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적먹] 돌아오는 계절

입존불가_시그너스 2015. 3. 26. 01:02

[지금까지 수고하셨습니다.]


이건 농구부 은퇴식 이후의 한 마디.


[졸업, 축하드립니다.]


이건 졸업식 이후의 한 마디.


상투적이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가 건넨 저 두 마디의 말은, 마치 가시처럼 자신의 가슴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졸업한지 2년 가까이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코끝이 시리다고 생각할 정도로 날씨가 점점 추워지기 시작하면 어렴풋이 그때의 잔상이 떠올랐다. 그리고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겨울이 지나고 졸업식 시즌을 맞이하게 되면 그 잔상은 여느 때보다 선명해졌다. 그러다 날이 서서히 풀리고 벚나무에 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면, 그 잔상은 벚꽃의 분홍빛 물결에 휩싸여 아스라이 무너져 내렸다.


벌써 2년 가까이 되었구나.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상하리만치 감상적인 어조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상은 가을 분위기에 한껏 젖어 있었다. 하늘은 높고 푸르며, 공기는 서늘하지만 상쾌하다고 느낄 정도로 가벼웠다. 나뭇잎들은 스스로를 알록달록하게 물들이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높고 푸르던 가을 하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신 하늘은 옅은 회색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공기는 날이 갈수록 차갑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선명하게 물들어 있던 잎사귀들은 점점 색이 바래가면서 땅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조금씩 변해가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새삼 겨울이 다시 돌아오고 있음을 체감했다.


생각해보니 그 때로부터 2년이 지났다고 하면, 녀석도 3학년.


그냥 그 때로부터 시간이 지났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지난 시간만큼, 자신이 나이를 먹는 만큼, 그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사실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1학년이었을 때조차도 2,3학년들 위에 군림하던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앞에서는 나이가 많고 적음은 무의미해 보였다.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그는 모두의 위에 고고하게 올라서 있는 존재였다.


잊고 지냈던 그, 아카시 세이쥬로에 대한 기억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하자 절로 조소에 가까운 웃음이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사람들을 쥐락펴락 하는 모습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리고 자신도 그 사람들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더욱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렇게 네 생각이 나는 걸 보니, 역시 겨울이 다가오고 있긴 한가보다.


풍경이 변하는 것을 보고 계절이 바뀌었음을 깨닫고,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림으로써 계절이 변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2년이라는 시간은 그리 길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짧은 것도 아니었다. 크고 작은 일들이 무수히 많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넘치는 그런 기간이었다. 자신의 경우만 해도, 대학에 입학을 했고 학교 내에서 여러 타입의 사람과 만나고 또한 스쳐 지나갔다. 평범한 일상이라면 평범한 일상이고,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변해버린 일상이라면 그런 일상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분명 기억을, 추억을 하나하나 쌓아갔을 터였다.


그러면 2년 전의 기억은 조금은 흐려질 법도 한데.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순간 입술 사이에서 하얀 김이 새어나왔다가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옛 기억이라는 것은 지금 흘러나온 입김처럼, 새로이 쌓이는 기억에 묻혀 사라져버리기 쉬운 것일 터였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기억은, 잊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 이전 해보다 더욱 선명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과연 모든 것에 승리하는 아카시. 남의 기억에서조차도 우위를 점하겠다는 것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다시 천천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의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는데, 그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는 바람에 무심코 발걸음이 느려졌었다. 그 탓에 몸이 식어가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날씨에 비해 가벼운 복장으로 나온 터라, 추위를 한 번 인지하자 더욱 춥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걸음걸이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빨리 집에 돌아가서 난방을 틀어야지. 따뜻하게 해둔 다음에 이불을 두르고 있어야지. 그러고 보니 도쿄에 상경한 이후 코타츠의 코 자도 못 본 것 같네. 교토보다는 추우니까 역시 하나 장만하는 편이 좋을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추운 것보다는 나으니까. 아, 근데 지난번에 오버클럭 시도한 후에 돈이 얼마만큼 남았더라. 설마 이번 달 생활비 간당간당한 거 아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자취하고 있는 맨션 앞에 도착했다. 주머니를 뒤져 현관 열쇠를 꺼내 들고 맨션 안으로 들어서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맨션 앞 담장 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다른 주민을 만나러 온 건가. 이곳까지 자신을 만나러 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기에, 당연히 자신의 손님은 아니겠거니 하고 생각을 하면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생각을 배신하기라도 하듯이, 그 사람은 자신을 불러 세웠다.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로.


“마유즈미 선배.”

“.....?!”


기척이 옅어서 순간 못 보고 놓칠 뻔 했습니다, 하고 그가 태연자약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지금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인물이 정말 실존하는 그인지, 아니면 순간 미쳐서 환상이 보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 있었더니, 그가 단정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 위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날씨가 많이 서늘해졌는데, 꽤나 가벼운 옷차림이네요.”

“...아...아카시...?”

“네, 아카시 세이쥬로입니다. 오랜만입니다, 마유즈미 선배.”


네가 어떻게 여기에, 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 그 말을 막았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여기서 이야기를 하기엔 선배의 복장이 너무 가볍다며,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자고. 마치 주인이 손님을 안내하는 것처럼 그가 태연하게 이야기를 하는 걸, 평소라면 시니컬한 어조로 받아칠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경황이 없었던지라, 그가 이야기를 하는 대로 그와 함께 무심코 자취방 안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생각보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방이군요. 책장에 특정 장르의 책이 유독 많은 것을 제외하면.”

“....내버려둬.”


홈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는 방 안에 들어오고 나서야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옛 후배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은 역시 당혹스러운 일이라, 다소 퉁명스러운 어조로 그의 말에 대답을 했다.


가정교육을 잘 받은 것이 분명한 후배는, 앉으라는 자신의 말이 따로 없자 움직이는데 거슬리지 않는 위치에서 단정한 자태로 서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자리에 앉으라고 이야기 하고 싶진 않았지만, 방에 들인 이상 그도 자신의 손님이었다. 반쯤은 몸에 밴 습관처럼, 그에게 아무데나 대충 앉으라고 이야기를 하곤 방의 난방 스위치를 켰다.


“왜 안 앉고 있어?”

“아. ...실례하겠습니다.”

“이제 와서 실례는 무슨. 이미 들어오자마자 방 평가 했으면서.”

“인상 깊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말은 잘 한다.”


여전히 매끄러운 화법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퉁명스럽게 대답을 했다. 방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의 맞은편에 앉으려고 몸을 숙이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초대한 적 없는 손님이라고는 해도 손님은 손님인데 차 한 잔 정도는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이.


“아, 잠시만 기다려라. 녹차라도 한 잔 가져올 테니까. 물론 비싼 품종도 아니고, 마트에서 파는 값싼 티백이야. 입맛에 안 맞아도 참아라. 있는 게 그거뿐이거든.”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침착함을 잃지 않는 그의 태도에, 괜히 칫 하고 혀를 한 번 차고는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주전자에 생수를 받아 물을 끓이면서, 찻잔 두 개를 꺼내 티백을 하나씩 넣어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다 끓자, 데워진 물을 잔에 부어 차를 우려내고 티백을 건져내 버렸다. 그 다음, 잔을 챙겨 들고 그에게로 돌아왔다.


“자.”

“감사합니다.”

“그래서... 뭐냐?”


아카시 손에 잔을 쥐어주고는, 자신의 잔을 한 손에 쥔 채로 맞은편에 앉으면서 대뜸 물었다. 아카시는 김이 폴폴 나는 녹차 잔을 한 번 내려다보고 있다가, 시선을 들어 올려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뜨거운 녹차 잔을 슬쩍 옆에 내려놓았다.


“대뜸 뭐냐고 물으시니 어떤 의도인지 파악하기가 힘들군요. 어떻게 찾아 온 거냐고 물으시는 거라면, 마유즈미 선배와 같은 곳으로 진학한 히구치 선배를 통해서 선배의 주소를 얻었습니다.”

“히구치 그 녀석...”

“히구치 선배를 탓하진 마십시오. 후배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신 것뿐이니까.”

“간절 좋아하시네.”


일순 변했나 싶었는데 여전히 시니컬하시군요, 라고 그가 덧붙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찾아온 의도를 묻는 거라면... 솔직히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마유즈미 선배를 뵙고 싶어서였습니다.”

“...!”


아직 난방이 원활하게 돌지 않아 방 안에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 녹차로 몸이라도 녹여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잔을 들어 올려 차를 한 모금 마시려던 차였다. 그러던 중 그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때문에,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차를 뱉어낼 뻔했다.


“너...너...!”

“손수건 빌려드릴까요?”


삼키려고 했지만 미처 다 삼키지 못했는지, 흘러나온 녹차가 한 줄기,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더럽다고 기겁을 할 만한 상황에도, 아카시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손수건을 빌려 주냐고 물었다. 어쩜 이 상황에서도 저렇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됐어. 괜찮아.”

“네.”

“그건 그렇고, 보고 싶... 아니 만나고 싶었다니, 그건 또 무슨 의미야?”


그는 자신을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는 것 같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뵙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 그대로의 의미도 이해가 안 간다니까? 이유가 뭔데?”

“보고 싶은 것에 대한 이유를 말하라니... 그건 저로서도 대답하기 힘든 문제입니다만.”

“...”

“그래도 답을 내어보자면, 역시 마유즈미 선배가 계속 생각나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부끄럽지만 그렇게 밖에는 설명을 못 하겠습니다, 라고 덧붙이며 그가 어느 정도 식은 것 같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말로는 부끄럽다 어쩐다 이야기를 하지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역시 속을 읽어내기가 힘들었다. 겨울이 찾아올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에 휘둘리는 것으로도 족한데, 이제는 실제 인물이 찾아와 자신을 휘둘러대니 머리가 조금 아파오는 것 같았다. 그런 자신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녹차로 가볍게 입술을 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짧은 인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짧았지만, 그래도 강렬했던 그런 인연이라고. 물론 선배의 성격상 이 연은 선배가 졸업을 하는 순간 끊어질 거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달리 집착하려고 하진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붙잡고 있는 인연은 여러모로 오래가기 힘드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을 잠시 끊고는, 본인 손에 들린 찻잔 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보이는 건 옅은 녹색의 물뿐일 텐데도, 그는 오래도록 찻잔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불현듯 선배가 생각나곤 했습니다. 은퇴식 이후에 개인적으로 따로 만났을 때의 모습. 졸업식이 끝나고 만나게 되었을 때의 모습. 그리고 졸업장을 한 손에 쥔 채 교정을 떠나던 뒷모습. ...그 모습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가 이야기 하는 것을 들으면서,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깜짝 놀랐다. 자신이 겨울이 될 때마다 떠올리고 하는 그의 잔상과 비슷한 시기의 장면이구나 싶어서. 하지만 그 생각은 속으로만 담아둔 채, 그가 이어 말하는 것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작년에 졸업하는 미부치, 네부야, 하야마를 전송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배가 제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건, 떠나는 뒷모습뿐이었구나 하는 점을. 그것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선배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제가 서 있는 곳의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뒷모습이 아니라, 저를 바라보고 있는 선배가 보고 싶었습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 너 말이야.”

“네.”

“작년에 깨달았다며. 근데 왜 1년 후에 온 건데?”


자신의 질문에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기존의 포커페이스 위로 살짝 감정을 드러냈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는 것 같은 감정이 어렴풋이, 물 위로 떠오르는 것처럼 얼굴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니까요.”

“잘 안 들려.”

“겨울이 지나고 제가 졸업을 하게 되면, 또 다시 선배와 같은 지점에 설 수 있으니까,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


그는 본인 손에 들린 잔을 바닥에 내려놓더니, 조심스럽게 이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 위에 가볍게 손을 겹쳐 잡더니, 살짝 흔들리는 눈으로 이쪽을 응시했다.


“제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을, 선배와의 새로운 시작으로 삼고 싶습니다.”

“...”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단지... 선배에게도 그럴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졸업식에 와주세요.”

“...”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다는 그의 말에, 이번에는 자신의 시선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 겨울을 거치며 보았던 그의 잔상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그 이미지가 반복되다가, 다시 처음 지점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자신이 그에게 수고가 많았다고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그에게 졸업 축하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서 등을 돌려 돌아가는, 2년 전 자신이 보았던 풍경이 아니라 다른 장면이 이어졌다. 이제는 얼추 시선 높이가 비슷해진 그와 마주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만개한 꽃 같지는 않지만, 부드럽게 피어나는 것 같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자신은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벚꽃이 피어났다. 끝없는 분홍빛 융단이 펼쳐진 것 같은 장관 아래서, 그가 다시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교복이 아닌, 성인의 복식을 갖춘 채로 자신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이것은 미래다. 그가 바라고 있고, 자신이 내심 바랐을지도 모르는 그런 미래.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니까 어쩔 수 없네. 갈게.”


2년 전과는 다를, 네 졸업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