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천성의 약함 키워드: 거짓말
비가 오는 날이면 ‘그 날’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곤 했다. 무채색으로 물든 풍경. 충격을 받다 못해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모진 말을 내뱉고 있는 자신의 목소리. 그리고 그와 자신을 적시는 빗방울과 바닥으로 떨어져 자잘하게 부서지는 비의 구슬픈 소리.
*
오늘도 ‘그 날’과 마찬가지로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어.]
[어제도 그리 할 일이 없어서, 하루를 만끽한 기분이야.]
[그래도 별로 네 생각을 하거나 하진 않았어.]
아니, 그래도 실은 조금은 했을지도, 하고 자조를 하면서 편지지 위에 글을 써 내리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손에 들려 있던 펜을 툭 내던지듯이 책상 위에 내려놓은 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은 비구름 탓에 옅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닫힌 창문에선 아직도 내리고 있는 빗방울이 부딪히는지 연신 토독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때와 같은 풍경이구나, 하고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듯이 혼잣말을 했다. 그 날도, 자신이 그에게 이별을 고하던 날에도 이렇게 비가 내렸었다.
그 날의 하늘도 지금과 같이 옅은 잿빛이었고, 그 하늘 아래 그와 자신은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마주보고 서있었다. 다소 갑작스럽게 이별을 고하는 자신을 붙잡으려고 그가 손을 뻗었을 때 자신이 그 손을 거세게 내쳐버려 그의 손등이 붉게 물든 것을 제외하면, 그 때의 풍경은 무채색 일색이었다. 다채로운 색을 용납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빛 바래버린 색깔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요...? 제 잘못이 있다면 뭐든 고칠 테니까, 제발 헤어지자고 하지 말아주세요.]
네 잘못은 아무 것도 없었어, 료타. 환청과도 같이 자신의 귓가에 맴도는 그의 목소리에 대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창 밖을 멍하니 내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신의 말 그대로였다. 그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그건 자신에게 있었다. 점점 빛을 발하는 그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혼자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추악한 자신에게. 순수하고 올곧은 마음으로 자신에게 넘치는 사랑을 안겨주었던 그와는 달리, 점점 이기적으로 사랑을 하기 시작했던 글러먹은 자신에게.
[사랑해요. 정말로 사랑해요. 절 버리지 말아주세요.]
버리지 말아달라는 그의 말을 들었던 순간, 그 때의 자신은 아주 잠시 웃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게 언제나 과분하리만치 사랑을 안겨주었지만 그 감정에 얽매여 있지는 않았다. 본인에게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와는 다르게, 그에게 건네주는 사랑에는 지나칠 정도로 인색하게 굴면서도 그 감정 하나 하나에 얽매여 있었다. 스스로에게 믿음이 없는 사람의 표본, 그 자체라고 해도 좋았다.
그렇게 자신과는 다르다고 생각되던 그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얽매여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도 자신과 다를 바가 없는 건가 싶어서 웃음이 나왔던 것 같았다.
그래서 버리지 말아달라는 그의 말에 자신은 뭐라고 대답을 했었던가. ‘모델 님이잖아? 그런 모습 어울리지도 않고, 멋지지도 않으니까 그만 둬.’ 라고 했었던 것 같았다. 그런 자신의 대답에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는 그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가는 그의 안색이 여느 때보다 인상 깊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자신은, 평소 보지 못했던 그의 일면을 본 것 같은 기분에 고취되어가고 있었다.
“쓰레기.”
쓰레기 그 자체였다.
그를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혼자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혼자 일어날 힘조차 잃어버리게 되어 자기연민이라는 진흙으로 점철된 바닥을 구르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모든 것은 스스로가 자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그에게 돌려버렸다.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그 때문이라고. 자신이 이렇게 나락까지 떨어지게 되어 버린 것은 모두 그의 탓이라고.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는 창밖을 내다보던 시선을 다시 책상 위로 돌렸다. 쓰다가 만 편지지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비가 내리고 있다는 일상 이야기를 적어내린 편지. 그리고 그 아래에 적은 ‘네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문구.
“거짓말쟁이.”
그의 생각을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머릿속 한 가득, 그 날 보았던 그의 얼굴이 떠오르는데 어떻게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비가 내리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그 날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데 어떻게 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양 손 가득 넘치도록 받은 그의 사랑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마음 속에서, 기억 속에서 자신을 지웠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와의 연은 이미 기한이 끝나버린 소모품 같이 되어버린 인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자신은 그 사랑을 놓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애처롭게 자신을 붙잡던 그의 손을 내쳐버린 당사자가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너와 멈추어버린 나. 줄어들지 않는 그 틈을 무엇으로 메울까.”
무엇 하나도 솔직하게 이야기 할 수 없는 자신으로선, 그 틈을 메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스스로 그를 버려버렸기 때문에 그를 붙잡는 것조차 할 수 없어, 제자리에 멈추어 서서 기다리는 수밖엔 없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를, 영원히, 이 자리에서 기다리는 수밖엔 없다.
“겁쟁이에, 거짓말쟁이에.... 가지가지 한다, 진짜.”
책상 위의 편지지를 집어 들어 양 손 안에 넣고 구겼다. 오늘도 그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가 또 한 장, 쓰레기통 안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