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키워드 : 바람개비

입존불가_시그너스 2014. 11. 30. 23:04

[키워드 : 바람개비]


거리는 낮이든 밤이든 언제나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다만 낮과 밤에 차이가 있다고 하면, 낮의 거리는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한적하다는 점이었고, 밤의 거리는 은은하게 빛나는 홍등과 함께 남녀의 웃음소리가 넘실거린다는 점이었다.


요시와라吉原. 끝없이 이어진 붉은 등의 거리. 이 거리 내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녀 구분할 것 없이 입술에 붉은 연지를 바르고 교태어린 손짓으로 이곳을 거쳐 가는 사람들을 유혹하곤 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런 그들의 행동이 천박하다고도, 꼴 보기 싫다고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자신에게 있어서는 태어난 곳이며 또한 자란 곳이고 앞으로 숨을 거둘 장소였기에.


열린 창문 사이로 흘러들어온 바람에 짙은 푸른빛의 머리카락이 살짝 흐트러졌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으로 천천히 빗어내려 매무새를 가다듬곤 바람이 많이 서늘해졌구나 하고, 한숨을 토해내듯이 살며시 중얼거렸다.


계절은 변하고 또 변해 어느새 한여름이 지나고 초가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에 따라 숨이 막힐 듯한 습기를 머금고 불어오던 바람도 서서히 가벼워지는 것 같더니 이따금 차가운 한기를 머금고 창문 틈으로 흘러들어올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자신은 습관처럼 미약한 기침을 뱉어내곤 했다.


이곳에 터를 잡고 있는 이들에 비해 자신이 약하다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올해는 버틸 수 있을까, 이번 계절은 버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몸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보겠다는 듯이 끈질기게도 영혼을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비가 오려나.”


다시금 불어온 바람에서 옅은 물내음이 느껴졌다. 구체적으로 설명은 할 수는 없으나, 짓이겨진 풀 냄새 같기도 하고, 가끔은 비릿하게 느껴지는 고인 물과도 같은 냄새. 이따금 맡게 되는 이 향기는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비를 몰고 오곤 했다.


비가 들이치면 방 안을 꾸며놓은 너울거리는 붉은 천들이 젖어버릴 것이었다. 하룻밤의 연인을 위해 준비해놓은 침구가 젖어버릴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메마를 대로 메말라 버린 자신의 마음 또한 젖어 버릴 터였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옅은 연지를 바른 입술을 살짝 끌어올려 웃으며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 창문을 닫아야....”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길게 늘어진 옷자락을 대강 추스르면서 천천히 창문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기나긴 소맷자락 속에 감추었던 손을 뻗어 창틀에 대었을 즈음, 창문 바깥쪽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밝고 화려한 붉은 빛이 가득한 이곳에서는 보기 힘든, 유달리도 옅은 흰 빛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기이한 것이 붉은 빛의 존재감에 눌릴 법도 한데도, 그는 하늘하늘, 흐느적흐느적, 마치 강렬한 붉은 빛을 희롱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유연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옅은 색소를 가진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손님이신가요?”


그는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가 다시 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그러시군요.”


짤막하게 흘러나온 부정에, 별 다른 미련이 없다는 듯이 평이하게 대답을 했다. 그렇게 대화가 끝나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다시금 창문에 손을 뻗었다. 그리곤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앉아서 거리를 바라보고 있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다음 이쪽을 향해 몸을 돌리는가 싶더니, 창틀 너머로 본인의 상체를 살짝 들이밀며 얼굴을 익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빤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넌 좀 다르네.”

“어떤 점에서 다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이런 점이.”


영문을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조금은 당혹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해가 가는 방향으로 대답을 해줄 생각이 없다는 듯이, 얇은 입술 끝을 살며시 끌어올리며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살며시 눈을 내리감았다 뜨며, 그로 인해서 흐트러질 뻔한 감정을 추슬렀다.


“조만간 비가 올지도 모르니 다른 거처를 찾으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손님’이 아닌 인물과의 대화는 좋지 못했다. 말 그대로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이 없었기에. 이쯤에서 사담은 접어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그를 보내려고 하자, 그는 좀 더 진한 미소를 입가에 거는가 싶더니 창문을 통해서 방 안으로 훌쩍 뛰어 넘어 들어왔다.


“여기서 머물지 뭐.”

“손님이 아니라고 하셨잖습니까?”

“‘손님’은 아니지. 굳이 말하자면... 불청객?”


불청객이라고 해도 ‘객’인 이상 손님이 아닌가, 하는 말은 미처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는 신발을 벗어 한쪽에 던져두더니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로 보료를 깔아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제 안방인 것 마냥 보료 위에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서 자신을 응시했다.


“뭐해? 이리 오지 않고.”

“.......”


말로는 아니라고 해도 역시 ‘손님’인 것인가. 연지를 바른 입술 사이로 한숨이 흘러나올 뻔 했다. 하지만 요시와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서 익힌 자태는 이런 순간에서도 빛을 발했고, 자연스럽게 하룻밤의 상대를 맞이할 때처럼 요요한 빛이 어린 미소를 입가에 걸며 자신을 부르는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한 걸음 옮길 때 옷깃에 꽂아 놓은 장신구 하나를 풀어 떨구었다. 또 한 걸음 옮길 때 허리띠를 고정시키고 있던 가는 끈 하나를 풀어 내렸다. 그리고 또 한 걸음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 치렁치렁하게 늘어지는 허리띠를 풀어 내리고 단정하게 여며져 있던 붉은 옷을 느슨하게 했다. 마지막 한 걸음을 남기고 그의 앞에 살포시 자리에 앉자 그의 어깨에 손을 가볍게 얹고는 입술을 겹치기 위해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의 손 또한 자신의 어깨 위에 얹어지는 것이 어렴풋이나마 느껴졌다.


“...이게 훨씬 낫네.”

“......?”


서로의 입술이 닿으려는 찰나, 그의 손이 자신의 붉은 겉옷을 벗겨 내렸다. 그리곤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그는 몸을 밀착하고 있는 자신을 가볍게 밀어내고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나른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보료 위로 길게 몸을 뉘였다.


“어울리지도 않는 붉은 색보단 흰색이 나아.”

“그렇습니까.”

“그게 비록 내의라고 해도 말이지.”


누워서 자신을 바라보던 그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건 비웃음이라기보다는 그의 자유로운 천성을 드러내는 듯 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상한다거나 그런 부정적인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는 붉은 빛보다는 이런 옅은 빛깔이 더 잘 어울리는구나 싶을 뿐이었다.


“......저..”

“아, 비 온다.”


새장 속의 새와도 같은 자신. 바깥 세계를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들고양이 같은 그. 그런 차이를 어렴풋이 느끼게 되자 그에 대해서 작은 호기심이 생겨, 그에 대해 알아보고자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하지만 그는 그걸 듣지 못했는지 창문을 가리키며 비 온다는 말을 꺼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창 쪽으로 걸어갔던 것도 행여 비가 올까 창문을 닫기 위함이었던 것을 떠올리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고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혹여 폐가 되지 않는다면... 뭘 하시는 분인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는 이젠 보료 위에 엎드려서 작은 탁자 위에 있는 종이를 손으로 슬슬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리곤 자신의 질문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태도를 유지하며 종이를 접으며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실례였다면 죄송합니다.”

“별로. 그냥 내가 뭘 했더라 하고 생각하고 있던 것뿐이라?”

“네?”


연신 종이를 접고 접어 모양을 만들고, 또 다시 탁자에서 종이를 집어 무언가를 만들면서 그는 나른한 어조로 다시 말을 이었다.


“여행도 다니고, 구경도 하고, 물건도 팔고, 사기도 치고.”


뭔가 신뢰성이 떨어지는 어조로 이야기를 하는지라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했다면 농담으로 치부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왠지 그는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별 다른 대답을 하지 못한 채로 종이를 접고 있는데 몰두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닫힌 창문 너머로 들리던 빗소리도 어느새 잦아들어가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무의식적으로 창문을 돌아보게 되었다. 종이 접기에 몰두하고 있던 그도 자신을 따라서 창문을 한 번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곤 접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가시는 겁니까?”

“비도 그쳤으니까.”

“하룻밤 머물다 가셔도 괜찮습니다.”

“그건 내가 사양하고 싶은데.”


그는 다시금 키득거리며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쭉 펴더니 신발을 던져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신발을 챙겨 신더니 창가로 향해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물 내음을 머금고 있는 바람이 열린 창문 틈 사이로 흘러들어왔다.


“비 잘 피했다. 다음에 또 놀러올 테니까 그동안 그거 가지고 놀고 있어.”

“그거?”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 그가 있던 보료 위를 한 번 돌아보았다가 다시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그는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사라져버린 뒤였다.


“바람 같은 분.”


한 곳에 머물지 않는 바람과도 같은 이였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가 자신에게 남기고 간 여운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가 남기고 간 종잇조각들을 집어 들었다.


“....이건?”


어렸을 적 많이 보던 것이었다. 그리고 어렸을 적 스스로 만들어 가지고 놀아본 적도 있는 것이었다. 종이의 네 귀퉁이를 길게 찢어 만들곤 했던 바람개비. 그는 비를 피하는 동안 탁자위의 종이로 여러 가지 종류의 바람개비를 만들어 두었다. 그가 다시 놀러오기 전까지 가지고 놀고 있으라며.


바람은 눈으로 볼 수 없다. 또한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단지 그 외의 감각을 통해 자신을 찾아왔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 바람을, 아무도 속박할 수 없는 자유로운 바람을 다른 누구보다도 환영하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바람개비. 바람이 없으면 한 곳에 얽매여 멈추어버리는, 다시 불어올 바람을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을 바람개비.


이보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게 또 어디 있을까, 하고 살짝 자조어린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남기고 간 바람개비를 마치 소중한 정표인 것 마냥 품에 안았다.


“다시 오실 그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