에, 머쓱한 미소를 지으면서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샤프를 빼앗아드는가 싶더니, 문제집 한 쪽 귀퉁이에 무언가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만해라. 공부나 해.]


자신을 돌아본다 싶었더니 역시 돌아오는 말은 그만해라, 공부나 해라, 라는 말 뿐이었다. 시험을 앞두고 있으니 그 말이 옳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름 오랜만에 만난 것인데 이런 말만 주고 받는 것은 조금 섭섭하기도 해서 투정을 부리고 싶어졌다. 애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그와 닿고 싶었으며, 그것을 통해서 그의 애정을 확인하고 싶었다.


“...손잡게 해주세요. 그럼 제대로 공부할 테니까.”

“뭐?”

“다른 것도 아니고, 손만 잡게 해달라는 거예요. 어차피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텐데요?”


그는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자신들이 앉은 곳은 창가를 바로 등지고 있는 테이블이었다. 뒤로 누군가가 지나갈 일도 없었고, 앞으로 누군가가 지나간다고 해도 테이블 위에 놓인 책과 자신들의 얼굴만 보일 터였다. 그러니 아무리 주변 확인을 한다고 한들 들킬 구석이라곤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듯이 약간은 으스대는 것 같은 얼굴을 한 채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작게 신음을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챕터 다 읽을 때까지 만이야. 알았냐?”

“네, 알겠슴다.”

“하여간. 너도 나도 오른손잡인데... 네 왼손 잡으려면 난 오른손을 희생해야 되잖냐.”


불편하다느니 어쩌느니 투덜투덜 말은 많아도, 살짝 테이블 밑으로 손을 잡으니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맞잡아 주었다. 맞닿은 손바닥을 통해서 그의 체온이 전해졌다. 그리고 자신을 생각해주는 그의 애정 또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왠지 꾹 다물린 입술 사이로 즐거움이 묻어나는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자신은, 키세 료타는 그에게 닿아있을 때에야 비로소 안정감을 느끼고, 그 접촉을 통해서 그의 애정을 느끼고 점점 커져가는 자신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