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황립] 키워드 : 나이

입존불가_시그너스 2014. 12. 27. 23:00

[황립] 키워드 : 나이


언젠가 한 번, 그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졸업하고 난 후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냐고. 그 질문을 들었을 당시엔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은 채 가볍게 대꾸를 했던 것 같았다. 진학을 생각하고 있으니 당연히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을 갈 테고, 대학에 가고 난 후에도 농구를 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이런 자신의 대답에, 그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냥 웃음으로 무마하는가 싶더니 ‘그렇군요...’ 하고 반응할 뿐이었다. 그때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속 시원히 하라고, 구박을 하듯 그를 쥐어박았지만 그래도 그는 이야기 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이 맞으면서도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리고 졸업을 앞두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가 미처 하지 못했던 그 말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가 있었다.


*


“...츠.”

“...카사마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어올렸다. 약간은 한심하다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동기를 마주하면서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 인사를 했다.


“미안. 잠깐 다른 생각을 했어.”

“그럴 것 같더라. 눈이 완전 풀렸었어.”


레포트, 많이 힘드냐? 라고 동기가 덧붙이더니 한 손에 들고 있던 캔 커피를 자신에게 가볍게 던졌다. 그 캔 커피를 받아 들고는 고맙다는 말을 덧붙인 뒤, 바로 캔 뚜껑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캔 커피 특유의 들척지근한 맛이 입 안에 감돌자, 무의식적으로 혀로 입술을 가볍게 훑어 올렸다.


“그냥 그렇지, 뭐. 워낙 악명 높은 교수님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되도록 안 들으려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뤄두는 강의라던데.. 넌 왜..”

“그러게. 사람들이 괜히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넌 쓸데없이 고지식해, 라고 동기가 이야기를 하곤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캔 커피를 낚아채더니 본인이 쭉쭉 들이키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주는 캔 커피가 아니었나, 하고 순간 생각했지만 어차피 다 마시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에 별 다른 대꾸는 하지 않은 채 동기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숨 한 번 안 쉬고 남은 커피를 모두 마셔버린 동기는, 마치 가득 찬 술잔을 비운 사람처럼 크으, 하는 소리를 잠깐 내더니 손등으로 본인의 입술을 슥 문질러 닦았다. 어딘가 과장된 듯한 그 모습이 웃기게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 고등학교 시절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것 같기도 해서 작게 웃음을 흘렸다.


“커피 마신 주제에 술 마신 것처럼 굴긴.”

“기분이지, 기분.”


폼생폼사야 말로 남자의 미덕이라며 본인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대해서 구구절절 늘어놓는 동기의 말을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리고 있다가, 이제 슬슬 본론에 들어가 줬으면 하는 바람에 그를 바라보면서 툭 말을 던졌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무심한 사람. 단도직입적으로 그렇게 물으면 어떡해? 그러니까 여자가 안 생기는 거야.”

“여자는 관계없잖아!”


콤플렉스에 가까운 부분을 동기가 찌르자 일순 발끈해서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그에게 대꾸했다. 그러자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 같아 움찔하곤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흠흠, 여하튼 신세한탄 하러 온 거면 빨리 하라고.”


멍석을 깔아주듯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주자, 동기는 본인의 인생관을 늘어놓았던 때처럼 현재 본인의 고민에 대해서 장황하게 토로하기 시작했다.


고민의 주제는 아니나 다를까 동기가 현재 만나고 있는 고등학생 여자 친구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대학생과 고등학생 커플이지만, 듣자하니 고등학생 시절부터 만나고 있던 사이로 일전에 자신도 동기의 소개로 그 상대를 한 번 만난 적이 있기도 했다. 그 때 그리 소득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예쁘게 잘 사귀고 있다는 건 여자에 익숙하지 못한 자신으로서도 잘 알 수 있었기에 뭐가 문제인 건가 싶었다.


그래서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이제야 길고 긴 서론이 끝나고 본론에 들어가는 것인지 동기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이야기에는 사족이 많이 붙어 순간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어진 부분도 몇 군데 있었지만, 대략적으로 요약을 해보니 ‘고등학생인 여자 친구가, 대학생인 자신이 다른 곳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다’ 는 것이었다.


“여자 친구 입장에선 걱정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그건 나도 알지. 하지만 아무리 걱정 말라고 해도, 나한텐 너밖에 없다고 납득을 시키려고 해도 혼자 힘들어 하더라니까. 이전에 나 고등학교 졸업할 때도 졸업하지 말라고 울고불고 얼마나 성화였던지.”

“그 이야기는 많이 들었으니까 이제 그만 해라.”


동기의 뻔한 과거사 레퍼토리가 다시 시작될 것 같아 단호하게 끊어냈다. 이런 자신의 태도에 동기는 살짝 토라진 것 같은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이내 다시 근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는 자신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의견을 구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여자의 심리를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라, 자신에게 의견을 구한다고 해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해서 천천히 운을 떼기 시작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얼마 차이가 나지 않더라도 나이가 서로 다른 커플이라면 어쩔 수 없는 문제 같다. 이야기를 많이 하고 안심시켜주는 수밖엔.”

“역시 그러려나...”

“자기 시야 내에 상대방이 없고, 자기 세상에 더 이상 상대방이 속해있지 않으면 불안한 건 당연한 거니까.”


진지하게 대답을 해주자, 동기도 동기 나름대로 느낀 바가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긴 채 핸드폰을 꺼내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가 싶더니 자리를 떴다. 분명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등을 기대어 앉아, 자신이 동기에게 해주었던 말에 대해서 천천히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자기 시야 내에 상대방이 들어와 있지 않으면, 자기 세상에 더 이상 상대방이 속해있지 않으면 불안한 것은 당연하다. 동기에게 이 말을 해주었을 때, 무심코 머릿속으로 ‘그’를 떠올렸었다. 고등학교 시절, 자신이 아낀다면 아꼈고, 애정을 주었다면 애정을 주었다고 할 수 있는 카이조의 에이스를.


물론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가 카이조라는 팀에 애정을 가져주기만을 바랐을 때라, 한시라도 빨리 카이조라는 울타리 내에서 그가 안정을 느낄 수 있도록 ‘주장으로서’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든 신경은 그에게로 쏠렸고, 이런 자신의 노력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그도 간간히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자신을 통해서 그가 카이조를 인지하고 있었고, 자신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카이조에 애착을 가지게 된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조금 변하게 된 것은, 대학 합격 발표가 나고 졸업식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졸업식 며칠 전, 그가 자신을 찾아왔었다. 처음엔 졸업이 얼마 안 남았으니 홀가분하겠다며, 평소 같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던 그였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한 쪽 손을 잡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도 안 되는 억지라는 것을 알지만 졸업하지 말아달라고, 자기 시야에서 벗어나 멀리 가지 말아달라고, 그 답지 않게 애원하고 울먹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어, 자기는 아직 어려서 쫓아가는 것밖에는 못한다며, 어딘가 서러움이 묻어나는 어조로 덧붙이고는 고개를 푹 숙였었다.


“아직 어려서 쫓아가는 것밖에는 못한다, 라...”


벌써 일 년 가까이 지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멀리 떠나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 그의 세상과는 동떨어진 곳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의 말을 통해서 다른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존재가 자신의 시야 밖에 자리하게 된 것이며 또한 자신의 세상 밖에서 그가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졸업한 후, 선배의 미래에는 ‘제’가 존재함까?]


이게 바로 그가 그 때, 자신에게 정말로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어 생각했다. 그럼 자신이 졸업하고 난 후, ‘그’의 미래에는 자신이 존재할까? 하고.


“애초에 나이가 많고 적고는 관계없었던 거야.”


어느 한 쪽의 나이가 많고 적음은 관계없었다. 나이 차이가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그저 상대를 향한 애정에서 기인한 걱정 그리고 불안감일 뿐이었다. 상대의 미래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을지, 상대의 마음에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있을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한 쪽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향하는 두 사람 모두의 마음일터였다.


“키세, 나는 말이지... 너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이 부럽고, 질투나.”


그에게는 전해지지 않을 말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