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 센티넬버스 리퀘 2
창문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온 햇빛에, 살짝 미간을 좁히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새하얀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워있는 상태 그대로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고 있다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몸을 일으켜 앉았을 때, 차가운 무언가가 뺨을 타고 또르륵 흘러내렸다.
또, 인가.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카가미는 작게 중얼거렸다. 손등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가볍게 훑어내었다. 이전에도 이런 일이 가끔 있었다. 꿈속에서 기억이 나지도 않는 과거를 접하게 되면, 간혹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곤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끔이었을 뿐, 요즘처럼 빈번하지는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원인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나왔다. 센티넬, 아니, 그와 만났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온 이후로, 그를 만나게 된 이후로, 자신의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무언가가 시나브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카가미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것만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 변화는 잔잔한 수면 위에 작은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과 같았다. 물의 절대량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떨어진 물 한 방울이 남기고 간 파장만큼은 잔잔한 수면을 흔들면서 길게, 그리고 넓게 퍼져나가는 것처럼. 그와의 만남이라는 작은 계기가, 자신의 내면에 변화라는 너울을 불러 일으켰다는 걸 카가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깨어나면 기억도 못하는 걸.
그와의 만남이 자신을 변하게 만들었다 한들, 지워진 기억을 소생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그저 꿈을 꾸었을 때의 감정만이 남아, 자고 있는 도중 눈물을 흘리게 만들 뿐이었다. 왠지 모르게 속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서 카가미는 씁쓸한 웃음을 한 번 뱉어냈다. 그리고 침대에서 벗어나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겨 욕실로 향했다. 기억이 나지도 않는 꿈에 계속 얽매여 있느니, 찬물로 세수를 하며 가라앉은 기분을, 상념을 털어내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았기에.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에 세안을 하고 난 후, 욕실에 비치되어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가볍게 닦아냈다. 술렁거리던 감정이 흐르는 물에 씻겨 내려간 듯, 조금은 차분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후우, 하고 길게 숨을 한 번 내뱉은 뒤, 사용한 수건을 대충 어깨에 얹고는 욕실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주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욕실과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주방으로 향하면서 잠시 생각했다. 이곳에 머물게 된 지도 벌써 세 달이 넘었건만 아직도 자신은 이방인 같다고. 그도 그럴 것이 그와 자신, 단 둘이 머물기에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넓은 저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끔 고용된 사람들이 와서 청소며 저택 관리를 하고 간다고는 하나, 왠지 모르게 사람 사는 느낌이 거의 묻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툭 떨어뜨려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심코 든 생각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내저었다. 그런 생각보다 식사가 우선이라는 듯이, 주방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호쾌하게 냉장고 문을 열어젖혔다.
"아... 조리해둔 건 어제 다 먹어치웠던가."
냉장고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조리되지 않은 음식 재료들뿐이었다. 평소에는 저택을 오고가는 고용인들이 만들어두고 간 음식을 꺼내다 먹으면 됐는데, 배가 고플 때마다 수시로 꺼내다 데워먹었더니 사람들이 다시 방문하기도 전에 조리해둔 것이 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잠시 동안 냉장고 안 재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몇 가지 야채와 계란, 버터, 우유 등을 꺼내어 챙겨 들었다.
"빵은... 아직 남았네."
꺼내 온 물건들을 테이블 위에 잘 올려놓은 다음, 빵이 보관되어 있는 곳을 확인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먹을 만한 양의 여러 가지 빵이 남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식빵을 꺼내어 손에 들고는 테이블 쪽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찬장과 수납장을 뒤져 요리에 필요한 것들을 찾아내곤 아침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조리되어 있는 것이 없다면 자신이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어차피 남들이 만든 것을 먹는 것보다 스스로 만들어 먹는 것이 더 익숙하기도 했다. 게다가 요리를 하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마 '과거'의 자신도 지금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을 터였다. 흔히 이야기 하듯,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몸은 기억을 하고 있는, 그런 계통의 것일지도 몰랐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손은 열심히 움직여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만한 토스트와 샐러드를 만들었다. 잘 구운 식빵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완성된 음식을 접시에 옮겨 담다가 문득 그를 떠올렸다. 평소라면 의식주가 모두 해결된 상태였으니 굳이 서로를 마주하지 않아도 어찌저찌 생활해 나갈 수 있었지만, 오늘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그가 스스로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지 여부도 알지 못할 뿐더러, 요리를 만들어 놓고 그걸 자신 혼자 다 먹어버리는 것 또한 카가미로선 뭔가 찝찝했다.
"오늘 오후에는 사람이 올지도 모르니까... 일단 그 전까진 챙겨주는 편이 낫겠지."
지금 만들어 놓은 것은 카가미 자신이 먹을 몫뿐이었지만, 또 다시 만들면 된다는 생각에 그리 아깝지는 않았다. 재료가 넉넉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아쉬웠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수납장에서 큰 쟁반 하나를 꺼내어 토스트와 샐러드가 담긴 접시를 옮겨 담았다. 그리고 유리잔 한 가득 우유를 부어 따른 뒤, 그것도 쟁반 위에 올려두었다. 마지막으로 쟁반 위에 덮개를 씌운 뒤, 조심스럽게 쟁반을 들어 올리고는 천천히 주방을 빠져나왔다.
"... 이쪽이던가."
그와 첫 대면을 한 이래로 향해본 적이 없는 복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아침만 건네주고 나오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걷기 시작했는데, 그의 방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묘하게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감정의 파장이 점점 더 짙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걸음을 옮겨, 그의 방문 앞에 멈추어 섰다.
"...들어간다."
살짝 노크를 하며 들어가겠노라고 먼저 이야기를 한 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긴장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쉽게 그의 공간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아오미네?"
열린 방문 안쪽으로 한 걸음만 내딛은 상태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게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을 제지하는 목소리는 이번에도 들리지 않았다. 그것에 용기를 얻어 터벅터벅 방 안으로 들어가는데, 침대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흠칫 놀라, 카가미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은 채로 고개만 천천히 돌려 침대 쪽을 응시했다. 그가 일어나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그는 베개에 고개를 파묻고 엎드린 자세를 한 채 아직까지도 잠들어 있었다.
아까 들린 소리는 뒤척이는 소리였던 건가.
아직 잠들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침대 머리맡 쪽에 있는 테이블 위에 쟁반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침대 가까이로 다가가 잠든 그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은 베개에 파묻혀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자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 같았다. 가이드를 서넛이나 붙여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센티넬도, 잠들어 있을 때는 평범한 사람 같다니.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을 좀 더 자세히 지켜보고 싶어서, 카가미는 자신도 모르게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얼마동안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을까. 그가 베개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자신 쪽으로 살짝 틀었다. 그리고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상태 그대로 미간을 찌푸렸다. 꿈속에서 뭔가 불만스러운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싶어서 살짝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그의 표정이 변함에 따라 카가미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단순히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이라 여겼던 그의 얼굴이 변해갔다. 처음에는 화난 것처럼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서서히 울 것 같은 얼굴로 변했다. 그리고 비통함을 속으로 삼키는 것 같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지켜보고 있는 이가 더욱 가슴이 아플 정도로, 슬픔으로 인해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의 고통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것에 감응한 듯, 무의식적으로 그에게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뺨 위에 가볍게 손을 얹으려고 했다. 순간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손은 그에게 닿았을 터였다.
타이가.
세 음절로 이루어진 말에, 심장이 쿵 하고 크게 뛰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카가미 또한 울고 싶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리만치 술렁이는 감정을 다잡으려 노력하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꾹 감긴 그의 속눈썹 아래로 작은 물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곧 이어 또 한 방울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카가미는 자신의 손으로 그 눈물을 거두어 주었다.
울지 마.
마음속으로 연신 울지 말라는 한 마디만을 반복하면서, 그가 가이드인 자신의 힘에 반응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그의 머리를,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