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키워드 : 매니큐어
[황립] 키워드 : 매니큐어
사람에게 어울리는 색이란 천차만별이다. 어느 사람에게는 밝고 부드러운 계통의 색이 어울린다면, 어느 사람에게는 화려하다 싶을 정도로 짙고 독특한 색이 어울리기도 한다. 하지만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를 떠나서, 한 번쯤은 상대가 이런 색을 몸에 걸쳐보는 건 어떨까, 하고 상상을 해보는 건 개인의 자유일 것이다. 마치 자신이 그를 지켜보다가 아주 가끔, 이전에 보게 되었던 그의 붉은 손톱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
늘 그렇듯 수업이 끝나면 습관처럼 체육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푼 뒤 본격적으로 훈련에 돌입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뭔가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누락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무의식적으로 두리번거리며 체육관 이곳저곳에 시선을 두었다.
“키세, 뭘 그리 찾고 있어?”
“아, 모리야마 선배...”
뭘 그리 찾고 있냐는 모리야마의 말에, 그를 돌아보며 멋쩍은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라 그래야하지.. 오늘은 뭔가 어제와는 좀 다른 것 같아서..”
“아아, ‘그게’ 없으니 허전한가보네.”
모리야마의 애매모호한 말에, 그 말의 의미를 전혀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손끝으로 볼을 가볍게 긁적였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슴다.”
“‘그거’ 말이야, ‘그거’. 널 열심히 구박하는 카사마츠의 애정 어린 손길이 없잖아.”
사람의 부재를 그런 걸로 깨닫다니, 네가 파블로스의 개도 아니고,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처럼 말을 툭 내뱉고 코트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모리야마의 뒷모습을 잠시 동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삼 다시 깨달았다. 늘 체육관에 가장 먼저 와서 훈련 지시를 내리고 있던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 사람이 훈련에 지각할 리가 없는데. 언제나 규칙에 엄격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한 사람이었기에 지각 같은 것은 그의 사전에 분명 없는 단어일 터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상하리만치 그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얼굴 표정이 확 굳어버렸다. 모리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행방을 물어야 할까, 아니면 지금 바로 체육관을 뛰쳐나가 그를 찾아나서는 게 좋을까. 머릿속으로 어느 선택지가 더 효율적인지 고려하면서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려는 찰나, 굳게 닫혀있던 체육관 문이 활짝 열렸다.
“늦어서 미안하다. 다들 연습 속행하도록.”
“... 카사마츠 선배!”
찾으러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상대가 눈앞에 나타나자, 반색하며 단숨에 그의 쪽으로 다가갔다.
“뭐, 뭐냐, 키세.”
“부 활동 시작했는데 선배가 안 보여서 깜짝 놀랐슴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구요.”
“쓸데없는 걱정이다. 가서 슛 연습이나 해.”
평소와 마찬가지로, 매정하리만치 딱딱한 그의 말에 오히려 안정을 되찾으며 씩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곤 그의 명령에 따르겠다는 듯이 과장되게 거수경례를 해보이려 하는데, 문득 그의 오른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손끝,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새끼손가락 한 마디정도가 하얀색 테이프로 꼼꼼히 테이핑이 되어 있었다. 마치 손톱의 보호를 위해 평상시 테이핑을 하고 있는 중학교 시절 동창인 미도리마처럼.
하지만 그는 미도리마와는 달랐다. 미도리마는 본인의 슛 터치 감각에 영향이 가지 않도록 다소 집착적으로 손톱관리를 하는 쪽이었지만, 그는 부상에만 유의할 뿐 손 관리에 신경을 곤두세우지도 않았다. 더욱이 자신 또한 그가 손과 관련된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를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생각할 수 있는 쪽은 단 하나.
“선배, 이 손... 어떻게 된 겁니까?”
개구지게 웃으려던 것을 그만두고, 싹 식어버린 얼굴로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는 듯이 자신을 올려보다가, 자신의 시선이 그의 오른손에 꽂힌 것을 깨닫곤 아차, 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무 것도 아냐. 가서 연습이나 해.”
“하지만, 선배...!”
“가서 연습이나 하라고 했다.”
“읏...!”
이 이상의 관심은 필요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끊어 내버리는 그의 태도에, 결국 캐묻지 못하고 몸을 돌려 연습을 하러 가는 수밖엔 없었다. 하지만 연습을 하는 내내 그에게, 그의 새끼손가락에 시선이 가는 것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
뒤늦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집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오늘의 열쇠 당번이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자신이 늦게까지 남아있으면 민폐이겠구나 싶어서 가능한 빨리 짐을 챙겨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레귤러 전용 로커실의 문을 열었다.
“어?”
“아, 이제 왔냐.”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네,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간이 의자에 앉아있던 그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이어 자기가 열쇠 당번이니 망정이니 다른 사람이었으면 항의가 들어올 뻔했다며 덧붙이는 그의 목소리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갈 준비 안 해? 빨리 짐 싸.”
“... 카사마츠 선배.”
자신의 부름에, 뭐냐, 하고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며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걸 또 잠시 동안 지켜보고 있다가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가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채듯이 쥐고는 자신의 눈높이 정도로 들어 올렸다.
“이 손가락... 어쩌다 이렇게 된 겁니까?”
“하?”
“대답을 아직 못 들었슴다. 대답해주십쇼.”
“아까도 말했잖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아무 것도 아닌데 테이핑을 할 정도임까? 제가 그렇게 바보로 보입니까?”
계속 아무 것도 아니라며 대답하길 기피하는 그의 태도에, 자연스럽게 언성이 높아졌다. 그는 평소와 달리 목소리를 높이는 자신의 태도에 조금은 놀랐는지 눈을 살짝 크게 뜨는가 싶더니, 이내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썼다. 그리곤 잡힌 손을 빼내더니, 테이핑이 된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어깨를 강하게 후려갈겼다.
“어디서 선배한테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 건방지게.”
“아, 아픔다!”
손바닥으로 맨살을 가격당한 터라 찌릿한 통증이 어깨에서부터 전해지는 것 같았다. 맞은 부위가 화끈화끈 거리는 것 같아서 울상을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는데, 그는 한숨을 푹 내쉬는가 싶더니 그 오른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별 거 아니라고. 다친 것도 아닌데 네가 그렇게 호들갑 떠니까 더 민망하다.”
“다친 게... 아닙니까?”
“그래.”
그럼 왜 테이핑을... 하고 묻는 것 같은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자, 그는 답지 않게 조금 주저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오른손에 감긴 테이핑을 왼손으로 서툴게 풀어 내렸다. 그의 새끼손가락에는 부상의 흔적 따윈 보이지 않았다. 단지 보이는 것이라곤 그의 새끼손톱 위에 물들인 것처럼 남아있는 붉은 매니큐어의 흔적뿐이었다.
“우리 집 꼬맹이.. 그러니까 막내 동생이 어디서 났는지는 몰라도 매니큐어를 빌려와서 말이지.”
“.......”
“방심한 틈을 타서 여기에 칠해버렸어.”
“그... 그럼 아세톤으로 지우면 되는 거 아님까...?”
애초에 매니큐어도 없는 집에 아세톤이라고 있겠냐? 하고 그가 덤덤하게 대꾸하자, 그것도 그렇다 싶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게 아니었다. 농구를 하는데 지장이 가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자신에게 패스를 해줄 수 있었다. 부상이 아니었으니까.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불안감은 어느새 지워지고 그 빈자리를 안도감이 메워나가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에요, 선배.”
“그래. 난 네 덕분에 피곤했지만. 사람이 번거롭게 보건실까지 가서 테이핑하고 왔는데.”
이게 떨어져나가거나 자연스레 지워질 때까지 테이핑으로 가릴 생각이었는데, 너 때문에 글렀어, 하고 덧붙이는 그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하하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는 다시 인상을 쓰면서 자신의 어깨를 툭 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웃음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제가 내일 아세톤 빌려드릴게요.”
“오, 그래준다면 고맙지.”
화색을 띠며 자신에게 고맙다고 이야기를 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정말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 때문에 곤란해 하고 있었구나 싶어서 다시금 웃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올 뻔 했다. 하지만 또 한 번 그에게 맞을까 싶어서 간신히 웃음을 참아내고는, 그에게서 살짝 떨어져 자신에게 할당된 로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내던져 둔거나 다름없이 방치한 가방 속에 로커 안의 짐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말임다, 선배.”
“엉?”
“그 붉은 매니큐어, 은근히 잘 어울리네요.”
지금 놀리는 거냐면서 그가 수건을 집어던졌지만, 그걸 공중에서 손으로 낚아채며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조라는 군단을 이끄는 명장인 그에게는 역시 푸른빛이 제일 잘 어울렸지만, 그의 타오르는 것 같은 기질을 닮은 붉은빛도 꽤 잘 어울리는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