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이렇게 어그러지게 된 원인은 단순하다면 단순했다. 그의 귀에 흘러들어간 한 마디의 말 때문이었다.


[마유즈미 공이 아카시 님을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여인이 자신의 정인을 보는 시선 같군요.]


자신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만지며 그 말을 꺼냈던 여관은, 별 생각 없이 이야기를 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 뒤, 손을 거두어들이고 쥘부채를 꺼내들어 본인의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으니까. 그리고 본인의 입이 주책이었다며,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자신 혼자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후궁에 인접한 곳이었기 때문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고는 하나, 이곳 또한 아카시 가문과 연관되어 있는 이들이 오고가는 장소였다. 황제의 뒤에서 천하를 호령하는 아카시 가문이니, 황궁 깊은 곳까지 아카시 가문의 눈과 귀가 심어져 있는 것은 당연했다. 여관으로서는 자신과 그녀, 단 둘이 주고받은 농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 말은 가문의 눈과 귀를 통해 전달되어 최종적으론 아카시에게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실은 자신도 아카시가 직접 자신을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리 심각하게 여기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농은 농일 뿐. 그리고 여관이 한 말은 아카시를 모욕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여인에 빗댄 것뿐이니 그의 심기에 거슬릴 것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멋대로, 자신의 잣대로 그의 생각을 추측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추측이 빗나갔다는 것은, 그가 살벌한 기운을 내뿜으며 자신의 방문을 열어 젖혔을 때 깨달았다. 옅은 미소를 짓고 있던 평소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차가운 얼음 같은 표정만이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예상과는 다른 그의 반응에, 최대한 그를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하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자신에게 맡기고 간 서안을 대강 훑어보고 있던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찾아온 그를 맞이하기 위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카ㅅ....읏...!]


자신이 그의 이름을 입에 담기도 전에, 그가 자신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얼마나 힘을 주어 잡았는지, 잡힌 머리채가 당겨질 때마다 두피에서 투둑 투둑 하며 머리카락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따끔한 통증도 찾아왔다. 통증 때문에 반사적으로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만 두라고,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채,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고개를 더욱 숙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꿇어.”

[읏...]

“꿇으라고 했어.”


그 말은 명령이었다. 그의 명령에 자신의 몸은 자연스럽게 복종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자세를 숙여 그의 발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행여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의 심기를 더욱 거슬리게 할까봐, 머리채를 잡힌 그대로 눈을 아래로 내리 뜨고 있었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다행이었을 것을. 아카시는 자신의 이런 순종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잡은 머리채를 끌어 올려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올려다보는 자신의 시선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의 붉은 홍채에서는 분노가 감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다른 한 쪽, 보다 색소가 옅은 눈에는 살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단지 농담 한 마디였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분노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것도 놀림의 대상이 된 것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었는데.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머리채를 쥔 손에 다시금 힘이 들어가자 생각이고 나발이고, 낮은 신음을 토해내게 되었다.


[읏...]

“재미있는 소리가 들리더군. 그것에 대해 변명할 생각은 없는 건가, 치히로?”

[변명이고 뭐고 그건 단지...]


농담이었을 뿐이었지 않냐고 그에게 되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머리채를 잡고 위로 끌어올리자 미처 말을 마무리 할 수가 없었다. 어찌나 세게 끌어당기고 있던지, 무릎을 꿇고 있던 자신의 몸이 살짝 일으켜 세워질 정도였다.


[아...팟.....]

“아프다고? 당연하지. 이것은 벌이니까.”


그의 목소리에 조소기가 묻어났다. 그리고 머리채를 잡고 있는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이내 방바닥에 내던지듯이 손을 놓아주었다. 그 바람에 쓰러지듯이 풀썩 그 자리에 엎어졌다.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평소엔 온후하다가도 이따금 사람 같지 않을 정도로 냉정한 모습을 보이는 그였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상황을 직시한 적절한 사리판단 내에서 움직였다. 그 방법이 잔혹할지언정.


그러나 이번에는 그 경우에 해당하는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그의 변화에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이유를 묻는 자신의 목소리에, 방 한 쪽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던 그가 자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찾은 물건을 손에 쥔 채, 이쪽으로 걸어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싸늘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주제를 모르고 경거망동하는 식신에게, 스스로의 위치를 깨달으라고 내리는 벌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주제넘게 행동했던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것은 옳지 못한 것이라고 그에게 항변하려고 했다. 그가 다시금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들어 올리지만 않았더라면 그 말은 똑똑히 입 밖으로 흘러나갔을 터였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다른 한 쪽 손에 들고 있는 것을 휘둘렀다. 방 안에 켜놓은 촛불에 번뜩이는 것을 보아하니 날붙이인 듯 했다. 그리고 쥐고 있는 모양새를 언뜻 확인하니, 그가 쥐고 있는 것이 단도가 아니라 가위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은 순간 머리 쪽이 허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가 손을 놓아준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주변에 한 올 한 올 떨어지기 시작하는 은빛 실과도 같은 것에, 천천히 어떻게 된 상황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은사가 아니었다. 지금 제 주변에 흐트러지고 있는 것은, 거의 발치까지 길게 기르고 있던 자신의 머리카락이었다. 그가 손을 놓아주었기 때문에 머리가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라, 그가 가위로 머리채를 잘라내었기 때문에 자유로워진 것이었다.


어째서, 라고 묻는 것 같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손에 쥐고 있던 머리카락 뭉치와 가위를 방구석으로 내던졌다.


“이걸로 처벌이 끝난 줄 알았다면 오산이야.”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밀어 젖혀 바닥에 눕히고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고정시키며 서서히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는 언제나 위압감이 넘쳤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위압감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느끼고 있었다. 말로는 잘 표현할 수 없었지만, 굳이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하면 ‘위기감’에 가까웠다.


그가 자신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말을 이해할 겨를이 없었다. 겹겹이 입고 있는 옷 사이로 그의 손이 밀고 들어오더니, 자신의 맨 살갗을 훑어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눈 깜빡할 새에 그 옷가지를 모조리 벗겨내고는 그 또한 한 겹 한 겹 본인의 옷을 벗어 내렸다.


값 비싼 비단 옷들이 한데 뒤엉켜 나뒹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그 옷이 구겨지든 더러워지든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자신만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손을 움직였다. 그 손길에서,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나려고 바르작거렸지만 이미 제 몸의 통제권은 그에게로 넘어가 있는 상태였다. 자신은 그에게 속박되어 있었다.


간간히 그에게서 감탄 어린 말이 흘러나왔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경황이 없어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어느 샌가 자신의 입술 새에서 뜨거운 숨과 함께, 앓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남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은밀한 부위에, 그가 무언가를 밀어 넣기 시작할 땐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릿한 통증이, 느껴져서는 안 되는 부위에서부터 느껴지고 있었다.


이걸로 끝이겠거니. 조만간 그가 떨어지겠거니, 하고 통증을 견뎌냈다. 그리고 그가 삽입했던 무언가를 빼내었을 땐 약간이나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허나 그런 자신을 내려다보며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세를 조금 바꾸더니 이내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아까의 통증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격한 고통이 온몸으로 퍼져갔다.


그 뒤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뒤섞여가는 거친 숨소리와, 어디서 나는 건지 모르는 질척거리는 소리뿐이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전해지던 격통과 함께 아릿한 통증도 몸에 새겨졌다. 그 통증이 새겨진 몸에는 붉은 꽃잎 같은 자국들이 남았다. 격통이 느껴지던 곳에는 액체로 질펀하게 젖어 들어간 것 같은 기분 나쁜 감각이 남아 있었다.


[...]


누워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둔부에서부터 척추를 내달리듯 올라가는 고통에, 절로 이를 악물게 되었다. 간신히 그 통증에 익숙해졌을 즈음에야, 이 방 안에 자신을 제외한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일어났나보군.”

[...]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했다.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눈동자를 보게 되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어제 그의 눈동자가 분노와 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면, 오늘은 또 달랐다. 마치 길거리의 돌멩이를 보는 것처럼, 무가치한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아무런 감정도 묻어나지 않는 눈이었다. 불안감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효용가치가 사라진 말은 버린다는 것이 내 원칙이지.”

[...아카시...]

“넌 더 이상 필요 없다.”

[...]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 그림자여.”


불안감은 적중했다. 그리고 ‘그림자’는 주인이었던 자에 의해 부여받았던 이름을 빼앗겼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닌 그림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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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심상이 연결되었을 때, 미도리마는 타카오의 꿈을 엿볼 수 있었음. 꿈은 온연히 타카오의 것으로, 미도리마는 그것에 관여할 수 없었음. 단지 지켜볼 뿐이었음. 타카오가 꾸고 있는 꿈이 파노라마처럼 천천히 흘러지나가기 시작했음. 타카오를 상냥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중년 남녀. 그리고 타카오에게 친근하게 매달리는 어린 여자아이. 또래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밝게 웃고 있는 타카오. 한 손으로 다루기에는 유독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공을 가지고도 신나게 뛰노는 타카오. 그것은 타카오의 일상이자, 타카오의 행복이었음. 그에게 붙여두었던 바람을 통해서 읽어낸 적이 있는 풍경들임에도 불구하고, 타카오의 꿈을 통해서 보게 된 것은 미도리마에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음. 타카오의 꿈에 미도리마 자신이 관여할 수 없는 것처럼, 타카오의 일상과 행복에 미도리마가 억지로 개입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자신이 그를 원하고 있다고 해도, 그를 강제적으로 제 곁에 묶어둘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음.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할 자유의지가 있었음. 그가 원하지 않는 한, 자신의 욕망을 그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음.


타카오는, 타카오 스스로의 생각과 의지로 본인의 삶을 살아가야만 했음. 자신이 그것에 개입해서는 안 됐음. 미도리마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음. 타카오의 일상 풍경이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갔음. 그리고 낯익은 풍경이 주변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음. 그것은 자신의 사당이었음. 그리고 그곳에서 타카오는 사당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열심히 떠들기 시작했음.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타카오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너의 모든 것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너의 일부로서는 남아 있는 거로구나.] 자신과의 만남이, 그에게 있어서 일상의 일부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음. 조금이나마 그가 가지고 있는 행복의 편린으로나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었음. 그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미도리마의 선택뿐이었음. 사당 앞에서 재잘재잘 떠들고 있는 타카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가, 미도리마는 살짝 눈을 내리 감았음. 그리고 타카오의 꿈속에서 천천히 떨어져나오기 시작했음.


그 날의 일은 마치 없었던 일처럼, 미도리마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행동했음. 자신의 힘이 닿는 토지를 천천히 거닐며 확인하고, 이따금 사당으로 찾아오는 타카오를 맞이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음. 그리고 다시 그날 밤처럼 둥근 보름달이 뜬 날이 돌아왔을 때, 미도리마는 사당 옆에 있는 바위 위에 걸터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음. 유독 달빛이 시렸음.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달만 응시하고 있다가, 미도리마는 자리에서 일어났음. 그리고 늘 거닐던 방향과는 달리,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음. 걷고 걷고 또 걷다보니 어느새 미도리마 본인의 토지에서 벗어나 있었음. 그것을 깨달은 것은, 낯선 존재의 접근에 불안한 듯 흔들리는 초목때문이었음. 그러나 미도리마는 그에 개의치 않고 낯선 토지에 발을 디디며 점점 더 그 토지의 중심부로 향하기 시작했음. 토지의 중심부엔, 붉은 토리이가 번듯하게 세워진 신사가 자리하고 있었음. 미도리마는 신사로 올라가는 계단에 첫 발을 내딛었음. 신인 미도리마의 몸에도 신사의 결계가 발동하는지, 미약하게나마 짓누르는 것 같은 힘이 느껴졌음. 하지만 살짝 신경에 거슬리는 정도일 뿐이었기에, 자신의 방문을 거부하는 결계를 헤집으며 계단을 올라 신사 안으로 들어갔음. 

[여전하군, 아카시.]

미도리마는, 신도 위에 서 있는 한 존재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음. 그리고 그 존재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미도리마에게로 다가왔음.

[낯선 이의 방문을 주시하는 것은 주인의 의무이자 역할. 게다가 방문한 이가 다른 땅의 주인이라면 더더욱.]
[어차피 너라면 내가 이곳에 발을 딛은 순간 나인 걸 알고 있었을텐데.]
[그렇기에 더욱 주시했다. 내가 알고 있는 너라면 사전 연락을 취하지 않은 채 이곳에 올 리가 없으니까.]

미도리마, 하고 그의 입술이 그의 이름을 언급한 후 부드럽게 다물렸음. 미도리마는 아카시를 바라보다가, 그 말에 수긍하는 것처럼 가볍게 숨을 내쉬곤 눈을 내리 감았음.

[그래서 미도리마, 너답지 않게 감정적으로 움직일 만큼 긴급한 용무라도 있는 건가?] 


아카시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가려는 태도를 취하자, 미도리마의 어깨가 살짝 움찔거렸음. 그것을 본 아카시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미간을 살짝 좁혔지만, 일단 미도리마가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겠다는 듯이 입을 다물고 있었음. 일말의 침묵이 두 존재 위에 내려앉았음. 미도리마는 다시금 숨을 짧게 내쉬고는, 눈을 떠 아카시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음.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이 되는 법을 알고 있나?]
[물론.]
[그럼 신이, 신에 가까운 존재가 인간이 되는 법도 알고 있나?]
[그래.]

아카시의 대답에, 미도리마는 어딘가 기대감에 찬 것 같은 눈으로 아카시를 바라보았음. 아카시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음.

[방법은 제법 간단하지. 현재의 삶에서 쌓아올린 것을 자연에, 세상에 돌려주고 윤회의 길에 오르면 돼.]
[...윤회.]
[신에 가까운 존재라면 본인이 가지고 있는 힘을 자연에 환원한 뒤 윤회를 선택하면 된다.]
[그렇군.]

그렇군, 하고 대답한 미도리마의 목소리에 결의가 묻어나는 것 같았음. 하지만 아카시가 이어 내뱉은 말은 냉정하기 짝이 없었음.

[하지만 포기해, 미도리마.]
[?]
[넌 안 돼.]


넌 안 된다며 딱 잘라 이야기를 하는 아카시의 목소리에 미도리마는 눈을 크게 뜨고 아카시를 응시했음. 그러나 아카시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음. 자신이 그렇게 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고 변명을 할 수도, 자신이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도 물을 수가 없었음. 그저 흔들리는 눈으로 아카시를 바라보면서, 아카시가 이어 말하기를 기다릴 수밖엔 없었음. 아카시는 미도리마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나지막이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음.

[수지가 맞지 않아.]
[...]
[인간을 비롯해 다른 영혼이 신격을 얻는다는 매우 힘든 일이지. 하지만 그것을 버리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워. 왜인지 알아?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쌓아온 것이 미미한 것이기 때문이야.]
[...]
[그러나 우리는, 다른 존재들에게 '신'이라 불리는 우리는 달라. 이 땅에 존재했을 때부터 그 격을 타고났지.]
[...]
[이제 이해했을까. '우리'는 그들과 격이 달라.]
[하지만...]

미도리마는 그래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지 않냐고 이야기를 하려고 했음. 하지만 그 말이 미처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아카시가 손을 들어 그 말을 끊었음. 그리고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것 같으면서도, 상대를 질책하기도 하는 것 같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음.

[물론 신이라 불리는 존재에게도 가능한 일이긴 해.]

신에게도 급이라는 것이 존재하니까, 하고 아카시의 입술 사이에서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단호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음.

[하지만 미도리마, 너는 네가 존재하기 시작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미도리마는 아카시가 하고 싶은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음. 미도리마는 질끈 눈을 감았음.


[기억할 리가 없겠지.]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다 안다는 듯이 자문자답을 했음. 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미도리마를 향해, 다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음. 

[우리는 갓 태어난 신들과는 달라. 스스로의 기억이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오랜 세월을, 이 토지와 함께 살아왔지. 애초부터 다른 것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다. 그런데 그 존재가 헤아릴 수도 없는 시간을 보내왔다면?]
[...]
[우리 자체가 자연의 섭리라는 천칭을 유지하는 것들 중 일부가 되어버린 거야. 극단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가 그 균형을 맞추고 있다고 해도 좋겠지. ]
[...]
[우리가 사라져 버리면, 윤회의 길에 올라버리면, 모든 것이 어그러져 버릴지도 몰라. 예를 들면, 너와 관련된 인간의 운명이 뒤틀려버린다거나.]

그 말에 미도리마는 몸을 흠칫, 한 번 떨었음. 아카시는 다시금 낮은 한숨을 내쉬었음.

[그런 식으로, 네가 윤회의 길에 오르기 위해 버려 버린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세계는 '조정'에 들어가겠지. 수지타산에 맞게. 어느 것은 빼앗아가고, 어느 것은 보충하기도 하면서.]
[...]
[그래도 넌 그 길을 택할 셈인가?]
[....나는....]


아카시와의 대화를 마친 미도리마는 자신의 토지로 돌아왔음. 그리고 사당 옆 바위에 걸터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음. 분명히 이 자리를 떠났을 때에는 크고, 눈이 시릴 정도로 빛나는 보름달이 떠 있었는데, 어느새 달은 하늘 저편으로 져버리고 새로운 해가 동쪽에서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음. 하늘을 붉게 물들여가면서 떠오르는 태양은, 이전에 보았던 것보다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음. 마치 그 강렬한 빛에 자신의 존재가 스러져버릴 것만 같을 정도로. 그렇게 한참동안을, 미도리마는 하늘을,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음.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러갔음. 미도리마는 바위에 앉은 자세 그대로, 타카오가 자신을 찾아오기만을 기다렸음. 오늘 당장 찾아오지 않아도 좋았음. 언제라도 좋으니 단 한 번, 자신을 만나러 찾아오기만 하면 되었음.

[그거면 돼.]

미도리마는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하듯 중얼거렸음. 그리고 그가 몇 번이고 거닐었던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음. 그렇게 기다림이 계속되고, 밤에 가까운 시간이 되었을 때, 그 길 위에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음. 그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사당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음. 


"오늘은 늦어버렸네... 설마 없는 건 아니겠지..."

타카오는 걱정이 어린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음. 하지만 이내 미도리마가 이 곳에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인지 환하게 미소를 지었음. 그리고 밝은 목소리로 미도리마에게 인사를 건넨 뒤, 다시금 조잘조잘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음. 그러나 그를 만나게 된 미도리마는, 그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었음. 아니,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그 이야기를 들어서는 안 되었음. 미도리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타카오에게로 다가갔음. 그리고 타카오를 자신의 품 안에 가두듯이 꼭 끌어안았음. 

"어라...? 향기가..." 여느 때보다 가까이서 느껴지네, 하고 타카오가 멍하니 중얼거렸음. 타카오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 닿았지만, 미도리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 그저 그를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음.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테지만, 한동안을 계속 그렇게 하고 있었음. 멍해져 있던 타카오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것 같자, 미도리마도 그의 몸 위로 둘렀던 팔을 조심스럽게 떼어내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음. 타카오의 얼굴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했음. 미도리마는 그 얼굴을 시야에 담고 있다가, 천천히 그를 향해 손을 뻗었음. 그리고 손바닥으로 그의 두 눈을 가렸음.

[미안하다, 타카오.]

미도리마의 입술에서 사과의 말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타카오의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더니 스르륵 그 자리에 주저앉기 시작했음. 자세가 완전히 무너져버리기 전에, 미도리마는 쓰러지는 그의 몸을 받치고는 조심스럽게 땅 위에 눕혀주었음.


바닥에 눕혀진 타카오는 고른 숨을 내쉬면서 잠들어 있었음. 미도리마가 힘을 사용한 탓이었음. 잠든 타카오 곁에 앉아서, 애틋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미도리마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서 타카오의 뺨을 살며시 쓸어내렸음.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나마 그를 만지는 시늉을 하는 것 자체로도 미도리마는 행복하다고 생각했음. 무심코 손을 움직여 타카오의 입술을 손끝으로 건드리다가, 이내 손을 거두어 들였음.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음.

[온 거냐, 아카시.]

미도리마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슬쩍 고개를 돌려 어느 한 장소를 응시했음. 분명 아무 것도 없었던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샌가 아카시가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음.

[재고할 생각은 없는 건가, 미도리마.]

미도리마는 고개를 내저었음.

[이미 결정한 일이라는 것이다. 전에 네게 답했듯이.]

아카시는 미도리마를 가만히 바라보았음. 그리고 미도리마가 대답을 했던 순간을 떠올렸음. 수지가 맞지 않아 어그러질 수도 있는데도 윤회를, 인간으로서의 환생을 선택하겠냐는 아카시의 물음에 미도리마는 이렇게 대답했음. '나는 그래도 인간이 되겠다.' '떠나보내고 나서 기나긴 시간을 홀로 슬퍼하는 것보다, 같이, 짧은 순간을 공유하며 그와 살아가고 싶다.' 라고. 

[이후의 일은 제 아무리 나라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그래도 선택하는 건가.]
[그래.]
[어그러진 후의 저 인간의 운명과 네 운명이 교차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래도 그 쪽으로 가겠다는 건가.]
[물론.]

미도리마의 대답에는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음. 그걸 아카시도 잘 알고 있었음. 아카시는 살짝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음.

['저 아이'의 기억을 지운 것에서 네 각오를 읽어낼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남겨놓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너를 위해서나, 저 아이를 위해서나.]
[아이가 아니라 타카오다.]

아카시의 말을 일부 정정해준 미도리마는, 잠들어 있는 타카오 쪽으로 고개를 돌렸음. 그리고 여느 때보다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음.

[내가 사라진 이후의 일은 나도, 그리고 심지어 너도 모르지. 그래서 지운 것이다. 나와 관련된 기억이 타카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니까. 내 존재가 사라진 걸 알고 슬퍼해주면 분명 그것만으로도 나는 기쁘겠지. 하지만 그건 내 이기심일뿐이다. 그에게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슬픔이라는 감정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 그러니 이게 타당한 것이다.]
[그렇군.]

아카시가 짤막하게 대답했음. 미도리마는 타카오를 좀 더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아카시 쪽을 돌아보았음.

[뒤를 부탁한다, 아카시.]
[별로 들어주고 싶은 부탁은 아니군.]
[훗.]

미도리마는 아카시에게로 손을 뻗었음. 아카시도 미도리마에게 손을 뻗었음. 두 손이 닿지는 않았지만, 미도리마의 손끝에서부터 은은한 빛이 나는가 싶더니 형태가 무너져가기 시작했음. 손끝에서부터 사라져가는 와중에도, 미도리마는 타카오 쪽을 응시했음. 그의 눈에 타카오를 담을 수 있는 한계의 한계까지. 더 이상 타카오를 볼 수 없게 될 즈음, 미도리마의 의지가 아카시에게 속삭였음.

/고맙다, 아카시./
[잘 가게, 친우여.]

한 마디의 인사말을 교환한 뒤, 미도리마는 한 줌의 빛이 되어 사라져버렸음. 그리고 그 빛마저 사라져버렸을 때,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음. 아카시는 잠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가, 타카오에게로 다가갔음. 그리고 타카오의 머리 위에 살짝 손을 얹은 뒤 언령 비슷한 것을 중얼거렸음. 그런 다음 손을 거두어들이고, 타카오를 내려다보면서 말을 걸었음. 

[이제 깨어날 시간이다, 미도리마의 정인이여.]
[현재의 기억도 잃고, 과거의 추억마저 비틀려 버리겠지만 그것 또한 타카오라는 인간을 사랑한 신의 선택이니.]
[바라건대, '두 사람'의 연이 다시 닿을 수 있길.]

그 말을 남기고 아카시는 홀연히 사라져버렸음. 그리고 미도리마가 사라진 뒤 아카시의 힘으로 잠시나마 유지되고 있던 미도리마의 사당이 마치 지우개로 지운 것마냥 세상에서 지워졌음. 남은 것은 바닥에 누워있는 타카오 뿐이었음. 

얼마 지나지 않아 타카오는 눈을 떴고, 낯선 곳에서 잠들어 있던 자기 자신에게 잠시 놀란 뒤 발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돌아갔음.


*


과거가 바뀌고, 현재가 바뀌었음. 
그러나 그들은 다시 만났음. 
토지신과 인간 아이로서의 만남이 아니라. 
비상한 재능을 지녔지만 그래도 평범한 아이와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의 재능을 가진 평범한 아이로서.
그렇게 그들은 다시 만났음.
유한한 삶 속에서, 서로만을 바라보고 서로에게만 온전한 애정을 바치는 그런 관계로.
그리고 그들이 맞이하게 될 결말은 신이 바랐던 것처럼 행복이 가득한 것일터.
~원작의 녹고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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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립] Like a Butterfly 연성 2015. 4. 25. 17:23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중간부터 꼬여버렸던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애초에 첫 단추를 잘못 끼워 넣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이 관계의 결말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


시야 한 가득 펼쳐진 하늘은 여느 때보다도 유독 푸르렀다. 그 푸른 빛깔에 눈이 시리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심코 하늘을 향해 한쪽 손을 뻗어보았다.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았지만, 손끝에 걸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닿을 것 같으면서도 닿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산들바람이 손끝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


그는 바람과도 같았다. 언제나 자유로워 보였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다. 때로는 땀을 식혀주는 부드러운 바람 같으면서도, 때로는 상대를 얼려버릴 것 같은 북풍과도 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는, 그런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단 의미였으므로.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기 때문에, 본인 기준에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냉정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조금씩이나마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그런 사람이 조금씩 자신을 의지해온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우쭐해질 정도로 기분 좋았다. 그것은 그의 안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점점 커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까. 자신이 그에게 점점 더 큰 영향력을 끼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오만이었다.


바람은 곁에 묶어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가두려고 해도 가둘 수 없는 존재였다. 또한 통제가 되지 않는 존재였다.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감정이 변질되어갈 즈음, 그 또한 변해가기 시작했다.


초기의 변화는 아주 미미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지어보이던, 예의 그 미소가 조금 늘어난 정도였다. 그것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보냈을 땐 이미 늦은 상태였다.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가면 너머로, 그는 까맣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본인도 어떻게 통제를 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인해서. 지울 수 없는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탓에 생겨버린 분노. 사랑의 편린이 변질되어버린 증오. 이 모든 것이 그를 잠식해나가고 있었다. 아니, 이미 그것이 그 자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는 더 이상 바람이 아니었다. 그에게 닿는 것을 모조리 끌어당겨 삼켜버리는, 독을 내뿜은 깊고 깊은 늪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찾아왔다. 그리고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고. 그가 의지하려고 하면 좋아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아닌 척 태연하게 있으려 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다고. 눈에 빤히 보이지만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해서 그냥 모르는 체 하고 있었다고.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있었다. 그는 원래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걸 잊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에 취해, 그가 기대어 오곤 한다는 우월감에 취해 스스로 눈을 가려버리고 있었다는 걸 그의 말을 통해서 깨달았다. 새삼 다시 깨달은 사실에 충격을 받고 있자니, 그가 입술을 슬쩍 비틀면서 웃었다. 그것은 예의 천진한 미소도 아니었고, 대외적으로 보이곤 했던 가식적인 미소도 아니었다. 상대의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비꼬고 있는 것이었다. 상대의 우둔함을 비웃고 있는 것이었다.


정곡을 찔린 채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니, 비웃고 있던 그가 건조한 어투로 말을 건넸다. 어차피 다 알고 있으니 한 번 선심 써주겠다고. 게다가 그도 기분을 풀 곳을 찾고 있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니냐면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자신이 입을 다물고 있자, 그는 그것이 승낙의 의미라고 생각을 했는지 손으로 자신의 턱을 가볍게 그러쥐듯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숙여 입을 맞추려고 했다. 그때 자신이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면, 입을 맞추고 끈적하게 혀를 얽었을지도 몰랐다.


[위로해달라는 거야?]


툭 내뱉은 자신의 말에, 다가오던 그의 입술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코앞에 있는 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져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위로? 지금 위로라고 했슴까?]


앙 다물린 그의 입술 사이로, 으르렁 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가 다시 말을 덧붙였다.


[위로 같은 거 바라지 않슴다. 이건, 내가, 당신에게 봉사를 하는 검다.]


몸소 말이죠, 라고 말을 마치는 순간 시야가 어두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다음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자신의 자취방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대강 잠근 뒤 내던져지듯이 침대 위에 눕혀졌다. 일사천리에 모든 것이 마무리 지어졌다. 옷이 벗겨지는 것도, 자신의 맨살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던 그의 손놀림도, 안쪽 깊숙한 곳을 파고드는 격통도.


그때의 기억은 여러 장의 사진을 보는 것처럼 띄엄띄엄,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의 밑에서 반은 울면서, 반은 헐떡거리면서 있던 것. 그렇게 원하던 거면서 왜 우는 거냐고 윽박을 지르는 그의 얼굴. 정신을 놓고 싶은데도 그렇게 되질 않아서, 미약한 목소리로 그에게 그만해달라고 애원한 것. 그리고 난생 처음 느껴보는 이질적인 감각을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정신을 놓았던 것.

눈을 떴을 땐 모든 게 끝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곁에 없었다.


몸에 남아있는 통증을 끌어안으면서 생각했다. 그래도 한 번이라도 그의 사람이 될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인연이 끝날지언정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는 안고 갈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그렇게 상처 입은 자신을 스스로 위안했다.


“그때부터가 문제였던 건가.”


단 한 번이라고 생각했기에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를 추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한동안 자신을 찾아오지 않던 그는, 어느 순간 불쑥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첫날 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눕히고, 이기적인 움직임으로 자신을 안은 뒤 훌쩍 떠나버렸다. 그런 밤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 되었다. 이런 관계는 그만두자고 이야기 할 수 있었던 순간도 많다면 많았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되풀이 되는 행위에 매번 상처를 입으면서도, 그 행위를 하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그를 소유할 수 있단 생각에 실낱같이 이어진 아슬아슬한 관계를 놓을 수가 없었다.


지독하기 짝이 없는 이기심이었다.


그 이기심이 자신을 좀먹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변해버린 그를 더욱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놓아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술을 마신 채로 자신을 찾아왔다. 자신을 찾아올 때면 술을 마시지 않아도 술에 취한 것처럼 거칠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인사불성에 가까웠다. 자신에게 뻗는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비틀비틀 안쪽으로 걸어 들어오는 그를, 안듯이 지탱해주고는 조심스럽게 부축해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대 위에 무너지듯이 몸을 뉘인 그는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윽고 억눌린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누군가의 이름을 읊조리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이름은 흐느낌에 가려져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리도 애달프게 부르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자신은 그에게,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존재였다. 신뢰는 받았을지언정,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을지언정, 자신은 그에게 있어서 사랑이 아니었다. 그가 사랑하는 존재가 될 수 없었다.


그 날만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바닥에 앉아 침대 위에 있는 그의 곁을 지키며 그가 잠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어느새 잠들었고, 다시 깨어났을 땐 이미 그는 떠난 뒤였다. 그리고 자신은 바닥이 아닌,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걸로 아주 조금 그와의 관계가 달라졌다. 아니,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래로 그와 반강제적으로 몸을 섞는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어느 정도 자신을 배려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연인에게 하듯 사랑스러운 키스를 나누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애무가 나날이 다정해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볼 일을 마친 후 바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곁에 좀 더 머물고 가는 날이 점차 많아지면서 그가 시나브로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그의 오래된 사랑을 지우지는 못하고 있더라도, 자신에게 조금씩 정을 주고 있다고 착각해버렸다.


이제는 반쯤 일상처럼 그와 몸을 섞은 뒤 살짝 선잠에 들었었다. 그러던 중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잠에서 깨어났었다. 침대 옆자리에는 그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딘가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 먹은 솜같이 무거운 몸을 간신히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찾았다. 베란다에서 그가 한 손엔 담배를, 다른 한 손엔 핸드폰을 든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키ㅅ...]


그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던 시도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묻히고 말았다.


[어디 있냐고요? 아뇨, 잠시 밖에... 애인 집이냐고요? 하하,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 거 아니에요. ...뭐, 그런 거죠.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사이. 속히 말하는 섹스 파트너라고 할까요. 관계 갖는 것 빼곤 딱히 바라는 것도 없어서 편해요. 임신도 안 하고.]


열어선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가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열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현실을 자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조리 다 착각이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깨닫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자신은 여러모로 편한 섹스 상대였다는 걸, 그의 입을 통해서 만큼은 절대로 확인받고 싶지 않았다.


세상이 무너질 것 같다는 기분이 바로 이런 느낌인걸까.


금방이라도 휘청거릴 것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를 다잡았다. 똑바로 서 있으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다. 그리고 통화 내용을 듣게 되었다는 걸 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워, 애초에 일어난 적이 없는 것처럼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침대 쪽으로 걸어왔다.


[아직도 잠까? 평소보다 더 오래 자는 것 같네.]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건네자, 그제야 다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아, 깼슴까? 실은 나, 이제 곧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

[그럼 다음에 또 올게요.]


다음을 기약하는 그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별 다른 말을 꺼내지 않고, 자신에게 바로 등을 보이며 현관을 빠져나갔으니까. 자동적으로 현관문이 닫히자, 그제야 입을 열고 뒤늦은 대답을 했다.


다음은 없어, 라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가 집으로 찾아와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집에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것이 몇 번 반복되니 그는 집으로 찾아오는 횟수를 줄였다. 대신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회사 근처로 가끔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발견하는 것보다, 자신이 먼저 그를 발견하곤 했기 때문에 다행히도 얼굴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회사 근처에서도 만날 수가 없자 차츰 그에게서 오는 문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 온 문자는 많이 바쁘냐는 내용이었다. 문자 확인은 했지만 답장은 보내지 않고 그대로 삭제해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의 내용은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답지 않게 걱정을 하는 것 같은 늬앙스로 바뀌었다. 이 또한 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런 문자를 보낸 건 또 처음이라, 기념할 겸 메시지 함에 보관해두었다. 다음으로 또 한 번 내용이 바뀌었다. 혹시 자기를 피하고 있는 거냐고. 이번엔 문자와 더불어 전화를 걸어오는 횟수도 늘어났다. 문자 확인은 주기적으로 할지언정 전화는 받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가 다시 문자를 보냈다. 보고 싶다고, 만나고 싶다고. 그래서 이번만큼은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의 위치를 짤막하게 적어서, 주변 풍경을 찍은 사진까지 첨부해서.


문자를 보낸 뒤, 자신은 줄곧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까마득하게만 보이는 지상을 내려다보면서.


끼익, 하고 철문이 열리는 소음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철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가 서 있었다. 늘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머리카락이 한껏 흐트러져있었다. 깨끗한 피부 위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마치 먼 거리를 달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작게 키득거렸다. 그가 서 있는 곳과 자신이 서 있는 곳은 거리가 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코앞에서 본 것 마냥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다 바로 웃음을 거두어들였다. 자신이 보았다고 생각한 그 모습 또한 착각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선배...?”

“오랜만이다, 키세.”


오랜만이라고 살갑게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이, 조심스럽게,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왜, 그런 곳에 서 있는 검까...?”

“이곳이 뭐가 어때서.”

“거긴...”


옥상 난간 바깥쪽이잖슴까, 하는 그의 말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래서 좋은 건데. 아슬아슬, 위태위태. 마치 외줄타기 하는 것처럼.”


게다가 하늘도 땅도 잘 보이는 곳인걸.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금 그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탁 트인 하늘, 그리고 그 아래 덩그러니 서 있는 그의 모습. 그것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꽤나 멋진 풍경이었기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웃고만 있는 자신의 작태에 그는 불안감을 느꼈는지, 다시 한 번 초조한 목소리로 자신을 불렀다.


“이쪽으로 와요. 거긴 위험함다.”

“그래?”

“네.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난 그쪽이 싫은데.”


자신에게 손을 뻗으며 천천히 걸어오던 그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들이곤, 다시 옥상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을 가만히 응시했다.


“키세, 난 말이지, 옥상을 좋아해. 정확히 말하자면 옥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

“여기까지만 올라와도 시계가 달라지거든. 땅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여. 게다가 하늘도 보다 가까운 곳에서 올려다볼 수 있어.”

“...”

“근데 꽤 옛날에 문득 깨달았다? 난간 안쪽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또한 지상에 얽매여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걸 말이야.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 좁은 곳에 갇힌 채로 드넓은 하늘을 동경하는 것과 같다는 걸. 원하고 원하는 것을 눈앞에 두고 있어도 가질 수 없는 것과 같아.”


같은 거다, 키세, 라고 낮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덧붙이며 그에게 한 번 시선을 던졌다. 그의 두 눈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선배, 난... 그...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슴다.”

“응, 모를 거다. 물론 몰라도 상관없는 일이지. 그러니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돼.”

“...”

“옥상에 있는 난간이라는 건 내게 있어서 일종의 벽이었어. 굴레이자 족쇄이기도 했지.”


그래서 벗어나고자 하는 거야.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그를 바라보면서, 이렇게까지 관계가 비틀리기 전에 짓곤 했던 순수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미안하다, 키세. 네 앞에서 이런 짓을 하는 건 내 이기심일지도 몰라. 아니, 내 이기심이야.”

“...선배?”

“너를 위해서라도 네 눈앞에서 조용히 사라져 주고 싶었어. 하지만 나를 위해서 내 존재가 네 기억 속에 남아있었으면 했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죠? 그렇죠?”

“내 충동을 억누르고 있던 마지막 굴레는 너였다, 키세. 비록 스스로 끊어내기로 마음먹었지만 말이야.”

“선배!!!”


땅을 등지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몸을 뉘였다. 난간에 반쯤 몸을 걸치고, 자신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비록 그 얼굴은 점점 멀어지고, 흐릿해졌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의 금발은 마치 태양빛과도 같아서 푸른 하늘과 유독 잘 어울렸으니까. 그 두 가지가 한데 어우러진 풍경을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간의 아픔을 모두 상쇄시킬 정도로 행복했다.


그러다 그의 얼굴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즈음에야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읊조리듯이 한 가지 소원을 빌었다.


[부디 다음에는 나비로 태어날 수 있길. 덧없는 생명일지언정 바람이 가는 대로 자유로이 따라 날갯짓을 할 수 있게. 그 날개가 거칠어진 바람에 찢어지기 쉬울지라도, 그래도 바람 하나만 바라보고 따라 날아다닐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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