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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 테이코 흑화미네 + 타교생 카가미
승리를 하고 난 후에야 맛볼 수 있던 극상의 기쁨. 그것을 느끼지 못한 게 벌써 얼마나 되었는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이 원래 자신의 양 손 안에 있었던 것처럼. 마치 날 때부터 한 몸이었던 것 마냥. 그래서인지 승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이 점점 떨어져갔다. 분명히 이기고 나서 미소를 지었던 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덤덤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번도 미소를 지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과거의 기억이 왜곡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도 지는 것보다는 낫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맞붙는 이들의 얼굴이 패색으로 얼룩지고, 그 얼굴에 포기라는 단어가 떠올랐을 때 깨달았다. 이건 아니다, 라고. 자신의 능력과는 별개로, 타인이 포기해버린 승부를 반쯤 어부지리로 쟁취하는 것은 더럽기 짝이 없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원하지 않은 선물을 억지로 떠안겨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을 완벽하게 막아 세울 수는 없더라도, 자신을 묶어두는 것이 비록 버겁다 하더라도, 끈질기게 맞서 싸워주길 바랐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투쟁심이라는 것을, 호승심이라는 것을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신의 바람을 백지로 되돌려버렸다. 시합포기라는 형태로 말이다.
“...”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간 더운 숨결이, 하얀 김이 되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숨을 한 번 들이켰다. 폐부를 얼려버릴 것 같은 시린 공기가, 몸 안을 가득 메웠다. 몸도 마음도 얼어가기 시작했다.
“지루해.”
휘적휘적 움직이고 있는 다리에 누군가가 납을 매달아 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걸을 때마다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손목 또한 무겁기 짝이 없었다.
“따분해.”
머리 안쪽에서 쾅쾅 울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분명 직시하고 있을 터인 시야가 빙그르르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싫다. 정말.”
생각하는 것도, 몸을 움직이는 것도 싫어져 버렸다. 지독하리만치 깊은 권태로움을 뱉어내면서, 발걸음을 강둑 쪽으로 옮겨버렸다. 강둑 가장자리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살얼음이 낀 강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 강은 여느 때보다 고독하고 쓸쓸해 보이는구나, 하고 무심코 생각해버렸다.
얼핏 보면 단단해 보이는 얼어버린 강. 하지만 발을 잘못 디딘다면, 얄팍하게 얼어 있는 얼음이 파스스 부서져 내릴 터였다. 그리고 부서져 버린 얼음 틈으로 발이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강 밑바닥으로 잠기게 될 것이다. 차가운 물에 먼저 닿아버린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위로, 위로 냉기가 침투하면서 온 몸이 굳어갈 것이다.
그리고 최후엔 꽁꽁 얼어버린 채로, 어두운 강 밑바닥에서 몸을 뉘인 채 잠들어 버리겠지. 아무도 구해줄 수 없는 곳에서. 영원히.
“핫, 나도 미쳐가나 보네.”
기분이 더욱 가라앉는 것 같아서, 괜히 짧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만약 그때, 근처에 앉아 있던 누군가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대로 집에 돌아갔을 것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얼굴에, 자신이 이따금 짓곤 했던 표정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말을 건네게 되었다.
“야. 정말 좋아했던 게, 갑자기 지루하고 따분해지면 어떨 것 같냐?”
자신의 물음에, 강을 응시하고 있던 그의 시선이 움직였다. 차갑게 식은 듯 했지만, 아주 희미하게 열기를 품고 있는 것 같은 눈동자가 이쪽을 주시했다.
“그 지루함이랑 따분함이 도를 지나칠 정도라 만사가 귀찮아질 정도면 어떨 것 같냐?”
이어 질문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하. 세상 참 편하게 사는구만.”
“그게 뭐가 잘못 됐는데.”
자신의 말이 거슬렸는지, 그가 다소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건 조금 슬플 것 같네.”
“...뭐?”
“그렇게 좋아했는데, 그 감정이 변해버리다니. 분명 뭔가 본인에게 있어서 큰 변화가 있었던 거겠지 싶어서.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말이지.”
잘은 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어, 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으로 툭툭 본인의 옷을 털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으나,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자신과 비슷한 신장의 소유자라는 것을. 그것에 아주 조금 호기심이 동했다. 그래서 그가 자리를 뜨기 전에 서둘러 말을 건넸다.
“야, 너 어디 다니냐?”
“... 교복을 보아하니 너네 학교는 아니겠네.”
그는 힐끔, 자신의 교복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어딘가 애매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이 무언가를 더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발걸음을 돌려 어딘가로 떠나가 버렸다.
*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고등학교 1학년 여름. 인터하이 경기장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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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 : 센티넬버스 AU
키워드 : 두 손을 등 뒤로, 얼음 호수, 빠져 나갈 수 없는 미로
[싫어!] [안 가!] [못 가!] [∎∎∎!!]
거칠지만 아직은 앳된 티가 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것은 환청에 가까운 것으로, 자신만이 듣는 목소리라는 것을 카가미는 알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예전부터 들렸던 것으로, 불현듯 찾아와 머릿속을 잠식해가곤 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늘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통증을 수반했다.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라, 카가미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카가미 씨, 괜찮습니까?”
운전석에 앉아 운전을 하고 있던 사람이, 백미러 너머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카가미는 두통으로 인해 흐릿해지는 눈의 초점을 다 잡으면서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안 좋은 꿈이라도 꾼 모양이군요.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꿈이라고 해야 할지... 예전 기억에 가까운 거였습니다.”
이런 자신의 말에, 운전을 하고 있던 사람이 무심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카가미 씨는 기억상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하고. 그러나 그 본인도 말실수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황급히 입을 다물곤 시선을 돌려 정면을 주시했다. 카가미는 그 모습을 백미러에 반사된 이미지를 통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그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불의의 사고로 인해 과거의 기억 대부분을 잃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의 단절, 그리고 남겨진 추억의 소멸을 뜻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기억해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아무 것도 떠올리지 못한 채 입원해 있던 중, 한 단체에 소속된 사람이 접촉해왔다. 그리고 짤막하게 대화를 나눈 뒤, 이내 그 단체 소속 병원으로 자신을 호송해갔다.
타의로 이동하게 된 병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센티넬. 가이드. 이전에는 없던 케이스. 개화된 힘. 아마 그 이야기들은 자신이 멀쩡한 상태였다고 해도 이해하기 힘들었을 거라고,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카가미는 무심코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의 자신은 의지할 곳이 달리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이 될지도 모르는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들은 자신의 재활 훈련을 도와줄 뿐만 아니라 과거 기억을 일깨우는 것에도 신경을 써주었다.
그것이 가이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데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
차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서, 가로등들이 잔상을 남기며 뒤로 흘러 지나갔다. 카가미는 그것을 응시하고 있다가 이내 눈을 다시 감아버렸다.
이렇게 눈을 감고 있으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과거를 일깨울 때 가장 먼저 되찾은 기억이었다. 그리고 자신만 들을 수 있는 그 목소리와도 관련된 것이었다.
이미 과거와 한 번 단절되었기 때문에, 그 기억 속의 자신이 카가미 자신이라는 강한 확신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 때의 감정만큼은 자신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자신은 어린 소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어린 소년은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두 셋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끌려가기 시작했다. 소년은 거칠게 저항했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간신히 한 팔을 뻗었다. 손을 잡아달라고, 구해달라고 외치는 듯한 얼굴로. 하지만 자신은 그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그에게 양 손을 뻗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두 손을 등 뒤로 숨길 뿐이었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이별, 발치에 떨어지는 것은 눈물이었다.
떨어지는 눈물이 발치에 고이기 시작했다. 고인 눈물은 이내 호수가 되었고, 호수는 시린 이별로 인해 꽁꽁 얼어붙었다. 그 얼음 호수 위에서 ‘카가미’는 발이 묶인 것처럼 멈추어 서 있었다. 흐려져만 가는 소년의 자취를 더듬으면서.
[미안해.]
과거의 왜곡된 기억을 따라 읊조리듯이, 카가미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리고 이내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려 현실로 돌아왔다.
“카가미 씨, 곧 도착하니까 내릴 준비 하십시오.”
“...네.”
그 말을 주고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탄 차는 한 저택의 출입구 안으로 미끄러지듯이 진입했다. 사회적 고위층이 살고 있을 거라고 해도 믿을 법한 번지르르한 저택을, 차 안에서 스쳐지나가듯 감상했다. 하지만 번듯한 외견과는 달리...
“공기는 험악하군.”
“역시 느껴지시는 겁니까? 확실히 가이드는 다른가봅니다.”
준비된 공간에 차를 주차하면서 그가 이야기를 했다. 이곳에는 좀처럼 통제하기 힘든 센티넬이 살고 있다고. 통제하기 힘든 만큼, 능력 하나는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센티넬이. 그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통상 능력의 가이드 네 다섯 명이 붙어야 하지만, 카가미 씨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거란 사족 또한 덧붙였다.
자신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그의 말에, 카가미는 작게 조소를 흘렸다. 가이드로서의 능력은 둘째 치고 자신은 각성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사람에게 통제 불능의 센티넬을 붙이려고 하다니. 그 센티넬이 얼마나 골칫덩이였으면 이렇게 떠넘기려 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생각했다. 이용당해도 별 수 없지, 하고. 어찌 되었든 재활 치료를 도와주고, 기억을 되찾아주려 노력한 보답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마중 겸 저택 안내역을 맡은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오자, 그를 따라서 저택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점점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공기를 통해서 누군가의 감정을 감지했다.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 처절함만큼은, 자신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소년의 목소리와도 같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곧 사라져 버렸다. 안내역을 맡은 사람이 어느 문 앞에 서서, 그 문을 열어젖힌 순간에.
“....!!”
방 안에 있던 한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소파 위에 나른하게 드러누워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무언가에 깜짝 놀란 것처럼, 상체는 반쯤 일으켜 세우고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카가미는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저 남자가 센티넬이구나, 하고. 그리고 처절하게 울부짖는 것 같은 감정을 발산하고 있었던 사람이 저 남자구나, 하고. 그리고 또한 시선이 마주친 순간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기억 상실이라는 빠져 나갈 수 없는 미로에 갇혀버린 자신에게 있어서, 저 남자는 미궁을 빠져나갈 하나의 단서이자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거란 사실을. 왠지 모르게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앞으로 네 전속 가이드가 될 카가미다. ...잘 부탁한다.”
>
센티넬 아오미네 + 가이드 카가미.
카가미는 사고 후 기억상실, 그리고 후에 가이드 능력 각성.
[∎∎∎!!] 는 아오미네가 카가미를 '타이가' 라고 부른다는 그런.. 거... ㅇ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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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리석은 인간이 내 사당에 손을 대는 것인가, 하고 미도리마는 생각했음. 하지만 곧 신경을 끄기로 마음 먹었음. 사당을 망치거나 하면 신벌을 내리면 그만이라고 생각을 했으니까. 어차피 인간은 미도리마 에게 있어건 자신이 내리는 신벌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워 하는 약한 존재일뿐이었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음. 하지만 인간에게서 흘러나온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게 되었음. "왓, 먼지 완전 대박. 여기 사람이 오는 사당이긴 한 거야? .... 분위기 자체는 꽤 괜찮은데.." 사람이 안 오는 것 같은 점 빼면 스산한 점도 없고, 꽤 멋지게 꾸며지기도 했고.. 하면서 인간은 혼잣말을 연거푸 내뱉고 있었음. 미도리마는 가만히 서서 그 소리를 잠자코 듣고만 있었음. 스스로 먼지를 치울 수는 없어 냅두고 있었지만, 솔직히 자신이 깃들 수 있는 곳을 멋지다고 해주는 말은 기분 나쁘지 않았음.
그러나 미도리마의 태도는 '저 인간이 얼마나 더 떠드나 보자'라는 것에 가까웠음. 언제 질릴까 하는 생각이기도 했고. 인간은 사당 요모조모를 세심히 살펴보면서 혼잣말로 이런저런 평가를 했음. 대체적으론 좋은 평이었지만 간간히 '촌스러~'라고 해서 미도리마를 자극하기도 했음. 물론 인간은 토지신인 미도리마가 그 자리에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음. 인간은 인외적인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영감은 눈꼽만치도 없어보였음. 미도리마는 시간낭비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준 인간에게 좁쌀만한 호기심이 생겼음. 그렇게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데, 인간이 갑자기 숨을 길게 내쉬더니 양 팔을 걷어붙였음. "기분이다. 먼지 정도만 청소해보고 가볼까~" 잘은 모르지만 신이 있다고 믿어지는 장소인데 먼지가 그득하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며, 인간은 스포츠백 속에서 수건을 꺼내들었음.그리고 사당 근처에 있는 작은 우물에서 물을 퍼올려 수건을 적셨음. 그런 다음 수건을 꼭 짜서 사당으로 다시 돌아왔음. 이후로 슥슥 닦기 시작하는 인간의 모습을 미도리마는 빠짐 없이 보고 있었음.
수건 한 장으로 사당을 다 닦는 건 무리였는지, 인간은 몇 번이고 우물로 향해 수건을 빨고 다시 돌아오는 걸 반복했음. 웬만한 먼지가 다 사라졌을 즈음에야 인간은 수건을 잠시 내려놓곤 기지개를 쭉 켰음. 그리고 혼잣말을 했음. "아, 체육관 청소도 하고 왔는데 사당 청소까지 하다니. 어디까지 청소 좋아하는 거야, 나." 하고. 물론 그 다음에 좋아한다는 건 장난이지만☆하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음. 깨끗해진 사당을 보는 건 오랜만인 미도리마는 기분이 살짝 좋아졌음.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인 듯 했음. 인간은 만족감에 가득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사당을 한 번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자전거를 세워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음. 솔직히 지금의 미도리마라면, 인간이 소원 하나를 빌고간다면 들어줄 마음이 가득했음. 좀 경박해보이는 인간이었지만 그래도 청소를 해준 대가로 들어줄 수는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인간은 청소를 끝낸 것만으로도 만족했다는 듯이 훌쩍 떠나버렸음. 미도리마는 다시 홀로 남겨졌음.
이번 인간이 떠난 이후로 미도리마는 또 한동안 인간을 볼 기회가 없겠구나 싶었음. 하지만 미도리마의 예상은 빗나갔음. 며칠 지나지 않아서 그 인간이 다시 치링치링 자전거 차임을 울리면서 사당으로 찾아왔기 때문에. 참 신기한게, 미도리마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영역에 포함되는 토지를 멀리, 오래 산책하곤 라는데, 그 인간은 미도리마가 사당 근처에 도착했을 때 꼭 들르곤 했음. 처음 한 두 번은 우연이겠거니 싶었는데 거의 매번 그러자 놀라울 정도였음. 여하튼 인간이 와서 하는 건 별 거 없었음. 사당에 먼지가 좀 앉았다 싶으면 전처럼 수건으로 닦아줄 뿐, 기본적으론 혼자 수다를 떨다 갈 뿐이었음. 미도리마는 자신이 있다고는 하지만 인간이 느끼기엔 혼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데 어쩜 저리 말이 많을까 싶었음. 순간 요즘 인간들은 다 저런 건가 하는 편견이 생길 것 같았음. 오늘도 인간은 주구장창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음에 또 올게.'하는 누구에게 남긴 건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치링치링 소리를 울리면서 떠났음.
매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꽤 자주 방문해주는 인간의 존재때문인지는 몰라도, 미도리마는 하루 하루가 꽤 즐거워졌음. 물론 스스로는 절대 즐거운 게 아니라며, 저런 경박한 인간의 말을 듣는 건 고역이란 것이다, 하고 스스로를 속이려고 하고 있었지만. 무료함에 젖어있던 일상에서 벗어나게 되자, 미도리마의 힘이 닿는 토지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음. 이전에는 그냥 그곳에 있을 뿐인 자연이라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좀 더 충만한 느낌이 가득해졌음. 초목을 이루는 잎사귀들은 좀 더 싱그러워졌고, 땅 위에 흐르고 또 땅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들은 좀 더 청량해져갔음. 공기 또한 이전보다 더욱 맑아져갔음. 토지신이란 그 존재 자체가 토지에 영향을 미치곤 했음. 즉 미도리마는 인정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경박한 인간'이라고 칭한 존재에게 꽤 관심을 두게 된 건 확실했음. 게다가 인간이 사당에 놀러와서, "이야, 여기는 날이 갈수록 공기가 맑아지는 것 같은데. 기분 좋다."하고 이야기라도 하게 되면 그 다음 날은 여느 때보다 날씨가 쾌청해지곤 했음.
인간이 주기적으로 방문한 것도 계절이 조금 흘러서 여름이 되었음. 인간의 의복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반팔을 입은 건 또 처음 보는 것 같아서, 미도리마는 내심 신기해했음. 그리고 자신이 입은 옷을 내려다보았음. 길게 치렁치렁 늘어진 의복이었음. 하지만 미도리마는 더위에도 추위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별 생각이 없었음. 인간을 만나기 전까지는. 하지만 인간이 반팔을 입고 오자, 슬쩍 자신의 소맷자락을 걷어올려 보았음. 의복 위에 감추어져 있던 자신의 하얀 피부가 겉으로 드러났음. 그걸 본 후에야 지금 자신이 경박하게 속살을 드러내 보인 건가 하고 충격을 받아 얼른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음. 인간이 이런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다 싶었음. 인간은 사당 앞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아 손으로 부채질을 했음. "아, 덥다... 여긴 그래도 다른 곳보단 시원하긴 하지만... 그래도 바람이 없으니 덥네." 여전히 가벼운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에서 약간 지친 기색이 묻어나는 것 같았음. 그걸 듣고 미도리마는 한 손을 가볍게 들어올렸음. 한 줄기 바람이 부드럽게 인간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음. 소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도리마는 인간의 바람을 들어주었음. 공물을 바치고, 인사를 다해 치성을 올린 것도 아닌데 미도리마는 바람을 불러왔음. 이것이 미도리마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변화인지 인간은 죽어도 모를 거였음.
미도리마의 힘으로 바람이 불고 지나가자 인간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음. 그리고 다시 입술사이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도 활력이 생긴 것 같았음. "아, 살 것 같다. 완전 기분 좋다."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인간이 활짝 미소를 지었음. 그 모습을 보게 된 미도리마는 다시 한 번 바람을 불게 해주려고 마음먹었음. 그래서 손을 들어올리는데, 인간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혼잣말을 했음. 바람은 이쯤하면 됐으니 슬슬 돌아가봐야지~하고. 그리곤 언제나처럼 다음에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훌쩍 돌아가버렸음. 돌아가버리는 인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미도리마는 무심코 손을 뻗을 뻔 했음. 하지만 미도리마의 손이 인간에게 닿을 리가 없었고, 인간이 미도리마의 기척을 눈치챌리가 없었음. 난생 처음으로 인간에게 손을 뻗고자 한 미도리마의 행동은 아무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흘러가버리고 말았음. 그때 미도리마는 아쉬움이라는 감정을 배운 것 같았음.
초여름이 지날 즈음이 되자 장마 기간이 찾아들었음. 이전의 미도리마라면 비가 내릴 땐 자연스럽게 주변 청소가 되어서 좋아했을 터인데, 이번만큼은 장마가 달갑지 않았음. 그 이유는 당연히 인간이 찾아오기 힘들어져서였음. 벌써 인간이 이곳에 들리지 못한 지도 이레가 지나고 있었음. 분명 장마가 오기 전, 인간이 장마 기간이 되면 아마 들르기 힘들 것 같다고 이야기를 흘리듯이 했지만 이레라는 시간이 흐를 정도일줄은 몰랐음. 이까짓 비가 뭐라고, 하고 미도리마는 혼잣말을 흘렸음. 기분이 점차 가라앉는 것 같았음. 그러자 미도리마의 주변에 있던 초목들에게도 변화가 나타났음. 이파리나 줄기 등에서 생기가 점점 사라지고 풀죽은 것 같은 느낌이 되었음. 미도리마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혀를 가볍게 차고는 자신의 토지를 둘러보러 산책을 나가려고 했음. 사당에 붙어 있어봤자 '그'를 만날 수 있을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푸른 녹색 우산을 쓴 누군가가 사당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음. 우산에 가려져 있었지만 미도리마는 바로 알 수 있었음. 그였어.
"나 왔어. 와, 엄청 오랜만에 온 것 같다." 여전히 가벼운 어조로 그가 이야기를 했어. 미도리마는 산책을 나가려고 했던 걸음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음. 무슨 말이라도 그에게 하고 싶었어. 왜 이제 온 것이냐. 인간이란 비가 오면 밖에 나오기 힘든 것이냐. 아니면 비를 싫어하는 것이냐. 그럼 나에게 소원을 빌거라. 비록 자연의 섭리를 위반할 수는 없지만, 네가 오는 날이만이라도 맑게 해주겠다. 라고. 하지만 미도리마의 말이 그에게 닿을리가 없었음. 그래서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응시하고만 있었음. 그는 평소라면 사당 앞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겠지만, 지금은 온통 비에 젖어 있어서 미처 앉진 못하고 어정쩡하게 쭈그리고 앉아 있었음. 우산을 쓰고 있는 그는 젖은 사당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손을 뻗어 손끝으로 가볍게 빗방울을 떨궈내었음. "비가 오니까 먼지도 안 앉겠는걸. 이야, 청소 안 해도 된다. 비도 좋은 점이 다 있네." 여전히 그는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혼잣말을 했음. 혼잣말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미도리마는 대답했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미도리마의 말은 그에게는 닿지 않았음.
둘 사이에는 침묵이 내려 앉았음. 들리는 것은 내리는 빗소리 뿐이었음.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빗소리만 듣고 있었겠지, 하고 미도리마는 생각했음. 그 사실에 미도리마는 씁쓸함이라는 감정을 배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음. 미도리마는 하늘을 한 번 바라보았음. 이대로 둔다면 빗줄기가 더 거세어질 조짐이었음. 비가 거세어지면 그가 돌아가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음. 그리고 일순 돌아가기 힘들어지면 그가 이곳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음. 하지만 미도리마는 고개를 내저었음.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우산 하나 가지고 버텨내기엔, 인간은 너무 약한 존재였음. 그러니 최대한 그를 돌려보내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음. 미도리마는 숨을 한 번 짧게 내쉬고는 다시 한 번 손을 들어올렸음. 그를 위해서 바람을 불러왔을 때처럼. 그러자 짙게 먹구름이 껴 있던 하늘이 조금씩 조금씩 색이 옅어지기 시작했음. 빗줄기도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음. 그의 얼굴을 거의 다 가리고 있던 우산이 살짝 들리는가 싶더니, 우산 밑으로 그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음. 그의 시선은 하늘로 고정되어 있었지만, 미도리마는 그걸로도 만족했음. [비는 잠시동안 묶어둘테니 그 사이에 돌아가라는 것이다.] 미도리마는 그에게 닿지 않을 게 분명한데도 말을 건넸음. 그리고 먼저 자리를 떠났음.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던 타카오가 시선을 내려, 그가 걸어가고 있는 쪽을 잠깐 바라본 걸 눈치채지 못했음.
장마기간 동안은 역시 그를 보기 힘들었음. 하지만 장마가 끝나고 한여름이 되자, 그는 그간 못 온 걸 만회하겠다는 듯이 더욱 자주 오기 시작했음. 많을 땐 하루에 두 번 이상 들릴 때도 있었음. 그러다가 하루는 그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사당 쪽으로 걸어왔음. 미도리마는 사당 근처에 놓인 바위 위에 걸터 앉아 그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음. 그러다가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보게 되었음. [공물인가?] 미도리마는 이제 버릇처럼 말을 건넸음. 그의 목소리는 바로 돌아오지 않았음. 그래도 미도리마는 평소처럼 그가 주절주절 떠들어 대는 걸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음. 아니나 다를까, 그는 손에 들린 걸 사당 앞에 슬쩍 내려 놓더니 자리를 잡고 앉아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음. "그러고 보니 이런 걸 들고 오는 건 처음인 것 같네. 이게 뭔지 알아? 오시루코라는 건데 말이지, 캔에 담긴 것도 있더라고. 이런 걸 누가 먹어? 라고 막 웃음을 터트릴 뻔 하다가 이걸 주신 할머니께 등짝 맞을 뻔 했다니까. 실은 내가 여기 자주 간다는 걸 알고, 동네에 연세 많은 할머니가 공양 올리라고 준 거야. 그 할머니 거동이 불편하시니까 할머니 대신 내가~라고나 할까." 그치만 역시 사당에 오는 거면 나도 공양을 꾸준히 올리는 편이 좋았을까, 하고 그는 말을 마치곤 웃었음. 미도리마는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음. [공양은 아무래도 좋으니, 그 경박한 웃음부터 어떻게 해보라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일방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고, 한쪽에서는 쌍방 대화가 이루어지는 미묘한 풍경이 자아내졌음. 미도리마는 그걸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걸 포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걸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음.
분명 자신의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않을 거였음. 자신의 모습 또한 그에겐 보이지 않을 거였음. 그래도 미도리마는 지금의 관계를 포기할수가 없었음. 토지신으로서 매우 긴 세월을 보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애착이 가는 인간이 생긴 것은 처음이었음. 한숨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음. 이 애착이라는 감정은, 자신에게 있어서 다양한 감정을 연이어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고 미도리마는 생각했음. 그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질 즈음, 사당 주변을 날아다니던 참새 두 마리가 미도리마가 앉은 바위에 자리를 잡았음. 그리곤 그 참새 두 마리는 작은 머리를 들어올려 미도리마를 바라보다가,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미도리마의 손가락 끝에 머리를 부볐음. 미도리마는 그 참새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음. 그때, 그가 미도리마 쪽으로 고개를 돌렸음. 그리고 몸을 일으키더니 미도리마가 있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어오기 시작했음. 미도리마는 순간 움찔했음. 감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참새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는 그거였음. 자신을 보고 다가온 게 아니라, 참새를 보고 다가온 거였음. 그 한 마디에 미도리마는 복잡한 심경이 되었음. 자신을 봐주길 바랐으면서도 못 봐서 다행이다 싶은 그런 마음이 뒤섞였음. 그가 다가왔다고는 하나 자신이 먼저 자리를 피하는 것도 신으로서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것 같아서, 미도리마는 꿋꿋히 그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음. 그는 바위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미도리마 손끝에 머리를 부비고 있는 참새를 가만히 바라보았음. "보통은 사람을 보면 도망가기 바쁘던데, 너희는 도망가지도 않네. 신기하다." 참새가 도망가지 않는 이유는 별 거 없었음. 미도리마 앞이었기 때문이었음. 그 지역을 지키는 토지신 아래, 모든 만물은 평등했음. 토지의, 토지신의 은혜를 받은 생명체라는 점에서. 비유해서 말하자면 참새라는 개체와 인간이라는 개체는 상성이 좋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버지 격에 해당하는 토지신 아래에서는 그냥 사이 나쁜 형제와도 같은 거였음. 그러니 미도리마 앞에서는 참새도 인간을 피할 이유가 없었던 거임. 미도리마가 자리잡은 곳은 일종의 성역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이런 걸 알리가 없는 그는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음. "자, 착하지." 그는 참새를 만지고 싶다는 듯이 바위 위에 손을 가만히 얹었음. 그의 시각에서는 분명 그랬을 거임. 하지만 미도리마의 시각에서는 달랐음. 그의 손은 바위가 아니라 미도리마의 손등 위에 얹어져 있었음. 체온이라는 것이 존재할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도리마는 자신의 손이 뜨거워지는 것 같다고 생각해버렸음.
자기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참새는 조금 고민을 하는 것 같았음. 그러다가 그 작은 머리를 들어올려 미도리마를 바라보았음. 미도리마는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느낌을 받으면서도, 참새에게는 가볍게 눈짓을 했음.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라고. 토지신이 그렇게 의지를 전달하자, 참새는 그걸 얌전히 따랐음. 그의 손끝에 가볍게 올라타서, 미도리마에게 했던 것처럼 머리를 슥슥 부비적거리기 시작했음. 그 행동을 본 그의 얼굴에서는 밝은 미소가 떠올랐음. 언제나 히죽히죽 웃는 얼굴에 가까웠지만 이런 미소는 또 처음 보는 것 같다고 미도리마는 무심코 생각해버렸음. 그러다 그가 다시 말을 꺼내자 미도리마는 침을 한 번 삼키고 그를 주시했음. "있지, 내 이름은 타카오야. 타카오 카즈나리. 이름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타카(매)인데 이렇게 친근하게 굴어도 되는 거야? 응? 천적이라구?" 그는 마치 사당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참새에게도 마치 사람 대하듯이 말을 걸고 있었음. 그 사실을 깨달은 미도리마는 약간 씁쓸해지면서도,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는 조금 들뜨고 말았음. 그의 이름은 타카오, 타카오 카즈나리. [타카오.] 미도리마의 입술 사이에서, 난생 처음으로 인간의 이름이 흘러나왔음.
그 날 하루는 어떻게 흘렀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음. 얼마 지나지 않아 참새가 날아가 버리고, 그가 그 모습을 보며 아쉬워하면서 손을 거두어 들이고, 자신은 그가 손을 거두어 들인 것에 아쉬워 했다는 것만 기억이 났음. 시간이 흐를 수록 미도리마는 타카오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되었다는 걸 깨닫게 되고, 또 그걸 인정하게 되었음. 하지만 그건 쉬운 과정이 아니었음. 미도리마는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에서만큼은 만물의 아버지라 불려도 좋은 존재였음. 그런 존재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은 큰 파장을 불러올 수도 있었음. 모든 것에서 중립이어야 할 존재에게 한 가지 기준이 생겨버린 거나 다름 없으니까. 그래서 미도리마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사당에 모셔진 자신의 신체神体에 들어가 한동안 칩거했음. 외부와는 차단된 곳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을 가다듬기 시작했음. 그 안에서 타카오에 대해서 특별하다고 인정하고,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지금까지 해온 토지신으로서의 역할은 성실히 수행할 것을 스스로와 약속했음. 특정 존재에게 편향된 애정을 주는 것은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후자 같은 경우는 당연한 걸지도 몰랐음. 그렇게 칩거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계절이 바뀌어 있었음. 신체에 들어갔던 건 여름이었는데, 나와보니 세상은 온통 눈으로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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