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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퀘 : 마유즈미에게 집착하는 아카시
오늘로써 이게 몇 번째 밤이던가.
마유즈미 치히로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더할 나위 없이 고급스러운 느낌에, 깃털 위에 누워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푹신한 침대 위였음에도 불구하고, 허리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둔통은 가실 줄을 몰랐다.
입술 밖으로 새어나올 것 같은 신음을 간신히 속으로 삼켰다. 그렇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천천히 숨을 고르면서 통증을 잊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저릿저릿하게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통증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 아무리 표정 변화가 적은 마유즈미라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찾아드는 아픔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아프다.
한쪽 손으로 묵직한 통증이 느껴지는 허리를 가만히 문질렀다. 그렇게 하고 있다 보니, 가만히 통증을 참고 있었을 때보다는 상태가 조금 나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손으로 허리를 문지르고 조심스럽게 주무르는 것을 반복했다. 평상시처럼 움직이는 것은 무리일지 몰라도 거동하는 것 자체는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야 비로소 주변 풍경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유즈미 자신의 옆자리에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는 이의 얼굴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도 피부색이 밝은 편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온 달빛이 어슴푸레 비추어진 그의 피부는 유독 하얗게 보였다. 아니, 창백하고 파리하다는 것에 가까운 느낌일지도 몰랐다. 마치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처럼. 만져보면 얼음장처럼 차가울 것 같았고, 생명체의 보드라운 느낌보다는 이질적이고 무기질적인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무심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가만히 쓸어내려보았다. 하지만 보고 있었을 때와는 달리, 미미하지만 따스한 체온도 전해지고 사람 피부 특유의 결 좋은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마유즈미는 일순,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사람은, 가끔씩 인간 같지 않은 느낌을 주곤 했으니까. 지금 이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인간이 아니었던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계 같았으며 또한 광기에 미친 짐승 같기도 했다. 그리고 닫혀버린 천국의 문 앞에서 절망하는 천사 같기도 했다.
더 이상 천국에 오를 수 없는 천사는 지상으로 떨어져 악마가 되었다고 했던가.
그래, 그런 논리라면 이해가 갈지도.
마유즈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절망으로 타락해버린 천사일지도 몰랐다. 빛을 잃고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갈구하는 악마가 되어버린 천사일지도 모른다고, 마유즈미는 생각했다.
***
이렇게 강압적으로 섹스를 하게 된 건 아무래도 그 무렵인 것 같았다. 깨끗하기 짝이 없던 그의 몸 위에 누군가의 이름이 떠오르기 시작했던 그 때부터.
물론 그 전부터 자신과 그는 교제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밝힐 수 없는 비밀스러운 교제였지만, 그래도 애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제일 먼저 상대의 얼굴을 떠올리곤 했으니까.
그러나 애인 사이치고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서로를 향한 애정 어린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으며, 애인 사이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았을 사소한 스킨십조차 없었다. 그저 빛 가는 곳에 그림자가 따라가듯, 조용히, 당연한 것처럼 같이 있을 뿐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자신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느 순간 그의 몸 위에 누군가의 이름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그는 답지 않게 가끔씩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 초조함은 불안감으로 바뀔 때도 있었고, 이따금 무언의 어리광으로 바뀌기도 했다. 통상적인 의미의 불안감과 어리광과는 조금 다른 형태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이름을 붙이자면 그런 쪽에 가까웠다.
흐릿한 흔적에 가깝던 이름이 점점 짙어질수록, 그의 감정도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폭력성으로 나타났다. 다른 이에게는 화살을 돌리지 않는, 오로지 마유즈미 치히로, 자신에게만 드러내 보이는 폭력성으로.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의 상대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운 거였을까. 아니면 그 자신이 누군가에게 감정적으로 예속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의 높디높은 프라이드를 부숴버렸던 걸까. 물론 직접 물어본 적은 없으니 그것에 대한 답은 얻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때 그가 느꼈을 비참함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단지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것은, 그 이래로 그가 자신을 안기 시작했다는 점뿐이었다.
***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자신을 찾아왔었다. 평소와는 달리 약간 들뜬 것 같기도 했고, 얼굴도 약간 상기되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달리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이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이름이 선명해졌습니다.]
그 때 자신은 이렇게 대답을 했던 것 같다.
[그래? 내 몸엔 아무 이름도 없는데. 네 짝이 생겼으면 이제 헤어져야 하나?]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다. 현재는 서로를 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들, 머나 먼 그의 미래까지 책임일 운명의 상대가 자신일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에게 그 어떤 이득도 도움도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저 같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애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너무나도 쉽게 헤어짐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그 뒤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끔찍할 정도로 신체의 한 부분이 아팠던 것과,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는 점과,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곤 짐승 같은 신음소리뿐이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의 체액 교환에는 사랑 따윈 없었다. 그 이전의 관계들은 비록 다소 강압적일지언정 배려는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달랐다. 행위에는 사랑도, 배려도 없었다. 남는 것은 몸과 마음의 상처였고, 느껴지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절박함과 절망감이었다.
[... 미안해요. 미안해요, 치히로.]
신체적 폭력에 지쳐 정신을 놓아가는 와중에, 그가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에 미안한 걸까. 싫다고 했는데도 억지로 침대 위에 눕힌 게 미안했던 걸까. 그렇게 눕히고도 자신이 반항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자 억지로 삽입부터 한 것이 미안했던 걸까. 아니면 더 이상 눈물도, 신음도 나오지 못할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인 게 미안했던 걸까.
그가 한 말의 저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렇게 자신은 까무룩 잠들었다.
***
“하지만 지금은 알 것도 같아.”
마유즈미는 속삭이듯이 이야기를 하면서, 잠든 그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어느 날, 정사라고도 할 수 없는 행위를 끝낸 이후에 우연히 그의 쇄골 밑에 작게 새겨진 세 글자를 보게 되었다. 문자치고는 작아서 약간 큰 점이 연이어 세 개 붙어 있는 건가 싶었는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자체로 쓰인 한문 이름이었다.
“내 이름이었으니까, 그거.”
그의 몸에 새겨진 이름은 마유즈미 치히로의 이름 석 자였다. 그의 운명의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마유즈미 본인이었다. 하지만 마유즈미에게 있어서 아카시는 그런 상대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마유즈미의 몸에는 어느 누구의 이름도 새겨져 있지 않았기에.
운명의 상대라는 게 차라리 이 세상에 없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면 몸에 새겨진 이름 석 자에 일비일희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가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을 놓지 못하는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아니면, 자신의 몸에도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일방통행인 운명은 한 사람에게는 절망에 가까웠으며,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상처밖에 되지 않았다.
“미안해.”
그 이후로 잠든 이에게 사과를 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마유즈미 본인이 되었다. 그도 그럴게, 마유즈미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기에.
운명의 상대가 혹시나 자신을 떠나갈까 초조해 하면서 아카시는 마유즈미를 속박했다. 그리고 마유즈미의 몸에 혹시라도 아카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이 떠오르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마유즈미의 온 몸을 구석구석 살피고 탐했다. 그런 뒤 아무 이름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지어보이곤 했다.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마유즈미를 내려다보면서.
온연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마유즈미를 내려다보다가, 아카시는 이따금 마유즈미보다 먼저 잠들곤 했다. 마치 오늘 밤처럼.
마유즈미는 잠든 그를 내려다보면서, 그에게는 닿지 않을 희미한 목소리로 연신 사과의 말을 되풀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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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단지 알 수 있었던 것은,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카가미 자신이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진정시키고 있던 그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었다.
어디로 간 거지.
혹시 자신의 힘으로도 감정 제어가 안 된 탓에 그가 폭주해버린 것은 아닐까. 아니면 힘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본능적으로 이곳을 빠져나가다가 다른 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현듯 부정적인 상상이 카가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막아야 해.
자신의 불찰이었다.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을 숙지하고 있으면서도 마음을 놓아버렸다. 적어도 자신이 이곳에 온 이후로 발작적으로 일어나는 폭주는 없었다고 전해 들었으니까. 그리고 자신 또한 그의 폭주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으니 안심하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더욱 신경을 썼었어야 했는데. 그의 감정을 끌어안았어야 했는데. 달래주었어야 했는데. ‘내가.’
후회와도 같은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카가미는 무의식중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더 늦기 전에 그를 붙잡아야만 했다. 그의 손을 잡아주어야만 했다. 그 생각이 온 머릿속을 잠식해가자,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워 침대 아래로 두 발을 내딛었다.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툭, 하고 묵직한 소리를 내면서 발치에 떨어졌다. 그러나 카가미는 주변을 돌아볼 새도 없이, 나가는 문만을 응시하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채지 않았더라면 곧장 밖으로 나갔을 터였다.
“갑자기 일어나는 것 같더니,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려는 거야? 화장실?”
“...?”
퉁명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비꼬는 어조가 섞인 낮은 목소리가 카가미의 귓가에 닿았다. 누군가에게 붙잡힌 손목을 한 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나른하면서도 염세적인 분위기가 도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얼굴의 주인은, 다소 황당하다는 듯한 눈으로 카가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장 자체는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심코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해버렸다.
“아...오미네...?”
“그래.”
“진짜...?”
“진짜가 아님 뭔데? 나 같은 놈이 나 말고 또 있을 리가 없잖아.”
나 참, 잠에서 깨보니 덩치 산만한 놈이 곁에서 내 손을 잡고 있질 않나, 심지어 내 얼굴 가까이에 고개를 묻고 잠들어 있질 않나. 그는 어이없다는 어조로 불평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덩치 산만하고 심지어 잠들어 있었다는 말 외에도 여러 가지 불평을 쏟아내었지만, 그 불평은 카가미에게는 닿지 않았다. 아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는 것이 맞을지도 몰랐다.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아직 이곳에 있다는 점이었으니까. 어디론가 떠난 것도 아니고, 어디론가 끌려가버린 것도 아니었다. 그것만이 중요했다.
“다행이다, 다이키...”
카가미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과 함께 짤막한 말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그의 얼굴 표정이 서서히,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가지 표정을 지으며 물끄러미 응시하는 것 같더니, 이내 핫, 하고 숨도 웃음도 아닌 묘한 것을 한 번 뱉어내고는 입을 열었다.
“뭐야. 그 새끼들이 너한텐 내 이름도 알려주든? 다른 가이드 놈들에게는 보안이다 극비사항이다 뭐다 하면서 코드네임만 알려주더니.”
“코드네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그것도 모르냐고 되묻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코드네임 ‘아오미네.’ 뭐, 내 경우는 코드네임이자 성이지만. 풀 네임은 아오미네 다이키.”
“...”
“그래서, 그 새끼들이 내 이름까지 알려줄 정도로 유능하신 가이드님의 이름은 뭐지?”
내 이름을 알려줄 정도로 그 새끼들에게 신뢰받고 있으면 통성명쯤은 해야 되지 않겠어? 라고 그가 덧붙이며, 한쪽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얼굴을 잠시 동안 응시하고 있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 말을 꺼낸 순간, 그에게서 불쾌감이라는 감정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맞닿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감정이 더욱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뭐야, 그쪽은 내 이름까지 알아놓고 이쪽에겐 알려주기 싫으시다?”
이제 빈정거리는 어조를 숨길 생각도 없는 그의 목소리에, 카가미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게 아냐.”
“그럼 뭔데?”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잠시 주저했다. 그는 자신의 정보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올 때 자신의 발언을 통제하려는 생각은 없어 보이기도 했다. 이 점이 카가미를 갈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곧, 선을 넘지 않을 정도의 신상 정보를 제공하는 건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심을 굳혔다. 결심을 굳혔을 때 바로 입을 열었다.
“난 내가 ‘카가미’이고 가이드라는 것 정도밖엔 몰라.”
“뭐?”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의 반응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하긴 카가미 자신이 그의 입장이었더라도, 지금 꺼내는 말은 단번에 이해하기 힘들 터였다.
“흔히 말하는 기억상실이다. 그들에게 거두어지기 전의 기억은 없어. 전무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고 탓인지 뭔지 우연히 가이드로서의 능력을 자각했고, 그래서 그들 눈에 띈 이래로 줄곧 그들은 나를 카가미라고 불렀다. 솔직히 난 내 본명조차 기억나질 않으니까, 카가미라는 건이 그들이 붙여준 이름이겠거니 했는데... 네 말을 들어보면 단순한 코드네임이었을지도 모르겠네.”
스스로도 기억 못하는 본명이라니, 이보다 보안이 철저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인걸. 왠지 웃음이 나는 것 같아서, 피식 웃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아직 웃음기가 덜 가신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바라보게 된 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지만, 잘못 봤겠거니 하고 생각을 하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미안하다. 본명을 이야기 해줄 수가 없어서.”
“....진짜냐?”
“기댈 하늘은 없지만, 관용구를 빌리자면 ‘하늘에 맹세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하자, 그가 자신을 응시하다가 이내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모르긴 몰라도 어느 정도 자신의 이야기를 믿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재미없게 됐네. 결국 너도 도구라는 거 아냐.”
부려 먹히는 신세라니 너나 나나 딱하구만, 하고 그가 공허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 말에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저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슬그머니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 손으로 본인의 뒷머리를 문지르듯이 긁적이다가, 한 발 앞서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방문 앞에 서서 문손잡이를 잡고 돌리던 그는 마지막으로 슬쩍 자신에게로 시선을 한 번 던졌다. 그리고 툭 한 마디를 내뱉었다.
“... 타이가.”
그가 잠결에 내뱉었던 이름이었다. 다시 한 번 심장이 크게 뛰었다.
“내... 가 알던 녀석 이름이야. 너, 그 녀석이랑 뭔가 비슷하니까. 내가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을 정도로. 그러니까 내키면 그 이름 쓰던지.”
그런 다음 그가 방문을 열고 나가고, 문이 닫히기 전 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한 말이 어렴풋이 들렸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였지만, 내용만큼은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침 잘 먹었다는 말이었다. 퉁명스럽게 흘러나온 그 말에 조금 기분이 좋아져서, 카가미는 낮게 목을 울리면서 웃었다. 그렇게 한동안 웃고 있다가, 문득 잊고 있었던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내가 아오미네에 대한 정보를 받은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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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운동 나가는 아카시와 아침 식사 차려주는 마유즈미
자신의 기상시간이 이른 편이라는 것은 아카시 세이쥬로,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상 시간은 전 날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쪽에 가까웠다. 전 날에 아무리 늦게 잠들었어도, 전 날에 아무리 고단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일어나는 시간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 맞이하게 된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카시는 자신의 옆자리에 누워 있는 사람을 응시했다. 어슴푸레한 아침 햇살이 드리우고 있는 그의 실루엣은 여느 때보다 존재감이 흐릿한 것 같았다. 마치 창문 틈새로 흘러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녹아버릴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점점 강해질 태양빛에, 이슬과 마찬가지로 눈 깜빡할 새에 증발하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물론 사람이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카시는 입술 사이로 피식,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웃음을 짧게 흘렸다. 아직 해가 미처 다 떠오르지 못한, 새벽에 가까운 아침에는 유독 감성적인 기분이 되곤 했다. 그와 몸을 섞은 다음 날에는 특히 더 그랬다. 그가 가지고 있는, 건조한 것 같으면서도 풍부한 감수성이, 몸을 섞을 때 자신에게 흘러들어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아카시는 다시 한 번 작게 목을 울리며 웃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럴 리가 없었다. 그건 과학적인 근거를 댈 수 없는 망상에 가까운 생각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자신은 그에게 빠져있었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 마유즈미 치히로라는 존재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그 탓에 매번 무리하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이야기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두 눈을 꼭 감고 잠들어 있는 그의 뺨 위에 아주 살짝, 닿을 듯 말듯하게 손을 얹었다. 손바닥에서부터 희미한 온기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접하는 체온보다는 약간 높은 듯 했다. 아마 밤늦게까지, 아니 새벽까지 자신이 그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은 탓일지도 몰랐다. 그는 무리를 하면 몸 어딘가에 변화가 생기곤 했으니까.
그의 뺨에 얹었던 손을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물끄러미 그의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한 번 눈을 뜬 이상 밤이 되기 전까진 잠이 오질 않으니 억지로 더 잘 수도 없었다. 몸에 익어버린 생활패턴은 이제 바꾸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러니 그가 잠에서 깨어나는 걸 기다릴 겸 가벼운 시간 때우기로 아침 운동을 하고 와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생각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행여나 자신 때문에 그가 잠에서 깨지는 않을까, 아카시는 조심스럽게 움직여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욕실로 향해 가볍게 세안을 한 뒤, 장롱에서 트레이닝복을 꺼내어 갈아입었다. 나갈 준비를 마친 뒤 바로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가 잠시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다시 침실 쪽으로 들어가, 곤히 잠들어 있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마유즈미 상.”
그를 불렀으나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치히로.”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으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미동조차 없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작게 웃으면서, 허리를 숙여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운동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맞춘 뒤 자세를 바로 했다. 미련 없이 발걸음을 현관 쪽으로 돌리곤 아침 운동을 위해 밖으로 나섰다.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얼굴에 와 닿는 공기는 약간 서늘하다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정도가 운동을 하기엔 최적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손목과 발목을 가볍게 풀며 달릴 준비를 했다. 잠을 자면서 굳은 근육과 관절이 어느 정도 풀리자, 보폭을 크게 하며 걷다가 서서히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페이스 조절을 하면서 인근 거리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평소 하던 게 있었기 때문에 숨이 차오른다던가, 심장이 급격하게 뛴다던가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달리면서 체온이 조금 오른 것인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결이 뜨거웠다. 그리고 서늘하다고 느꼈던 공기 또한 더 이상 서늘한 걸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이 정도면 되었을까.
페이스를 늦추며 천천히 보폭을 줄여나갔다. 그리고 정리 운동을 하는 것처럼, 천천히 걸어 집 앞으로 되돌아왔다. 현관문을 열면서 문득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하는데,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이마며 몸에 살짝 땀에 배어나와 있는 걸 깨닫게 되었다.
샤워부터 해야겠는걸.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가볍게 훔쳐내면서 생각했다. 그리고 운동화를 벗은 뒤 현관에 올라섰다. 발걸음을 집 안에 내딛자마자 바로 욕실로 향하려는데, 뭔가 고소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
향기의 근원지는 부엌이었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욕실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돌려 부엌으로 걸어갔다. 부엌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갓 구운 것으로 보이는 토스트 두어 장과 우유 한 컵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아무 말 없이 테이블 위에 차려진 것을 응시하고 있다가 싱크대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왠지 모르게 어수선한 모양새였다. 어제 말끔하게 치웠음에도 불구하고.
“하하.”
테이블 위의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아카시는 바로 침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침실 문을 열어젖히니, 아직 침대 위에 누워서 곤히 자고 있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 자고 있는 척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까지 자고 있는 척 할 거예요?”
자신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말이 안 통하면 행동하는 수밖엔 없겠군요.”
아카시는 그렇게 이야기를 한 뒤 곧장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그에게로 다가가, 허리를 숙여 입을 맞췄다. 시작은 가벼운 버드키스였지만, 그가 눈을 뜰 것 같지 않자 집요하게 혀로 그의 입술을 핥아 올리고 치아로 가볍게 입술을 자극했다. 자극에 반응해 반사적으로 입술이 벌어지자 그 틈을 파고들어갔다. 숨이 모자랄 정도로 진득하게 입을 맞추고 있자, 그가 눈을 뜨더니 그만하라는 듯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어깨를 밀어댔다.
“지독한 놈 같으니.”
“그러니까 자는 척 그만하랄 때 그만하는 게 좋았잖아요.”
“타이밍을 놓친 걸 어떡하라고. 게다가 이런 식으로 강제로 일어나게 만들 줄 내가 알았겠냐?”
불퉁거리는 어조로 이야기를 하는 그를 바라보면서, 아카시는 도리어 그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왜 모릅니까?”
“뭐?”
“잠자는 공주님을 깨울 수 있는 건 왕자의 키스뿐이잖아요.”
“...”
“그러니까 키스로 깨우는 게 당연하죠.”
공주님 치곤 꽤 큰 키의 소유자지만 말이에요, 하고 덧붙이면서 아카시는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자신을 이상한 놈을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응시하는 그에게 살며시 손을 뻗었다. 다시금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어 말했다.
“아침식사 준비해줘서 고마워요.”
“...흥.”
“땀 냄새 날지도 모르니까 샤워하고 나와서 먹을게요.”
“그러던지.”
“더 잘 생각 아니면 같이 샤워 할래요?”
“거절한다.”
같이 들어가면 어제의 연장전이 될 것 같으니까, 하고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게 어렴풋이 귓가에 닿았다. 그 이야기에 작게 웃으면서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곤, 먼저 씻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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