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빙] 여름 바다
배포했던 책에 수록된 단편 하나.
#2 자빙 [ 여름 바다 ]
여름 바다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상체에는 속이 얼핏 비칠 것 같은 얇은 티셔츠, 그리고 하체에는 바람이 잘 통하는 통이 넓은 반바지. 그런 가벼운 옷차림을 한 채로 해변을 거닐고 있던 히무로는, 시야에 들어오는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잠시 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푸른 보석처럼 청명한 빛깔을 띠고 있는 바다.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하게 내리 쬐는 햇볕. 그리고 그 빛을 받아 알알이 반짝거리는 모래사장.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지니, 왠지 모를 설렘으로 인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두근거림은 어느새, 저 푸른 바다에 몸을 맡기고 싶단 작은 충동으로 변해갔다.
가끔은 이런 충동에 이끌려 작은 일탈을 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혼자만의 생각을 속으로 되뇌며, 히무로는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금의 자신은 해수욕을 즐기기에 적당한 옷차림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충동에 져서 바닷물에 몸을 담근다고 한들, 그 후처리가 번거로워질 거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자연이 뻗어오는 유혹은 강렬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그는 작은 일탈이라고 하는,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과도 같은 말을 위안삼아 한 걸음 한 걸음 바다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어느덧 바다를 코앞에 둘 정도가 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추어 서서, 저 멀리 수평선 너머를 일견했다. 그리고 서서히 발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모래사장과 바닷물이 만나는 경계에서는 잔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왔다가 쓸려나가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히무로는 그 움직임을 잠시 동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계선을 뭉개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파도 쪽으로 천천히 양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물보라를 일으키는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온 파도는 히무로의 발등을 적시곤 어머니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바다의 품으로 되돌아갔다. 파도가 밀려올 때 함께 모래도 같이 떠내려 온 것인지, 비치 샌들 안쪽이 모래알의 깔깔한 느낌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 감각조차도 기분 좋다고 생각하며, 히무로는 조금 전보다 더욱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왕 발이 젖은 김에 조금 더 들어가 볼까.
거침없이 밀려드는 파도와 접하고 나니 생각 또한 대담해져갔다. 좀 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바다를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발등을 가볍게 적시는 정도였던 수위는 어느새 높아져 발목 부근까지 물에 잠길 정도였다.
물속에서 일렁거리고 있는 자신의 양 발, 정확히는 발의 형상을 잠시 내려다보고 있다가 몇 걸음 더 앞으로 내딛었다. 발목 부근에서 찰랑거리던 물은 어느덧 무릎께까지 올라와 반바지의 밑단을 가볍게 적시기 시작했다.
야주 약간이라고는 하지만 옷이 젖어버렸다. 그러면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기왕 젖은 김에 좀 더 들어가 보지, 뭐.”
작은 일탈로 시작했던 움직임은 어느새 본격적인 일탈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일탈이라고 하기엔 건전하기 짝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히무로는 작게 웃었다.
점점 높아지는 수위에 무의식적으로 양 팔을 앞뒤로 휘적거리면서 물살을 헤치고 좀 더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앞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금씩 깊어지던 물은 어느덧 그의 가슴부근까지 올라와 있었다.
“시원하다….”
해변 가장자리를 거닐고 있을 때도 그리 덥지만은 않았다. 햇볕이 조금 따갑다고 생각되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캘리포니아 해변의 여름 햇살과 비교하면, 이 정도 햇빛은 따사롭다는 형용사가 상대적으로 더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은 했어도, 밖에 있을 때와 바닷물 안에 있을 때의 체감 온도는 확실히 다르긴 달랐다. 다시금 시원하다는 말을 나지막이 내뱉으며, 히무로는 침대 위에 눕듯이 물 위로 편안하게 몸을 눕혔다. 그리고 부드럽게 밀려드는 파도에 몸을 맡겼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파도를 따라 몸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감각이었다. 무수히 많은 손들이 온 몸을 간질이는 것 같기도 했고,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어루만지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기질을 갖고 있는 연인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서툴지만 달콤한,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애무를 시도했을 때처럼.
파도의 감각에 집중을 하고 있다가 어느새 자신의 연인에게까지 생각이 미쳤다. 부자연스러우면서도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에, 히무로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서툴다’라는 표현은 좀 너무했을지도, 라고 생각하면서 누운 자세 그대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조용히, 물의 흐름을 느끼면서 혼자만의 고요한 세계에 잠겼다.
***
“…칭.”
“…로칭.”
어디서 낯익은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왠지 자신을 부르는 것 같다고 느껴질 즈음에야 비로소 히무로는 감고 있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리고 편안하게 누워있던 몸을 어느 정도 바로 일으켜 세운 뒤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무로칭.”
“…아츠시구나.”
히무로가 아츠시, 하고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무라사키바라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특유의, 어리광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칭얼거리는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톤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다들 무로칭 사라졌다고 난리 났구. 게다가 나더러 찾으러 나가보라고 자꾸 귀찮게 굴기에 일단 나오긴 했는데…왜 이런 곳에 있구? 덕분에 찾는데 고생깨나 했다고.”
“미안, 미안. 생각보다 기분 좋았거든, 여기.”
히무로는 작게 웃으며 사과의 말과 함께 변명 아닌 변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잠시 무라사키바라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는 가슴팍까지 올라오는 수위가, 그에게 있어서는 허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을 보게 된 순간 묘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히무로를 한 번 바라봤다가 해변 모래사장 쪽을 한 번 돌아보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무로칭은 물에 들어오는 거 좋아하는지 몰라도, 나는 싫단 말이야. 젖는 것도 싫고, 젖은 옷 갈아입는 것도 귀찮아.”
“…하하, 그렇구나.”
자신도 그리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가 워낙 큰 축에 속하는지라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리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었는데, 왠지 모르게 복잡한 심정이 되어서 히무로는 그의 투덜거림을 건성으로 흘려들으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청개구리처럼 일부러 좀 더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금보다 더 깊은 곳으로 향하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의 반응을 확인할 겸, 히무로는 살짝 곁눈질로 그를 돌아보았다. 물에 들어오는 게 싫다고 했으니 이쯤이면 해변 쪽으로 돌아갈 법도 한데, 그는 짜증난다는 기색을 역력하게 풍기면서도 자신을 따라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무로칭. 아무리 무로칭이라고 해도 더 이상 귀찮게 하면 짓눌러 버릴 거야?”
“…하하, 그건 좀 무서운걸.”
그와 자신의 체격차를 고려하면 충분히 그렇게 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섭다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연신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얼마동안 그렇게 웃고 있다가, 히무로는 더 깊은 곳을 향하고 있던 발치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는 자신의 바로 뒤까지 쫓아와 있는 상태였다.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심 놀라면서도, 손을 뻗으면 그에게 닿을 수 있는 이 거리가 왠지 마음에 들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짓눌러 버린다, 라…. 그럼 그렇게 되기 전에….”
일반적인 흐름이라면 나가야겠다는 말이 나올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나가야겠다는 말을 기다리는 것 같은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히무로는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짓궂은 어린 아이처럼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무라사키바라가 의아한 표정을 짓기 시작할 즈음, 히무로는 그를 향해 천천히 팔을 뻗었다. 그리고 팔을 그의 목 뒤로 둘러 감았다. 그런 다음 무라사키바라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와 함께 물을 등지고 눕듯이 풍덩 빠져버렸다. 불시의 일격이라서 인지는 몰라도, 무라사키바라는 저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자신이 끌어당기는 대로 물속에 잠겼다.
***
눈을 떠서 보게 된 물 속의 풍경은 희뿌연 것 같으면서도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물에 의해 소리가 차단된 것인지 지상보다 고요하기만 했다. 들리는 것은 자신이 내뱉은 공기 방울이 터지는 소리와 간간히 전달되어 오는, 둘 중 누구의 것인지 희미한 숨소리뿐이었다.
그런 고요한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자신과 그, 단 둘뿐이었다. 단 둘만 있다는 감각이 어떻게 작용한 것인지는 몰라도, 히무로는 무라사키바라를 끌어 안고 있던 팔을 조금 더 당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찾았다. 희뿌연 시야에, 물을 먹지 않으려는 듯이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는 그의 얼굴이 비쳤다. 그의 얼굴을 잠시 동안 응시하고 있다가, 그 꼭 닫힌 입술 위로 히무로는 자신의 입술을 부드럽게 포갰다.
혀도 섞지 않은 단순한 립키스였다. 그러나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부드러운 감촉만은 가슴 한 구석이 저려올 정도로 잘 느껴졌다. 입술을 조심스럽게 부비고 있던 와중에 문득, 마치 자신들이 어항 속의 금붕어라도 된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소리 없이 시선과, 행동과 접촉만으로 서로를 느끼는 게 닮았다고 생각하며 여전히 입술을 맞댄 채로 살짝 입술 끝을 끌어올려 웃었다.
좀 더 입술을 맞대고 있다가 서서히 숨이 부족해져갈 무렵, 히무로는 그를 놓아주었다. 자신에게서 풀려난 그가 먼저 수면 위로 고개를 쳐드는 것을 물속에서 올려다보며, 히무로는 좀 더 물속에 잠겨 있으려고 했다. 아직은 이 안에 더 있을 수 있으니까, 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 생각을 부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무라사키바라는 다소 거칠게 물 위로 자신을 끌어올렸다.
“…아츠시, 좀 더 부드럽게 끌어올려주면 좋을 텐데.”
“…내 알 바 아니구.”
부드럽게 끌어올려주면 좋겠다는 덤덤한 말에 기가 찬 것인지, 그는 어이없단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휙 하고 몸을 돌리더니 물살을 헤치며 해변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앵돌아진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가 곧 자신도 그의 뒤를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연이어 밀려드는 파도 때문에 걸음이 잘 나아가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기다리느라 그가 일부러 천천히 걷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금방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을 수 있었다.
“아츠시.”
“…….”
여전히 토라져 있는지 그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옅은 미소를 짓다가 다시 말을 걸었다.
“아츠시, 밖에 나가면 뭐라도 사 먹을까? 과자나 달리 먹고 싶은 거 있어? 내가 사줄게.”
“…….”
그에게선 계속 답이 없다. 그제야 비로소 그가 많이 화가 났나 싶어서 슬쩍 곁눈질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 순간, 잔뜩 골이 나 삐죽거리는 그의 입술 사이에서 한 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빙수 먹고 싶어, 하고. 툴툴거리는 기가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그것마저도 귀엽게 느껴져 히무로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 빙수 먹으러 가자. 빙수 먹고 난 다음엔 과자도 사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