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청화] 리퀘2

입존불가_시그너스 2015. 3. 15. 01:02

청화 테이코 흑화미네 + 타교생 카가미


승리를 하고 난 후에야 맛볼 수 있던 극상의 기쁨. 그것을 느끼지 못한 게 벌써 얼마나 되었는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이 원래 자신의 양 손 안에 있었던 것처럼. 마치 날 때부터 한 몸이었던 것 마냥. 그래서인지 승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이 점점 떨어져갔다. 분명히 이기고 나서 미소를 지었던 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덤덤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번도 미소를 지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과거의 기억이 왜곡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도 지는 것보다는 낫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맞붙는 이들의 얼굴이 패색으로 얼룩지고, 그 얼굴에 포기라는 단어가 떠올랐을 때 깨달았다. 이건 아니다, 라고. 자신의 능력과는 별개로, 타인이 포기해버린 승부를 반쯤 어부지리로 쟁취하는 것은 더럽기 짝이 없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원하지 않은 선물을 억지로 떠안겨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을 완벽하게 막아 세울 수는 없더라도, 자신을 묶어두는 것이 비록 버겁다 하더라도, 끈질기게 맞서 싸워주길 바랐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투쟁심이라는 것을, 호승심이라는 것을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신의 바람을 백지로 되돌려버렸다. 시합포기라는 형태로 말이다.


“...”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간 더운 숨결이, 하얀 김이 되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숨을 한 번 들이켰다. 폐부를 얼려버릴 것 같은 시린 공기가, 몸 안을 가득 메웠다. 몸도 마음도 얼어가기 시작했다.


“지루해.”


휘적휘적 움직이고 있는 다리에 누군가가 납을 매달아 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걸을 때마다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손목 또한 무겁기 짝이 없었다.


“따분해.”


머리 안쪽에서 쾅쾅 울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분명 직시하고 있을 터인 시야가 빙그르르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싫다. 정말.”


생각하는 것도, 몸을 움직이는 것도 싫어져 버렸다. 지독하리만치 깊은 권태로움을 뱉어내면서, 발걸음을 강둑 쪽으로 옮겨버렸다. 강둑 가장자리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살얼음이 낀 강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 강은 여느 때보다 고독하고 쓸쓸해 보이는구나, 하고 무심코 생각해버렸다.


얼핏 보면 단단해 보이는 얼어버린 강. 하지만 발을 잘못 디딘다면, 얄팍하게 얼어 있는 얼음이 파스스 부서져 내릴 터였다. 그리고 부서져 버린 얼음 틈으로 발이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강 밑바닥으로 잠기게 될 것이다. 차가운 물에 먼저 닿아버린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위로, 위로 냉기가 침투하면서 온 몸이 굳어갈 것이다.


그리고 최후엔 꽁꽁 얼어버린 채로, 어두운 강 밑바닥에서 몸을 뉘인 채 잠들어 버리겠지. 아무도 구해줄 수 없는 곳에서. 영원히.


“핫, 나도 미쳐가나 보네.”


기분이 더욱 가라앉는 것 같아서, 괜히 짧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만약 그때, 근처에 앉아 있던 누군가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대로 집에 돌아갔을 것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얼굴에, 자신이 이따금 짓곤 했던 표정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말을 건네게 되었다.


“야. 정말 좋아했던 게, 갑자기 지루하고 따분해지면 어떨 것 같냐?”


자신의 물음에, 강을 응시하고 있던 그의 시선이 움직였다. 차갑게 식은 듯 했지만, 아주 희미하게 열기를 품고 있는 것 같은 눈동자가 이쪽을 주시했다.


“그 지루함이랑 따분함이 도를 지나칠 정도라 만사가 귀찮아질 정도면 어떨 것 같냐?”


이어 질문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하. 세상 참 편하게 사는구만.”

“그게 뭐가 잘못 됐는데.”


자신의 말이 거슬렸는지, 그가 다소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건 조금 슬플 것 같네.”

“...뭐?”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 감정이 변해버리다니. 분명 뭔가 본인에게 있어서 큰 변화가 있었던 거겠지 싶어서.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말이지.”


잘은 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어, 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으로 툭툭 본인의 옷을 털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으나,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자신과 비슷한 신장의 소유자라는 것을. 그것에 아주 조금 호기심이 동했다. 그래서 그가 자리를 뜨기 전에 서둘러 말을 건넸다.


“야, 너 어디 다니냐?”

“... 교복을 보아하니 너네 학교는 아니겠네.”


그는 힐끔, 자신의 교복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어딘가 애매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이 무언가를 더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발걸음을 돌려 어딘가로 떠나가 버렸다.


*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고등학교 1학년 여름. 인터하이 경기장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