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립] 사랑은 열린 문
[황립] 사랑은 열린 문
7.4데이 기념글
*쌍방 삽질하는 황립이 보고 싶어서 그만...
그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깨달은 것은 꽤 오래 전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마음을 그가 눈치 챈 것 또한 비슷한 시기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항상 겁쟁이였던 자신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짙어지는 감정을 숨기기에만 급급했다. 혹시라도 안 좋은 방향으로 바뀌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그런 노력 때문에, 혹은 그런 노력 덕분에 그와 자신의 관계에는 지금까지 변함없었다. 그와 더불어 그의 마음이 자신을 향해 열리는 일 또한 없었다.
*
"오늘 무슨 일 있슴까?"
"무슨 일이 있어야만 볼 수 있는 사이냐, 우리가?"
그건 아니지만, 하고 키세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그가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슬쩍, 그의 모습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한 번 훑어 내렸다.
무슨 일이 있어야만 볼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도리어 단순한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치곤 지나치게 가까워서, 서로가 내킬 때 시간만 맞으면 만나는 관계였다. 하지만 그런 걸 다 떠나서, 독한 술을 연신 들이키면서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무슨 일이 있냐는 말이 제일 먼저 튀어나가 버리고 만 것뿐이었다.
"뭔가 선배답지 않슴다. 그리고 위스키 한 병을 혼자 다 마실 생각임까?"
"네 손 빌려서 집에 돌아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 마라."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란 거 알잖아여."
이 와중에도 자신에게 선을 긋는 것 같은 그의 태도에, 약간은 서운하다는 듯이 답하며 한숨을 흘렸다. 그러자 그는 되려, 어린 게 선배 앞에서 한숨 쉰다고 가볍게 타박을 하더니 빈 스트레이트 잔에 다시금 위스키를 가득 채웠다.
홀로 술을 채우고 마시려는 그 모습이 왠지 마뜩잖아서, 키세는 그에게서 잔을 빼앗아 들고는 직접 그 잔을 들이켜 비워버렸다. 초콜릿 향과도 비슷한 진득하고 들큰한 특유의 향이 알싸하게 코끝을 맴돌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술이 넘어간 식도에서부터 화끈한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밀려오는 술기운에 키세는 잠시 손으로 부채질을 하다가 그의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왜 그러는 검까? 이유를 알아야 위로든 뭐든 하져."
"위로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인마."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키세에게서 잔을 빼앗아 와 다시 술을 채우기 시작했다. 위스키가 넘칠 듯 말듯 가득 채워졌을 즈음, 술병을 내려놓고 잔을 들어 올리려고 하는 그의 손을 키세가 살며시 잡아 멈추어 세웠다.
"카사마츠 선배."
"……."
"선배."
"알았다, 알았어."
카사마츠는 키세의 끈질김에 졌다는 듯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그리고 속내를 털어 놓을 테니 잡은 손목을 놓아달라고 덧붙였다. 이제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뜻을 표하는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키세는 손을 놓아주었고, 여느 때보다 진지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카사마츠는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듯이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쉬이 말로 내뱉어지지 않는지, 입술을 두어 번 달싹거리다가 살짝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안색이 다시금 어두워지는 것 같더니 묘하게 초조한 기색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 변화에 따라 키세도 괜히 초조해졌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그가 편하게 말을 꺼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어느 샌가 손에 배인 땀을 슬쩍 옷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아, 안 되겠다. 일단 한 잔만 더 마시고."
술 한 잔 더 마시겠다는 말에 키세가 뭐라 답할 새도 없이 카사마츠는 잔을 비워버렸다. 그리고 도수 높은 술이 넘어갈 때 으레 그렇듯, 크으으 하고 술기운이 감도는 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런 뒤 숨을 잠시 고르다가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키세를 불렀다.
"키세."
"네."
"키세."
"네, 말씀하십셔."
"……."
"카사마츠 선배?"
"…열리지 않는 문이 네 눈앞에 있으면 넌 어떻게 할 거냐?"
키세는 그 말을 듣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가 꺼낸 말의 의중을 몰라서 잠시 당혹스러워 하다가, 이내 감정을 수습하면서 질문을 되돌려주었다.
"지금 선배가 말하는 열리지 않는 문이란 건 사람의 마음, 인거져?"
"쓸데없이 날카롭긴. 굳이 되물을 필요까진 없잖아."
"질문의 의도가 명확해야 그에 부응하는 답을 할 수 있으니까여."
"…그건 그러네."
카사마츠는 한 발 늦게 수긍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키세가 들려줄 질문에 부응하는 답을 기다리며, 카사마츠는 술기운으로 흐려져 가는 눈에 힘을 주면서 그를 응시했다. 그 시선에 살짝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키세는 담담하게 자신이 떠올린 대답을 입에 올렸다.
"세상에 열리지 않는 문이란 건 없다고 생각함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리지 않았다는 건 아직 그 문을 열 열쇠를 손에 넣지 못했다거나, 문을 열 방법을 모른다거나…,"
문고리를 쥐고 있는 사람이 문을 열 생각이 없다는 거겠죠.
키세는 밀려오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카사마츠는 그런 그의 고통을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본인이 던진 질문의 답을 내어달라고 종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할 건데?"
"선배…."
"그래서 키세 넌, 어떻게 할 건데."
"……."
…전, 모르겠어요.
*
이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잘 모르겠다는 자신의 대답에 그도 자신도 입을 다문 채 술잔을 기울였고, 집에 돌아가기 힘들 정도로 서로 거나하게 취해버렸다는 것만은 명확했다. 그걸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키세 자신이 일어난 곳이 낯익은 침대가 아닌, 낯설기 짝이 없는 호텔의 침대였기 때문이었다.
아직 숙취와 잠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눈을 한 채로, 키세는 한 손으로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듯 더듬었다. 하지만 손바닥에 닿는 것은 푹신한 침구뿐이었고, 그 자리에선 사람의 온기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옆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키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몸을 돌려 모로 누웠다. 그리고 한 동안 텅 빈 옆자리를 멍하니 응시했다.
[아…앗….]
[…왜…어째서….]
[몰라…. 너도 모르겠다고 했으니까, 나도… 읏!]
[…모르겠슴다. 정말로.]
"…?!"
불현듯 떠오른 어젯밤의 기억에 키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금 전 떠오른 것이 무엇인지, 아직 또렷하지 않는 정신을 억지로 다잡아가며 기억을 되짚어나가기 시작했다.
"일 냈다…."
모르긴 몰라도 어렴풋이 떠오른 기억이며 이불 밑으로 훤히 드러난 나신으로 보아할 때 저지른 게 분명했다. 그는 술기운에 휩쓸려서, 그리고 키세 자신은 술기운과 더불어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에 휘둘려서 일을 친 게 분명했다.
어떡하지.
밀려오는 숙취조차 잊을 정도로 당황하며, 키세는 허둥지둥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제의 정신없었던 상황을 대변하듯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주워 입기 시작했다. 내동댕이쳐져 있던 옷에는 약간 구김이 가 있었지만 매무새를 가다듬으니 아주 못 볼꼴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한 쪽 구석에 내팽개쳐져 있던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혹시나 그가 이곳을 떠나고 난 후에 연락을 하진 않았을까, 아니면 떠나면서 짧게라도 메시지를 남기진 않았을까, 초조함 반 기대감 반인 감정 상태로 핸드폰 알림 창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
자신의 기억이 왜곡된 것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 판단하건대, 그가 연락 한 통, 짧은 메시지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의도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 날의 일은 술기운에 벌어진 단순한 해프닝일 뿐, 그 이상으로 키세 자신과 얽히고 싶지 않다는 것. 그 날의 일을 언급하기조차 싫었다는 것.
꽤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내왔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자신에게 한 톨의 여지도 남겨주지 않는다는 점이 못내 서러웠다. 그의 마음의 문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허상과도 같지만 분명 한 순간의 밤을 같이 보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의 결정을 받아들이겠다는 듯이, 키세는 금방이라도 그에게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연락을 취하려던 손을 반대 손으로 아프게 짝짝 내리쳤다. 연락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결정이라면 그에 따라야지.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 역시 따르는 수밖에 없겠지.
*
피우지도 못한 사랑의 실패를 가슴에 묻은 채로도 시간은 무심할 정도로 변함없이 흘러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실연의 아픔이 시간이 흐를수록 아주 조금씩 옅어지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이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는 듯 키세는 홀로 고소를 짓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키세의 핸드폰으로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름 피곤한 하루를 보낸 터라 일찍 잠자리에 들려던 차였기 때문에, 그는 약간 짜증이 난 상태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하잘 것 없는 일로 연락을 한 거라면 그 상대에게 전화를 해서 배로 피곤하게 만들어주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하지만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그 다짐은 파도에 치인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전의 그 호텔로.]
[첨부파일 : 20160704.jpg]
오랜만에 보낸 메시지치고는 짧기 그지없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메시지와 더불어 날아온, 방 번호가 적힌 카드키를 찍은 사진을 본 순간 알 수 없는 기분이 자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건 기대감일까, 아니면 불안감일까. 술렁거리기 시작하는 가슴을 부여잡으면서, 키세는 지금 자신이 잠자리에 들려 했다는 것도 잊은 채 대강 옷을 챙겨 입은 뒤 집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 그와 하룻밤을 보냈던 호텔에 들어서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가 있을 방문 앞에 선 순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이 문을 열어도 되는 걸까. 그냥 열면 열릴까? 아니면 노크라도 해야 하나? 아니지, 무난하게 벨을 먼저 누르고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는 게 좋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휩싸인 상태로 전전긍긍하고 있을 즈음,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키세가 그 누구보다도 그리워했던 그가 얼굴을 내밀었다.
“뭐야, 왔으면 들어오지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
“들어와.”
들어오라는 짧은 말 한 마디를 남기곤, 카사마츠는 그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방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저 문지방 하나를 넘으면 될 뿐인데도, 키세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상태로 카사마츠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들어오라고 했는데도 뒤에서 따라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의아했던지, 카사마츠는 방 중앙에 서서 키세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뭐해?”
“저…전…….”
“도대체 뭐하는 건데.”
“…제가 들어가도 되는지 모르겠슴다.”
“들어오라는 내 말은 허투루 들었어?”
답지 않게 주저하는 키세의 태도가 마음의 들지 않았는지, 카사마츠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를 불쾌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며 키세는 양 손을 내저어 보이며 의사표시를 했지만 그래도 쉬이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여기로 들어오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카사마츠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한 마디를 툭 내뱉고는, 다시 키세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키세의 손목을 덥석 잡아 끌어당기며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이리 와.”
“…….”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긴장한 것 같은데, 너. …이거라도 마셔라.”
“이게 뭠까?”
“와인.”
많이 마시진 말고 한 모금 정도만 마셔. 조금만.
키세에게 와인 한 모금을 마실 걸 종용한 카사마츠는, 그가 제 말에 따르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난 후에야 만족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할 말이 있으니 일단 편히 앉으라며 키세를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반 강제적으로 침대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키세는 좌불안석하며 카사마츠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카사마츠는 이런 상황에도 아무렇지 않은 것인지, 침착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침대 맞은편 가까운 곳에 위치한 긴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불렀어.”
“무…무슨 말을 하고 싶으시기에….”
“너, 그 날 밤 기억 나냐?”
그 날 밤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반문을 할 뻔하다, 예의 그 날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키세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그 걸 본 카사마츠는 ‘기억하고 있나보네,’ 하고 짧게 한 마디를 내뱉은 뒤 그를 빤히 응시했다. 응시하는 시선이 깊어질수록 키세는 초조함에 몸을 뒤틀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가 잘못했….”
“미안하다.”
“네?”
“응?”
동시에 말을 꺼낸 것도 놀랄 일이었지만, 비슷한 말이 서로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더욱 놀라웠던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반문했다. 그렇게 한 두 차례 더 말이 겹치다가, 결국 상황을 정리하자는 듯이 카사마츠가 손을 한 번 내저었고 키세는 그에 따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잠깐, 네가 잘못했다는 건 무슨 의미야?”
“말 그대로 제가 선배에게 몹쓸 짓을 했으니까여.”
“몹쓸 짓을 한 건 난데?”
“네?”
“그 날 덮친 건 나니까.”
키세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며 혼란스러운 기색을 표했다. 그 날의 자신은 분명 카사마츠를 안고 있었다. 숙취 때문에 자신이 착각한 것이 아닌 이상 그건 변함없는 사실일터였다. 게다가 그 다음 날 일어났을 때 민망한 부위에 이물감이 없었으니 기억엔 이상이 없다는 것에 더욱 신빙성이 있었다.
“하지만 분명 그 날엔 제가 선배를….”
“내가 시작했어. 넌 얼떨결에 휩쓸린 거고.”
카사마츠는 쓴 풀을 씹은 것처럼 얼굴 근육을 약간 비틀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너한테 못할 짓을 한 것 같아서 연락도 못했다.”
“아니, 그건….”
“용서 받기 힘들단 걸 알고 있어도 사과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선배.”
넌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을 텐데.
고요한 방 한 가운데로 카사마츠의 한숨어린 목소리가 흘러 지나갔다. 키세는 순간 그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졌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검까?”
“맞잖아? 너,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던 거니까 내게 감정 한 톨 내어주지 않은 거잖아.”
‘열기 싫으니까’ 문을 열어주지 않은 거잖아.
카사마츠의 목소리가 낮게 침잠했다. 키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그의 침묵이 긍정으로 받아들여진 것인지, 카사마츠는 작게 웃고는 애써 가벼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
“알고 있었어. 쓸데없는 구설수에 휘말리기 싫었을 테니 이해 해. 내가 알기론 너 헤테로기도 하고. 그걸 알면서도 네 평온을 깨뜨린 것 같아서 미안하단 거야. …용서 받기 힘들단 건 알지만 그래도 순전 내 이기심으로 사과하는 거니까.”
소파 위에 아빠다리를 하고 앉은 채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하는 그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여전히 그가 하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머릿속이 마치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생각이 정리될 즈음에야 비로소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카사마츠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지 마십셔.”
“…키세.”
“사과하지 마십셔. 오히려 제가….”
“…….”
“내가 사과해야 함다. 그 날 옳다구나 하고 안은 건 나임다.”
“…뭐?”
“술기운 때문에 저에게 손을 뻗은 선배를 냉큼 안아버린 건 나임다.”
“…….”
“술에 취해서라고 자기 위안을 하면서, 선배를 이용해 스스로의 감정만을 충족시킨 게 바로 나임다.”
선배가 마음을 열어주지 않아도 그 순간을, 그 기회를 놓치기 싫어서 선배를 안아버린 게 바로 나예요.
그러니까 선배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라고 덧붙이면서 키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더듬더듬, 자기 죄를 토로하는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무서웠슴다. 선배는 내가 품은 감정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선배의 마음은 도무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나를 향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드러내기가 무서웠슴다. 그래서 숨기고 또 숨겼슴다. 그러면 하다못해 친한 후배로라도 남을 수 있으니까. 미움 받진 않을 테니까.”
“…키세.”
“열리지 않는 문 같은 건 없다고 그때 말했지만, 난 선배의 문을 열 방법도 모르겠고… 그래서 아예 열 생각조차 하지 못했슴다.”
무서워서. 무섭고 무서워서.
“나도 무서웠어.”
“네?”
“네가 그런 의미로 네 곁을 내어줄 생각이 없어 보여서, 내가 다가갈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아서.”
“…….”
“나한텐 네가 열리지 않는 문 그 자체였는데.”
“선배.”
뭐야, 같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반대편 문고리를 붙잡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거잖아. 밀건 당기건 결과는 똑같은 거였는데.
그렇게 말한 카사마츠가 슬쩍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좋아해.”
“!”
“좋아한다, 키세.”
“…치사함다.”
“뭐가 치사한데.”
“전 아직 그 문을 직접 열지 못했다구여!”
“고백을 못했단 말을 굳이 그렇게 돌려 말할 필요가 있나? 게다가 이젠 다 아는데?”
“제겐 중요함다! 그러니까 잠시 기다려주십셔. 잠시만 기다려주면….”
“싫은데.”
네가 직접 열지 않아도 문은 이미 열려버렸다고. 게다가 이젠 자동문이 되어 버렸어. 네가 다가오면 그냥 열려버리네. 그리고 내가 다가가도 그냥 열려버리겠지.
여전히 장난스러운 어조로 카사마츠가 덧붙이며 웃었다. 그리고 이젠 사과할 이유조차 사라져버렸으니 본인 마음대로 할 거라며 대담하게 내뱉는 말과는 다르게, 약간은 조심스럽게 키세에게로 손을 뻗었다. 키세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손을 맞잡고 카사마츠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닫혀있던 문을 열 열쇠는 자신의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 또한 자신에게 있었다. 예전부터.
키세의 생각 : 나는 내 감정을 인정하고 마음의 문을 열고 나왔는데 닫혀있는 선배의 문을 열기가 무섭슴다 징징징 . 근데 선배의 마음을 열 방법도 모르겠슴다 징징징. 문 앞에서 그냥 울래여 징징징. 이러면 중간은 가겠지.
카사마츠의 생각 : 분명 같은 감정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저 녀석이 마음에 빗장을 걸어잠그고 있다. 나는 괜찮은데. 역시 동성은 좀 그런가. 원래 저 녀석, 헤테로이기도 했고... 저 문을 억지로 열 생각은 하지 말자. 이게 답이겠지.
현실 : 서로 상대방의 마음의 문이라고 생각했던 게 그냥 문 하나. 마음의 접점. 결국 문 하나 사이에 두고 서로 반대편 문고리를 잡고만 있는 채로 지금까지 삽질했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