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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온 햇빛에, 살짝 미간을 좁히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새하얀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워있는 상태 그대로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고 있다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몸을 일으켜 앉았을 때, 차가운 무언가가 뺨을 타고 또르륵 흘러내렸다.
또, 인가.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카가미는 작게 중얼거렸다. 손등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가볍게 훑어내었다. 이전에도 이런 일이 가끔 있었다. 꿈속에서 기억이 나지도 않는 과거를 접하게 되면, 간혹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곤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끔이었을 뿐, 요즘처럼 빈번하지는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원인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나왔다. 센티넬, 아니, 그와 만났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온 이후로, 그를 만나게 된 이후로, 자신의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무언가가 시나브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카가미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것만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 변화는 잔잔한 수면 위에 작은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과 같았다. 물의 절대량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떨어진 물 한 방울이 남기고 간 파장만큼은 잔잔한 수면을 흔들면서 길게, 그리고 넓게 퍼져나가는 것처럼. 그와의 만남이라는 작은 계기가, 자신의 내면에 변화라는 너울을 불러 일으켰다는 걸 카가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깨어나면 기억도 못하는 걸.
그와의 만남이 자신을 변하게 만들었다 한들, 지워진 기억을 소생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그저 꿈을 꾸었을 때의 감정만이 남아, 자고 있는 도중 눈물을 흘리게 만들 뿐이었다. 왠지 모르게 속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서 카가미는 씁쓸한 웃음을 한 번 뱉어냈다. 그리고 침대에서 벗어나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겨 욕실로 향했다. 기억이 나지도 않는 꿈에 계속 얽매여 있느니, 찬물로 세수를 하며 가라앉은 기분을, 상념을 털어내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았기에.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에 세안을 하고 난 후, 욕실에 비치되어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가볍게 닦아냈다. 술렁거리던 감정이 흐르는 물에 씻겨 내려간 듯, 조금은 차분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후우, 하고 길게 숨을 한 번 내뱉은 뒤, 사용한 수건을 대충 어깨에 얹고는 욕실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주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욕실과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주방으로 향하면서 잠시 생각했다. 이곳에 머물게 된 지도 벌써 세 달이 넘었건만 아직도 자신은 이방인 같다고. 그도 그럴 것이 그와 자신, 단 둘이 머물기에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넓은 저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끔 고용된 사람들이 와서 청소며 저택 관리를 하고 간다고는 하나, 왠지 모르게 사람 사는 느낌이 거의 묻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툭 떨어뜨려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심코 든 생각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내저었다. 그런 생각보다 식사가 우선이라는 듯이, 주방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냉장고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호쾌하게 냉장고 문을 열어젖혔다.
"아... 조리해둔 건 어제 다 먹어치웠던가."
냉장고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조리되지 않은 음식 재료들뿐이었다. 평소에는 저택을 오고가는 고용인들이 만들어두고 간 음식을 꺼내다 먹으면 됐는데, 배가 고플 때마다 수시로 꺼내다 데워먹었더니 사람들이 다시 방문하기도 전에 조리해둔 것이 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잠시 동안 냉장고 안 재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몇 가지 야채와 계란, 버터, 우유 등을 꺼내어 챙겨 들었다.
"빵은... 아직 남았네."
꺼내 온 물건들을 테이블 위에 잘 올려놓은 다음, 빵이 보관되어 있는 곳을 확인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먹을 만한 양의 여러 가지 빵이 남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식빵을 꺼내어 손에 들고는 테이블 쪽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찬장과 수납장을 뒤져 요리에 필요한 것들을 찾아내곤 아침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조리되어 있는 것이 없다면 자신이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어차피 남들이 만든 것을 먹는 것보다 스스로 만들어 먹는 것이 더 익숙하기도 했다. 게다가 요리를 하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마 '과거'의 자신도 지금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을 터였다. 흔히 이야기 하듯,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몸은 기억을 하고 있는, 그런 계통의 것일지도 몰랐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손은 열심히 움직여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만한 토스트와 샐러드를 만들었다. 잘 구운 식빵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완성된 음식을 접시에 옮겨 담다가 문득 그를 떠올렸다. 평소라면 의식주가 모두 해결된 상태였으니 굳이 서로를 마주하지 않아도 어찌저찌 생활해 나갈 수 있었지만, 오늘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그가 스스로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지 여부도 알지 못할 뿐더러, 요리를 만들어 놓고 그걸 자신 혼자 다 먹어버리는 것 또한 카가미로선 뭔가 찝찝했다.
"오늘 오후에는 사람이 올지도 모르니까... 일단 그 전까진 챙겨주는 편이 낫겠지."
지금 만들어 놓은 것은 카가미 자신이 먹을 몫뿐이었지만, 또 다시 만들면 된다는 생각에 그리 아깝지는 않았다. 재료가 넉넉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아쉬웠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수납장에서 큰 쟁반 하나를 꺼내어 토스트와 샐러드가 담긴 접시를 옮겨 담았다. 그리고 유리잔 한 가득 우유를 부어 따른 뒤, 그것도 쟁반 위에 올려두었다. 마지막으로 쟁반 위에 덮개를 씌운 뒤, 조심스럽게 쟁반을 들어 올리고는 천천히 주방을 빠져나왔다.
"... 이쪽이던가."
그와 첫 대면을 한 이래로 향해본 적이 없는 복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아침만 건네주고 나오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걷기 시작했는데, 그의 방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묘하게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감정의 파장이 점점 더 짙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걸음을 옮겨, 그의 방문 앞에 멈추어 섰다.
"...들어간다."
살짝 노크를 하며 들어가겠노라고 먼저 이야기를 한 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긴장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쉽게 그의 공간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아오미네?"
열린 방문 안쪽으로 한 걸음만 내딛은 상태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게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을 제지하는 목소리는 이번에도 들리지 않았다. 그것에 용기를 얻어 터벅터벅 방 안으로 들어가는데, 침대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흠칫 놀라, 카가미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은 채로 고개만 천천히 돌려 침대 쪽을 응시했다. 그가 일어나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그는 베개에 고개를 파묻고 엎드린 자세를 한 채 아직까지도 잠들어 있었다.
아까 들린 소리는 뒤척이는 소리였던 건가.
아직 잠들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침대 머리맡 쪽에 있는 테이블 위에 쟁반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침대 가까이로 다가가 잠든 그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은 베개에 파묻혀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자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 같았다. 가이드를 서넛이나 붙여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센티넬도, 잠들어 있을 때는 평범한 사람 같다니.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을 좀 더 자세히 지켜보고 싶어서, 카가미는 자신도 모르게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얼마동안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을까. 그가 베개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자신 쪽으로 살짝 틀었다. 그리고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상태 그대로 미간을 찌푸렸다. 꿈속에서 뭔가 불만스러운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싶어서 살짝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그의 표정이 변함에 따라 카가미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단순히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이라 여겼던 그의 얼굴이 변해갔다. 처음에는 화난 것처럼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서서히 울 것 같은 얼굴로 변했다. 그리고 비통함을 속으로 삼키는 것 같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지켜보고 있는 이가 더욱 가슴이 아플 정도로, 슬픔으로 인해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의 고통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것에 감응한 듯, 무의식적으로 그에게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뺨 위에 가볍게 손을 얹으려고 했다. 순간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손은 그에게 닿았을 터였다.
타이가.
세 음절로 이루어진 말에, 심장이 쿵 하고 크게 뛰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카가미 또한 울고 싶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리만치 술렁이는 감정을 다잡으려 노력하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꾹 감긴 그의 속눈썹 아래로 작은 물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곧 이어 또 한 방울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카가미는 자신의 손으로 그 눈물을 거두어 주었다.
울지 마.
마음속으로 연신 울지 말라는 한 마디만을 반복하면서, 그가 가이드인 자신의 힘에 반응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그의 머리를,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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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전에 인터뷰했던 잡지를 들춰본 것은 한 순간의 변덕일 뿐이었다. 그의 인터뷰가 수록되어있다기에 구매를 한 것도, 이후 방치하고 있다가 뒤늦게야 읽어볼 생각이 든 것 또한. 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남기고 간 영향은 막대하기 짝이 없었다.
*
Q 이번 대담을 통해서 키세 군에 대해서 많은 걸 알 수 있었어요.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겠죠.
A 그런가요? (웃음)
Q 그렇고말고요. 그러니까 하나만 더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A 제가 대답할 수 있는 선에서라면 얼마든지.
Q 아마 전국의 키세 료타 팬들이 물어보고 싶어 하는 질문이 아닐까 싶어요.
A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조금 부담스러운데요. (웃음) 각오하고 있을 테니 얼마든지 물어봐주세요.
Q 질문은 짧습니다. 현재 키세 료타의 이상형은?
A 아, 이상형에 관한 거라... 음... 저를 구속하지 않는 사람? 지금 생각나는 건 이정도 밖에 없네요.
“구속하지 않는 사람.”
인터뷰를 가볍게 읽어 내려가고 있다가, 한 부분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시선이 멈춘 곳은 그가 이상형에 대하여 대답을 한 부분이었다. 구속하지 않는 사람. 다시 한 번 그 문장을 반복해서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 순간, 구속하지 않는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대답을 하는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마 조금 난처하다는 듯이 눈썹 끝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약간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겠지.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 척 하다가, 진심이 어린 대답을 내뱉었겠지. 인터뷰라고 비교적 유하게 돌려 말했지만, 누군가에게 구속당하기 싫다는 것을, 그런 걸 혐오한다는 것을 잘 포장해서 천연덕스럽게 겉으로 드러냈겠지.
그라면, 키세 료타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잡지를 덮었다.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았다. 이 이상 그와 관련된 것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인터뷰가 수록된 잡지 표지 모델이 그였던지라, 잡지를 덮은 순간 표지 속의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가볍게 혀를 차곤 잡지를 아무렇게나 방바닥에 툭 던져두었다. 앞표지의 그가 보이지 않게, 일부러 뒤표지가 위에 오도록.
그 이후로 몇날 며칠 동안 그 인터뷰에 대한 것을 잊으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오히려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그 인터뷰의 내용이 머릿속에 떠올라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대학 들어와서 처음 보게 되는 시험 날짜가 코앞에 닥쳤는데도 불구하고, 전공책의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용 암기를 위해 필기를 옮겨 적고 있던 서브노트에도 어느새, 키세의 이름 넉자와 구속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깊게 새겨지고 있었다. 기억에. 가슴에.
이 상태로는 억지로 책을 붙들고 있다고 해도 공부가 될 것 같진 않았다. 손에 쥐고 있던 샤프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과 그의 이상형으로 빼곡해진 노트 한 페이지를 쭉 찢어 내렸다. 그것을 꾸깃꾸깃 구겨버리고는 책상 옆의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 지금 버려버린 종이마냥 잡지 인터뷰를 읽었던 기억도 쉽게 버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은 녹록치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은 느낌이었다. 깨달음의 계기 치고는 많이 이상했지만.
“...”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 괜스레 뒷머리를 쓱쓱 쓸어내렸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 있다가는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 자신에겐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면 적어도 기분전환을 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밤 9시. 늦다면 늦은 시간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몸에 걸칠 가벼운 상의 하나와 핸드폰을 챙겨든 채 방을 나섰다. 거실에 있던 부모님이 어디 가는 거냐고 묻자, 집중이 안 돼서 휴식 겸 잠시 산책 좀 하고 오겠다는 대답만을 남기고 집 밖으로 빠져 나왔다.
집 밖으로 나오니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핸드폰은 대강 바지 주머니 안쪽에 찔러 넣고, 들고 나온 겉옷을 챙겨 입었다. 봄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밤은 서늘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래도 봄이라고 입김이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미미한 차이로 계절 변화를 다시 한 번 확인한 후에야,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걸음을 옮길 때, 눈앞에 닥친 시험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다음 한 걸음을 옮길 땐,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한 걸음을 옮길 땐,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비우러 나온 것이니 이런 생각조차 부질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그래서 무념무상의 상태로, 목적지 없이 방황하듯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
시험에 대한 생각도, 그 외의 다른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의식이 자신을 이끈 모양이었다. 자신의 무의식은, 갈 곳이 없이 방황하던 발걸음을, 그가 살고 있는 동네 근처로 이끌었다. 그 때문에, 그가 인터뷰한 내용 때문에 여러모로 복잡한 심정이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무의식적으로 그를 찾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미묘한 기분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이래서야 원, 그 녀석이 싫어할 타입에 속할지도 모르겠는걸. 하고.
사귀고 있는 사이라고는 하나, 아무런 언질도 없이 집 근처에 찾아와 있는 것을 보면 그가 당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당황 그 이상으로 정이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후자의 경우를 생각하니 피가 식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들키지 않게 돌아가야겠다.
그가 언급한 ‘구속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에 도리어 자신이 구속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이상형에 신경을 쓰게 되고, 그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자신은...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그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 하나만큼은 자신에게 있어서 불변의 진리나 다름없었다. 밤 산책은 이쯤 하기로 하고, 그에게 들키기 전에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걸음을 좀 더 빨리하면 그에게 들킬 일도 없을 거라 생각하니, 점점 더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가로등 밑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키세?”
“카사마츠 선배?”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집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다 그를 발견한 자신이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그도 이쪽을 바라보더니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곤 더할 나위 없이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이쪽으로 달려왔다.
“여기까진 어쩐 일임까?”
“아, 그냥 밤 산책.”
“선배, 시험 기간이 코앞이라고 해서 데이트는커녕 얼굴 보는 것도 제대로 못했는데... 이렇게라도 만나니까 좋슴다.”
“그러냐.”
“게다가 선배, 최근 들어서 전화도, 문자도 잘 안 하잖슴까.”
“...그건...”
잡지를 읽은 탓이었다. 잡지 인터뷰 내용 중에, 구속하지 않는 사람이 취향이라고 그가 이야기 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화도 문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 자신이 보내고 있는 메시지가 그에게 있어서는 구속하는 것처럼 느껴지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그렇다보니 최근엔 최대한 그의 메시지에 답변만 하는 수준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건?”
“시험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랬어. 미안하다.”
“선배에게 사과 받으려고 물은 건 아님다.”
그가 눈썹 끝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난처하다는 듯이 웃었다. 이전에 자신이 상상했던 얼굴 그대로라, 살짝 웃음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아직 교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나저나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아직 교복이야? 남아서 연습하다 온 거냐?”
그 말을 꺼내고 아차, 싶었다. 이렇게 일일이 캐묻는 것 또한 구속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실수를 한 것 같아서, 살짝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반응은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아, 연습도 연습이지만 공부도 조금 하고 왔슴다. 그러다보니 평소보다 귀가가 늦어졌슴다.”
“공부? 네가?”
불과 작년, 아니 몇 개월 전만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스스로 남아서 공부를 하고 온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을 하면서, 약간은 의심이 묻어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짜임다! 농구는 지금도 성실하게 하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공부 쪽에도 좀 더 성실해져 볼까 해서...”
“잘 생각했네. ...근데 예전의 네 모습과 조금 괴리감이 있어서 적응이 안 된다. 미안.”
“그게 뭡니까, 진짜...너무함다.”
칭찬 같으면서도 왠지 칭찬 같지 않다면서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그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사과를 하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자신을 그가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답지 않게 약간 우물쭈물 거리는 것 같은 태도로.
“이런 모습... 좋아함까?”
“응?”
“그러니까... 매사에 성실한 사람, 좋아함까?”
그가 건네는 질문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미간을 살짝 찡그리면서, 의미를 모르겠단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해야 될 것 같아서, 일단은 생각나는 대로 대답을 했다.
“성실한 사람 좋지. 신뢰라고 해야 할지, 절로 마음이 간다고 해야 하나. 그런 사람이 취향...아.”
그런 사람이 취향이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미처 다 끝마치지 못했다. 성실한 사람이 좋다고 대답을 한 이후로, 그의 눈이 약간의 불안감과 기대감 같은 걸로 일렁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신의 취향에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자신의 이상형인 ‘성실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키세.”
“예?”
“너, 누구한테 내 이상형 같은 거 물어봤냐? 모리야마?”
자신의 말에 그의 어깨가 흠칫 하고 크게 떨렸다. 쉽게 대답할 수가 없는지, 그는 시선을 요리조리 피하고 있다가 마침내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모리야마 선배에게 물어봤슴다.”
“나한테 직접 물어보지 그랬냐?”
“그치만, 그렇게 하면 별로 감동이 없잖슴까! 게다가 선배가 절 더 좋아해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변하려고 했다고 그가 덧붙였다. 단지 자신이 그를 좀 더 좋아해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랬다고. 그래서 성실해지려 노력하고 있다고. 그 말을 듣게 되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굳이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나, 너 좋아해.”
“....!”
“하지만 고등학교 입학 당시처럼 돌아가 버리면 발로 걷어차 버릴 거다.”
“...네...”
좋아한다는 말에는 기가 사는가 싶더니, 이내 나태해지면 걷어찰 거란 말에 다시 풀죽어 버린 그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이라면 아무런 사심 없이 그에게 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고 있던 그의 이상형에 대해서.
“키세, 구속하지 않는 사람이 좋냐?”
“편하긴 할 것 같슴다.”
“그럼 내가 널 구속하려고 하면, 시시콜콜 뭔가 자꾸 물어보고 하면, 넌 날 싫어할 거냐?”
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바로 대답했다.
“아뇨! 제가 왜 싫어함까? 그것보다, 선배는 그런 거 하나도 안 하잖아요? 가끔은 해줬으면 한다구요!”
“해줬으면 하다니, 뭘?”
“시시콜콜 자꾸 묻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아니었냐?”
“선배는 경우가 다름다!”
“뭐가 달라, 임마.”
괜한 억지 쓰지 말라며 그의 다리를 아프지 않게 한 번 걷어찼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자꾸만 입술 사이로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의 이상형에 부합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의 취향에 부합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는 자신을 좋아하고 있으니까.
취향을 넘어서서,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특별하게 여겨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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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리마가 사과의 말을 건넨 다음, 타카오는 입을 꾹 다물었음. 마치 미도리마가 건넨 사과의 말을 들은 것처럼. 그럴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미도리마에게는 그렇게 느껴졌음. 타카오는 얼마 동안 이야기를 하지 않다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음. "있지,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 네가 사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평소의 공기? 분위기랑은 다른데, 하고 이전처럼 살짝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타카오는 이야기 했음. 하지만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묻어난다고 해서 그게 진심으로 즐겁다거나 한 건 아니라는 건, 인간의 감정에 둔한 미도리마도 잘 알고 있었음. 그러나 그런 식으로라도 분위기 환기를 하고 싶은 타카오의 심정은 알 것 같았기에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음. 타카오는 이어 이야기를 했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이렇게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난 기뻐. 여기 신 님, 할머니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정말 대단한 분이었구나.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란 생각했던 사람... 아, 사람이 아니지, 여튼 그런 존재를 다시 만나게 해줬어. 진짜 뭐라도 바쳐야 할 것 같은 기분이야. 뭘 바치는 게 좋을까. 이전처럼 오시루코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여기 신 님이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미도리마는 입을 열었음. [너다, 타카오. 너만 있으면 된다.]
미도리마는 자신이 무심코 꺼낸 대답에 스스로도 깜짝 놀랐음. 하지만 이미 자신의 감정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런 말이 나올 법도 하다고 생각했음. 물론 실제로 그를 소원을 이루어준 '대가'로서 거두어 가면 안 되겠지만. 미도리마는 잠시 고개를 내저었음. 그냥 이렇게만 있어주는 걸로도 좋았음. 인간의 삶은 덧없기 짝이 없지만, 그 짧은 시간이나마 그가 본인의 생을 자신과 공유해준다면 그걸로도 만족할 수 있었음. 답지 않게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여튼 그렇다고 생각을 했음. 미도리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타카오는, 이제 서서히 웃음기를 찾아가는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음.
"나... 내일 또 다시 여기 와도 될까? 너를 만나러 오고 싶어. 신 님이 사당 앞을 만남의 장소로 삼는다고 경을 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널 만날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니까... 다시 널 만나러 오고 싶어. 대답은... 역시 들을 수 없겠지? 나 혼자만의 약속이 되겠네."
마지막 말은 왠지 모르게 씁쓸함이 감도는 것 같았음. 미도리마는 몰랐지만, 타카오는 한 가지 배운 것이 있었음. 한 번 온기를 알아버린 짐승이 그 온기를 갈구하게 되는 것처럼, 온기를 알아버린 짐승이 그 온기를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얼마나 절박해지는지를. 타카오는 '그'라는 존재를 한 번 잃어버렸기 때문에 더욱 절박해져 있는 상태였음. 안 그런 척 노력하고 있었지만, 스스로는 그저 슬프고 슬퍼서 힘들었을 뿐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지만 타카오에게 있어서 미도리마는 이제 놓을 수 없는 존재였음. 놓치기 싫은 존재였음.
"만나러 올거야."
타카오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이야기를 했음. 미도리마는 타카오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음. 그리고 손을 잠시 움직여 신력을 사용했음. 인간에게는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 없으니, 무너뜨린 돌탑의 돌을 움직였음. 그리고 그에게 대답을 돌려주었음. [ん(응)] 이라는 문자로써.
이런 식으로 타카오에게 직접적으로 대답을 해준 건 처음일지도 몰랐음. 물론 타카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서, 미도리마가 직접 대답을 해준 게 처음일지도 몰랐음. 짧은 한 마디의 대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도리마는 살짝 부끄러워지는 것 같았음. 그가 자신을 기다렸던 것처럼, 자신도 그를 기다렸고, 그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걸 직접적으로 알린 것 같아서. 왠지 마음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음. 타카오는 처음에는 움직이는 돌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음. 그러다가 미도리마가 만든 한 마디의 답을 보고는 다시금 눈물을 뚝뚝 흘렸음."아 진짜... 나 원래 이렇게 눈물 많은 애 아닌데. 다 너 때문이야." 미도리마의 탓으로 돌리는 타카오의 말은 불경한 것일지도 몰랐음. 하지만 미도리마는 그 말을 불경하다고 생각하기는 커녕, 오히려 미안하다고 이야기 하며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고만 생각했음. 타카오는 눈물을 소매로 슥슥 닦고는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음.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음. "내일 올게. 네가 와도 된다고 했으니까... 꼭 올 거야. 내일 만나. 나 기다리고 있어야 해?" 타카오는 장난스럽게 한 마디를 덧붙인 다음, 이제 후련해졌다는 듯이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음. 그리고 미도리마가 있는 곳에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이고는 천천히 등을 돌렸음.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진 것처럼 보였음.
[따라가라.]
사당을 떠나는 타카오의 등을 바라보면서 미도리마는 한 마디를 덧붙였음. 미도리마의 언령에 따라, 바람 한 조각이 날아가 타카오의 등에 살며시 붙었음. 이 바람이 타카오의 행방을, 타카오의 주변 상황을 미도리마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전달할 거였음. 타카오가 미도리마에게 각인되었듯이, 미도리마도 타카오에게 각인된 이상 미도리마는 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음. 타카오의 인생을 하나도 빠짐 없이 지켜봐주겠노라 생각했음. 자신이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서.
타카오에게 붙여둔 바람은, 타카오의 곁에 머물면서 겪은 것들을 '기억'으로 남겼음. 그리고 그 기억을 고스란히 신에게 보여주었음. 서로 떨어져있다 하더라도, 미도리마는 타카오의 일상 등에 대해서 알 수 있었음. 가족들과 행복하게 웃는 모습,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노는 모습, 때때로 공부를 하면서 머리를 싸매는 모습... 미도리마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일상이었지만, 타카오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 기억은 매우 흥미로웠음. 그가 살고 있는 곳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있는 사당에서, 미도리마는 그 기억을 몇 번이고 돌려보면서 타카오가 자신을 다시 찾아오기만을 기다렸음. 그렇게 그를 만나고, 돌려보내고, 다시 만나고, 또 다시 돌려보내는 일과를 반복했음. 그러다가 여느 때보다 둥글고 큰 보름달이 뜬 날 밤, 미도리마는 사당 밖으로 걸어나왔음. 사당 주변에 친 결계를 빠져나와, 인간세상으로 향했음. 그리고 타카오가 살고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음. 이런 아름다운 밤에는 잠을 청하기도 힘들터인데, 타카오는 그것에 개의치도 않는다는 듯이 쿨쿨 잘도 자고 있었음. 미도리마는 마치 녹아들듯이 타카오의 집 안으로, 방 안으로 향했음. 그리고 곤히 잠들어 있는 그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머리맡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음. [타카오.] 미도리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다가 손을 들어올렸음. 그리고 그의 뺨 위에 가볍게 손을 얹었음. 처음으로 미도리마 쪽에서 인간과 접촉했음. 잠든 그의 심상과 미도리마의 심상이 천천히 연결되기 시작했음.
미도리마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땐 풍경이 바뀌어 있었음. 분명 미도리마가 있는 곳은 타카오가 잠들어 있는 침실일텐데,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아주 낯익은 곳이었음. 다름아닌 미도리마의 사당 근처의 풍경이었음. 미도리마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듯이 그 풍경을 시야에 담았음. 하지만 미도리마가 보고 있던 '진짜' 풍경과는 뭔가가 조금 달랐음. 좀 더 생기가 넘치는 것 같기도 하고 묘하게 왜곡된 부분도 있는 것 같았음. 미도리마가 보고 있는 것은, 타카오의 꿈 속. 타카오가 꿈속에서 보고 있는 심상이었음. 접촉한 것만으로 인간의 꿈속을, 속내를 접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되었음. 물론 직접 시도해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지만,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진짜 되니까 미묘한 그런 심정에 가까웠음.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미도리마는 무의식적으로 꿈 속에 있을 타카오를 찾았음. 하지만 사당 근처에서는 타카오를 볼 수 없었음. [타카오의 꿈이 아니었던가.] 타카오의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타카오가 없었음. 미도리마는 순간 당황했음. 그럼 자신은 누구의 꿈에 흘러들어온 것인가? 미도리마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사당으로 들어오는 입구 쪽에서 타카오로 보이는 인영이 걸어들어오기 시작했음.
[타카오.] 순간 다른 이의 꿈속에 들어온 건가 싶어서 답지 않게 당황했었는데, 타카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안심이 되었음. 그래서 미도리마는 다소 밝은 목소리로 타카오의 이름을 불렀음. 타카오가 점점 더, 미도리마에게 가까이 다가왔음. 그리고 타카오의 발걸음이 어느 위치에서 멈추었을 때, 미도리마는 또 다시 이상한 점을 발견했음. [타카오? ..... 조금 자란 것 같다는 것이다....?] 타카오의 눈높이가 이전보다 조금 더 높아져 있었음. 그리고 체격 또한,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타카오의 체격보다 단단해져 있는 것 같았음. 마치 나이를 먹어서 성숙해진 것처럼. 그것에 생각이 미친 순간 미도리마는 잠시 눈을 크게 떴음. 타카오는 살짝 시선을 들어올려 미도리마를 바라보았음. 타카오의 눈에도 살짝 놀라운 기가 어리는가 싶더니, 이내 타카오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음. "와, 이젠 얼굴까지 보이네. 어디까지 제멋대로인거야, 내 무의식은." 요 근래 사당에 찾아오는 꿈을 평소보다 많이 꾸는가 싶더니, 이제 얼굴까지 상상해서 꾸게 될 줄은 몰랐다며 타카오는 폭소를 터뜨렸음. "그래도 잘생겼네. 분위기도... 숲이랑 닮았어."
[....] 지금 타카오의 눈에 비추이는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미도리마는 알 수 없었음. 하지만 서로의 심상이 연결되었으니, 그에게 자신의 본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을 했음. 그리고 자신의 본 모습이 그에게 보이고, 그가 그 모습을 보고 잘생겼다고 해준 거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음.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본 모습에 호감을 느낀 걸테니까. 미도리마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연심이 담뿍 담긴 잔잔한 눈으로 타카오를 바라보았음. 그리고 잠든 그에게 했던 것처럼, 손을 살짝 들어 올려 타카오의 뺨 위에 가볍게 얹었음. 꿈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타카오의 체온이 손바닥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 같았음. 느닷없는 자신의 행동에 조금 놀랐는지 긴장감이 어린 떨림도, 그러나 이내 마음이 놓였는지 부드럽게 가라앉은 움직임도 모두 미도리마에게 전해졌음. 타카오는 잠시 놀랐지만 이내 눈을 살며시 내리감으면서 미도리마의 손길을 받아들였음. "역시 꿈속에서는 뭐든지 할 수 있다더니... 내가 바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닿을 수 있다니... 행복해. 응, 진짜 행복하다. 요새 꾼 꿈들 중에서 최고의 꿈이야."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타카오는 고개를 움직여 미도리마의 손바닥에 볼을 부비는 것 같은 행동을 취했음. 그리고 장난기 어린, 그러나 어딘가 수줍음도 묻어나는 것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음. 그 미소를 지켜보고 있자니 미도리마의 가슴 한 구석도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었음. 이것이 연인을 바라보는 기분인가. 이것이 연인들 사이의 교감인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된 미도리마는, 다시 한 번 더 타카오의 뺨을 만지작 거리다가 손을 거두어 들였음. 그리고 몸을 살짝 숙여, 드러나 있는 타카오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음. 다소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그 행동은 미도리마에게 설렘을 안겨주었음. 그리고 타카오는 미도리마의 행동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음. "진짜 최고잖아. 나 이마에 키스 받아본 적 없는데! 아니, 부모님이 해주셨을 수도 있지만 내가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사람에겐 받아본 적 없다구? 내 무의식 일 제대로 해서 다행이다 진짜." 그러면서 계속 웃던 타카오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제 손바닥을 주먹으로 통 하고 한 번 쳤음. "그러고 보니 이거 꿈이잖아? 내 멋대로 해도 되는 거 아냐? 그럼 이마의 키스만으로 만족할 순 없지!" 그렇게 이야기 한 타카오는, 양 손을 미도리마에게로 뻗었음. 그리고 약간 높은 위치에 있는 미도리마의 양 어깨에 손을 턱 하고 얹었음. "잘 받아가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타카오는 미도리마의 몸을 자신의 쪽으로 살짝 끌어 당겼음. 그리고 미도리마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음. 이어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이 미도리마의 입술 위에도 본인의 입술을 살며시 겹쳤다 떼어냈음.
미도리마는 얼떨결에 뺨에도 입맞춤을 당하고 입술에도 입맞춤을 당했음. 지금까지 이래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음. 타카오는 그 모습을 보더니 크게 웃음을 터뜨렸음. "반응까지 최고야! 하기사 내가 보고 싶은 모습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이거 진짜 대박인데. 귀엽잖아!" 키도 나보다 큰데, 얼굴도 진짜 잘생겼는데, 분위기도 정말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풀풀 풍기는데도 마치 인간 같다면서, 타카오는 연신 폭소를 하다가 눈물을 흘릴 정도가 되었음. "하...너무 웃었더니 눈물이 다 나네. 배도 아픈 것 같아." 여전히 키득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타카오가 이야기 했음. 미도리마는 딱딱하게 굳어 있다가 시간이 조금 흐르자 정신을 차렸음. 그리곤 타카오를 가볍게 흘기면서, 웃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보였음. 그 얼굴을 올려다 보던 타카오는 다시금 웃음을 터뜨리다가, 웃음이 잦아들 즈음 미도리마의 품에 폭하고 안겼음. 그리고 싱그러운 풀내음이 나는 미도리마의 기모노 위에 얼굴을 살짝 묻었음.
"있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신 님의 신부라던가, 요괴의 신부라던가 하는 이야기. 기본적으론 제물로 바쳐지는 이야기를 곱게 포장한 거라고 하지만... 왠지 너를 알게 된 이후로는 그런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싶었어. 적어도 내게는 사랑이 존재하는 거니까 말이야. 물론 이런 말 하면 다른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 게 분명하니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지만. 지금은 꿈 속이니까 괜찮겠지? .... 네가 요괴든 신이든 좋으니까, 나를 신부로 맞아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 성별은 제쳐두고. 아마 네 이상으로 내가 누군가를 좋아할 것 같지도 않고, 이미 네게 홀려버려서 다른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이렇게 본 적도 없는 네 모습을 상상해서 꿈에 등장하게 할 정도로 말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당으로 찾아가는 것 정도 뿐이니까, 날 맞이하러 오는 건 네가 해줬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
"어때? 날 맞이하러 오지 않겠어? 그만큼 널 사랑하고 있어. 사랑하고 있습니다."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을 속삭이던 타카오가 살짝 고개를 들어올렸음. 미도리마는 타카오의 기나 긴 말을 들으면서 다시금 욕심이 생기는 것 같았음. 그를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는데, 그가 먼저 자신에게 맞이하러 와달라고 이야기를 한 거임. 신의 신부가 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육체를 버리고 그 영혼만이 영생을 사는 것. 즉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한 번 겪어야 한다는 것이었음. 마음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그를 신부로 들이고 싶었지만, 신이 사리사욕을 위해 인간의 명을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음. 그래서 미도리마는 잠시 생각에 잠겼음. 그리고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음. 이것은 평범한 말이 아닌 언령. 인간의 마음에도 울리는 생각의 파동이었음.
[[네게 단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시기는 네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되었을 때...]]
[[네가 성인이 되었을 때, 다시 한 번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그대로 평범한 삶을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내 신부가 될 것인지.]]
[[타카오, 넌 아직 어리고 어리다.]]
[[그러니까 좀 더 생각을 해보도록 해. 날 찾아오지 마라.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나는 사당의 주인, 이 지역을 다스리는 신 '미도리마']]
지금의 말을 '계약'으로 삼아 타카오가 성인이 되었을 때, 선택에 대한 대답을 들으러 가겠노라고, 미도리마는 스스로의 본명을 밝히면서 이야기 했음. 그리고 계약을 확실히 묶기 위해서, 이번엔 미도리마 쪽에서 고개를 숙여 타카오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음. 미도리마의 힘이 계약의 인이 되어 타카오를 옭아맸음. 계약이 끝나자 꿈의 세계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음. 미도리마는 사당에서, 타카오는 인세에서, 서로 만나지 않고 지내게 되는 나날이 시작되었음. 하루가 멀다하고 만나던 것이 마치 한 여름 밤의 꿈이었던 것처럼.
어느덧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잎사귀가 지고, 나무들이 헐벗기 시작했다.
청량하게만 느껴지던 공기는 또한 어느새 폐부를 얼릴 것처럼 차가워져만 갔다.
더 이상 푸르지 않은, 은회색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면서 숨을 잠시 내쉬었다.
입술 사이로 희뿌연 김이 새어 나가더니, 곧 공기중으로 스러졌다.
뒤를 돌아보았다.
다가오는 겨울에도 시들지 않은, 푸르른 내음을 지닌 자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미도리마."
자신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그 손을 잡아주었다.
겨울에 잠식되어가는 세상이 푸른 녹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신의 이름을 따라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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